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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 히가시야마 유이X타네다 코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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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로 야구공이 굴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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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여름날의 도쿄 특유의 찝찝하고도 기분 나쁜 날씨였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목덜미 위에 끈적함이 눅눅하게 눌러붙었다. 히가시야마 유이는 가방을 안고 벤치에 앉아서, 그러잖아도 좋지 않은 날인데 날씨도 별로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깜빡깜빡 아래를 보다가 야구공을 주워 들었다. 약간 해져 있는 게 척 보기에도 연습용 공이었다. 이 근처에 누가…….

"저기!"

생각하기 무섭게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가시야마 유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44도까지 올라간 날씨에도 유니폼을 갖춰 입은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훌쩍 키가 크고 제법 다부진 체격의 소년이었다. 더위 탓인 게 분명한 새빨간 얼굴,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 급히 벗는 야구 모자, 짧게 깎은 검은 머리까지 모로 보나 운동부 학생이었다.

"그거, 후…… 저희 거예요. 죄송합니다, 헉……."

"아, 저, 숨 쉬세요. 저 괜찮아요. 그냥 공이 발치로 굴러온 것뿐이라……."

어차피 계속 여기 있을 예정이었다. 하고 있는 일이 없었으니 방해도 아니었고 바닥을 굴러 온 야구공에 다친 것도 아니었으니 공 좀 굴러왔대도 상관없었다.

소년은 그래도 감사한다는 말까지 뱉고서 숨을 몰아 쉬었다. 모자를 벗고 머리칼을 헝클이자 짧은 머리칼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가만히만 있어도 교복이 땀으로 흠뻑 젖는 날씨였으니 어떻게 보기만 하는 것도 걱정스러운데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결국 별로 도움되지 않을 손 부채질을 하자 조금 진정하는가 싶던 소년이 웃는 것처럼 기침했다. 요란한 소리에 유이도 머쓱하게 손을 내리다가 등 뒤로 감쳤다. 마주한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홈런이었나 봐요."

공을 건네며 무심코 말을 붙였다. 야구. 즐겨 보거나 하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즐기지 않는 스포츠도 아니었다. 친구들 중에 야구부 남자친구를 둔 아이가 있어서 이야기도 들었고.

뭣보다 히가시야마 유이도 여름 고시엔에는 열광하는 편이었다. 선수들에겐 여름과 동의어라고도 할 정도로 유명한 대회니까.

"그런 셈이죠."

공을 넘겨 받으며 소년이 가볍게 웃었다. 그새 호흡이 안정됐는지 장난기 섞여 제법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인상 위로 순간 볕이 고였다. 유이는 다시 야구 모자를 눌러 쓰는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이 근처에서 야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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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이름은 타네다 코타로라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고등학생이며, 부활동으로 야구를 한다고 했다. 지금은 다른 부원들과 연습을 하러 공원 근처 야구장까지 나왔다고. 유이는 야구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그의 유니폼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유니폼을 곁눈질했다.

"안 더워?"

"좀 더워."

"좀?"

"사실 많이 더워."

스포츠 드링크를 집어 들며 그가 대답했다. 공 주우러 갔다가 여자애를 데려왔다며 웅성대는 다른 부원들을 막 쫓아낸 이후였다. 조금 움츠러진 채로 있던 히가시야마 유이는 탁 트인 야구장을 응시했다.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무더위마저도 몰아낼 것 같은 시퍼런 색깔.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그런데도 연습을 하는 거야?"

"고시엔 예선이니까."

"고시엔이 목표야? 타네다 군."

"뭐, 다 그렇지."

그렇지. 찰나의 여름에 모든 걸 던지는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타네다 코타로가 배트를 바닥에 두어 번 찧더니 눈을 돌렸다.

"히가시야마는?"

"응?"

"야구 좋아해?"

어, 하고 말을 고르는데 그가 다시 물었다.

"해볼래?"

4

타네다 코타로는 굴러다니던 베팅 티를 주워다 세워 놓았다. 졸지에 배트를 잡게 된 히가시야마 유이가 이쪽을 쳐다보는 다른 부원들을 곁눈질하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 나 운동 못해. 정말로. 옷도 교복이잖아."

"뭐 어때? 히가시야마는 고시엔에 나갈 것도 아닌데. 뛸 필요도 없어."

"그래도……!"

"그냥 있는 힘껏 쳐서 날리기만 하면 돼. 잘할 필요 없어. 해보면 고민거리도 다 날아갈걸."

말문이 막혔다.

"잘할 필요가 없을 때는 공을 치지 못해서 바닥에 떨어지든, 홈런을 치든, 어느 정도 성공을 하든 중요하지 않아. 그냥 힘껏 배트를 쥐고 휘둘러서 공을 쳤다는 사실만 중요하지."

필요하면 부원들 데리고 뒤돌아 있겠다면서 타네다 코타로가 웃었다. 히가시야마 유이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벤치에서 고작 여기까지 움직였다고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운동에는 정말로 재능이 없었다. 하물며 남자애들 앞에서 혼자 눈 감고 공 치는 건 너무 민망했다.

혼자 있기 그래서 따라왔을 뿐이니 한사코 거절하면 타네다 코타로도 이해할 것이다. 그래도 못 하겠다고 배트를 밀면 어쩔 수 없지, 하며 연습을 재개할 것 같았다. 그러면 생각했던 대로 계단에 앉아서 좀 구경하다가 슬쩍 인사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면 됐다. 엄마가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아빠 말고 엄마가.

"오늘……."

충동이 입술을 벌렸다.

"오늘 내 생일이야."

하는 말에, 코타로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

"응."

오늘 내 생일이야. 그래서 오늘은 케이크를 먹기로 했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배트를 만지작거렸다. 아침에는 날씨가 그렇게 덥지 않았다. 엄마는 케이크를 구워 놓겠다고 하셨다. 학교 끝나고 일찍 돌아오렴, 아빠도 오늘만큼은 일찍 들어온다고 하셨어. 웃으며 하시는 말에 그러겠노라 답했다.

일찍 돌아왔을 때는 방 너머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온다며. 유이 생일이라니까. 일이 그렇게 중요해? 아니, 안 늦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정시에 퇴근하는 게 힘들어도 12시 전엔 들어와야 할 것 아냐. 당신은 매번 그러지.

그놈의 일, 일, 일.

일이 당신 딸보다 중요해?

희미하게 휴대 전화를 탄 목소리가 대답하는 게 들렸다. 깜빡깜빡거리는 목소리로 그래, 라고.

히가시야마 유이는, 장담컨대, 아버지와 싸우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닌 듯했다. 딸의 생일이 주제였던 대화는 어느새 어머니의 서운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매번 그러지. 일이 가족보다 중요해?

히가시야마 유이가 어머니에게 오늘 학교 때문에 늦을 것 같다고,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고 집 밖으로 나온 덴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벌컥 문을 닫고 나오면서, 여름이라 낮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일 축하해."

히가시야마 유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타네다 코타로가 쳐다보고 있었다. 유이는 머뭇거리다가 배트를 쥐고 자세를 취했다. 아마추어 특유의 엉성한 자세로 눈을 꾹 감았다.

"오, 올려 줘."

타네다 코타로의 눈이 휘었다. 좋아,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하곤 공을 올린 뒤 몇 걸음 물러섰다.

"공을 보고 힘껏 치면 돼. 잘 치겠다거나 이기겠다고나 하는 생각은 하지 말고."

보고, 힘껏, 아무 생각 없이.

유이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깡-!

세찬 소리가 바람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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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재밌었어."

웃음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는 타네다 코타로의 것이었다.

"……응, 고마워. 재밌었어."

약간 힘이 빠진 듯한 답은 반대로 히가시야마 유이의 것이었다.

자신한 대로 유이는 연속으로 티를 세 번을 쳤고, 힘없이 달랑거리며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야구공을 보며 야구부 타네다 코타로는 웃음을 꾹 참았다. 못한다곤 했지만 이렇게 못할 줄은. 유이 자신마저도 몰랐다.

"그래도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응…… 생각보단."

그래도 앉아만 있었을 때보단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야구를 충격적으로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충격이 좀 더 커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만 들어가. 생일이라며."

코타로가 손짓했다.

"생일은 가족과 보내야지."

생일은 가족과 보내야지. 장난스럽게 웃는 엄마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

"응. 타네다 군도 잘 들어가."

"데려다줄까?"

"아니야. 바로 요앞이거든. 오늘 정말 고마웠어."

타네다 코타로가 모자를 눌러 썼다. 앳된 소년 특유의 웃는 표정.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히가시야마 유이는 몸을 돌렸다.

한참을 걸었다. 한참을 걸을 거리가 아니다 보니 조금 돌아서 걸었다. 케이크와 통화와 늦게 들어가면 얼만큼 혼날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문자가 왔다. 많이 늦니? 걱정스러운 문자가 몇 개 와 있었다.

멈춰 서서 한참을 보다가 문득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집은 코앞이었다.

오늘은 히가시야마 유이의 생일이었다.

6

[케이크 구웠어, 딸.]

[늦어도 괜찮으니까 오면 먹자. 생일이니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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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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