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태섭] Marry

우성태섭] Marry 3

와따 by 와따

우태 미국 좀아포

뻑뻑한 수도꼭지 돌아가고 콸콸 쏟아지는 물 소리가 들려 우성은 벌떡 일어났다.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거울을 보며 열중하게 턱에 묻은 거품을 걷어내는 태섭이 있었다. 그리 관리한 것 치고 면도 하기 전후 차이가 별로 다름은 없었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는지 요리조리 얼굴을 뜯어보다가 거울 너머 잠 깬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태섭은 모닝 차주 마냥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너 나와.”

태섭은 우악스럽게 우성의 손목을 잡고는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아침부터 고래고래 질렀다. 저렇게 작은 몸인데 성량은 무슨 그 두배가 되는 거 같았다. 우성이 황급히 귀를 틀어막자 더 화가 난 태섭은 우성에게 바짝 붙어서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이 자국 보이냐? 네가 개야? 사람을 물고?!”

“헉... 너 피부가 약한가 보다, 남을 줄은 몰랐네.”

키스마크라기엔 치열 자국이 남은 멍이었지만 누가 보면 남사스러울 만한 꼴이었다. 우성은 그래도 안 보이는 곳이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며 태섭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태섭은 우성의 너스레 떠는 행동에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답답하다며 괴로워했다.

“태섭아, 오늘 라디오 틀어본다며~”

우성은 태섭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고물에 가까운 라디오를 꺼내왔다. 고물처럼 보이지만 작동 되니까 안 버리고 뒀던 거겠지? 우성은 라디오 선을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주파수가 완전 맞진 않는지 불안정한 잡음이 크게 들려 태섭은 볼륨부터 줄이고 버튼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씩 돌려보았다.

"이게 채널? 주파수 돌리는 건가?"

"소리 미묘하게 바뀌지 않아?"

라디오는 영 써본 적이 없어 난감했다. 미묘하게 바뀌는 잡음을 들으며 혹시나 사람 말씨가 들리지 않나 두 사람은 라디오에 고개를 바짝 붙이고 머리를 맞대어보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다행히 송출되는 채널을 찾았다. 귀를 기울여 듣던 태섭은 쯧 혀를 찼다. 방송국에서 국가 재난을 대비해 미리 녹음해둔 음성이었다. 정부를 믿고 침착하게 대응 하며 응급 상황 시 매뉴얼을 따르라는 정보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좀비 사태에 도움 되는 방송은 아니었기에 태섭은 다른 방송을 찾으려 다시 버튼을 돌려보았다. 몇 분 시도해보다가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부정확한 발음으로 인해 그냥 넘어갈 뻔한 음성을 우성이 잡아내고 볼륨을 최대로 키워 다시 들어보았다. 노인의 지긋한 음성이 알아듣기 쉽지 않았지만 들리는 단어로 유추하건대 은신처를 제공할 테니 이 외에 필요한 부분들을 조달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서로 도와가며 생존할 의향이 있다면 아침에 맨해튼 해수욕장 앞 수족관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음... 썩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닌데 우리 말고 멀쩡한 사람들이 있는지 알아두는 것도 좋으니까."

"바다 쪽은 상황이 좀 괜찮나? 다른 곳도 어떤지 보는 게 좋을까?"

"알아두면 쓸모 있을 거 같긴 한데, 가본 적 없는 데라... 맨해튼 해수욕장이면 어느 정도 거리지?"

태섭은 맨해튼까진 가본 적이 없어 지도를 봐도 찾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성은 어차피 계속 여기에 머물든 이동을 하든 여벌의 옷도 필요하기 때문에 해수욕장에 있는 수족관만 기억해 두고 오늘은 옷을 구하러 가보자고 했다. 지도도 차에 있었기 때문에 지체할 것 없이 태섭은 나갈 준비를 했다. 조달하러 가는데 필요한 장비들을 챙겨 태섭이 앞장 서고 그 뒤를 우성이 따랐다.

"여기 옷 구할만한 데가 있나?"

"백화점 근처에 옷 가게 있을걸?"

골목에 차를 주차한 두 사람은 대형 옷 가게를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안에 아무도 없었다. 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역시 다 좀비가 되어버린 걸까? 큰 유리창으로 거리를 둘러보다가 태섭은 휙 고개를 돌렸다. 괜한 생각을 말아야 했다. 우성은 앞에 걸려있는 옷을 대충 집어 드는 태섭과 달리 제일 안부터 꼼꼼히 옷을 뒤집어 텍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판국에 브랜드 찾는 거냐 기가 막혀 태섭은 우성에게 사치 부리지 말라며 주의했지만 그러는 본인도 진열대에 있는 왁스를 챙겼다. 어느 새 우성은 한 손에 가득 옷걸이를 잡고 있었고 옷을 보니 폴로 셔츠와 하와이안 셔츠였다. 태섭은 폴로는 그렇다 쳐도 눈에 띄게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라니 온 시선을 끌 일이 있냐며 큼직한 패턴의 옷을 뺏으려 했다.

"아, 왜에~ 일부러 태섭이 너한테 딱인걸로 고른 거란 말이야~"

"아주 표적이 되어달라고 하지 그래?"

신기하게도 취향을 어찌 알았는지 셔츠는 태섭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입었다가 좀비나 강도 둘의 습격을 바로 받을 거 같은 것이 문제였다. 우성은 툴툴거리면서 하와이안 셔츠를 아무 데나 걸어두고 태섭은 무지 셔츠를 골라왔다. 잘 안 입는 스타일이라 어색했지만 아쉬움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옷 장사라도 할 셈인가 싶을 정도로 묵직하게 챙긴 둘은 오늘도 차에 한가득 실어 담다가 우성은 번뜩 든 생각에 들고 있던 옷을 태섭에게 넘겼다. 거의 밀다시피 넘긴 우성에 의해 태섭은 차에 고꾸라졌지만 옷 무더기가 쿠션이 되어 아프진 않았다.

"야, 어디가!!"

"나 볼 일 좀!!"

"급해도 야구 배트는 챙겨 가야지!!"

태섭이 던진 배트를 손쉽게 받은 우성은 배트를 흔들며 코너로 사라졌다. 태섭은 별일 없겠지 생각하며 언제라도 출발 할 수 있게 시동을 걸고 우성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우성은 금방 태섭에게 돌아왔고 차 뒷문이 닫혔는지 확인 한다며 열었다가 다시 닫은 뒤 조수석에 탔다. 태섭은 지도를 보며 어제 사고가 일어났던 주유소 말고 어디에 또 있을지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유소가 있어 액셀을 밟으며 지도를 옆에 우성에게 내밀었다. 지도를 받아서 든 우성은 태섭에게 방향을 안내하고 태섭은 우성의 말을 들으며 신호를 무시하고 운전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누군가 밟은 지도 모르고, 누굴 데려가는지도 모르고.

주유소에 도착하자 사람은 없었지만 좀비 직원이 둘 있었다. 태섭은 이를 어쩐다 고민하다 우성에게 둘 정도는 따돌릴 수 있을까? 중얼거렸다. 우성은 설마 하며 기겁 했지만 또 언제 주유소를 찾을지 모르니 찡얼거리며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우성이 박수를 치며 좀비에게 다가가자 좀비 둘은 태섭의 의도대로 우성을 쫓아 달려들었다. 그러나 우성에겐 어림 없는 속도였던지라 우성은 좀비를 가지고 놀았다. 태섭은 그런 우성을 보며 적당히 하지 오바하네, 또... 혀를 차다 머리에 툭 떨어진 물방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리려 하고 있었다.

"날씨도 참 가지가지..."

주유를 마치고 차에 올라탄 태섭은 창문을 내려 우성을 불렀다. 창문으로 팔을 빼 문을 팍팍 치며 호출하자 우성은 파블로프의 개 마냥 뛰었다. 갑자기 천둥이 치며 비가 우성을 덮쳤다. 하늘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좀비들은 우성을 뒤쫓다 말고 입을 쩌억 벌리고 멍청히 비가 떨어지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태섭이 몸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고 우성의 이름을 불렀다. 물이 밀려 들어오듯 재빠르게 올라탄 우성은 문을 세게 쾅 닫았다. 비에 쫄딱 젖은 우성은 개 마냥 몸을 털었고 태섭은 그런 우성에게 하지 말라며 가볍게 팔뚝을 찰싹 내려쳤다. 비가 물 폭탄 마냥 쏟아져서 와이퍼 없이 안전하게 갈 수 있을지 긴장 되었는지 운전대를 잡은 태섭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우성은 꿈틀거리는 태섭의 힘줄을 보고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천천히 가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돌아가는데 2시간 가까이 소요 됐다.

"찝찝해~ 몸 완전 끈적거려."

"난 그나마 괜찮은데 너 먼저 씻을래?"

"그냥 한 번에 씻고 옷 갈아입자. 너도 지금 물 뚝뚝 떨어지는데?"

"아이, 좁아죽겠는데 어떻게 같이 씻어. 너 먼저 빨리 해! 그다음에 하게."

태섭은 물에 좀 젖은 것만으로 감기에 걸릴 정도의 연약한 남자가 아닌데도 우성은 태섭을 끌어당겨 옷을 벗겼다. 태섭이 우성에게 반항 했지만 반쯤 걸쳐진 옷이 방해했다. 우성은 그런 태섭을 보고 깔깔 웃다가 턱으로 점프해 머리를 박은 태섭으로 인해 혀를 씹었다.

"자린허 가태..."

"어어, 말 잘하는 거 보니까. 달려있다."

우성은 두 손으로 입을 부여잡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멀쩡할 일 없다며 혀를 내밀어보니 피가 살짝 나고 있었다. 태섭은 설마 피가 날 것이란 생각을 못 해서 차마 혀를 만지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우성은 그런 태섭의 걱정이 좋아서, 욱신거리는 통증은 무시하고 눈앞의 태섭에게 징징거렸다.

"야, 미안. 피 날 줄 몰랐어."

"너무 아파..."

"어, 어... 일단 너도 옷 벗어."

어쩔 줄 몰라하는 태섭의 반응은 우성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태섭이 옷을 들어 올려 벗기느라 우성의 맨살에 따듯한 감촉이 기분 좋게 퍼졌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상반신을 탈의한 채로 눈을 마주쳤고 한 명만 동공이 떨렸다. 태섭은 눈을 마주해도 그 떨림을 모르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개수대에 물을 틀어 비누를 집어 들었다. 태섭의 손안에서 거품이 몽글몽글 생기고 그 거품을 우성의 얼굴에 묻혔다. 뺨에 묻은 거품이 뭐 그리 웃긴다고 깔깔 웃는지 해맑은 얼굴은 몇 년 전 고교생이던 얼굴과 다름 없어 보였다. 우성의 마음은 점점 수심이 차고 있는데 첫사랑은 늘 그 자리 그대로 지키고 있다. 우성은 스스로 호흡 조차 조절할 수 없는데. 억울한 마음에 분했다. 분풀이로 거품을 걷어내 태섭의 머리에 얹어 그대로 마구 헝클어트렸다.

태섭은 웃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순식간에 야차가 되어 우성에게 헤드락을 걸고 그대로 개수대 물을 틀어 고문했다. 우성은 태섭에게 타임을 외쳤지만 태섭은 들은 채도 안 하고 그대로 비누를 우성의 머리에 문지르며 거품을 내고 얼굴까지 손을 뻗어 빡빡 씻겼다. 투박한 손길에 우성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어푸어푸 소리 내며 온갖 구멍에 들어오는 물에 괴로워했다. 고문을 빙자한 샤워가 끝나고 고문 당하느라 지친 우성과 자신보다 큰 육체를 씻긴 노동을 마친 태섭은 바닥에 뻗었다. 승자 없는 싸움이었다. 태섭은 겨우 기운을 내 개수대에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았다. 비누로 감은 머리는 뻑뻑해서 곱슬머리가 더 푸들처럼 올라왔다. 태섭은 머리의 물기를 탈탈 털어내고 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며 바지를 벗었다. 우성은 태섭의 강아지 같은 머리를 보며 웃다가 눈앞에서 벌어진 탈의에 굳어 눈을 뗄 줄 몰랐다.

"말려두게 바지도 벗어."

"여기서?"

"? 올라가서 벗게? 굳이?"

"아, 아. 발로 밀지 마! 벗을 테니까!"

치한을 보듯 양팔로 가드하는 우성의 꼴에 짜증 난 태섭은 발로 우성의 엉덩이를 밀어댔다. 우성은 태섭의 발을 피해 엉금엉금 이동하며 바지를 사수하려다가 팬티 마저 벗어 드러난 태섭의 엉덩이를 보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 뭐 해. 내가 바지까지 벗겨줘야 돼?"

성큼성큼 걸어오는 태섭의 아래에 흔들거리는 기둥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우성은 속으로 절규하며 태섭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반쯤 울며 바지를 벗었다. 실랑이 끝에 벗는 우성을 보고 태섭은 뒤돌아 마저 갈아입을 팬티를 주웠고 우성은 숙인 태섭의 양쪽이 벌어지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살갗에 아래가 불룩 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섭의 밀크 초콜릿 같은 피부에도 화이트초콜릿인 부분이 있었다. 미국에 와서 대체 얼마나 개방적인 생활을 한 것인지 아찔해질 정도로 선명한 삼각형 화이트초콜릿이었다. 우성은 자연스레 삼각형 수영복을 입고 태닝 했을 태섭을 떠올렸다가 서버린 자신의 것을 부여잡고 허둥지둥 통이 널널한 바지를 찾아 주워 입었다. 그런 우성을 보며 태섭은 거봐 찝찝했지 하고 속 편한 소리를 해서 우성의 속을 더 뒤집어놨다. 사람 속도 모르고.

우성은 태섭에게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며 소리를 지르고 위로 뛰어 올라가 화장실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갔다. 쿵쿵 올라가는 우성을 올려다보며 쌀 뻔했나 오해한 태섭이었다. 우성은 태섭이 의아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자극적인 상상을 반찬 삼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서둘러 아랫도리 상황을 해결했다. 휴지로 뒤처리를 마치고 변기에 흘려보내며 찾아온 현타에 우성은 쓸어내릴 것도 없는 머리를 쓸어내렸다. 이대로 태섭과 오늘 밤 같이 잘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아무 일도 없어야만 했다. 오늘 밤은 특별한 날이니까. 우성은 정신 없이 올라오면서 언제 핸드폰을 챙겼는지 폴더를 열어 화면 속 시간을 확인 했다. 23 : 30,그리고 7월 30일. 태섭의 생일까지 30분 밖에 안 남았다. 생일인 사람에게 발기한 상황을 보여주면 무슨 기분일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 실수만은 피하고 싶었다.

우성은 정신 사나워 보이는 표지를 보고 시리즈 물인 액션 영화 테이프를 몇 개 챙겨 내려갔다. 내려가니 태섭이 버팔로 윙과 감자튀김을 차려두었다. 우성이 테이프를 재생 시키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태섭이 그 앞에 맥주를 꺼내두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영화를 즐겁게 감상했고 영화에서 사건이 진행될 때 우성이 일어났다.

"화장실 또 가?"

태섭은 영화를 보며 우성에게 물어보았고 우성은 태섭의 몽실몽실한 뒤통수를 보며 웃었다. 낮에 화장실 간다 온다며 봐두었던 빵 가게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애플파이가 있었다. 케이크면 좋았을 테지만 크림류는 흐물흐물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냉장고가 다행히 작동 중이어서 그 안에 있던 휘핑크림 캔을 꺼내왔다. 카운터 앞에 있던 초도 하나 챙기고 태섭이 볼 세라 차가 쾅 닫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숨겼다. 그렇게 은밀하게 조공해온 애플파이에 휘핑크림 캔을 흔들어 크림을 잔뜩 올렸다. 조촐한 케이크였지만 초까지 붙이고 나니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우성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태섭의 뒤로 다가가자 태섭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너 언제 이런걸..."

"어때? 감동 받았어?"

"내 생일 기억 했네?"

"너한테 관심 많으니까~"

우성은 고 2, 덥다 못해 뜨거웠던 계절에 첫 패배와 함께 첫사랑을 경험했다. 땀에 젖은 남자는 늘 주변에 차고 넘쳤는데 유독 하나가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신은 정말 잔인했다.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대가도 없이 빈 소원은 가혹했다. 이 땅을 떠나기 앞으로 몇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사랑이라니. 우성이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기 초 학생 정보란에 적을 법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안 것이라곤 겨우 태섭의 생년월일, 그리고 산왕 농구 부원들도 다 아는 농구 포지션 정도였다. 우성은 이름 세 글자도 누가 볼까 봐 종종 손바닥에 송태섭을 그리고 새기고 써보았다. 그렇게 마음을 마무리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나고 일 년이 다 되어갈 때 태섭의 생일이 가까워질수록 우성은 괴로워했다. 이 정도면 신의 저주나 다름 없다며 언제 이 경험은 완료가 될까 생각해보았지만 우성은 알 수가 없었다. 또 그렇게 한 해가 마무리 되고 그다음 해 여름에 태섭을 미국에서 만났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성은 기쁨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농구 경기 휘슬이 울리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우성은 태섭과의 포지션 싸움을 두고 압도적으로 이겨냈다. 하지만 태섭은 분한 표정 없이 그저 우성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신청했다. 대단하다고 인정 해주는 태섭의 모습은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어째서 태섭이 졌는데 왜 우성이 진 기분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란 죄로 을이라는 낙인에 찍힌 것 같이 숨이 옥죄였다. 우성은 대기실로 돌아가는 태섭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쳐다보다 고국의 말로 생일 축하해, 태섭아 축하를 전했다. 그를 들은 팀원이 무슨 말이야? 물었으나 우성은 고개를 저으며 알려주지 않았다. 태섭에 관한 거라면 누구에게도 알려주기 싫은, 그래봤자 참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 닿지도 못할 마음이었는데.

그 때의 여름을 회상하며 우성은 눈을 깜빡였다. 불 꺼진 방안 하얗게 빛을 뿜는 티비 앞에 따듯한 주황 불빛이 태섭과 우성의 얼굴을 감쌌다. 우성은 태섭에게 초를 끄라며 내밀었고 태섭이 후 부려던 찰나, 우성은 뒤로 확 뺐다. 태섭이 의아한 눈초리로 보자 우성이 소원을 빌어야 한다며 웃었고 태섭은 속으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길 빌며 초를 껐다. 우성은 초를 제거하며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지만 태섭은 비밀이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 우성은 바로 케이크를 던져버렸다.

"미친놈아!!!!!!!"

결국 매를 번 우성은 태섭이 바닥에 쏟을까 허둥대며 케이크를 잡고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신나게 맞았다. 우성은 뭐가 좋은지 그걸 다 받아내면서 아이 같이 웃었다. 그 얼굴에 태섭은 어쩔 수 없단 듯 한숨을 푹 쉬며 주먹을 내리고 파이를 크게 한 조각 잘라 우성의 입에 욱여넣었다.

"읍, 으으읍!!"

"맛있어? 맛있어 보이네~ 나도 맛 좀 볼까~"

우성의 입에 파이를 넣은 손을 안 빼고 파이를 조금 떼어 먹은 태섭은 맛있네 하며 우성에겐 왜 안 먹냐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우성은 생리현상으로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고 태섭은 우성이 울기 시작하자 손을 떼어주었다.

"송태섭!!! 완전 싸이코패스야!!!!!!"

"어, 넌 유아 퇴행."

"누구 때문에 운 건데!!"

태섭은 어깨를 으쓱이며 파이를 집어먹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우성은 남은 파이를 홀랑 제 입에 넣었다. 태섭은 생일 파이를 왜 네가 다 먹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막진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개수대로 가 얼굴에 묻은 생크림을 열심히 닦았다. 생크림은 엄청 기름지구나 생각 들 정도로 피부가 기름 지는 거 같았다. 티격태격 하는 동안에 음식이 다 식어버렸지만 버팔로 윙은 이곳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입맛에 맞았다. 영화는 어느 새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태섭은 아까 우성을 제압할 때 체력을 다 써버렸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말 없이 눈을 감고 조는 태섭의 얼굴은 아기나 다름이 없었다. 우성은 뒷정리는 날이 밝으면 하기로 하고 칫솔을 문 채로 태섭을 안아 들고 소파 베드로 옮겼다. 많이 피곤했는지 별로 안 마셨는데 태섭은 상당히 취해 뻗었다.

"태섭아, 취했어?"

우성이 말을 걸어도 태섭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들썩이는 배를 보며 깊이 잠들었구나 생각하다가 우성은 말려 올라간 옷 사이로 살짝 보이는 태섭의 배꼽을 보고 망설이다 옷을 좀 더 올렸다. 가슴까지 젖히니 피부보다 살짝 옅은 조그만 유두가 보였다. 우성은 입에서 칫솔을 꺼내고 태섭의 왼쪽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이렇게 포근한 마음을 가지게 할 일인가.

우성은 태섭의 가슴팍에 입술을 1초 가져다 대었다가 바로 떼었다. 태섭의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에 하얀 거품이 묻어났다. 우성은 그 거품을 손가락으로 슥 닦아내고 입을 마저 헹구어갔다. 우성은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태섭의 핸드폰 화면을 켰다. 이한나의 얼굴. 태섭은 어떤 점에 반해서 이 먼 거리를 견디고 사랑하는 걸까 궁금했다. 호기심이 우성의 마음을 좀 먹어서 그러면 안 되는걸 알면서도 우성은 태섭의 문자함이 보고 싶어졌다. 임시 저장함을 누르고 전체 선택. 삭제. 삭제만 누르면 끝날거 같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태섭에게 마음을 접을 수 없듯이. 우성은 이대로다 간 홧김에 실수를 저지를 거 같아 저장함을 나와 발신함을 눌러보았다. 태섭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알고 싶었다.

"이상하지, 나는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아는게 얼마 없거든 귓가에 속닥거렸다.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과 다를 바 없는 우성은 발신함을 훑어보았다가 스크롤을 내리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겨우 3통 정도 읽고 확 꺼버렸다. 속이 뒤틀리는 거 같은 기분이 낯설었다. 고작 몇 줄 안되는 글자로 우성의 마음은 비참해졌다. 그 짧은 말에 담긴 감정을 자기가 갖고 싶어서.  태섭은 항상 우성에게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기쁨도 되고 고통도 되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태섭의 핸드폰도 충전할까 싶었다가 태섭이 핸드폰을 보지 말았으면 하는 이기심이 머리를 지배했다. 작은 방에서 멀어봤자 얼마나 멀겠냐 싶겠냐마는 우성은 손에 든 태섭의 핸드폰을 멀찍이 두었다.

"아... 목말라 죽겠다."

입을 벌리고 자서 모래를 삼킨 것처럼 바짝 말라붙은 목을 붙잡고 태섭은 일어났다. 허리춤에 매달려 자는 우성도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태섭은 우성의 입을 콕 집어 닫아주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태섭이 건드리자 우성은 입을 오물거리며 꿍얼꿍얼 거리다 뒤돌아 누웠다. 우성이 깨지 않게 조용히 쿡쿡 웃다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요의가 들어 위로 올라갔다. 태섭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허전함에 깬 우성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가 계단을 쿵쿵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손 들고 일어나."

눈이 벌겋게 충혈된 남자가 총구를 우성에게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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