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창 下
침상
거대한 두 마수가 마수 무리의 중심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잠에서 깨어나고 다음날 부관의 보고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오히려 두 마수가 소대의 중심이었던 그레이엄의 이목을 끈 꼴이었고 그 틈을 타 마수의 본대가 소대를 공격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양의 기사 중 한명의 이능력이 폭주했다. 보고서를 읽던 그레이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미친 인간처럼 웃으며 자신을 저주했다. 그는 적어도 더 이상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인데 어째서인가 제 탓으로 다시 또 누군가를 잃고 말았다. 사람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기분을 알기에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인데 어째서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투입된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어지는 거대한 죄책감을 그레이엄의 뇌는 견딜 수 없었다. 만약 그때 진정제가 투여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미쳤겠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3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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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은 그의 대위가 하는 말을 모두 무시한 채 병상에서 벗어났다. 당장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그레이엄은 곧바로 유포니엄의 훈련장을 찾았다. 그리고 유포니엄에 걸린 트라이야의 깃발을 요구했다.
고작 마수 두 마리의 시선을 끄는 것으로는 지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것들의 시선을 끌자. 그레이엄은 기다란 창 날 쪽에 자신의 하나뿐인 여신의 기를 달았다. 여신의 가호가 조금이라도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그레이엄은 기다란 창 손잡이에 유포니엄 3학년의 리본을 매달았다. 조금이라도 이것이 행운을 불러다 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후로 그레이엄은 창을 휘둘렀다. 익숙하지 않아 자꾸 손에서 떨어지는 창이 야속했지만 그래도 휘둘렀다. 고작 이런다고 마수들이 자신을 더 바라볼지 의문이었으나 그래도 휘둘렀다. 계속 반복해서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레이엄은 나약하다. 유약하고 볼품없다. 덩치만 커졌지 생각하는 것은 단순하고 할 줄 아는 것이 몇 없다. 그렇기에 흔들릴 자격조차 없다. 여기서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사라진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다. 그래서 휘두르고 때문에 휘둘렀다. 더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서.
얇은 창대에 의지하고서 걷는다.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얇아서 누군가 찬 다면 꺾이고 쓰러질 것을 앎에도 막대기따위에 의지해 버티는 것은 그것말고는 버틸 방법을 잊은 것이 아닐까. 몸이라도 움직이면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일까. 바람에 깃발이 나부낀다. 유독 시린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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