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태섭] Marry

[우성태섭] Marry 2

와따 by 와따

우태 좀아포

"어, 시원하게 잘 보고 왔냐?”

우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개수대로 갔다. 태섭은 왜 저러나 의아해 하다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우성이 내려놓은 야구 배트를 양 어깨에 메고 상의를 탈의한 채 올라갔다. 우성은 순간 태섭에게 조금만 있다 가라고 막아야 하나 고민 했다가 설마 눈치챌까 싶어 마저 씻기로 했다. 변기의 수압은 나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휴지는 막힘 없이 내려갔으니 뒤처리는 완벽했다. 완벽하지 못한 것은 우성의 마음뿐이었다.

우성은 태섭이 꺼내둔 칫솔에 치약을 짜고 빡빡 이를 닦았다. 가글로 입 안 구석구석 깨끗하게 헹구고 태섭이 쓴 칫솔을 빤히 내려다봤다.

“화장실 더러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생각보단 쓸만하네! 하긴 괜찮으니까 정우성 네가 안 찡찡거렸겠지?”

뛰어내리다 시피 계단 아래에 착 점프한 태섭의 소리에 화들짝 놀란 우성은 가글을 놓치고 말았다. 발판에 스며드는 가글액을 보고 태섭은 덩치에 안 맞게 새가슴이냐며 툭 장난을 치며 휴지를 뜯어와 정리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꼼꼼히 치우던 태섭은 미동 없는 우성의 다리를 보고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달린 전등이 우성의 뒤통수와 거리가 가까웠던 탓인지 얼굴에 명암이 선명했다. 정우성의 눈이 이렇게 새까만 색이었던가 생각하다 물기를 다 닦은 태섭은 쓰레기를 한데 잘 모았다.

“쓰레기는 우리가 여기 지내는 꼴 알리면 안되니까 최대한 냄새 안 나게 깨끗하게 써서 버리자. 여름이라 일주일에 한 번은 무리고 3일에 한 번 거리 좀 떨어진 곳에 버리면 괜찮을 거야.”

태섭은 누적된 피로가 이제 확 느껴졌는지 하품을 시원하게 하더니 우성이 흘렸던 부스러기를 열심히 털어냈다. 지친 몸을 스프링이 출렁일 정도로 뉘였다. 태섭이 여기까지 움직이는 동안 우성은 개수대 앞에 서 있던 자세 그대로 한치의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있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태섭은 우성에게 까딱까딱 손짓으로 전등을 가리키더니 불 끄고 딱 누우라 했다. 우성은 농구 할 때와는 달리 느릿느릿 움직여 건전지가 다 한 장난감 마냥 천천히 불을 끄고 발을 질질 끌며 태섭의 옆으로 다가왔다.

“좁다...”

“이 정도도 감지덕지하지. 불평하지 마라. 너보다 내가 더 불편하니까.”

그 말대로 우성이 침대에 눕자 태섭은 침대 외곽으로 밀렸다. 성인 남성 한 명이 여유롭게 누울 수 있는 침대라 해도 둘까지는 무리였다. 그나마 이불이 꽤 넉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우성은 윗옷을 벗었다.

“미친! 야! 맨살 닿잖아! 치워, 빨리!”

“아니 너도 벗었으면서 뭐 그리 질색해, 상처 받게.”

“더운데 살 닿으면 기분 더러운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별로 안 덥잖아! 선풍기도 켜뒀는데!”

태섭은 어깨에 우성의 팔뚝이 닿자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퍽퍽 우성을 마구 밀쳐냈다. 그런 태섭의 행동에 열 받은 우성은 전신에 힘을 주고 절대 태섭의 뜻대로 밀리지 않고 버텼다. 힘 대결에서 태섭의 패배로 끝나자 우성은 곧 태섭에게 프레스를 걸어 반격했고, 질색하던 태섭은 이내 괜히 이러다 땀 흘려서 다시 씻느니 그냥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의미 없는 반항을 끝냈다.

“뭐하냐?”

“전주인이 쓰던 충전기 나랑 같은 브랜드더라고. 핸드폰 충전하게.”

“하~ 충전기 생각을 못 했네... 내일 구해야겠다.”

태섭은 여전히 통화 불가 지역 표시를 보다 화면에 자리 잡은 한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성은 태섭이 화면에 입 맞추는 걸 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 돌아갈 수 있겠지.”

“돌아가야지.”

“......”

“당연한 거 물어볼 시간에 빨리 와서 자라. 내일 충전기 찾으러 가면서 라디오도 있는지 찾아봐야 하니까.”

“라디오에선 뭔가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오히려 티비보다 나을 수도 있지. 개인이 라디오에 송출할 수도 있다던데.”

“태섭이... 은근 아는 게 많네?”

“네가 너무 애 같은 거 아니고?”

이죽이며 웃는 태섭의 표정이 얄미워 우성은 아까처럼 태섭에게 바짝 붙어 맨살을 괴롭혔다. 태섭은 생각보다 간지럼을 잘 탔고 자존심에라도 간지러워 웃는 소리를 안 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필사적으로 참느라 귀가 빨개진 것을 우성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보다가 태섭의 괴로워하는 눈빛과 마주치고 손을 멈췄다. 태섭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새침하게 등을 휙 돌린 우성이 이제 자! 하고 자는 척 눈을 감았다. 태섭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우성이 어처구니없었다.

이제 잠들었나 싶었는데 등 돌렸던 우성이 태섭의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댔다. 덩치는 산만한 놈이 어리광이나 부리고 사내 답지 않다 생각하며 태섭은 뺨에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잠에 드려 노력했다. 우성은 무신경하게 태섭이 졸리건 말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태섭아, 자? 잔다, 왜. 뭐야, 안 자잖아. 네가 말 걸기 전까진 꿈꾸고 있었어. 무슨 꿈 꿨는데? 여자친구? 어, 한나 보고 있었어.

꿈에서 한나가 나왔다는 건 뻥이었다. 옆에서 우성이 계속 뒤척거려 태섭은 몸만 잠들고 정신은 깨어있었다. 지친 하루를 보낸 탓에 뭐라 할 정신도 남아있지 않아 우성의 뒤척임을 하나하나 느끼며 참고 있었다. 우성은 태섭이 참아주는 것도 모르고 태섭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깨에 닿는 짧게 민 머리 감촉은 머리카락이라기보단 털 동물 같았다. 태섭은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 만져볼 기회가 많지 않아 잘 알진 못했지만 아키타견 같은 감촉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정우성 하는 짓도 꼭 개 같지. 혼자 쿡쿡 웃는 태섭의 성대가 떨리며 어깨에도 진동이 전해졌다. 우성은 무슨 생각해? 하고 질문 했지만 그 사이 기절했는지 태섭의 입이 사알짝 벌어지며 숨이 흘러나왔다. 우성은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떼 태섭의 목에 바짝 붙었다. 허리는 뒤로 빼고. 아래가 태섭의 몸에 닿으면... 그건 제법 곤란할 거 같았다. 나란히 누운 태섭의 목에선 우성과 같은 비누향이 났다. 파우더리한 향이 이렇게 계속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드는 향이었던가 태섭한테 어울린다 라는 생각을 하며 국가를 제창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 몰골이 말이 아닌 우성과 달리 뺨이 부은 태섭은 머리도 평소와 달리 내려선 지 고등학생 때와 별 다름이 없어 보였다. 우성은 아침부터 맞고 싶진 않아 쏟아져 나오려는 말을 입안에 꾹 삼켰다. 둘은 개수대에서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에너지바를 입에 물고 연장을 챙겼다.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탄 우성을 보고 한숨을 쉬다 태섭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른 새벽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오후엔 지하에 있는 게 안전할 거 같아 잠을 얼마 안 잤더니 몸이 각성 상태에 빠진 거 같았다. 반면 우성은 정신을 통 못 차려서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동네에 차가 아예 안 지나다니는 건 아니어서 한 바퀴 돌아도 위험하지 않겠다 싶어 태섭은 가게들의 위치를 오늘 다 파악해 두기로 했다. 나중에는 차 운전하는 걸로 뒤를 밟힐지도 모르니.

지도를 펼치고 펜으로 어제 봤던 주차장 쪽에 제일 먼저 X 표시를 하고 은신처 반경 2km 거리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미국 내에서 치안이 썩 나쁜 도시는 아니었기에 갱이나 범죄자는 눈에 띄진 않는 듯했다. 혹은 어딘가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태섭은 통신사를 발견하고 옆 골목에 주차했다. 주변을 경계하고 안전하단 판단이 들자 우성의 손목을 잡고 통신사 가게 문을 가리켰다. 미국은 대부분 큰 유리창이나 통유리 문이어서 침입이 수월했다. 이래서 범죄율이 낮아질 수가 없는 건 아닌가 가게를 강탈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웃기고 씁쓸했다. 금방 필요한 충전기와 배터리를 챙기고 라디오도 근처에 있었다. 마침 옆에 철물점도 있어서 각종 끈과 공구함도 챙길 셈이었다. 우성은 어제 태섭이 스포츠 가게에 성큼성큼 들어갔을 때를 떠올리고, 부디 이것도 사람에게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잠자코 태섭이 한 아름 안겨주는 짐을 옮겼다. 

"태섭아, 뭐 해?"

"… 이것도 챙겨야 하나 싶어서."

태섭이 선반 위를 올려다보길래 우성도 그쪽을 쳐다보았다. 라디에이터, 이 계절에 맞지 않는 겨울용품이었다. 지금은 7월 말, 앞으로 해가 더 뜨거워질 달이었다. 짧은 말에도 우리가 겨울까지 아니, 어쩌면 그 이후에도...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태섭은 돌아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지만 동시에 우성보다 더 현실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날이 추워지면 지금과 달리 아예 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걸 꺼내는 순간, 은연중에 인정할거 같았다. 자신들은 이곳에 갇혀 못 빠져 나갈걸.

이 때 우성의 장점이 빛을 발했다. 생각하느라 망설이지 않는 다는 큰 장점. 신중하게 고민하는 태섭과 달리 일단 뭐라도 해보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성의 방법이었다. 우성은 머뭇거리는 태섭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라디에이터를 꺼냈다. 

"여기 등유도 있으려나? 찾아보자."

라디에이터를 안아든 우성은 태섭에게 웃어보였다. 우성의 말을 듣고 창고로 보이는 곳을 뒤지자 20리터 등유통이 3개나 나왔다. 라디에이터에 등유를 직접 채워서 써본 적은 없었기에 이게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둘은 통을 다 챙겨보기로 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하고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오늘도 비품으로 한가득 채웠다. 

짐을 한가득 실어서 그런가 언덕길 올라가는 게 영 쉽지 않다 농을 치며 은신처로 돌아가다가 마을 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도서관은 책 무게 때문에 하중을 튼튼하게 지었다더라. 그래? 도서관에서 지내는 게 더 안전했으려나? 다른 사람들도 그 생각하고 저기 갔을 거 같은데.

쿵-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던 둘은 갑자기 벌어진 눈앞의 사태에 할 말을 잃어 입을 벌리고 눈만 데굴 굴려 서로를 보았다. 제일 먼저 움직여 문에 손을 댄 것은 우성이었다. 우성이 차 문을 열기 직전, 태섭은 소리 쳤다.

"열지 마!"

"지금 사람이… "

"칠 때… 눈을 봤어. 사람 아니야."

태섭의 말대로 허연 거품을 입에 물며 앞 범퍼에 매달려 와이퍼를 붙잡고 기어오르는 여자의 홍채는 하얗게 탁해져 있었다. 여자의 찢어진 옷 사이로 무자비하게 씹힌 살점이 너덜너덜 헤져있었다. 창이 좀비가 흘리는 피로 얼룩지자 와이퍼를 작동 시키려 했으나 매달려 있던 좀비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나뭇가지 마냥 떨어져 나갔다.

"정우성, 눈 감고 있어. 귀도 막고."

"뭐, 뭐 하려고?"

"빨리!"

 날 선 목소리에 우성은 곧바로 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귀도 막았다. 하지만 워낙에 소리가 커서 못 들을 수가 없었다. 터지는 소리. 우성의 미흡한 운전 실력으로 과속 방지 턱을 밟았을 때보다 더 큰 충격. 충격이 지나가고 눈을 뜨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어찌나 어금니를 꽉 물었는지 빠드득 소리도 들렸다. 우성은 사람이었던 것을 죽이고 지나간 생생한 느낌에 토기가 치밀었지만 지금 힘든 것은 태섭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감행해야만 한 태섭의 판단이 옳았다.

"우웩-, 에엑."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태섭은 먹은 것을 다 토했다. 운전하는 중에 간단한 요기 거리만 먹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토하는 데 목이 아프다거나 위가 쓰러진 않았다. 다만 인간으로서 윤리를 처음으로 부순 감각이 태섭의 마음에 선명한 비수가 되었다. 토 하면서도 태섭은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으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리에 운전대를 잡은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뿐만 아니라 옆에 우성도 타고 있었다. 이미 좀비가 되어버린 것과 산 사람 둘. 누가 봐도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을 다독이려 해도 어린 청년에겐 가혹한 경험이었다. 하필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서 그 아래 뺨에 번진 눈물 자국이 태섭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여자도 살고 싶었겠지. 그래서 뛰쳐나왔던 게 아닐까. 차에 치이기 전까진 완전히 좀비가 아니었다. 괴로워하며 자신의 몸을 쥐어뜯던 여자의 손가락은 엉망이었다. 손톱 몇 개는 들려 있었고 씹혀서 망치질한 고기처럼 뭉개져 있었다.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저항했을 여자를 태섭이 확인 사살했다.

우성은 태섭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화장실에 따라 들어가지 않고 문 옆에 기대 태섭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너무 나오지 않는다 싶으면 그때 억지로라도 물을 마시게 하고 눕힐 생각을 했다. 이토록 힘들어하는 처음 보는 태섭의 모습이 안타까워 우성은 눈물이 나올 거 같았지만 꾸역꾸역 참았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태섭을 앞두고 자신이 우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다행히 우성의 걱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태섭은 지쳐 보이긴 하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피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라디오는 내일 틀어보고 오늘은 뭐 볼까. 일본 영화 있나 찾아볼까?"

"일본 작품은 다 만화네~ 만화 봐?"

"한번 보자, 어릴 때 이후로는 잘 안 봐서 모르겠어."

우성은 먼저 내려가 비디오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 했다. 제작사 로고가 나오는 동안에 태섭에게 물을 따라주고 소파 베드에 앉혔다. 태섭은 많이 지쳤는지 맥아리 없는 손으로 우성이 시킨 대로 원샷 했다. 빈 컵에 콜라를 따르고 우성은 팝콘을 뜯었다. 

"오늘은 밥 내가 차릴게. 일단 만화 보면서 한숨 돌리고 쉬자."

"응, 난 조금만 먹을래. 아직 별로 안 고파서."

태섭의 옆에 자리 잡고 누운 우성은 태섭의 다리에 슬쩍 머리를 얹었다. 뻔뻔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태섭은 콧김을 흥 하곤 빼진 않았다. 우성이 뜯은 팝콘 봉지 입구를 태섭의 손에 갖다 대자 태섭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거절에 우성이 울상을 짓자 질린다는 표정으로 하나 집어 먹었다. 하나 씹어 삼키고 마지못해 우성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 보고 우성이 환히 웃자 태섭은 한숨을 쉬었다.

"넌 진짜 남고 출신이란 게 안 믿겨."

"왜?"

"이렇게 큰 놈이 턱턱 엉겨 붙고 말이야… 북산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북산은 생각보다 엄청 빡빡하다~"

"산왕은 엄격한 거 치곤 많이 봐주는 거 같은데?"

"뭐, 선배들이 날 많이 좋아하긴 했어? 에이스니까."

"와, 완전 재수 없어. 내가 네 선배였으면 많이 때렸을 거 같아."

"안 그래도 현철 선배한테 목 엄청 잡혔거든? 너까지 있었으면 나 진짜 병원 가느라 훈련 빼먹었을 거야. 넌 작은데 왜 그렇게 손이 매워?"

작다는 말에 욱한 태섭은 그만 자기 허벅지를 벤 머리를 한 대 때렸다. 제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성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왜 때리냐며 벌떡 일어나는 우성을 발로 밀며 머리 무거우니까 치우라고 태섭은 다리에서 내쫓았다. 우성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한 줄도 모르고 삐진 티를 팍팍 냈다. 

"일본어… 오랜만에 들으니까 되게 낯설다. 반가워서 그런가."

"우리끼린 하잖아?"

"자주 보진 않았잖아. 

"하긴 일본어 지금… 5개월 만에 하는 거 같네?"

"그치, 겨울에 저번 경기 하고 지금 본 거니까 그 정도 됐을걸?"

"우리 이러다 돌아갈 때 일본어 까먹는 거 아냐? 좋아, 같이 대화하는 동안은 영어 단어 절대 금지! 어때!"

"뭐어?"

"완전 순수 일본어로만 말하기! 오늘부터 시작!"

"이거 완전 생떼 쓰네?"

넋놓고 만화를 보던 태섭이 중얼거리듯 한 말을 놓칠세라 대답한 우성은 굳었던 태섭의 표정이 풀린걸 보고 헤실헤실 웃었다. 오늘의 상처가 오래 가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그 생각에서 벗어났으면 싶었다. 그래서 괜히 허허실실 얘기도 하고 엉킨 실타래 풀듯 무거운 공기를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태섭은 만화 영화가 제법 재밌었는지 어제 봤던 영화보다는 눈이 더 말똥해 보였다. 이제 슬슬 배가 고프려나 싶던 우성은 냉장고 안에 있던 피자를 데우고 맥주도 같이 꺼내왔다.

"오늘도 술 마셔?"

"그간 경기 대비하느라 식단 했잖아, 소소한 상이지."

"난 벌크업 하느라 잘 먹긴 했는데. 주면 또 먹지."

"엥? 그닥 필요 없겠다?"

장난친다고 맥주를 빼는 우성에게 그건 아니지 하며 팔을 뻗었다가 태섭의 손을 피한다고 맥주를 치켜올리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피자 접시를 놓칠 뻔 했다. 소중한 양식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사고는 피해야 했다. 태섭은 맨손으로 잡으려 했고 우성은 태섭이 화상 입을까 봐 재빠르게 접시를 고쳐잡았다. 우성은 다행히 흘리지 않았고 태섭이 잡은 것은 우성의 팔뚝이었다. 태섭이 잡자마자 우성은 자신이 열이 나나? 싶을 정도로 확 후끈 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오르는 체온을 태섭도 못 느낄 수가 없었다. 

"너 왜 이렇게 뜨거워? 열 나?"

"어? 아니, 아니. 피자 데우느라 불 써서 그래."

"얼마나 가까이 있었길래 몸이 달궈질 정도야?"

점점 상체까지 덥석덥석 잡아대는 태섭의 손 탓에 우성은 죽을 맛이었다. 오로지 손에 들린 차가운 맥주만이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신을 잡게 해주었다. 피자를 테이블에 올린 우성은 맥주를 냅다 식도에 부었다. 갑작스러운 우성의 행동에 태섭은 맥주를 확 뺐다.

"취하는 건 괜찮은데 취할 거면 곱게 취해라? 안 그럼 너 위로 내쫓아버린다. 찜통 안에서 잘래?"

"목이 너무 말라서… "

"차라리 물을 마셔~ 아까 나한테 준 것도 남았는데."

"어, 어… 이 정도로는 안 취해, 걱정 마."

안 취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우성은 한 캔을 비우고 신이 나 그 뒤로 연달아 두 캔을 깠다. 태섭이 천천히 마시는 동안 혼자 물 마시는 하마 마냥 마셔대더니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하고 해롱거리기 시작했다. 태섭은 처음 한 캔 만에 풀린 입꼬리를 보고 말려야 하나? 싶었다가 오늘은, 오늘 정도는. 하고 내버려 두기로 했다. 계단 위로만 못 올라가게 하면 될 일이었다. 태섭 또한 술이 필요한 하루이기도 했다. 

"정우성. 졸려?"

"아니이~"

"… 안 졸려도 자야 될 거 같은데."

"자기 실허~"

"너 지금 혀 다 풀렸어. 이 닦고 이제 자."

"너 누우면."

"나 아직 마시는 중이잖아."

"혼자 마시면 안대! 내가! 같이 마셔줄게. 자. 딱 한 캔 하자!"

"하~… 야, 누워. 나도 그냥 잘 테니까. 그만하자, 어?"

"응? 나 시작한 것도 없는데 혼자 뭘 그만 하재?"

어? 우성의 말이 이상한 뉘앙스로 느껴진 태섭은 우성을 들어 올리려다가 그 앞에서 멈칫 했다. 술 취한 놈을 상대로 무슨 망상인가 싶어서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태섭은 차마 입안을 안 닦고 잘 순 없어서 칫솔을 입에 물고 우성은 스스로 양치질을 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해주기에도 다 큰 성인 남성은 거부하고 싶었고 그나마 최선이 가글을 시키는 것이었다. 가글액을 따라서 우성에게 아 하라고 입을 벌리게 시키자 우성은 뭔지도 모르고 넙죽 마셔버렸다.

"태서바, 맛 이상해…"

"야!! 그걸 왜 마셔!!  정우성, 진짜. 골 때리는 자식이네?"

"에엥, 이거 술 아냐?"

"그걸 물어봐야 아냐… 술 못하면 마시질 말지! 맛탱이 간거 어쩔 거야, 니!"

"태서바, 너 화내니까 푸들이 왕왕 짖는 거 가타~"

기어이 매를 번 우성의 머리를 태섭은 주먹으로 빡 때렸다. 술에 고통도 무뎌졌는지 아까처럼 머리를 부여잡지도 않고 바보 같이 웃었다. 고등학생 때 많이 맞았다던데 하도 맞아서 그런 취향인가… 싶을 정도였다. 태섭은 가글액을 치워버리고 물을 따라주고 자신을 따라 하라며 고개를 뒤로 젖혀 가글 소리를 냈다. 태섭이 하는 대로 따라 물을 몇 번 입에 담고 뱉고 반복하고 태섭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소파 베드에 누웠다. 태섭은 우성이 허튼짓을 할까 봐 이불로 둘둘 김밥처럼 말아버렸다. 팔다리가 구속 되어서 답답했는지 우성은 끙끙 거리였지만 깡그리 무시하고 뒤돌아 누웠다. 애벌레처럼 허리를 접고 피며 태섭의 등에 바짝 붙은 우성은 속이 답답해 구강호흡을 했고 숨은 고스란히 태섭의 피부에 닿았다. 축축한 숨결에 빼액 소리를 지르며 우성을 밀쳤지만 술 취한 놈이 으레 그렇듯 무식할 정도로 평소보다 힘이 더 셌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앞으로 맨날 이 자식하고 밤마다 씨름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과 짜증이 태섭의 가슴에 홧병을 키웠다. 지칠 대로 지친 태섭은 우성이 점점 자신의 몸을 침대 외곽으로 몰아도 숨만 크게 내쉴 뿐 그냥 뒀다. 이러다 떨어지면 바닥에서 자면 그만이었다. 우성은 기가 막히게 태섭을 딱 침대 프레임 경계에 주차하고 어깨에 턱을 기댔다. 

"태섭아, 너한테. 고소한 소금 냄새 나."

"소금이 소금이지. 고소한 건 또 뭔데."

"피부도 그을린게… 초콜릿 같네. 달겠다."

"뭐… 아!!! 미친놈!!!!! 내가 곱게 취하라 했지!!!!!!"

어깨를 앙 물어버린 우성에 경악한 태섭은 진심으로 살의를 담아서 주먹을 지르려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꿈틀꿈틀 움직이며 한 팔을 빼버린 우성이 태섭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몸통을 끌어안고 옥죄어서 실패에 그쳤다. 정우성은 힘을 적당히 주는 법을 모르나? 갈비뼈가 압박될 정도로 눌렸다. 처음엔 장난 치려고 한 거였는데 어쩐지 점점 장난에 진심이 들어가서 태섭을 괴롭히고 싶었다. 술에 기대면 안되는데 우성은 취한 척 태섭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미친놈아, 이 정도는 심폐소생술 할 때나 그러는 거야!! 빨리 힘 안 빼?!"

"아~ 나 그만 맞구 싶어. 네 손 너무 아파… "

"그러게 누가 맞을 짓을 하냐고!!"

태섭은 왁왁 화를 내느라 점점 우성의 발음이 또렷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우성은 꿋꿋하게 취한 척 태섭의 어깨에 이어 등을 핥고 초콜릿 먹는 꿈을 꾸는 척 하는 건지 냠냠~ 소리를 냈다. 태섭은 일단 자고 날이 밝으면 정신 교육을 잡아야 겠다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우성은 와중에도 태섭은 정말 푸들 같다 따위를 생각하며, 태섭이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게 그리고 자신에게 붙을 수밖에 없게 팔로 꽉 고정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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