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태섭] Marry

[우성태섭] Marry 4

와따 by 와따

우성태섭 미국 좀아포 




 

화들짝 놀란 우성은 총구를 주시하며 두손을 들어 보였다. 어디서 쫓아온 거지? 잠이 확 달아나고 머릿속에 생각이 휘몰아쳤다.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던 노숙자는 우성에게 턱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우성은 순순히 벽에 바짝 붙으며 아직 총성이 들리지 않았으니 태섭에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침착하게 생각했다. 노숙자는 배가 상당히 고팠는지 벽에 밀착한 우성을 겨냥한 채 식탁에 미처 치우지 못한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담았다. 노숙자가 움직일 때마다 걸친 누더기에서 악취가 뿜어져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노숙자는 단 몇 분 만에 음식을 다 먹어 치우고 부족했는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음식을 보고 눈을 희번뜩 뜨며 차가워서 맛 없을텐데도 게걸스럽게 입에 욱여넣었다. 어느 새 음식에 한눈팔려 우성을 겨냥하던 총구도 내리고 양손에 양념을 묻혀가며 일주일은 굶은 들개처럼 먹어 치웠다. 

우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냉장고 안에 머리를 처박고 폭식하는 노숙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질색 했다. 그러자 노숙자가 멈칫, 냉장고 문을 탁 닫고 우성을 쳐다보았다. 우성은 아차 하며 지뢰 밟았다 어떡하지? 고민하다 눈동자를 굴려 표정을 살피려 했다. 노숙자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마저도 수염과 양손에 미트볼 소스를 묻힌 상태라 웃긴 꼴이었지만 우성은 노숙자의 손 아래에서 들린 안전장치 해제 소리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어떡하지, 이 상황을. 위에 있는 태섭이도 어떡해야하지?


“저리 안 꺼져?! 당신 누구야!!”


볼일을 마친 태섭이 내려오다 들린 낯선 인기척에 계단에서 뛰어내려 간발의 차로 노숙자의 등을 후려쳤다. 지하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른 태섭은 쓰러진 노숙자가 놓쳐버린 총을 다시 쥐려는 것을 보고 빠르게 발로 걷어찼다. 노숙자는 다시 총을 쥐긴 어렵겠다고 판단했는지 쓰러진 채로 태섭의 하체를 훑더니 벌떡 일어나 태섭을 덮쳤다. 태섭은 전신에 힘을 줘 넘어가지 않도록 버텼지만 죽기 살기로 덤비는 노숙자의 주먹에 그만 얼굴을 맞고 말았다.


뻐억- 골이 울리는 느낌에 태섭의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태섭은 바로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노숙자의 주먹이 제법 무거웠다. 은신처를 탐내는 노숙자는 비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 태섭을 처리하려 했다. 죽일 기세로 폭력을 휘두르는 침입자를 보던 우성은 어찌 해야할 줄 몰랐다. 태섭은 멱살을 노숙자에게 잡혀 계속 맞으면서 와중에 입모양으로 우성에게 끼어들지마 라고 했다. 우성은 그 입모양을 읽고 이성이 회까닥 돌아 옆에 있던 것이 뭔지도 모르고 꽉 잡았다. 우성의 허리 근육이 돌아가며 왼쪽으로 양팔이 포물선을 그리며 강하게 아래를 내리찍었다.


골프는 한 번도 쳐보지 않았지만 골프공에 비해 몇 배는 되는 사이즈다 보니 손쉽게 적중했다. 근육을 틀어 있는 힘껏 스윙을 날리자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태섭을 내려다보던 노숙자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겨울에 한오라기 걸치지 않고 밖으로 나간 것처럼 덜덜 떨면서, 아니 발작인가. 우성은 부르르 떠는 몸을, 엇나간 골프공을 구멍으로 조심스레 조준하듯 골프채 헤드로 툭 쳤다. 노숙자는 점점 더 크게 떨고 있었다. 골프채 머리만 보던 노숙자의 눈이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올라갔을 때 우성은 눈동자 사이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이토록 분노가 조절되지 않은 순간이 있었던가 우성은 자신의 내면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 성찰도 옆에 주저앉아 멍든 얼굴을 문지르며 아파하는 태섭을 보고 금방 사그라졌다. 태섭이 연관되어 있는 것들은 다 뭐 하나 우성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여버렸다. 지금도 멈추질 못하고 있었다.  


"정우성!! 그만해!"


뭐라 윙윙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성은 핸드폰 진동인가 싶었다. 진동이 울릴 수가 없는데? 태섭이 말을 건 거였구나 허리춤에 매달린 무게가 느껴지고나서 겨우 상황을 인지했다. 우성은 골프채를 거꾸로 들어 더럽혀진 헤드를 보다가 그대로 던져버렸다. 방이 좁은 탓에 골프채는 그대로 냉장고에 부딪혔고 낡은 고물이었던지라 그 충격으로 냉장고 문이 열리며 조용한 방 안에 냉각 소리만이 들렸다. 

우성은 애써 진정하려고 두 손으로 눈을 짓누르고 숨도 쉬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손 틈새로 뺨이 적셔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의 태섭이 그랬듯 우성 역시. 아니, 태섭은 좀비를 처리한 것이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우성 뿐. 우성은 사람으로서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짓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사람을 죽일 일은 없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마저도 이젠 사치일 것이라는 절망이 들었다. 


태섭은 비탄에 빠진 우성을 황망히 보다가 시선을 돌려 눈 뜬 채 죽은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우성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제 태섭이 화장실에서 죄책감을 토해낼 때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곁에 있던 우성을 떠올리며, 태섭은 몇 발자국 앞에 떨어져 있는 아까 발로 찼던 총을 주워들었다. 총은 실제로 만져본 적이 오늘이 처음이라서 잘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손에 느껴지는 무게가, 탄창이 가벼웠다. 태섭은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노숙자는 우성에게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총을 겨눴던 것이었다. 노숙자는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저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까지 생각했다가 철회했다. 우성에게 탄창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살인을 없던 일로 만들 순 없다. 사실을 말해봤자 우성만 더 괴로울뿐. 우성과 태섭 둘의 위치가 반대였어도 태섭도 결국 저 사람을 해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써 생각했다. 

  

"우성아. 일단 씻자."


억지로 손을 잡아 당겨 개수대로 이끌고  비누를 건넸다. 우성은 비누를 받아들이고 멍하니 옷에 튄 핏자국을 보다가 옷을 하나씩 벗어서 개수대 안에 두었다. 태섭은 소파 베드에서 이불을 가져와 시체를 가리고 점점 고이는 피에 짐이 젖을까 봐 소파 베드로 옮겼다. 우성이 씻는 동안 은신처에서 떠날 채비를 했다. 일단 태섭은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두고 가기로 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는 동안에 상할 수도 있으니 통조림 같은 장기 보관이 가능한 것들만 가방에 쑤셔 넣었다. 빠르게 짐 정리를 얼추 마치고 태섭은 지갑에서 한나와 맞춘 커플링을 꺼내 들었다. 커플링을 집은 손에 수전증이 도졌다. 반지를 놓칠까 봐 태섭은 심호흡을 내쉬며 서둘러 왼손 약지로 밀어넣었다. 


그간 하루도 농구를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어서 주로 가지고만 다녔던 반지를 약지에 끼며 이제야 수긍했다. 이제는 정말로 그간의 삶에 안녕이라 해야 했다. 이 세상에서 태섭을 태섭으로 유지할 수 있게 이 반지만이 도와줄 것이다.

약지에 자리 잡은 차가운 금속 느낌이 시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아무리 소중해서 아꼈다 해도 진작에 끼고 다녔어야 했다고 후회하면서. 그런 태섭을 우성은 물기를 닦을 생각도 안 하고 마냥 우두커니 서서 바라봤다. 침통한 표정으로 반지만 쳐다보고 있던 태섭이 마음을 겨우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물소리가 꺼진 것을 눈치챌 때까지 그냥 그렇게.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뒤돌아본 태섭의 말에 우성은 뜬금없이 바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섭과 함께 들었던 라디오가 생각나 우성은 대답 한 번 끄덕이곤 태섭이 챙긴 짐을 지고 올라갔다. 태섭은 계단 위로 사라진 우성을 확인하고 총을 소파 베드 아래에 숨겨두었다. 우성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지 한 번에 옮기기 힘든 짐을 양팔에 끼고 순식간에 차로 옮겼다. 

태섭은 저 노숙자를 기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길 간절히 바라며 차갑게 식은 시체를 두고 은신처에서 벗어났다. 아무도 저 죽음에 슬픔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감정들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우성을 데리고서.

바다로 향하는 길에 도서관을 지나쳤다. 제발 없기를 바랬건만 하필이면 이때 태섭이 치고 갔던 좀비가 넝마된 하반신으로 도로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2차선 도로, 7미터도 되지 않을 그 거리 안에 갇혀서 가죽이 아스팔트에 갈리도록 느릿느릿 기어갔다. 그 광경에 태섭은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우성의 상태가 훨씬 좋지 않아 티 내지 않았다. 좀비를 지나치고 지도 한 번 쳐다봤다가, 도로 표지판을 한 번 쳐다봤다가, 처음 가는 길이라 헤매 이동하는데 한 시간 좀 넘게 걸렸다. 


우성은 그 한 시간 동안 미동도 없이 멍하니 창문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중인걸까, 생각에 빠지면 안 좋을텐데 걱정이 들었지만 뭐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위로는 커녕 더 최악 같았다. 그 상황에서는 죽이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태섭이 맞지만 않았어도 우성이 그렇게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다.  태섭은 도망치던 첫 날 우성이 엉성한 폼으로 골프채를 휘두르며 사람 칠 일은 없겠지? 하는 물음에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될 일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그 때가 빨리 온 게 문제였다. 살기 위해 저지른 살인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태섭은 맨해튼 해수욕장에 어서 오세요! 해맑게 맞이하는 마스코트 간판을 보고 도착 했다고 우성에게 말했다. 우성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성이 한 손으로 다른 손가락 거스러미를 뜯고 있었다. 태섭은 뒷좌석으로 몸을 뻗어 생수병을 가져와 우성에게 목 좀 축이라며 건네주었다. 우성은 태섭에게 받기만 하고 뚜껑을 열진 않았다. 태섭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차에서 내리자고 한 뒤 맨해튼 해수욕장이라고 써진 표지판을 지나쳤다. 처음 와본 맨해튼 해수욕장의 인상은 쓸쓸했다. 한여름의 바닷가가 이렇게 썰렁할 수 있다니. 여기 있던 사람들은 다 무사히 도망쳤을지 상상을 하다가 차에서 내린 우성에게 아직 이른 시간이니 근처를 살펴보자고 했다.


"이런데 농구 코트가 있네?"

"농구공이다... 농구 하다 도망간 사람도 있을까?"

"두고 간 거 보니까 그런가 봐.


관리를 안 한 지 오래되어 보이긴 했지만 며칠 만에 보는 농구 코트가 반가웠던 태섭은 농구공을 향해 걸어갔다. 태섭의 뒤를 쫓아 터덜터덜 걸어온 우성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갑자기 얼굴로 날아온 공을 민첩하게 받아냈다. 패스를 보낸 태섭은 우성의 앞으로 다가와 림을 등지고 양발 사이를 벌려 우성에게 1 on 1을 걸었다. 우성은 피식 웃으며 소매를 어깨까지 말고 공을 바닥에 튕겼다. 몇 번 튕기는 동안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 채 신경전을 펼치다 머리 위로 낮게 나는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동시에 우성이 전방에 튀어 나갔다. 곧바로 우성에게 따라붙은 태섭이 움직임을 저지하고 그에 우성은 공을 뺏기지 않도록 위로 한 번 들어 올리곤 백스텝으로 돌아갔다. 

며칠만에 잡는 농구공이 이런 감촉이었던가 생각하며 우성은 서서히 게임에 집중하며 시체에 대한 생각은 떨쳐냈다. 태섭이 우성을 걱정하는 동안 우성도 나름대로 페이스를 조절하려고 했다. 우성은 귓가에 남아있는 두개골 깨지는 소리를 잊기 위해 태섭을 제치고 골대가 흔들릴 정도로 쎄게 덩크를 꽂았다. 오래된 철제가 버둥 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성의 힘을 겨우 받아냈다. 

태섭은 우성이 덩크를 날리고 나서 그 얼굴을 지그시 보다가 상태가 조금 돌아온 것을 눈치챘다. 그러고는 이대로 점수를 내줄 순 없지 하고 공을 스틸해 블록을 걸어오는 우성에게 페이크로 속여 넘기고 핑거롤을 올렸다. 회전이 걸린 레이업슛이 블록을 수월하게 피하고 림에 보기 좋게 쏙 들어갔다. 이로써 점수는 1 : 1, 누가 이겨도 의미 없는 게임이었지만 둘은 진지하게 임했다.

스피드가 더 빠른 태섭이 다시 한번 재빠르게 림으로 뛰어가려 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좀비가 침을 질질 흘리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좀비에 당황한 두 사람은 벙쪄있다가 농구공을 냅다 좀비 안면으로 던져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간 좀비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벌레 같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태섭과 우성은 차로 전속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고 널부러져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경기도 그렇고 우리는 좀처럼 승부 낼 수가 없네."

"이 판국에도 승부 내고 싶어?"

"당연히 항상 이기고 싶지! 근데 계속 승부 안 나면 평생 안 끝나나?"


우성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히고 좀비 근처에 떨어진 농구공을 쳐다보았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었다. 그러다 한숨을 크게 푹 쉬더니  평생 무승부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성의 웃음소리가 차 안을 뒤덮었다. 허파에 바람 빠지듯 크게 웃는 우성은 고장난거 같았다. 


"이제 슬슬 수족관 앞에 가서 찾아볼까? 나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지도 몰라, 수족관 앞으로 가는 건 위험할 거 같고 그 앞 골목에서 기다려보자."


수족관 입구가 보이는 골목에 조심스레 차를 세우고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핸드폰을 보니 8시가 거의 다 되어갔다. 그로부터 몇 분 정도 지났을 때 수족관 앞에 있는 모든 차량 창문을 한 번 씩 두들기는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겁도 없이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단신으로 하나하나 확인을 해보고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것을 보곤 되돌아갔다. 노인이 차도를 건너서 돌아가려고 할 때 태섭은 차에서 뛰쳐나와 노인을 불러세웠다.


"저기요, 선생님!!"


노인은 누군가가 진짜 올 거라곤 생각을 안 했는지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떴다. 다가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왔다고 하자 우성도 차에서 내려 노인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였다. 노인은 다가오는 우성을 쳐다보며 태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둘을 환영한다며 집으로 안내 했다. 태섭은 우성과 노인을 데리고 차로 돌아와 노인이 알려주는 곳으로 주행했다. 수족관에서 8분 거리인 마당이 딸린 이층집이었다. 

노인은 집에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멀리 나갈 수도 없어서 이대로 굶어야 하나 난감했다며 두 사람이 와줘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모르겠다고, 우성과 태섭이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빠르게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 인사와 함께 말을 마쳤다. 태섭은 그런 노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며 속으로 불교인 건 말하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당 안쪽에 차를 대고 현관문을 열어준 노인의 뒤를 따라 차에 있던 물품들을 다 옮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세월이 쌓인 집인지 현관 옆에 걸린 사진들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여기서 오래 사셨나 봐요."

"음? 아아, 아내하고 젊었을 때부터 이 동네로 이사 오고 계속 살았지."

"아내 분은..."

"아내는... 이틀 전에 급하게 좀비를 피하다가 크게 넘어진 탓에 거동이 힘들어서 안방에서만 지낸다네. 필요한 건 내가 다 갖다주고 있고."


얼마나 심하게 다친 것인지 노인의 얼굴에 서린 우울함에 태섭은 더 묻지 않았다. 우성은 별로 둘의 이야기에 큰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성큼 집안에 들어간 우성은 노인이 먼저 권하기도 전에 식품을 식탁에 꺼내 차리려는 기세였다.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기겁한 태섭이 제지하려 했으나 노인은 마침 배가 고팠다며 우성을 도와 식탁에 식사를 차렸다. 태섭도 잇따라 늦은 아침 식사를 함께 차리고 우성과 태섭이 노인을 마주 보고 앉았다. 노인은 땅콩버터가 발라진 빵을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와 곁들여 먹고는 두 사람에게 간단한 소개를 부탁했다. 태섭과 우성은 뭐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을 하느라 뜸 들였고 노인은 씩 웃으며 먼저 예시로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이런, 얘기 꺼낸 사람이 먼저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내 이름은 조지 포드, 안방에 있는 아내는 레이나 포드라고 하네. 아내와 나는 함께 교회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었네. 목사거든.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어려운 사람들과 서로를 도우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는 중이지."


조지는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우성을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 다음 차례는 우성의 소개였다.


"우성. 농구 선수예요. 이쪽 친구하고요."


매우 짤막한 소개에 태섭은 그게 다냐며 우성을 쳐다보았다. 우성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태섭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태섭은 집주인에게 첫인상을 싸가지 없게 보이고 싶진 않아서 우성의 몫까지 성실하게 답변했다.


"저는 태섭 송이고 송이라 부르시는 게 편할 거예요. 저희는 한국에서 왔고 고등학생 때부터 라고 해야 하나... 그때부터 친구였나? 조용히 해, 나 말하잖아. 그때 경기 붙어서 알게 되긴 했는데 유학까지 같이 미국에 올 줄은 몰랐어요. 원래 얼마 전 대학 리그 경기 때문에 둘 다 LA에 왔다가 그 경기 중에 도망치게 됐어요."

"오, 대단한 인연이구먼."

"그런가요? 어찌 보면 나름 중요한 순간마다 옆에 있었던 거 같긴 하네요."

"이런 인연도 분명 지금 이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라고 내려주신 하나님의 인도일지도 모르네."


말마다 붙는 하나님 단어에 우성은 껄끄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태섭은 우성의 삐딱한 면모가 신경 쓰여 우성의 발을 톡 차며 주의했다. 우성은 속으로 마음이 약해서 신에게 매달리는 것 아니겠냐며 노인의 말을 옆에 있는 태섭 때문에 흘려넘겼다. 그마저도 이어지는 노인의 찬양에 괜히 반박해지고 싶어지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고 도로 욱여넣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도움은 커녕 시련만 주는게 균형이 말도 안됐다. 태섭과 자신 앞으로 죽음을 밀어넣는 것이 맞는 짓이라 생각하나. 태섭과 함께 경기장에서 달아날 수 있던 것도 누군가의 인도 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성은 노인을 째려보았다. 


태섭은 얼른 불편한 식사 자리를 파하고자 집에서 머무는 동안 혹시 지킬 사항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노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세탁기가 고물이라 돌릴 때 큰 소리가 나서 웬만한 세탁물들은 손 빨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2층 작은 방에서 건조를 하고 모든 쓰레기는 현관에 두었다가 일주일에 한 번 배출하는 것. 그 외에는 노부부의 사생활을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아내가 통증으로 인해 잠을 쉽게 자지 못해 예민한 상태라 안방 복도 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화를 마치고 노인은 자신이 식탁을 정리하겠다며 두 사람에게 2층 큰 방으로 가서 짐을 마저 풀고 오늘은 오느라 피곤 했을 테니 이만 쉬고 점심이나 저녁은 둘이서 먹으라고 했다. 그러고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노인들 뿐이라 한밤중에 움직이는 것이 더 눈에 뜨일 것이라며, 혹시 나갈 일이 있다면 새벽에 움직이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해수욕장 인근 지도를 꺼내주었다. 태섭은 노인이 준 지도를 받고 도로 위치를 대강 훑어본 뒤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태섭은 우성의 팔을 붙잡아 2층으로 이동했고 노인은 그 모습을 살피다가 큰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자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 문이 닫히며 또 그 안에서 무언가 철컹 소리를 냈다.


태섭과 우성은 2층 방에 들어가 큰 창문 밖으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태섭은 한참 바다를 쳐다보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뭐 하는가 쳐다보았던 우성은 태섭이 치는 자판과 화면에 떠오른 전송도 되지 못할 문자들로 꽉 채워진 임시 저장함을 보고 애꿎은 커튼을 확 쳐 창문을 가려버렸다. 태섭은 한나에게 언젠가 함께 미국 바다를 보고 싶었다고 쓴 문자를 그대로 전송 했다가 전송 실패 문구가 뜬 것을 보고 핸드폰을 덮어버렸다. 이윽고 침대에 벌렁 누워 한 팔로 눈을 가리고 낮잠을 청하려 했다.


"바다 예쁘다. 한나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우성은 대답하지 않고 혹시 창을 통해 누군가 여기 사람이 있단 것을 알 수도 있으니 더 두꺼운 커튼이 있는 지 찾아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간 우성은 안방 근처로 얼씬거리지 말라던 노인의 경고를 떠올리고 거실에서 노인을 호출 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들려오지 않아서 노인이라 귀가 어두운 건가 싶어 어쩔 수 없이 안방 복도로 향했다. 그러자 안방 문 안에서 잠금장치 소리가 들리고 연달아 다른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노인은 함께 식사하며 대화 할 때와는 달리 날이 선 모습이었다. 잔뜩 경계하는 모습에 멈칫한 우성은 뒤로 돌아가 멀찍이 섰다. 우성의 발치를 쳐다보던 노인은 그제야 우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큰 방의 커튼이 얇아서 밖에서 다 보일 거라는 우성의 말에 2층 작은 방에 다른 커튼이 있을 거라고, 커튼 위에 하나 더 달면 밖에서 안 보인다며 노인은 부랴부랴 우성을 올려보내려 했다. 


우성은 자신을 얼른 치워버리려는 행동에 기분이 팍 나빠져 고개만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곁눈질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우성이 계단 위에 다 올라갈 때까지 노인은 우성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성은 그 눈길에 기분이 너무 더러워져서 거칠게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우성이 2층에 도착하자 노인은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나고 다시 한번 철컥. 문 안에 또 다른 잠금장치 소리가 나는 점이 어쩐지 수상했다. 방 안에 숨기는 것이라도 있나? 숨길 정도로 소중한 것인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집으로 끌어들인다? 켕기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태섭아, 자?"

"아니, 아직."

"이상한 점을 느꼈는데. 방문 잠그고 그 안에서 또 잠그는 소리가 들리면 뭐 일 거 같아?"

"금고?"

"금고는 아닌데 비슷한 소리는?"

"문 안에 문...? 방에는 아내 분 계시다 했잖아. 이 집에서 동물은 안 키우시는 거 같던데."


태섭은 아까 현관에서 보았던 액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진은 오로지 노인과 그의 아내 둘의 모습 뿐, 자식도 동물도 없이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온 모습 뿐이었다. 그래서 우성의 말을 듣고 기묘한 기분이 마음에 서서히 퍼져갔다. 방안에 아내만 있을 터인데 철저하게 격리를 한다?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확인하는 게 좋겠지?"

"혹시 모르니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이 집에서 나오게끔 유도할 수 있을까?"

"아까 차 주차하고 나서 보니까 조그만 창고 옆에 오래된 바이크 있던데 나이 드셔서 운전 못 하신 거 아닌가 싶다. 고칠 수 있는지 봐달라고 하고 유도 해보자."

태섭은 우성과 대화하면서 제대로 자지 못해 쌓인 피로가 서서히 풀린 듯했다. 조금씩 닫히는 눈꺼풀을 보고 우성은 일단 쉬고 나서 찾아보자며 잠에 들랑 말랑 하는 태섭 옆에 누웠다. 많이 피곤했는지 우성이 옆으로 돌아 누워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우성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태섭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새 태섭의 입술에서 얕은 숨이 나오고 가슴은 느리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태섭의 숨소리를 듣다가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드려고 우성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니 태섭은 잠든 직후 그대로 미동도 없이 정자세로 누워있었다. 침대 옆 탁상에 둔 핸드폰을 열어보자 이제 한 시간이 지났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우성은 눈만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잠이 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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