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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로, 이것은 초라한 고백

커미션 3000자 / BL 2차

커미션 by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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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히 볼품없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을 만큼 가득 차 버린 마음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막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끝이 났구나. 상디는 한숨을 쉬었다. 폐에서 덜 빠진 담배연기가 훅 하고 허공을 갈랐다. 숨이 모자라 뱉지 못한 것이 희게 퍼지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제 자신이 참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문제였지.


 사실 문제라고 것도 없다. 사람의 마음속에 사람이 들어오는 일인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저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좋겠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였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는 매너 정도는 갖춰야 하는 것이 남자이기 때문에, 딱히 어떠한 거부감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다보니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늦은 밤, 부엌 정리를 마치고 나와 돛대 끝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그를 올려다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저는 이것을 불쾌함이라고 선언하고 그렇게 믿어왔다. 약간 울렁이는 기분. 기억하는 한 제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왔건만 뒤늦게 배멀미라도 하는 것 같은 이 느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왜 저놈을 볼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작은 일에도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상대가 민망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조로는 당황을 했다. 제가 짜증을 낼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약간 놀라는 기색을 비추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예전에는 잘만 받아주던 장난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아니, 이런 말은 웃긴다. 우리라니. 그냥 저와 그 녀석이 거대한 괴수를 잡아서 누가 더 큰 걸 잡았네, 아니네 하는 다툼을 할 때까지만 해도 무엇이든지 느긋하게 받아칠 수 있었다.

 저는 요리사였고, 서빙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꼬셨다. 손만큼이나 혀도 발달했다는 뜻이었다. 느긋하게 말로 넘어가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녀석은 말이 꼬여서 입술을 꾸욱 다물거나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본인이 바보 같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고는 했다. 그때마다 이겼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면 유치하다고 놀리려나.

 뭐, 이 정도 유치하면 어떠냐고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꿈을 쫓아서 가는 여행 속에서 저는 든든한 동료를 만난 것이다. 장난을 치고 투닥거리고 마리모라고 놀리며 성질을 내기는 했어도 그는 어쨌거나 제 동료였다.

 ..그랬다. 언제까지였더라. 아마도 쵸파를 데리고 섬을 떠날 때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 할머니가 분명 치료를 잘못한 게 분명해. 몰래 제 머리를 어떻게 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배에 오르던 쵸파가 훌쩍이며 바라보는 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벚꽃이 흩날리는 것 같았고, 영원히 저물지 않은 봄이 오는 것만 같았다.

 제가 내어준 음식을 먹으며 신나하는 동료들을 보고 있다가 무심결에 닿은 시선이었다. 한쪽 얼굴이 반짝반짝하게 빛나던 그의 모습. 맥주를 들고 해맑은 얼굴로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 얼떨결에 같이 팔을 뻗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출렁이는 맥주가 조금 흘러서 급하게 입을 대고 마시는 동안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왜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기에, 저는 망설임 없이 이것을 불쾌감이라고 선언했다. 제 스스로에게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치 아래가 울렁울렁 거렸다. 무언가를 잘못 먹었을 때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혀왔다. 주먹을 쥐고 살살 쳐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계속 그를 볼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하, 솔직해지자. 이것도 조금 문제였다.), 제 동료이기 때문이었다.

 꿈을 함께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함께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나미씨를 여성으로 배려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이 곧 증거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저 마리모를? 아니, 다른 사람이라도 별로 좋지는 않겠지만 이건 조금 심각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최악이 갑자기 눈앞에 턱 들이 밀어진 것이다.

 최악? 그런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최악인가?


 허겁지겁 울면서 달려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은 그를 치료하는 쵸파와 옆에서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선장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피냄새가 났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났다. 잠깐 어깨에 기대도록 했을 뿐인데 제 옷의 절반이 젖어버릴 정도로 피를 흘렸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뜻이다.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앞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은 시야에 누워 있는 그가 가득 찼다. 덕분에 살짝 다리가 꼬였고 저는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을 이들이 저에게 말을 걸지 않은 것은 다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저는 제게 당당하게 선언했던 말을 거둬들여야 했다. 이건 불쾌감이 아니었다. 명치 아래가 자꾸만 울렁거리고 심장이 뛰는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심했다. 이건 사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런 것에 편견을 가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녀석은..


 “야, 뱅글눈썹.”

 “뭐, 마리모.”

 “불렀으면 말을 해.”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답답하다고 풀러버렸을 붕대도 그대로 매고 있는 걸 보면 아프기는 한 모양이었다.

 밤하늘이 새까만 색이었다. 촘촘하게 떠 있는 별들과 둥글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이유를 알았으니 일단은 사과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동안 예민하게 굴어서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제게서 몇 걸음 물러났는지 잘 아니까. 제대로 된 남자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멋있게 딱! 미안하다. 그동안 내가 너를 좋아했는데, 그걸 잘 모르는 바람에 예민하게 굴었다. 놀랐지? 임마, 걱정하지 마. 이제는 알았으니까 그러지 않을 거니까. 하하하.

 머릿속으로는 줄줄 말도 잘한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만 빙빙 도는 그 말들을 제대로 쏟아내야 하는데 자꾸 헛숨만 툭툭 튀어나왔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들었다가 숙였다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저를 보던 그는 한 마디 했다.


 “똥 마렵냐?”

 “뭐?”

 “똥 마려운 개처럼 낑낑거리고 있잖아, 니가.”


 말하는 꼴 하고는. 그런데 그 말마저도 네가 나에게 하는 거니까 좋다고 느껴진다면, 나 정말 미친 거 맞지? 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사실 몇 번 뜯은 상태라서 두피가 조금 아팠다. 입안이 씁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는 바람에 머리도 약간 멍했다. 눈을 깜박거리는데 제 속도가 꼭 술을 많이 마신 사람처럼 느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퍽하는 소리가 나도록 눈가를 때렸다가 손을 쭈욱 내렸다. 제 행동을 무덤덤하게 쳐다보고 있던 그가 팔짱을 끼고 바라보았다. 마치 어디까지 할 거냐는 식이었다. 그런데 돌아서서 가지는 않았다. 그래, 나는 너의 이런 점이 좋다. 빌어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디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 뱉어냈다.


 “야, 마리모.”

 “왜.”

 “너.. 좋아하는 사람.. 있냐?”


 아,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가슴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내 마음이 주저앉았다는 뜻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멍청이! 하지만 겉으로는 멀쩡했다고 자부한다. 다리로 싸우는 사람답게 무릎이 떨리기는 했지만 아직 바로 서 있을 수는 있었다. 제발 제대로 된 말을 하자. 충분하게 볼품없었으니까, 제발..


 “..뭐?”


 생각했던, 제가 할만한 수많은 말들 중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지, 조로는 답지 않게 약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저는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말을 해야 했다. 잠시 입을 다물자 바람이 불었다. 살랑거리는 저 짧은 머리카락에 뒤엉켜있던 피와 마치 먼 시절에 겪었던 것처럼 반짝거렸던 네 얼굴이 자꾸만 나를 이상하게 만든다. 기분 나쁘게 울렁이는 이 감각이 사랑이라면, 나는..


 “없으면.. 나 좀 좋아해주면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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