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태섭] Marry 1
좌충우돌 미국 좀아포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놔도 7월 말의 여름은 녹아내릴 듯한 열기였다. 20분 내내 쉬지 않고 뛴 전반전 때문에 덕지덕지 바른 왁스도 땀에 젖어 고정이 풀려버렸다. 이마를 간질거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쓱 쓸어 넘기고 타올로 얼굴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았다. 락커를 열고 안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숨을 고르던 태섭은 생각에 잠겼다. 전반전 점수는 32 : 43, 한 자릿수 점수 차 정도는 후반전에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차였다. 비록 그 상대 팀에 과거에 아슬하게 역전해 이겼던 정우성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 와서 벌크업도 했고 스킬도 꽤 늘었다. 지금이라면 자신 또한 정우성의 포인트 가드에 뒤지지 않는다며 해볼 만한 승부라고 생각을 잘 갈무리 하며 락커를 쾅 닫았다.
후반전 준비를 위해 태섭은 선수 대기실에서 나와 경기장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팀 메이트 행방을 의아해하면서. 곧 경기 휘슬이 울릴 텐데 누구도 대기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미국에 오고 제일 당황스러웠던 것은 강백호보다도 더 자유분방한 팀원들이었다. 뺀질거리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지나친 개인플레이가 한 번씩 걸림돌이 되곤 했다.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적응에 가까운 포기를 하니 한국에 있을 때처럼 모두를 교정해야 한다 류의 조급함은 들해지긴 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리던데 결국 태섭은 실패했다.
경기 중에 이러는 건 도를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쳤다! 태섭은 쿵쿵 한 발 한 발 체중을 실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코너를 도니 경기장 불빛이 보이면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아주 심상치 않은 소리가…
발걸음을 죽여 다가가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다 뚝뚝. 끊기는 소리와 쩝쩝 씹어삼키는 소리에 걸어왔던 방향 그대로 몸을 틀어 재빠르게 뛰어갔다. 태섭은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끊긴 것이 아니라 온몸이 골절 났을 때 들었던 소리였다. 그런데 부러지고 나서 들리던 쩝쩝 소리는 대체?
머릿속이 빠르게 뒤엉길수록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순식간에 대기실로 돌아온 태섭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유니폼 위에 대충 점퍼를 걸치고 나머지는 스포츠백 안에 거칠게 쑤셔 넣던 중, 철컥철컥 누군가 문고리를 돌리고 있었다.
"아, 씨발… "
태섭은 욕을 하며 숨어야 하나 고민 하다 자존심 상하지만 청소 공구함이 딱 들어갈만하겠다 싶어 가방을 의자 아래 던지고 쏙 들어갔다. 문짝을 닫자마자 문고리가 찰칵 열렸다. 뭔 놈의 잠금장치가 저렇게 허술한 건지. 태섭은 속으로 그간 찾지도 않던 신을 간절히 부르며 제발 그냥 나가게 해달라고 열렬하게 아는 신들의 이름을 다 재창했다. 하지만 그런 간절한 바람과 달리 침입자는 성큼성큼 공구함으로 다가왔고 태섭은 선빵 필승이다! 속으로 외치며 공구함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악!!!!!!"
"!! 어, 어… "
침입자가 공구함 문짝에 부딪힌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틈에 머리를 걷어차려고 튀어나왔던 태섭은 익숙한 머리가 고통에 찬 신음을 끙끙 앓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정우성,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송태섭, 걱정 돼서 기껏 여기까지 온 건데 이렇게 밖에 환영 못 해줘? 너무해."
많이 아팠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정도가 아니라 줄줄 흘리는 얼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태섭은 진땀을 흘리며 많이 아프냐? 따위를 묻다가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야, 우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지금 경기장 쪽 위험한 거 같아. 얼른 여기서 뜨자."
"아무것도 못 본거야?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왜? 뭐 있어? 뭔데 그래?"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경기장 안에 좀비 같은게 있어."
"좀비??"
영화에 나오는 좀비 그런 거? 라고 멍청하게 되묻는 태섭에게 짐짓 비장한 표정을 지은 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놀리는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진지한 표정에 태섭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장난기 있어도 경기 중에 상대 팀 놀린다고 골때리는 짓을 벌일 놈을 아니었다 가 태섭이 정우성을 향한 의견이었다. 태섭은 의자 아래 던져두었던 스포츠백을 둘러메고 우성을 이끌고 나섰다.
"일단 살아남아야지, 마주치지 않게 조심히 나가자."
"? 내 말을 믿네?"
"네가 경기 중에 그런 장난 칠 정도로 한가한 놈은 아니지?"
"뭐야, 태섭이~ 나한테 관심 많네. 잘 알고 있고~"
"하, 됐다… 야, 니 말마따나 좀비면 입 좀 조용히 해 봐."
굳이 태섭이 주의를 주지 않더라도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본 게 있었는지 우성은 굳은 얼굴로 태섭을 뒤에서 따라오게 하고 앞장서 길을 이동했다. 경기장 입구를 지나치며 건물 출구를 향할 때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피 웅덩이가 생긴 것을 보고 태섭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선가 또 이상한 신음이 들리는 거 같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일을 겪다니.
건물 밖으로 나온 태섭과 우성은 대화를 나눴다. 우성은 태섭에게 대꾸를 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차 열쇠를 꺼내 주차장을 배회하며 차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혹시나 밖에도 좀비가 있을까 신속하게 움직이며 반바퀴를 돌았을 때 우성이 속한 대학 리그 차량이 삑 소리를 냈다.
" 넌 그런데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어떻게 차 키를 챙겼네?"
"화장실 갔다 왔는데 그 사이 이미 대기실에 한바탕 지나갔더라고. 물려도 바로 되는 건 아닌가 봐. 코치님이 줬어."
간략한 말이었지만 대강 어떤 상황이 지나갔는지 왜 우성이 일부러 태연한 척 하는지 태섭은 눈치를 챘다. 무섭지만 한껏 센 척을 하는 게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차 키를 꽂으려는데 계속 손이 엇나가 왜 이러지 중얼거리는 우성의 손을 부드럽게 밀고 대신 꽂은 태섭은 시동을 걸고 조수석으로 넘어갔다.
"안전하게 모셔봐라."
한껏 여유롭게, 거만하게 명령조를 내리는 태섭의 행동에 황당한 우성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 피식 웃곤 안전벨트를 매고 지도도 없이 큰길로 쭉 빠졌다. 바깥 동향을 살피기 위해 목적지 없이 달리기로 했다.
"야, 야. 운전 넘겨. 장난 하냐?"
"왜 그러는데 송태섭~"
한 10분 정도 이동했을 때 태섭은 꼬고 있던 팔짱을 풀고 우성을 향해 짜증을 냈다. 진짜 몰라서 저러나 가증스러운 자식. 우성은 운전을 정말 더럽게도 못했다. 미국에 와서 운전할 일이 별로 없었던 건가, 부러운 새끼. 무슨 과속 방지 턱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걸리고 앉아있는지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을 거 같았다. 태섭의 짜증에 안 통할 애교를 부리다 태섭이 두말 안 한다는 표정을 짓자 시무룩해진 우성은 벨트를 풀고 내렸다. 태섭은 혀를 차고 차에서 내린 뒤 우성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우성은 아픈 척 아으~ 얼굴을 찡그리며 조수석에 탑승했다. 태섭은 운전석에 올라타 거칠게 운전대를 잡았다. 우성에 비하면 거친 손길이지만 그와는 대조 되게 매끄럽게 나아가는 차량에 우성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언제 이렇게 운전 연습을 했냐며 놀라워했다. 태섭은 앞만 주시하며 너와는 다르게 착실한 사회생활을 했거든 이라며 우성에게 어택을 날렸다. 태섭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우성의 불안하던 심정도 금방 잦아들었다. 큰길로 들어선 지 좀 지났는데 바깥을 보아하니 금방 해결될 상황은 아닌 듯했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아니, 대부분이 반은 죽어있고 반은 좀비였다. 죽어 있는 반도 일어나 좀비가 되는데 반나절도 안 걸릴 듯했다.
"하, 미친… 뭔 일이야, 이게."
"소리에 반응하긴 하는데, 그래도 느린 게 그나마 다행이지?"
"쪽수가 너무 많아서 최대한 아무도 없을 만한 곳으로 가야 할 텐데. 차도 말고 인도 쪽으로."
"음."
하지만 인도에 즐비한 좀비들의 행보에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은 어쩌야하나 고민 하다가 태섭이 지도를 살폈다. 오며 가며 봤던 스포츠 매장 위치를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냈다. 우성은 태섭이 어디로 찾아가는건지 궁금해했다가 얼마 안 가 주차하고 내린 태섭이 어떤 가게 안을 조심스레 살피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여기는 왜? 무기라도 구하게?"
"총은 구하기 어렵고 총알은 소모품인데 이건 타격도 강하고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거니까."
"으아~… 그래,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제 이상할 거 없는 상황인데."
우성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금방 수긍하는 태도를 갖추고 태섭을 따라서 가게를 탈취하기로 했다. 우성은 살면서 자신이 도둑질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태섭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기는 골프채랑 야구 배트만 챙기면 될 거 같지?"
"이걸로 사람 칠 일은 없겠지? 새삼 무섭다."
태섭이 던진 골프채를 받은 우성은 스윙을 날렸다. 실전에서는 골프공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칠거라 어렵진 않겠지만 엉성한 폼을 보아 하니 괜히 손목이라도 망가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성에게 골프채는 무리인 듯싶었다. 우성의 손에서 골프채를 빼앗고 야구 배트를 쥐여주자 우성은 자존심에 징징 거리려 했으나 그럴 상황은 아니었기에 입술만 댓 발 내밀 뿐 별다른 반항은 안 했다. 그런 우성을 뒤로 하고 태섭은 무기를 얻었으니 보호구로 쓸만한 것도 있을지 가게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착용 가능하다는 문구가 써진 쪽으로 가니 각종 장비들이 있었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것이 야구 포수 마스크와 보호 장비였다. 태섭은 우성에게 손짓해 부르고 얼추 맞을 사이즈를 눈대중으로 가늠한 뒤 입어보라고 시켰다. 우성은 순순히 태섭이 시키는대로 장비를 착용하고 마스크도 두상에 맞게 조절한 뒤, 시구 자세를 선보였다.
"뭐냐! 그건 포수가 아니라 투수잖아!"
"알아~ 야구하면 딱 이 포즈지!"
매장 창문 바깥 상황만 아니었다면 천진난만한 그림이었다. 매장 안에 큰 거울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거리를 배경으로 서로 옷을 골라주는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담겨 있었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 바깥 상황을 계속 경계하며 두 사람은 어깨에 짐을 이고 밖으로 나섰다. 넓은 차량 뒤에 아무렇게나 짐을 쑤셔 넣고 시동을 건 태섭은 오는 길에 봐두었던 주유소로 향했다. 주유소로 향하니 눈앞에 보이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주차 해놓은 차량과 서로 먼저 주유 하겠다며 다투는 차주들, 그리고 어떻게 안에 집어넣었는지 알 수 없는 좀비가 되어버린 주유소 직원. 태섭은 어차피 차들이 아무렇게나 대어져 있어 들어갈 공간도 없어서 멀찍이 차를 세우고 상황을 살폈다. 우성은 태섭에게 기름 당장 필요할까? 물어보았고 태섭은 급하지는 않지만 계속 차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될지 모르니, 이왕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고자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도 얼마 가지 못했다.
탕-.
태섭이 한숨을 쉬며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 저들끼리 싸우던 차주들 중 누군가 성깔을 참지 못하고 총을 꺼냈다. 큰 굉음이 공간을 메우며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었다. 머리가 깨진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비, 시체는 보았지만. 총상을 입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태섭이 눈을 끔벅이다가 우성의 웁-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안색이 창백해진 우성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태섭은 다음, 다음 주유소를 찾아보자 말하고 차를 돌려 이동했다. 여기서 멀리,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는 곳이 어딜지 떠올리며.
"우리도 조만간 저렇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까?"
"…필요하다면?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그래야겠지."
"하… 총 앞에선 아무 소용 없을 거 같은데 총 구할 데는 없으려나."
"미국이니까 총 파는 데가 없진 않지만, 구하기 어려운걸 떠나서 정우성 너 총 쏠 수 있어?"
"아니. 태섭이 너도 못 쏘지."
"우리가 쏠 일이 뭐가 있겠냐…"
태섭은 총을 구한다 한들 쏠 줄도 모르고 괜히 뺏겨서 그 총으로 목숨이 위험하진 않을까 고려했다. 주유소로부터 차로 20분 떨어진 마트에 도착해 태섭과 우성은 각자 골프채와 야구 배트를 쥐고 포수 장비를 착용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마트로 들어가자 이미 어느 정도 털려있는 진열대와 캐리어에 통조림을 잔뜩 싣고 있던 여자가 흠칫 놀라며 허겁지겁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사라졌다. 괜히 찜찜한 기분에 우성은 짜증을 냈다.
"어쩔 수 없지. 여기 오면서 저 사람도 아까 우리가 봤던걸 경험 했을 수도."
"아! 알긴 하는데~ 그래도… 그런 인간으로 취급 당한 게 짜증 나서 그래."
"이런 거에도 익숙해져야 할 거야. 우리도 앞으로 서로 말곤 저렇게 보게 될 거니까."
우성에 비해 담백한 태섭의 행동에 왜 이렇게 차분한 건지 궁금했던 우성은 태섭에게 첫째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아까 여자가 마저 담지 못한 통조림 쪽으로 걷던 태섭은 움찔 하고는 왜? 이유를 물어보았다. 우성의 든든해서 그렇다는 말에 태섭은 픽 웃고는 지금 실없는 소리 할 때가 아니라며 어서 식량을 챙기자고 보챘다. 우성은 카트를 끌고 와서 태섭과 등을 돌린 채 통조림을 골랐다. 최대한 유통 기한이 길고 고단백인 것으로.
식품 이것저것 담아 카트 반을 채우고 생필품을 보러 향했다. 카트를 운전하다 멈춘 우성의 등에 옆을 보고 걸었던 태섭이 얼굴을 박았다. 갑자기 멈춘 우성을 의아하게 보다가 뒤돌아본 장난기 어린 표정에 태섭 또한 멈칫 했다. 우성은 냅다 태섭을 들어 올려 카트 안에 넣었다. 완전히 쏙 들어가는 사이즈는 아닌지라 몸이 구겨진 태섭은 불편한 티를 팍팍 풍겼지만 괜히 주변의 어그로를 끌까 봐 눈썹만 짝짝이로 들어 올렸다. 그런 태섭이 웃겼는지 우성은 크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태섭은 자신을 놀리며 사진 찍는게 짜증 나긴 했지만, 우성의 웃음 소리가 누군가에게 들릴까 싶어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우성은 입이 막힌 채 태섭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웃음을 참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말 없이 주먹을 치켜든 태섭을 보고 겨우 진정하고 태섭은 체념 했는지 카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섭이 주장처럼 지시하자, 우성은 운전할 때와는 달리 매끄럽게 카트를 밀었다.
"나는 비상약 챙겨올 테니까. 너는 필요해 보이는 거 채우고 있어."
"같이 움직이자!"
"아니, 여기서 빨리 챙기고 뜨는 게 나을 거 같아. 마트에 아직 이렇게 비품이 있는 거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챙기러 올 텐데 혹시 부딪힐지도 모르니까. 그런 일 없어야지."
태섭의 논리적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우성은 냅다 진열대에 있는 제품을 두 팔로 끌어안고 싹쓸이 했다. 태섭은 팔이 기니까 저만큼 들리는구나 감탄하다가 비상약 쪽으로 총총 빠르게 뛰어갔다. 응급처치 세트와 진통제, 소독약, 항생제.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태섭은 카트를 가득 메꾼 우성에게 고갯짓으로 문을 가리키고 차에 빠르게 실었다. 제법 묵직해서 차 뒤쪽이 살짝 쏠릴 정도였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괜찮겠지. 잘 지켜내야 하는데… 만반의 준비를 갖추니 마음에 불안이 스멀스멀 피기 시작했다. 우성의 핸드폰을 보고 난 뒤로 더더욱. 정신이 없어서 마트에서 핸드폰을 쓴 우성을 보고 확인해 볼 생각을 했다. 핸드폰 화면 상단에는 통화권 외라는 표시가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통화 불가 지역으로 바뀐 걸까? 하는 걱정을 안고 태섭은 차를 몰다가 비디오테이프 가게를 발견했다.
"엥? 비디오 보게?"
"이 난리에 사람들이 비디오 털진 않을거 같아서. 지하실도 이 가게 거 같은데 지하에 있는게 안전하겠지?"
"안에 좀비는… 없을까?"
"여기 안쪽 잠금은 안되어있고 바깥만 잠겨있는데 급하게 나간 거 아닐까? 정우성, 골프채 좀 줘봐."
골프채를 단단히 쥐어 잡은 태섭은 가게를 돌아 혹시 뒷문도 있는지 찾았다. 태섭의 생각대로 다행히 뒷문은 있었고 잘 보이지 않았다. 뒷문의 손잡이를 마구 내려치자 장난감 스프링이 고장 나 퉁겨진 것처럼 금방 고장 났다. 우성에게 차를 지키고 있으라 하고 태섭은 먼저 내부를 조사했다. 닫힌 문을 발로 뻥 차고 골프채를 휘두르는데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텅 빈 가게였다.
이대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면. 간절한 바람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섭은 우성에게 오케이 싸인을 보냈고 우성은 서둘러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도 완전히 안전하진 않으니 언제라도 도주할 수 있게 짐은 반만 옮기기로 했다. 비디오 가게의 지하는 다행히 생각보다 사람이 지낼만한 환경이었다. 샤워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파 베드와 티비, 선풍기, 작은 냉장고에 조그만 부엌 정도. 위생적이지 않지만 개수대가 있으니 몸도 씻을 수 있고 조리도 가능한 환경이었다. 소파 베드를 발견하자마자 우성은 포수 장비를 착용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아닌 척 했지만 계속 긴장한 탓에 많이 지쳐 보였다. 태섭은 땀에 절은 장비를 벗어던지고 짐을 구석에 몰았다. 선풍기 전원을 켜자 다행히 전기는 잘 들어왔다. 우성 쪽으로 선풍기를 틀고 소파베드에 고개를 처박은 우성을 툭 건드리며 장비 좀 벗으라고 핀잔을 주었다. 애벌레 마냥 꾸물꾸물 벗던 우성은 벗자마자 시원하다며 선풍기에 얼굴을 대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 했다.
"전기 끊기지 말아야 하는데… 이 사달이 미국 전체에 난 건가?"
"티비 있으니까 틀어보자!"
우성이 테이블에 있던 리모컨을 조작하자 티비가 지직 소리를 내며 켜졌다. 티비의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몇 번 채널을 바꾸자 경보 알림이 나왔다. 방송국에서 아예 끊어버린 건가? 두 사람은 아무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조금 겁에 질렸다. 왜 아무것도 안 나오지?우성의 중얼거림에 태섭은 자신이라도 침착해야 한다며 화제를 돌리려고 우성에게 배고픈지 물었다. 우성은 잠깐 말이 없다가 티비를 끄고 태섭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섭은 혹시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열었다가 대식가였을 거 같은 가게 주인에게 잠시 감사를 표했다.
"맛있는 냄새 나네!"
"냉장고에 음식이 꽤 있더라. 많이 먹어, 정우성."
"어? 술도 마시게?"
"뭐, 있으니까 마셔줘야지~ 너도 하나 줘?"
칠리 미트볼에 감자튀김은 저녁 식사로 꽤 괜찮았다. 고기가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많은 양은 안되어 보였는데 삼키니 제법 배가 금방 불렀다. 맥주로 막힌 목을 뚫으니 더더욱. 말 없이 음식만 씹던 두 사람은 티비에 연결 되어 있는 비디오를 발견하고 조용한데 뭐라도 틀까? 얘기를 꺼냈다. 지금 이 상황에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1층으로 올라가서 무엇을 볼지 생각하다가 미국으로 온 두 사람은 유학을 온 뒤로 영화를 하나도 보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나 미국 와서 영화 본 적 없다?"
"티비로도?"
"아, 그렇게는 조금 봤는데 영화관은 못 갔어."
"나도~ 그랬던 거 같다. 바쁘기도 바빴고…"
"이렇게 여유롭게 보게 되네."
원치 않은 여유가 달갑지 않아서 그 말과 함께 우성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태섭은 영화를 썩 잘 아는 편도 아니고 일본에서도 즐겨보진 않았던지라 뭐가 재밌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성은 먼저 비디오 얘기를 한 사람 답지 않게 비디오는 안 보고 허공만 보며 주변을 돌았다. 카운터 쪽에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태섭은 고개를 숙여 작게 써진 줄거리를 보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보니와 클라이드… 태섭이 멈춰서 무언가 보고 있자 흥미가 동했는지 우성이 다가와 뭘 보냐며 허리를 숙였다. 태섭에게 가까이 붙어 줄거리를 같이 읽은 우성은 태섭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우리 앞날 같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꼭 한나한테 돌아갈 거니까."
"아니! 나도 안 돌아간다는 건 아니고~"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몰라? 초 치는 말 하지 마, 이 자식아."
태섭은 우성의 등을 가볍게 퍽 치고 이 포스터 영화의 비디오가 어딨는지 찾아냈다. 마땅히 볼 영화도 없고 그 줄거리처럼 되지 않을 거지만 그냥 어떤 결말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영화 20분 만에 태섭은 괜히 골랐다며 후회 했다. 무슨 총을 쏘는 장면만 몇 분에 한 번 씩 꼭 나오는 건지 영화 속 총성이 너무 커서 태섭이 골난 소리를 내며 음성을 팍 줄였다. 그에 우성이 못 알아듣겠다 툴툴거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태섭은 김이 다 빠져버린 먹다 남긴 맥주를 치워버리고 콜라를 벌컥 마셨다. 우성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나쵸를 부스럭 꺼내 소파 베드에 몸을 편히 기댄 채 와작와작 먹었다. 태섭은 이불에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기함하며 위에서 먹지 말라고 말렸지만 우성은 꿋꿋하게 집어먹었다. 둘은 조용히 티격태격 싸우고 그 사이 영화는 어느덧 후반에 들어섰다. 태섭은 범죄를 미화 시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딴짓을 하다 마지막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반면 우성은 과자를 집어먹던 손을 멈추고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앞만 주시했다.
태섭은 영화가 끝나자 티비를 끄고 이런 범죄를 미화해서 만든 영화라니… 중얼거리며 윗옷을 벗고 개수대에서 가볍게 몸을 닦았다. 우성은 어느새 과자를 치우고 등 돌린 채 씻고 있는 태섭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반신 샤워를 마친 태섭이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로 우성에게 씻고 오라고 말을 하자 우성은 눈을 깜빡 한 번 감고 화장실은 위였던가? 물어보았다. 태섭이 여기 없으니까 위에 있겠지 말을 하자 우성은 갔다 오고 나서 씻겠다고 계단을 올라갔다. 바지에 손을 꽂고 올라가던 우성의 옷자락을 급하게 붙잡고 태섭은 잠깐만, 우성을 세웠다. 흠칫 멈춘 우성이 의아한 듯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린 태섭이 혹시 모르니까 하며 건네준 야구 배트를 내려다보며 우성은 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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