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낙비
0.1999년의 어느 날.
오늘 오전 부고 연락이 왔다.
연고도 없는 여자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장례는 내일부터 5일간 치뤄진다고 한다. 순간 더럽게 오래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먹은 것도 없어 딱히 뭐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오랜만에 면도를 했다. 머리도 깔끔하게 잘랐다. 주변에서 그렇게들 단정하게 하고 다니라고 할 때에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가서 아무것도 먹으면 안돼. 알지?”
미식의 악마가 속살였다. 참으로 달콤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쓰디 쓴 말을 뱉었다. 내가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졌다. 그저 무력하게 발을 움직이는 것 뿐. 어제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더라. 혹여 그 여자가, 윤경아가 걸은 전화도 있을까 싶어 전화기록을 그냥 지워버렸다. 이제 와서 그녀에게 죄책감을 갖는 것 또한 너무나도 가식적으로 느껴질까 견딜 수 없어져서 그러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 이 상실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하나. 나는 나는 그렇게 또 이해 받을 수 없나.
나는 내일 뭘 입어야 하나.
1.완벽한 이방인
내가 그 여자의 장례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얀 근조 화환이 저 벽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그 여자의 집안답게 장례식장 조차도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서, 나는 무감한 얼굴을 하고서-
“윤경아씨와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라는 물음에-
“그저 거래하며 오가다 아는 사이였습니다.”
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그저 거래하며 오가던 사이. 타인에게 우리 관계를 서술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뿐이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 내밀은 내 까만 명함이 부끄러워졌다. 향내가 가득 피어오는 내부는 담배 연기도 같이 뿌옇게 올라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속이 울렁거렸다. 영정사진 속에서 윤경아가 웃는다. 저 여자가 원래 저렇게 웃었던 가. 내가 보기에 영정사진 속에 있는 여자는 퍽 불행해 보였다. 왜 일까, 내 옆에 있었던 여자의 얼굴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이것 또한 아마 기분 탓일까. 왜 당장이라도 연락을 하면 그 여자가 받을 것 같은 이 기분은. 그리고 왜 나는 무엇이 두려워 왜 그 여자에게 연락을 끝끝내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생각들이 뒤엉켜 엉망이 되었다.
우는 소리가 가득했지만 그 누구도 통곡하지 않는 이상한 장례식장이었다.
2.담배 한 갑
장례식장에서 나온 나는 편의점에 들렀다. 왜 어르신들 말하는 것 중에 장례식장에 다녀온 날이면 꼭 사람 많은 곳에 들렀다가 집에 가라는 말이 있으니. 그런 잡설을 믿는 편은 아니었으나 평범한 이들처럼 평범하게 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보며 미식의 악마가 비웃었다. 그 여자가 피우던 담배에서는 약간의 단내가 났다. 내게 돛대라며 건내 주었던 그 담배 한 개비도 받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는 것을 보아하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리 한 갑은 전부 태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3.공중전화
주머니에서 삐삐가 울렸다. 장례식에 찾아간 날 이후로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미식의 악마는 지치지도 않는지 내리 몇 일간 먹어 대라며 날 괴롭혔고 오늘 새벽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지막으로 날 굴려 대길 그만 뒀다.
삐- 삐- 작은 전자 화면에 ‘982’가 떴다. 이제 귀찮게 - 개인 전화가 보편화 된 마당에 누가 구식 연락 수단을 사용하겠는가 - 삐삐를 보낼 사람은 없을 터였다. 나는 코트를 챙겨 입고서 밖으로 나갔다. 벽에 붙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어느새 장례식장에 가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느 때와 다를 거 없는 거리엔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노란색 빨간색. 알록 달록한 우산을 들고 있는 이들 사이를 지나는 느낌은 퍽 유쾌했다. 오늘 비소식이 있었던 모양인지 하나같이 한손엔 우산을 들고서 어딜 바삐 가고 있었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질 때 즈음에야 전화부스에 도착했다. 나는 동전을 여러개 늘여놓고는 기지국 번호를 눌렀다. 하도 많이 눌러져 색이 벗겨진 ‘0’ 이 거슬렸다.
“…신태림 님께 보낸 사람은 윤경아 님 입니다.”
기지국을 통해 들려오는 전자음성은 건조하기 그지 없었다. 이어 들려오는 음성이 설명하길 일주일 전에 발송된 메세지 라고 했다. 그게 왜 이제와서 발송되었는지 나도, 기지국도, 그리고 윤경아도 알 도리가 없었다.
“신태림님의 음성사서함에 확인하지 않은 메세지가…”
그만 듣자. 나는 수화기를 그만 내려놓으려 했다.
“1건 있습니다.”
4.부재중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
전화선을 타고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수화기를 난 놓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시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이 짓거리를 10번쯤 반복 하고 나서야 난 공중전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이기적인지, 마지막까지 참으로 그 여자다웠다. ‘사랑해-’도 아니고 ”사랑했었어” 라니.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속이 쓰렸다.
나는 한참을 전화부스 안에 서서 유리창에 기대어 있었다. 빗방울이 이끼긴 유리창 너머로 흘러내렸다. 비소식이 있었을 텐데. 나는 또 알지 못했던가. 그 여자는 이제 우산이 없어도 되겠구나.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을 전부 전화기 위에 올려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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