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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불온不穩 1

경찰 권건영 X 검사 장 율(장 진) - 썰 기반 로그

Malibu Nights by 늑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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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립니까. 순직 처리를 안한다니요?" 

"권 경감."

"경무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애들 흑야회 놈들 싹 잡아들이려고 가서 개죽음 당한거. 순직도 안해주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유가족들은 어떡하고……"

"목소리가 커."


목소리를 낮추라는 사내의 압박에 건영은 뒷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장장 5년을 공들인 프로젝트였다. 기업을 가장해 청부살인이며 마약 유통이며 사채며 온갖 위법은 다 저지르면서 몸을 키워 성장세가 어마어마한 깡패새끼들이 경찰 무서운줄 모르고 이곳저곳 설쳐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게 십년도 더 되었다. 그 놈들 싹 잡아 족치겠다고 시작한 게 우리 애들 다 죽어나간 이 프로젝트였단 말이다. 거기다 최종적으로 잡입 수사를 허락한 것도 눈 앞에 있는 작자였다. 건영에게 경무관이라고 불린 사내는 건영이 입을 다물자 갑갑하다는 듯 넥타이 안쪽을 검지로 잡아 내렸다. 


"그렇지… 다 죽었지. 아니, 다는 아니던가? 열 다섯 정도 들어가서 살아나온 애가 천 경사 하나 뿐이라지?"

"…예, 실패했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애들 순직 처리는 해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개죽음 당한게 아니라고 유가족들에게 설명을……"

"뭐 이렇게 된건 다 책임자인 권 경감이 부주의해서가 아닌가? 이렇게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 것도 그 머리 나쁜 새끼들이 어떻게 알았겠어, 그 녀석들 중 한 놈이 변절해서 리스트 다 넘어간거지."

"예? 아니, 잠깐…… 서로 누가 경찰인지도 모르는 애들이 어떻게 리스트를 넘깁니까. 잠입경찰 목록은 극비사항이라 저랑 경무관님만 압니다. 그게 하나 변절했다고 넘어갈 정보가 아니라는거 아시지 않습니까."


탕! 건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무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쳐 큰 소리가 났다. 그 후로는 건영도 경무관도 섣불리 말을 꺼내들지 않았다. 건영은 자신이 꺼내든 말이 둘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유는 '완전한 잠입경찰 목록'이 그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라, 그 정도의 깔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건영 자기 자신이거나 지금 눈을 부라리고 있는 오승태 경무관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 사내도 알고 있는 거다. 변절한 놈이 우리의 정보를 가로챘다는 가능성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허술하게 정보를 보관할 것 같았으면 프로젝트 시작도 못 했다. 경무관은 숨을 크게 내뱉더니 잠깐의 흥분으로 흐뜨러진 옷을 매만지고는 소매를 접어 올렸다. 


"권건영이, 너 머리가 어떻게 됐나보다? 상황파악도 못하고 기어오르고."

"…다른거 크게 바라는거 아닙니다. 거기서 죽어간 우리 애들, 순직처리만 허락해주십시오."


건영은 그가 잠입경찰 목록을 넘겼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다만 심증 뿐이니 그에 대한 조사는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었다. 일단은 프로젝트에서 죽은 경찰들 순직처리가 먼저였다. 그러지 않으면 거기서 죽은 애들 목숨은 대체 뭐가 된다는 말인가. 그가 순직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쩌면 건영을 보호하는 명목일 수도 있었다. 다만 더 정확히는 흑야회를 자극할까봐 조심하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이 안된다면 나중에 흑야회를 몰아내고 그 때여도 괜찮으니 허락만 해달라고. 그래야 녀석들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에서 지우지 않고 둘 수 있으니 말이다. 건영은 허리를 거의 접듯이 상체를 숙였다. 대답이 없자 다리를 접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둣코로 건영을 일어나라는 듯 툭툭 건든다. 


"부탁드립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으니 애들 기록만 보관해서…"

"내가 참 권 경감 좋아해. 일 잘하지, 동료도 끔찍이 아끼지… 근데 말이야.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네."

"…그게 뭔…"

"이미 애들 기록 말소시켰다. 흑야회 놈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놈들이 아냐. 우리라도 살아야하지 않겠냐? 너가 미연이를 아낀다면은……"

"야이, 씨발… 오승태!"

건영이 고개를 퍼뜩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이를 으득 갈고 주먹을 꽉 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순직처리를 하지않고 경찰 기록을 말소시켰다는 말은 그 프로젝트 자체를 없는 일이라 치기로 했다는 말이다. 건영과 잠입경찰들이 막대한 예산과 시간으로 일궈낸 그 성과와 실패를 싹 묻어두겠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건영의 약혼자를 들먹이는 것은 엄연한 협박이었다. 오승태를 때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한 번 따지기도 전에 사무실로 경위 둘이 들이닥쳐서는 건영의 팔을 붙들었다. 건영이 무릎꿇고 있을 때 애들을 부르기라도 했는지 이 놈 둘도 급하게 온 티가 풀풀이다. 이거이, 놔! 오승태는 그러든 말든 귀찮다는 듯 빨리 내보내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건영의 팔 한 쪽씩 붙잡은 녀석들을 떨쳐내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오승태가 제 약혼자를 언급한게 마음에 걸렸다. 이미 미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니겠지. 건영은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오승태를 끝까지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저새끼… 언젠간 족쳐서 빵에 넣으리라. 커피잔을 들어 호록 한입 마시는 오승태의 얄미운 모습을 마지막으로 사무실의 문이 닫혔다. 다 큰 사내가 경찰서에서 질질 끌려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심지어 그 사내가 여기서 꽤 유명한 경감님이라면 더 하다. 결국 권건영은 경찰서 정문에서야 풀려났다. 끌려오느라 당긴 팔을 주물거리고 있었더니 그 중 한 놈이 입을 열었다. 

"저… 한 달동안 쉬고 오시랍니다, 권 경감님."

"허…… 그래? 고생했다. 니들은 가서 쉬어라."

살다살다 형사 된 이래로 한솥밥 먹은 경찰서에서 쫒겨나는 일도 있다니, 권건영 마흔 넷 먹은 인생 참 기구했다. 한 번 대들었다고 1개월 정직 처분이라니 오승태 그 새끼 쪼잔하기가 아주 밴댕이 소갈딱지다. 제가 나오지 않는 한 달동안 자기가 연루된 증거를 싹 소멸시키려는 수작이겠지. 안봐도 뻔했다. 한숨 푹 쉬며 담배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했으나 라이터가 끌려가던 도중 떨어졌는지 아무리 몸을 뒤져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성질내며 그냥 경찰서 정문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얼굴로 내리쬐는 햇빛이 눈이 부시고 시큰거리는 눈에 들어차는 하늘이 파아랗다. 아주 존나 시퍼렇다. 

"아이, 씹… 날 존나 좋네." 

어제까지는 우중충하니 비만 죽어라 내리더니 왜 쫒겨나는 날엔 이다지도 날이 화창한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렸다.

순백의 불온不穩

 오 경무관 눈 밖에 나자 떨어지는 일거리라곤 뒤치닥꺼리 뿐이었다. 형사들은 웃기게도 범죄자 잡아 넣는건 좋아하면서 검찰에 가서 검사랑 이야기하는건 싫어했다. 절차가 귀찮기도 했고 높으신 검사 나으리들은 잘난 체가 심하다는 이유가 한몫했다. 모든 검사가 그런 것은 아니겠다만 판사 검사 사자돌림인 양반들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다는건 우리들 사이에선 거의 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잡아놓은 범죄자들이 재판에서 얼마나 형량을 받든 신경쓰지도 않는 것이다. 그 잘나신 판검사 나으리들 덕택에 무죄로 풀려나는 일은 거의 없고 반년이든 일년이든 거의 들어갔다 나오니 실적에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형량을 길게 받으면 땡큐고 아니면 말고. 고 놈의 실적, 실적. 경찰이 성과에 목을 죽어라 메니 이 판이 이렇게 썩어 빠진 거다. 물론 건영도 검사를 만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건 잘 맡아달라 검사 앞에서 재롱이라도 싸바싸바 존나게 떨어야하는데 그걸 누가 좋아하겠냐만은 밥줄 떨어질까봐 얌전히 서류 챙기고 나온 참이었다. 검찰에 도착해 안내받은 사무실로 가니 기다리고 있었는지 훤칠한 사내가 명함을 건넸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장 율입니다."

건영은 율이 건넨 명함을 받아들고는 얼굴과 명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권건영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경찰이나 검찰같은 법조계 양반들을 특히 불신했다. 제 상사인 오 경무관도 그 꼴인데 위로는 얼마나 썩어있을지를 생각하면 참 골 때리는 것이다. 검사나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돈만 받아쳐먹으면 그만이지, 대강 스으윽 하고 훑어보면 다 견적 나온다 이말이다. 이번 사건을 맡게 된 검사도 그랬다. 집안 좋지, 머리 좋지, 부족함 없이 자랐을 귀티 번지르르한 것이 얼굴에 좔좔 흘렀다. 이야, 인물 좋네. 그게 권건영이 생각한 장율의 첫인상이었다. 

건영은 웬만해서 재판에 참석하더라도 검사의 실력을 주의깊게보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율은 달랐다. 율은 재판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했다. 호소력있는 곧은 목소리와 타당한 논리, 상대 변호사를 여유롭게 짓누르는 강세가 돋보이는 사람. 재판이 끝날 즈음에 피고는 울음을 터뜨리거나 체념하거나 울그락불그락 화를 냈다. 그도 그럴게 율이 이끄는 재판은 피고에게 거의 최고 형량을 선고했으니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를 안고 온 놈들에겐 청천벽력이었을 테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있는 검사라고 해도 건영은 크게 관심두고 싶지 않았다. 보통 이런건 말단들이나 와서 하는 건데, 경감씩이나 달고 재판에 들락날락하는 것도 영 모양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계속 새로운 사건 파일을 들고 장율의 사무실을 찾아야만 했다. 자주 찾아오니 이젠 반가운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내에게 꾸벅 목례하고 파일을 건넸다. 이거, 뭐 딴 지역으로 안보냈을 뿐이지 거의 좌천 취급이구만. 갑갑한 마음에 담배 하나 물고 불을 붙였다. 율이 서류를 훑어보다 건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여기 금연입니다. 건영씨." 

"한 대만 피우면 안됩니까?"

"금연이니까요."

"우리 이제 친하지 않습니까, 한 대만 핍시다. 예?"

능글맞게 웃으며 연기를 후욱 뿜어낸 건영이 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배를 안피는 건지 기관지가 약한건지 콜록대던 사내는 바로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쨌든, 여기서는 안됩니다. 건영씨 경찰이시잖아요."

"앞에 말은 안 꼬집는걸 보니 우리 친한 건 맞나봅니다?"

"아니었습니까?"

"뭘 또 그걸 확인하려고 하시나, 장 검사님이 친한 거 같으면 친한 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거, 창문 좀 빌리겠수다."

여기는 금연이라하고 담배는 피워야하겠고 건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사무실 창문을 활짝 열어서는 창틀에 팔을 올려 고개를 내민 채로 이어 피워댔다. 연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을 수는 없겠다만 굳이 여기서 한 대 피워야겠다는 권건영의 고집의 산물이었다. 뻐끔뻐끔 연기를 뱉어내고 있노라면 율이 사건 파일을 넘기는 종잇장 소리가 사락거렸다. 금세 짧아진 담배 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끄고 하나 더 물었다. 치익, 라이터로 불 붙이는 소리가 스민다. 

"한 대라고 하셨잖아요, 건영씨."

"율씨는 담배 안피십니까?"

못 들었다는 양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이 퍽 능청스럽다. 이미 불도 붙였겠다 건영이 담배를 쉽사리 끌 것 같지 않아 율이 한숨을 내쉬곤 다시 파일을 들추며 대답했다. 

"안 핍니다. 냄새 배기도하고."

"그래요? 이 좋은 걸 왜 안하나 몰라."

"그게 좋은지 잘 모르겠네요. 건강에도 안 좋지 않습니까."

율의 뻔한 대답을 들은 건영이 큭큭 웃어댔다. 얼마나 말을 주고 받았다고 또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끄는 걸 보았다. 하나 더 핀다고 하는건 아니겠지? 율은 건영이 기대고 있는 창가를 흘금 쳐다본다. 다행히 더 필 생각은 없는지 담배 케이스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건영이 몸을 돌려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는 바람에 율은 마주친 시선을 바로 내려버렸다. 굳이 시선을 피할 필요까진 없었던 것 같은데 건영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괜히 뒷목을 매만졌다. 

"그게 다, 율씨가 피는 법을 몰라서 그럽니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을 꾹 삼킨 율이 파일 완독을 끝냈다. 쉬운 케이스라 건영의 도움은 크게 필요할 거 같진 않았다. 굳이 그가 필요하다면 재판 참석 뿐일까.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부탁하면 건영은 궁시렁거리면서도 잘 따라주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던 사내가 정독을 끝낸 파일을 보더니 갈 채비를 했다. 재판이 마무리 될 때까지는 또 지겹게 보겠지. 율은 그런 건영이 싫지는 않았다. 쉽게 투덜거리고 곧잘 장난을 치지만 살가운 사내였기에 어쩌면 친구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며는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장 검사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권 경감님."

아니면 그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걸지도.


"아 쫌, 그만해요. 더 털어봐야 안나온다고요."

"안 나오긴 무슨, 다 나와. 너 내 돈만 처먹었지. 이 놈 새끼, 이거. 일루와."

"뭔 소리예요, 이 아저씨가 노망이 났나!"

공식적으로 열람할 수 있는 정보는 불신한지 오래, 권건영은 장 율 검사의 오점을 찾겠다고 난리부르스를 떨었다. 제 아무리 건실하게 보인다해도 검사 양반들은 죄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대학 입학 비리부터 뇌물까지, 아주 각양각색으로 일 치르는 것이 높으신 양반이란 말이다. 돈만 주면 신상 싹 털어주는 요 맹랑한 꼬맹이는 권건영이 징계를 받은 이후로 자주 찾아가는 단골 정보통이었다. 알아보려고 찾았던건 아니고 일전에 사이버 수사대 일 대타를 맡아 좇던 중 찾아낸 보배였다. 그 때 저지른 사소한 잘못 하나 쉬쉬 덮어주고 종종 이용해 먹는 비즈니스 사이 되시겠다. 건영이나 서호나 왁왁대는 성정에 자주 투닥거리곤 했으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건영이 서호의 널따란 이마에 있는 힘껏 딱밤을 갈겼어도 문지르며 씩씩댈 뿐이라. 

"근데 아저씨 경찰 아니세요? 이거 다 불법인데."

"난 경찰이라 이 정도는 불법 저질러도 돼."

"와, 존나 치사하다." 

뻔뻔한 낯짝으로 경범죄는 경찰이니 저질러도 된다는 말을 뱉는 건영을 바라보는 서호의 눈이 짜게 식었다. 이 아저씨, 퍽 진심으로 때렸는지 이마가 얼얼해 뜨거웠다. 이씨, 투덜대면서도 더 털어먹을 정보가 있는지 키보드와 마우스를 놀린 서호가 손을 완전히 뗐다. 봤죠? 없어요. 서호가 배째라는 듯 등받이에 늘어졌다. 건영은 난감하기만 했다. 아주 작은 죄 하나 없는 사람이 있기는 하던가. 그렇게 바른 사람이 있다고? 이 썩어빠진 판에서 범죄 이력이 하나도 없다고? 석연치 않은 얼굴로 지갑에서 만원 짜리를 꺼내 엎어진 서호 얼굴짝에 붙이듯 줘버리고는 건물을 나섰다. 바로 담배 하나 피워 물며 벽에 기댄다. 이러면 그 사람을 미워할 구석이 전혀 없잖냐……. 처음으로 권건영의 깊은 불신에 의문점을 남기게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변명같겠지만 원래 율과 친해질 생각은 아니었다. 툭하면 같이 술을 마셨고 집을 놀러갔으며 그 집 제수씨랑도 친해졌지만 정말로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거다. 참 내,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범죄이력 깨끗한 검사가 있다는 걸 결국 믿지 못한 나머지 어떻게든 숨기고 있는걸 캐보겠다고 치근덕대며 다가갔던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까미의 리드줄을 잡고 항상 가던 길로 조깅하며 욕지꺼리를 짓씹는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 허여멀건한 얼굴이며 사근사근한 성격이며 율의 사소한 습관들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건실하고 올곧은 사람인지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티없이 맑은 사람을 만난 건 거의 처음이라 건영의 호기심이 동한 것도 한몫했다. 율은 불러내면 흔쾌히 오는 데다가 반응이 커 놀리는게 재밌는 사람이다. 한 번도 경찰을 경시하거나 낮잡아보지 않고 두루두루 어울려 지냈다. 차마 미워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작자라 더 재수없었다. 그래서 계속 불렀다. 그 상판 자주 보면 지겨워서 싫어질 수도 있겠거니 싶어서. …싫어지긴 개뿔이, 건영은 홧홧한 숨을 후욱 뱉어냈다. 괜시리 땅을 더 세게 박차 동네를 달렸다. 주인 어지러운 맘 하나도 모르는 검은 개는 신난 듯 따라 내지른다. 근처의 공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무릎에 손을 얹고 헉헉대었다. 차라리 이렇게 홧홧하고 갑갑한게 매일 거리를 뛰어다니느라 그런거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오늘도 달리신겁니까? …아, 물 드릴까요?"

문제는 매일 질리도록 보는 이 사내 앞에서 그런다는 거였다. 율이 바로 앞까지 생수를 들이밀며 물었다. 이게 숨이차서 쿵쿵대는 건지 저 허연 사내 때문에 쿵쿵대는 건지. 건영은 인정하긴 싫었지만 눈을 감고 말았다. 후자다. 쓸데없이 환하게 빛나는 저 치 때문이리라. 


 약혼자 얘기를 괜히 꺼내들었는지 제수씨가 미연을 데리고 같이 놀러오라고 하는 바람에 율의 집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안그래도 사람 속 다 뒤집어지고 있는데 그 원인들이 한데 모여 부어라 마셔라하니 권건영 머릿골이 아픈건 당연지사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연은 제수씨와 율 둘 다 마음에 든다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오빠 친구 없는거 같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 안해도 되겠다. 하며 시시덕거리는 미연이 얄밉기만 하다. 건영은 맥주잔을 들어 마시면서 시선은 율에게 꽂힌 채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율이 이쪽을 볼라치면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같이 술 마시면서 취기 이렇게 빨리 올라온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마음에 없는 말은 하기 싫어 계속 맥주만 들이킨 것이 삽시간에 올라온 듯 했다. 그래도 정신 나갈 정도로 취한건 아닌지라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기는 했다. 이 권건영이 누구냐, 별별 일 다 겪은 이야기 봇따리 그 자체 아니신가. 사내 하나와 여인 둘을 깔깔거리게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다 이거다. 

고기 익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차로 사그라들고 술 자리가 끝날 기미가 보이니 건영은 돌아가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울 요량으로 옥상에 올라갔다. 제수씨가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그런지 옥상에는 화분이 많았다. 하나라도 깨뜨리면 면목없으니 화분 근처로는 가지도 않았다. 옥상 난간 앞에 선 건영은 엄지로 케이스를 밀어 담배 한 개비를 물어 꺼냈다. 고개를 숙여 불을 붙이고 나면 그제서야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날 존나 좋네. 도시의 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하늘에 흰 연기가 구름마냥 수놓는다. 이제 어쩐담, 술 먹었으니 운전은 무리고 미연부터 집에 데려다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줄창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영은 건영의 바로 옆에서 멈춘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오늘 자고 가요, 건영씨." 

율이 난간에 팔을 대고 상체를 숙여 건영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담배 연기가 위로 퍼지는 바람에 조금 숙인 듯 보였다. 바로 답하지 않은 채로 어깨를 으쓱여보인 건영은 평소보다 빠르게 담배를 태웠다. 방금 물었는데 벌써 반 정도 타들어갔다. 혀를 짧게 차며 새 담배를 입에 물려고 고개를 숙이자 율이 손을 뻗어 건넸다. 살짝 고개를 돌려 율을 쳐다보았으나 취기가 정확한 상황 파악을 방해하고 있었다. 눈만 껌뻑거리며 바라보다가 거 뭐요, 퍽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하나만요."

"가르쳐줘도 제대로 못 피는 양반이… 됐수다." 

"안 줄거면 피지 말든가요. 우리 집 금연이에요." 

어이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건영의 낯에 율이 넉살좋게 웃으며 내민 손을 까딱였다.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이 하나도 없어보이자 건영이 마지못해 케이스에서 엄지로 하나를 살짝 밀어 건넨다. 긴 손가락 사이로 집어든 사내가 다시 건영을 바라보며 담배를 흔들었다. 불까지 대령하랍신다. 궁시렁거리면서도 불을 붙여주고 나면 둘 사이에는 잠시간 적막이 내려앉는다. 그것도 율이 콜록대는 소리에 금방 깨지긴 했지만. 

"피지도 못하면서 거… 뭔 고집이신지."

"변덕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가끔은 안하던 일을 하고 싶은 날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 아시나? 사람이 안하던 짓하면 금방 죽으신답니다." 

길게 내뱉어진 숨에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율은 한 번 입댄 후로 섣불리 입에 물진 못했다. 아마 저 치에겐 이게 많이 독했을 거다. 그것도 몇 번 피우면 금방 익숙해질테지만 쓴 맛 익숙해져 뭐하겠는가. 건영은 흘금 시선을 율에게 둔다. 이번에는 시선이 마주친다고 해도 피하지 않았다. 담배를 쥔 투박한 손이 난간으로 떨어지자 건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율씨는 참 사람이 좋아, 응?" 

"갑자기 그게 뭐예요, 건영씨 많이 취했나보다. 그냥 자고 가요."

"그래. 나 집 갈랍니다."

"제대로 듣긴 한겁니까?"

재판에서는 그렇게 날아오르는 사람이 건영 속마음 하나는 모르는 체 하는건지 정말로 모르는건지 헷갈렸다. 자고 가라는 그 말 못 들은 척 넘겨버리면 눈 감고 넘겨주는 센스가 있어야지. 이래서 모범생들이란… 딸각 소리를 내며 닫은 담배 케이스를 바라보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그에게 발걸음을 옮긴 건영은 율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하든 말든 바로 앞에 섰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율이 더 뒤로 발을 빼려고 했으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건영은 팔로 허리를 꽉 붙들어매고는 율의 입술을 잡아먹듯 입맞췄다. 자유로운 손이 그의 턱을 쥐고 볼을 꾸욱 눌러 입새를 벌리도록 종용하면 그 틈 사이로 축축한 살덩이가 입안을 헤집었다. 고개가 뒤로 빠질 생각을 하면 어림도 없다는 듯 뒤통수를 쥐곤 고정시켰다. 흐읍, 숨이 일방적으로 막힌 율이 숨을 헐떡이기 시작하면 더 집요하게 호흡을 갈취했다.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지극히 열망하는 욕구가 드러나는 입맞춤이 끝나자 건영은 율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율과 달리 차분한 건영은 끝까지 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어딘가 한 구석이 씁쓸한 듯이 늦은 답을 내뱉었다. 

"…갈랍니다." 

"잠, 잠깐……."

율이 더듬거리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건영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제수씨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 잠든 미연을 업어들고는 율이 돌아오기 전에 현관을 나섰다. 곤히 잠든 미연이 무어라 잠꼬대를 했다. 도로 앞에서 겨우 잡은 택시에 들어차 앉고는 미연의 집 주소를 기사에게 불러주었다. 택시 기사가 운전대를 잡아 출발하면 건영은 창가에 이마를 대고 욕지꺼리를 짓씹었다. …아이, 씨발. 좆됐네. 제대로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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