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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마탑주였다 단테X에이 / 로맨틱 타로 / 3,62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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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 밀리듯 꿈을 꿀 때가 있다.

물길이 불길처럼 보이는 꿈이었다. 높게 뻗 숲속 나무들도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쨍쨍한 날조차 버석함 하나 없이 시원하고 청량한 숲이었다. 빗줄기가 나무 사이로 쏟아져 내리다가 웅덩이를 만드는 날이면 숲 전체가 서늘해졌다. 불길에 약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화마를 볼 일이 없는 곳이었다. 일부러 불을 피우지 않는 이상 나뭇가지 한 조각에 불붙는 것조차 보기 힘들다. 붙는다고 해도 에이는 그로부터 도망갈 방법을 알았다.

그래도 에이는 종종 꿈을 꿨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파편 같은 순간이 있다.

*

"에이."

단테는 깃털 같은 목소리로 연인을 불렀다.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부드럽고 녹을 것 같은 목소리. 서늘해 보이는 인상은 매번 햇볕 스민 듯이 부드러워져서, 에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가 제법 차가운 인상이라는 걸 잊곤 했다.

"오늘 날씨가 좋더라."

"……. 그래? 빨래 널어야겠다."

"잠은 잘 잤어?"

"그럭저럭."

침실 문을 열고 나온 에이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덤덤해 보이는 무표정. 딱히 기분이 유달리 좋거나 나빠 보이지 않는 얼굴에는 피곤함이나 졸림 따위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단테."

평소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에이가 말했다.

"장 좀 봐 와."

"아, 준비할게. 평소에 가던 데로 갈 거지?"

"응. 너 혼자."

"……같이 안 가?"

"이젠 단테 너도 적응해야지. 혼자 다녀와 봐."

그럴듯한 대답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단테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는 이제 이 집에서 사는 데 당당히 허락을 맡은 상황이므로. 마법을 쓰면 사실 장이고 뭐고 굳이 필요가 없었지만 에이가 말하면 들어 주고 싶었다.

"정말 나 혼자 가?"

그래도 같이 가고 싶어서 허리를 숙여 뺨을 기울이고 시선을 맞춰 반응이 좋았던 그대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지자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표정에 애교라도 부리듯 부러 시무룩함을 덧씌웠다. 아니 사실 거짓도 아니었다. 정말 둘이 가고 싶으니까.

하지만 에이는 단호했다.

"다녀와."

"……응."

"기다릴게."

그래도 그 말이 좋아서 단테는 웃었다. 햇볕보다도 보석보다도 마주칠 때마다 누그러지는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그날이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에이가 단테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단테를 피하기로 마음먹은 게 그 순간 같았다. 분명 에이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단테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을 보고 돌아 온 순간 에이는 집에 없었고, 얌전히 기다리자 저녁 들어온 에이는 요리를 마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단테가 일이 있어 보이면 바로 가라고 내보냈다. 주로 단테에게 떨어지는 일이란 한두 번 다녀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만에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에이는 또 덤덤히 받아주었다가 피했다가 사라졌다가 배웅했다. 계속 그 상태였다.

혹시라도 후회하나. 별로였나? 긴 삶 속에 연애는커녕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해 본 적조차 없으며, 자기 자신을 낮추어 본 적 없는 단테는 난생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잠깐이었다. 에이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덤덤했지만 단테를 보면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단테를 보며 웃을 때마다 접히는 눈가에는 애정이 있었다. 단테, 잘 다녀와,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도 아니면 착각일까 싶었다. 그는 요즈음 매번 바빴다. 요즈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직책을 달고 있는 이상은 아마 계속해서 바쁠 테지만, 아무튼 에이는 매번 탑으로 불려 가는 단테를 늘 이해해 줬다. 이것도 피곤할까 봐 그럴지도 모른다. 모르지만…….

"잘 자. 단테."

가볍게 말하고 돌아서는 에이를 보고 단테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같이 자면 안 돼?"

"뭐?"

약간 황당해 보이는 얼굴이 그를 돌아봤다. 그제야 제 말이 어떻게 들릴지 깨달은 단테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라,"

에이가 눈썹을 찌푸린다. 단테는 숨 막히는 기분으로 다급히 덧붙였다.

"같이 있고 싶어서."

"……."

"그, 그냥 에이 너는 눕고 나는 침대 옆에 앉아만 있을게. 어차피 난 아침에 가야 하니까 잠깐 보기만 하다 갈게. 정말로."

오래 못 본 것 같아서. 어제도 봤고 엊그제도 봤지만 그렇게 말하자 에이는 한숨을 쉬었다. 단테는 조금 죽고 싶어진 기분이 됐다. 헛소릴 하는 것도 하는 거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추해 보는 게 난생처음이라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웃는 게 보고 싶었다. 이미 웃어주지만, 여전히 다정하지만 그래도 달랐다.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뺨을 쓸어보고 입을 맞출 때 휘어지는 것처럼 계속 네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내가 보고 싶었다. 옆에서 계속.

손끝을 당긴다. 마디마디에 깍지를 꼈다. 언제고 다정한 색의 눈동자를 마주 본다.

"보고 싶어."

"……보고 있잖아."

"그래도 보고 싶어."

손을 먼저 잡은 건 단테인데 속절없이 당겨지는 것도 단테였다.

에이는 붙잡힌 손을 보다가 그를 침실 안으로 데려왔다. 저렇게 쳐다보니 뭘 어쩌겠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단테 너도 누워. 옆에서 보기만 하면 정신 사나워."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답하자 단테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뭔가 말하려고 하기에 그냥 냅다 눕혀서 이불을 덮어버렸다.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여전히 멀뚱멀뚱 뜨고 있는 눈 위를 손으로 덮자 단테가 움찔 티 나게 몸을 떨었다가 별수 없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스쳐서 간지러웠다.

"……에이, 진짜 이대로 자?"

"아니면 뭐 하게?"

"아니야.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난 오늘부로 말을 못 해."

"그럼 난 누구랑 대화해?"

"사실 말할 수 있어. 거짓말이야."

"거짓말하지 말고 자, 그럼.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하는데 피곤하잖아."

단테는 이러고 어떻게 잘 수 있냐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듯했나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에이는 가깝게 맞붙은 몸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쿵, 쿵, 쿵. 세차게 뛰는 맥박이 옮아서 제 몸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눈가를 가린 손을 서서히 치웠다. 단테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둠이 눈에 익어 하얗고 화려한 얼굴이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보랏빛이 보이지 않는 색을 가만히 훑는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서서히 올라온다.

애정, 호의, 기쁨,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감정과는 결을 달리하는 무언가가.

단테.

너는 오래 살고 나는 오래 살고 너는 아주 오랜 세월을 이미 지나왔고 나도 그래왔고…….

심장 소리를 듣고 있어. 긴장한 것처럼 딱딱히 굳은 뺨, 깨어 있을 때면 좋아 죽겠다는 듯이 닿아 오는 시선을 기억해. 그걸 생각하면 편해졌다. 기분이 괜찮아졌다. 아니 좋아졌다. 어떤 나쁜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 찰나가 있었다.

그런데도 종종 생각나.

넌 죽지 않잖아, 라고 말하는 그 불안하고 서늘하며 죄책감에 물든 듯하다가도 안위를 찾는 듯한 눈동자를.

네가 그러지 않을 걸 아는데도 생각이 난다면.

나는 너를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에이."

순간 단테가 입술을 달싹였다.

"좋은 꿈 꿔."

에이는 눈을 깜박였다.

"내가 아까 대답을 안 해서……."

"……."

심장 소리는 시끄럽지 않게 요란하다. 귓바퀴에 걸리는 소리를 헤아리다가 에이는 단테를 끌어안았다. 에이? 당황한 듯 빳빳하게 경직되는 남자의 몸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다정한 소리. 울림. 부름.

난 왜 생각할까.

"……에이."

"……왜?"

"심장 소리 들려……."

이름 붙일 수가 없는 감정을 생각하며 에이는 팔에 힘을 줬다.

"그냥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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