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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봄이 오면

우리는 정처없이 떠돌지 않아도 되겠지.

Malibu Nights by 늑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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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파도가 친다. 이화우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 사랑해, 

네 목소리를 듣지 못 할 리가 없다. 나는 안드로이드였으므로 네 목소리만은 아무리 작게 말한다고 한들 어떻게 해서든 들을 것이다. 다만, 그 한 마디가 날 뒤흔들어놓았다. 화우의 생체 신호가 약해지고 있었다. 아니, 꺼져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죽겠지. 화우는 의식을 놓은 듯 자기를 욕하는 말에도 잠잠했다. 화우는 우리가 지구에 남은 유일한 인간들이라고 했다. 안드로이드인 나마저 인간이라고 말한 건 자신이 혼자 살아남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아마도 '희망'에 가까운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신을 잃은 너를 안아 들고 근처의 가장 큰 병원 건물을 찾았다. 아직 네가 얕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은 너를 살려놓고 싶었다. 잠시라도 좋아, 아주 잠깐만이라도. 네 수줍은 고백에 답이라도 해주기 위해서라도 살아줘. 모래가 들어가지 않도록 꼼꼼히 천으로 둘러싸고 병원 건물로 쉬지 않고 뛰어 가장 깨끗한 병실 침대에 너를 눕혔다. 내가 아주 순진한 인간이라고 믿는 너를 위해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살별이었다지만 나는 C0-E245이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샛별의 쌍둥이 동생으로 고안된 주문제작 모델이었다는 소리다. 지병이 있던 샛별의 곁에서 보조하고 챙길 수 있게끔 설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렇다면 내 하드웨어에 의학지식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화우와 대화할 때는 필요 없었던 정보였기에 굳이 꺼내지 않았지만 뭐라도 너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꺼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병원의 비상전력을 복구시킬 수 있을 정도로 이 건물은 모래 폭풍의 피해가 적은 듯했다. 병원을 샅샅이 뒤져 쓸 수 있는 약이란 약은 전부 꺼내왔다. 약을 품에 한 아름 들고 네 앞에 서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잘못해서 네가 죽어버리면 어쩌지. 또 잃어버리나, 나는? 그렇다고 해서 손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너는 곧 죽겠지. 하지만, 내가 약을 주사한다면 살지도 모른다. 희박한 확률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 손에 널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뭐든 해 보이겠다고 떨리는 손을 다잡고 약을 다시 살핀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주사기에 약을 채워 넣었다.

…네가 숨만 겨우 붙어있는 의식불명인 상태로 이 병원에 머문 지 17일째, 무인탐사선이 우릴 발견했다.

── 꽃 피는 봄이 오면

"오늘도 왔구나."

"네."

하염없이 화우가 들어간 의료 캡슐 안만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서영이 하는 말이었다. 서영은 적당한 길이의 검은 단발에 상냥한 얼굴의 여인으로 화우를 돌봐주고 있는 이 곳의 의사였다. 살별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시선을 캡슐로 옮겼다. 서영은 의사가운을 여미곤 옆에 앉아 살별의 시선이 가닿은 화우의 얼굴을 살핀다. 그는 미동도 없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만큼 화우의 몸 상태는 심각했다. 지금은 몸에 들어간 모래를 전부 빼냈다지만 어째서인지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이 곳으로 온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10년 전 황폐해진 지구를 연구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에서 보낸 무인탐사선이 살아있는 인간을 감지했고 살별이 구조신호를 보내왔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영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그럴게 지구는 11년 전 갑작스러운 자연재해로 지구상에 있는 인간은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우주로 떠나있었던 소수의 인류만이 살아남았다. 제라드 호의 1차 지구 탐사보고는 충격적이었다. 어디를 봐도 살아남은 인간은 보이지 않았고 강한 모래폭풍만이 제라드 호를 반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움직이는 안드로이드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들은 감정회로가 인간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타버려 자폭하거나 스스로 영원히 전원을 껐다. 그 후 우리는 인간과 유사한 안드로이드는 제작하지 않았다. 그 최후가 너무나 처참하기도 했거니와 안드로이드의 감정회로는 취약해 위험에 처한 인류를 구해야 할 그들이 절망하느라 인류의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가 지구에 사는 인류의 멸종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살별은 겉 캡슐 유리를 훑다가 서영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평소와 다른 소식은 없나요?"

서영은 고개를 내저어 보인다. 그래요…….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채로 힘없이 답하는 살별이 서영은 안쓰럽기만 했다. 감정을 느낄 줄 알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유일한 지구의 안드로이드. 10년 동안 화우의 곁을 지켰지만 살아있기에 자라는 화우와 달리 그는 하나도 자라지 못했다. 아무리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자아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의 몸은 본질적으로 기계였다. 부품교체를 권유해봤으나 살별이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화우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남고 싶다고. 나중에 화우가 일어나서 자신이 자라길 바란다면 교체를 하겠지만 정신이 들 때까지는 이대로 있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살별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작동하지 않는 내부 부품만 조금 바꾸고 말았다. 다만,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간-정서형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좋게 말해서 인기였지, 분해해보고 싶다거나 실험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수도 없이 받는 터라 서영이 둘의 신변을 보호하고 나선 거였다. 서영은 뛰어난 의사이기도 했지만 약자인권보호협회장이기도 했으니 협회 차원에서 보호하는 것이 가장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무리한 요구에 살별이 어울릴 이유도 없었다. 그는 정부의 요청으로 전신 스캔을 완료했으며 인간-정서형 안드로이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 하지만 살별은 기억에 관한 메모리는 건들지 않기를 원했다. 그건 개인적인 기억이니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서영은 캡슐의 관리창을 열어 화우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나노봇을 투입했다. 캡슐 안으로 들어간 나노봇은 화우의 상태를 샅샅이 보고하며 진찰했다. 허공에 나타난 화면이 화우의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결과를 보여줬다. 언제부턴가 서영 너머로 화면을 보고 있던 살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볼게요." 

"어디 갈 데라도 있어?"

살별은 대답에 답지않게 뜸을 들였다. 진찰을 끝낸 나노봇은 캡슐 안에서 상시 검진 상태로 돌아갔다. 캡슐은 느리게 움직이며 화우는 그 안에서 둥실 떴다. 서영은 사실 화우의 의료캡슐을 볼 때마다 살아있는 시체를 보존하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아 관자놀이를 꾹 누르곤 신경을 껐다. 어차피 몸에 이상이 있다면 나노봇이 알려줄 것이다. 갈 데가 없다면 오늘은 같이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물어보았지만 멋쩍은 듯 볼을 긁던 그는 수줍게 답했다. 

"바다요." 


"전살별, 왜 그랬어?"

"나는 누나의 안전이 우선이야."

"넌 로봇이잖아, 인간인 척 하지 마! 내가 얼마나 가고 싶었던 여행인 줄 알기나 해?"

"알아, 하지만 누나는 워프트레인을 타면 안 되잖아. 쓰러질 거야. 가려면 다른 수단을 써서-"

"시끄러워! 네가 부모님이라도 돼? 날 감시하고 꼰지르기나 하고!"

 C0-E245이 기억하기에 샛별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감정적이었으며 고집이 셌다. 그렇지만 C0-E245이 사랑하기엔 충분했다. C0-E245은 오직 샛별만을 위해 만들어진 개체였다. 인간과 매우 흡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개체. 부모는 샛별과 함께 태어나야 했던 쌍둥이 동생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샛별보다도 몸이 약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죽어버린 아이는 부모의 상처로 남았다. 그들은 죽은 아이를 돌려받길 원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샛별이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했고 바쁜 자신들을 대신해 샛별을 돌볼 사람을 필요로 했다. C0-E245는 그런 부모의 바람으로 쌍둥이 동생의 역할을 하고 샛별과 똑같이 크도록 설계되었다. 살별이라는 죽은 동생의 이름을 가지고 샛별과 함께 자랐다. 자랄 때마다 부품을 교체하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C0-E245는 샛별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화가 나거나 고집을 부릴 때는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고야 마는 것이다. 동생이 아닌 로봇으로 대하고 C0-E245의 애정을 부정한다. C0-E245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화를 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엉엉 울면서 사과하러 오리라는 걸. 무엇보다 샛별은 자신을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 분명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C0-E245, 1년 동안 전원 OFF!"

"아니, 누나 그 명령어는 어떻게-"

…씨발, 존나 화났나보네. 망했다. 저 명령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까무룩 눈이 감긴다. 프로그래밍이 된 명령을 거역하려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그래도 괜찮아. 화가 풀리면 전원을 켜주겠지. 정지 명령어를 알고 있다면 기동 명령어도 알고 있을 테니까. 잠깐만 잠들어 있을게. 샛별아, 미안해. 빨리 화를 풀어주면 좋을 텐데…….

 눈을 떴다. 익숙하지만 싸늘한 방 안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샛별아? 대답이 없다. 창문을 열어놨는지 밖에서 모래바람이 불어 방 안이 온통 모래 천지였다. 이 꼴이 되도록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아니, 이건 방을 비운 것 같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엄마와 아빠를 찾으며 밖으로 나섰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 안은 온통 모래가 열린 창과 문으로 들어와 가구 모양 그대로 쌓여있었다. 현관 밖을 나섰을 때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온통 모래, 모래, 모래… 모래로 덮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도 안드로이드도 없었다. 꼭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로 달려 나가 이웃집이며 가게며 다 둘러봤지만 찾은 거라곤 이미 죽어있는 인간들과 작동을 멈춘 안드로이드 뿐이었다. 신문함에 꽂혀있는 신문을 들어 살폈다. [2241년 5월 5일, 엄청난 규모의 모래폭풍이 불다…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 타격을 크게 입어… 인명피해 발생…] 이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전광판에는 2242년 5월 4일이라는 날짜가 떠 있었다. 그러고선 '즐거운 운행되세요!' 따위의 환영인사가 네온사인으로 지나간다.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도시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모래폭풍에 쓰러진 나무와 일부 건물들,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모래가 낀 채로 부패한 시체들… 이 척박한 환경에서 샛별과 엄마와 아빠가 살아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살별은 모든 상황을 부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모래로 뒤덮인 집을 깨끗이 치우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재해로 자신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피난을 가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희망을 가졌다. 그렇게 그 집 안에서 시간을 초 단위로 세며 샛별을 기다렸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충격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할 것도 같은데, 아직도 밖에선 모래바람이 불고 있으니 살아있더라도 자신을 찾으려면 오래 걸리겠지. 살별은 우습게도 희망을 놓지 못했다.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날 버리고 갈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야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자신의 가족이었다. 밉고 말도 지지리도 안 들었지만 C0-E245가 가장 사랑하던 가족, C0-E245는 그들이 너무 그리웠다. 외로웠고, 슬펐고, 미칠 것만 같았다. 누나,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꿈이라고 해 줘. 이젠 자아 회로가 돌아가지 않아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원을 내리되 여기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깨도록 설정해두고 C0-E245는 결국 스스로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눈을 뜬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C0-E245는 뛸 리가 없는 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족이 나를 찾으러 왔을까? 이제는 모래 폭풍이 잠잠해졌나? 인간들이 돌아온 건가? 기대와 불안을 한껏 앉고 내려간 거실에는 웬 남자가 주방을 뒤지고 있었다. 

"아,안녕. …사람이야?"

C0-E245는 남자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모든 걸 인정하고 말았다. 아, 나는 버려졌구나. 아니면 그들이 죽었던가. 감정회로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났다. C0-E245의 시스템은 강제로 다운이 되더니 초기화 프로그램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화는 할 수 없었다. C0-E245는, 아니 살별은 그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놀란 남자를 위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처음의 안드로이드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초기화 된 로봇처럼 꾸며냈다. 

"내 이름은 전살별이야." 

"…"

"안녕, 네 이름은 뭐야?"

"나, 나, 나는 이화우."

"너와 가족이 되어서 정말 좋아."

그 날, C0-E245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C0-E245는 외로웠고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도 외로워했다. 우리는 별 다른 이유 없이 가족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저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다. 


 화우는 나를 인간으로 대했다. 자기가 먹을 토마토 캔 수프를 따서 반을 나에게 주질 않나,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것마냥 손을 잡고 앞장섰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기 때문인지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을 알려주려고 했다. 그러면 가끔은 화우가 원하는 대로 배우기도 하고 시치미를 떼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너는 참 샛별이와 많이 닮아있었다.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리웠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행복이 뒤따라왔다. 화우는 우리 말고도 살아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필이면 모래언덕에서 네가 손을 놓치는 바람에 자신을 찾겠답시고 모래를 한껏 들이마신 게 화근이었다.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아가는 널 볼 때마다 샛별과 겹쳐 보여 안쓰러웠다. 그래도 약을 찾으면 기침은 잦아들었기에 안심하고 있던 게 문제였을까. 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깨달을 때마다 고독이 엄습했다. 다시 혼자 남겨지기 싫어. 차라리 네가 내 전원을 꺼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네가 혼자 남게 되잖아. 그게 더 싫었다. 너도 안드로이드였다면 좋았을 텐데, 서로 전원을 끄고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에는 이별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운을 띄웠다. 바다가 끝 없이 펼쳐져 있는 그 곳이라면 네가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은 삭막한 모래언덕이 아니라 청량한 수평선일 테니까. 작별할 준비를 바다로 향하는 내내 했다. 감정회로가 타지 않도록 미리 받을 수 있는 충격에 대한 가중치를 입력해두고 그 이상을 넘으면 강제로 다운되고 다시 기동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그래도 이번엔 두 번째인 데다 준비도 해오고 있으니 충격이 클 것 같진 않았다. 슬픔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이어 온 지구를 돌아다니다 보면 너 같은 인간이 하나쯤은 더 있지 않을까. 내가 살아있는 인간들을 모은다면 인류는 어쩌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버텼다. 네가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랬을 텐데,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니까. 내가 혼자가 된 이후로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강한 유대의 단어였으니. 그런데, 샛별에게 듣는 것과는 약간 달랐다. 하지만 나는 그 차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널 병원까지 안고 뛰었다. 

 우주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인간들은 지구의 멸망을 알게 된 후로 비상에 걸렸다고 했다. 남은 인류들이 한 데 힘을 모아 만든 화성도시는 거대한 돔으로 둘러져 있었다. 지구의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두었기에 완벽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직 건설 중인 게 많은 도시였지만 충분히 인류가 살 정도는 되었다. 살아남은 인간보다 기계적인 일을 하는 안드로이드가 더 많은 화성 도시에서 인간과 같은 사고를 하는 기계는 나 뿐이었다. 정부에서도 유일하게 시민권을 발행해 준 안드로이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힐금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걸음을 빨리한다. 바다처럼 꾸며놓은 모래사장에 주저 앉아 그때 네가 건넸던 뿔소라를 귀에 대었다. 솨아아─ 솨아아─ 소라너머로 파도가 친다. 조심스럽게 발을 담그며 뿔소라에 물을 담았다. 아, 바닷물을 두려워 말걸. 그때 너랑 함께 할 걸. 물이 담긴 뿔소라에 입술을 슬며시 가져다 댄다. 문득 비렸던 첫키스가 생각나 웃고 만다. 소라에 담긴 물을 빼내곤 지구와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게 있다면 저 어두운 곳 어딘가에 지구가 있을 거라는 사실 정도일까. 너무 늦기 전에 다시 네가 누워있는 병실로 향했다. 정확히는 캡슐 안이었지만 그래도 네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캡슐 앞의 간의 침대에 누워 손을 뻗어 캡슐의 옆을 짚어 쓸었다. 실은, 손을 잡고 싶었다. 

"화우야, 꽃 피는 봄이 오면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돌지 않아도 되겠지."

매일 밤 네가 듣고 있기를 바라며 말을 걸었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날도 있었고 즐거웠던 추억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가끔은 널 원망했고 미워했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너를 그리워했다. 견디지 못하고 감정회로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면 전원을 잠시 끄고 일어났다. 그래도 너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투명한 유리 캡슐에 누워 하루하루를 연명한 채로 말이다.

"여기는 사시사철 따뜻하지만 지구는 곧 봄이 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는데, 왜 너는 피어나지 않는 걸까. 나는 그 꽃비에 젖고만 싶었다. 내 기능들이 정지한대도 좋으니 푹 젖어보고만 싶었다. 

"그게 뭔 소린지는 알아? 내일이면 우리가 만난 지 10년째야, 멍청아. 그만 헤매고 빨리 일어나." 

절박한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보고 싶단 말이야, 이화우 개새끼야."


서영은 멍해 보이는 살별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비명과 함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기 전에 잡아준 서영은 걱정이 담긴 낯으로 물었다. 

"괜찮아? 어디 안좋은 데는 없고?"

"아니에요. 그냥 피곤했을 뿐이에요."

 안드로이드도 피곤을 느끼나? 살별이 그렇다니까 별말은 하지 않았으나 궁금하기는 했다. 인간-정서형 안드로이드는 서영도 깨나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였기에 곁에 있는 살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지구에서 유행하는 인간-정서형 안드로이드는 가격이 비싸면 비쌀 수록 인간과 비슷해진다고 했다. 살별은 음식 섭취도 가능했고 물에 들어간다고 고장이 나지 않는다. 피부도 인간과 거의 흡사하며 체온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 거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대하고 있다가도 상처가 나기라도 하면 푸른 연료를 뚝뚝 떨어뜨리다 보니 종종 안드로이드라고 깨닫곤 마는 것이다. 살별은 쓰고 있던 수첩을 갈무리해서 가방에 넣고는 자기 캐비닛에 넣었다. 살별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서영과 이렇게 친해진 것도 화우를 보살펴준다는 명목 덕분이지 그 외의 사람들을 어려워했다. 어울리는데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과하게 선을 긋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나마 아이들을 좋아해서 아이들에겐 친절한 것 같던데…. 서영은 화성 도시에 새로 건축된 수목원을 살별과 함께 구경하기로 했다. 저번 카일 탐사선이 지구에서 많은 식생물 샘플을 가져왔고 연구 끝에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수목원이었다. 다양한 식물들을 교배해서 화성도시 곳곳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거의 하루종일 화우의 곁에만 있는 살별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지구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안드로이드니 감회가 새로울지도 모르지. 어떤 감상이든 좋으니 마이너스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보던 은행나무만 보다가 오랜만에 여러 식물들을 보니까 좋은 거 같기도 하고요."

"정말? 다행이야."

"일부러 신경 써주신 거예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서영을 본 살별이 웃으며 물었다. 아, 웃는 거 예쁘네. 살별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서영은 나이에 안 맞게 신이 났는지 살별의 손을 덥석 잡고 수목원 곳곳을 힘차게 돌아다니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살별은 갑작스레 잡힌 손에 당황하면서도 놓지 않은 채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누나가 살아서 컸다면 저런 느낌일까 싶었기도 했고 서영에게는 신세를 진 게 많았으니까. 종종 자신을 신기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살별은 꽃 내음에 둘러싸인 채 지구를 추억했다. 목련은 학교 옆에 있던 나무였지, 개나리는 이웃집 담장 너머로 나온 게 예뻤었지. 그런 소소한 감상에 빠져들며 서영에게 말해주곤 했다. 서영은 살별이 조금씩 자기 얘기를 해주는 게 기꺼워 살별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같은 얘기를 계속 들어주었다. 슬슬 수목원이 끝나갈 시간에 다다르자 서영은 나갈 채비를 마쳤지만 살별은 벚나무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서영이 근처에 다가가자 살별이 서영을 올려다보았다.

"…꺾어가고 싶은데, 안 되겠죠?"

"아무래도 정부 재산이니까 어렵겠지."

"아쉽네요. 이맘때가 벚꽃이 가장 예쁠 땐데."

"그런가?"

"4월이잖아요. 이때쯤이면 바람이 불어서 벚꽃 잎이 사방에 날려서 꽃비가 떨어졌어요."

 그렇게 말하는 살별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서영은 살별이 묘사한 봄 거리를 상상해보았다. 우주에서 나고 자라 지구는 얼마 발 디디지 못해 그 광경이 잘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분홍색 꽃잎이 날린다면 무척 아름다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쉬운 듯 벚나무를 계속 바라보는 살별을 보다가 서영은 두 팔을 걷고는 벚나무 끝 가지를 뚝 분질렀다. 살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 하고 서영을 불렀다지만 그는 장난스럽게 웃곤 살별의 손에 벚나무 가지를 쥐여주었다.

"에이, 모르겠다. 좀 징계 먹지 뭐. 우리가 뿌리 건든 것도 아니고 나뭇가지 하나 분지른 건데."

"진짜 괜찮아요?"

"이 정도도 이해못해주는 정부면 죽으라지 그래!"

 살별이 크게 웃으며 동조했다. 얼른 수목원을 빠져나가자는 서영의 말에 살별이 뒤따랐다. 살별의 손에 봄이 담겼다. 언젠가 화우와 함께 보고 싶었던 벚나무를 안아 들고 향도 못 맡을 캡슐 옆 화병엔 벚나무 가지가 꽂혔다. 마치 싱그러운 봄이 병실을 찾아온 것 같았다. 

 서영은 화우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근 10년 동안 계속 화우의 상태를 지켜봐 왔다. 처음에는 거의 죽어있던 그는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모래가 폐에 들어가 상처를 계속 냈던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다만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래 폭풍은 일반 모래도 있지만 인간에게 치명적인 유독 물질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중독 증세도 같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로 보였다. 살별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생명을 연장해둔 덕택에 구조를 하자마자 바로 나노봇을 이용해 몸 안에 들어간 모래를 걸러내고 상처를 치료했다. 의료 캡슐에 들어간 후 한 달에 걸쳐 몸 기능과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의식만은 찾기 어려웠다. 뇌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건가 싶어 따로 검사를 진행해봤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영혼만 쏙 빠진 것 같달까, 의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화우가 의식을 찾는 걸 바라지 않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살별은 꽤 오랜 시간을 화우와 함께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그 이전에는 화우 혼자서 돌아다녔다는 소리가 된다. 그 고독을 몸이 잊지 않아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일부러 의식을 숨긴 거라면 지금 상태에 맞아떨어지는 가설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숨어있는 의식을 건드려준다면 정신을 차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방법은 살별의 동의가 필요했다. 인간의 무의식과 정신을 건드리는 건 허락 없이 남의 기억을 헤집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잘못하면 기억이 섞이거나 지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서영은 더더욱 이 방법을 최후로 미뤄두었다. 그러나 10년이 넘게 진전이 없는 지금이라면 이젠 이 방법을 써야 하지 않을까? 서영은 살별에게 마지막 방법에 대해 말했고 생각보다 순순히 허락했다. 저는 이제 지쳤어요, 절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그냥 일어나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라는 그의 대답과 함께 서영은 살별을 끌어 안아주었다. 그렇다면 한 번 해보자, 살별아. 

 서영이 마지막 수단을 써보겠다며 화우를 진료실로 데려간 것도 사흘이 지났다. 얼마나 깊게 숨었으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초조하면 초부터 세는 버릇을 고쳐야하건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중간에 전원을 끌까도 고민했다. 시계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서영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화우는 일어났을까? 아니면 그대로 잠들어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살별아, 성공했어… 근데 네가 와봐야 할 것 같아." 

 그의 말은 이러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게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의식이 돌아온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는 걸로 봐서는 기억을 아예 잃어버린 건 아닌 거 같다. 그 기억에 살별과 함께 한 기억이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통화를 끊자마자 화우가 있는 진료실로 향했다.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못 믿을 것 같았고 믿기지 않았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금까지 잡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진료실 문 앞에서 서자 바보같이 망설이며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네가 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 처음부터 다시 하면 돼. 처음부터… 문고리를 잡아 돌리니 꿈에 그리던 침대에서 일어난 네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으면서 맞아주려고 했는데, 너를 보자마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발소리를 들은 네가 이쪽을 바라본다. 아, 웃어야하는데. 왜 바보같이 자꾸 눈물이 나지. 

"안녕… 내 이름은, 흐, 전살별,이야……."

 가다듬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하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네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게 기껍다. 네가 다 잊어버렸으면 내 모습이 얼마나 꼴사나울지 괜히 우스워 웃어버리고 만다. 가까이 다가가자 네가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준다. 그 다정히 얼마나 그리웠는지, 너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화우야, 난, 흐윽, 너와 가족이 되어서, …정말 …좋아."

"별아, 울지 말고. 여긴 봄이야?"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울컥 울음을 토해냈다. 듣고 있었구나. 울다가 아직도 파악 안되는 듯 맹한 얼굴에 웃다가 너를 와락 끌어안았다. 훌쩍이며 네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봄이지, 개자식아…" 

"나쁜말 쓰는 것도 여전하네…. 아, 아파!"

 10년 동안 혼자 자라 커진 품 안에 기대다 네 말에 옆구리를 꼬집어버렸다.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는 너를 보다가 꼬집었던 살을 문질러주며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웠었다. 이 온기가. 이제서야 마주 끌어안아주는 네 서툰 보답에 힘껏 등을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해, 이화우." 

 이제는 정말로 내 손을 놓지 말고 함께 가자. 10년 전 우리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나는 곁에 있을게. 그때는 웃으면서 작별하자. 그전까지 함께 해. 꿈속에서 헤매지 말고 나랑 함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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