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태섭] Marry 6
우성태섭 좀비 아포칼
어느 덧 노부부와의 기묘한 생활은 한 달 차에 접어들었다.
우성과 태섭은 그 짧은 한 달 동안 3명을 죽이고 바다에 던지고 왔다.
처음은 새벽에 부엌을 침입해 식재료를 털어가려던 중년 남성을 발견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그를 우성이 야구 배트로 머리만 집요히 내리쳐 죽였다. 고함을 듣고 놀란 태섭이 뛰쳐 내려갔을 땐 이미 상황은 종료였다. 노인과 우성이 다리와 팔을 붙들고 포대에 실었다. 포대 끝자락에 고인 피가 주륵 흘러 바닥에 혈흔이 주욱 길게 늘어졌다. 태섭은 둘을 도우려 현관으로 가다 머리 터진 시체의 삐죽 튀어나온 눈알과 마주치고는 다가가지 못했다. 우성은 그런 태섭에게 잠이나 더 자고 내려오라며 시체 머리에 포대를 감아 태섭의 시야에서 차단 시켰다.
바이크에 시체를 매달고 바다를 향해 멀어지는 우성의 뒷모습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노인은 현관문을 굳게 닫고 태섭의 옆을 스치며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더니 안방으로 사라졌다. 태섭은 2층에 올라가서 창에 쳤던 커튼을 살짝 들춰 파도치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한나야, 나는 어떡해야 할까. 나중에 돌아가면 너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크 배기음이 울렸다. 우성을 기다리던 태섭은 계단이 삐걱거릴 정도로 쿵쿵 내려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피로 적셔진 흰 티가 보였다. 우성은 피 묻은 손을 쓱쓱 옷에 문지르고 있었다. 우성의 얼굴을 보자 피 묻은 뺨도 뺨이지만 붉게 젖은 눈가가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안타까운 기분에 사로잡혀 태섭은 저도 모르게 우성의 눈물 자국을 매만지려 손을 뻗었다가 놀란 우성이 그를 피했다. 어색한 공기가 둘을 휘감고 숨소리만이 무겁게 들렸다. 우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피 묻을까 봐 짧은 변명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우성이 지나간 자리에 피냄새가 남았다.
태섭은 2층에서 깨끗한 어두운 색상의 옷을 집어 들어 다 씻고 나온 우성이 입을 수 있도록 욕실 앞에 두었다. 밝은 옷은 안 입는 것이 심신에 이로울 거 같아서였다. 우성이 샤워하는 동안 태섭은 생각을 정리하고 결심했다. 한나나 가족,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해도 우성만 고생 시킬 수는 없었다. 다음이 온다면 그땐 태섭이 먼저 나서야 했다.
씻고 태섭이 준비해준 옷을 입은 우성은 태섭의 어깨를 톡 치며 일부러 웃어 보였다. 아무리 안방에서 집주인이 안 나와도 집안을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어려웠는데 마침 준비해줘서 고맙다며. 입은 잘도 말하면서 눈은 마주하지 않는 우성이었다. 우성은 태섭이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느껴 잠도 자지 못하면서 부러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 척을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또 마당에 침입자가 들어왔었다. 이번엔 바이크를 훔치려고 한 건지 끼릭 끼릭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서 태섭은 골프채를 잡고 튀어 나갔다. 침을 꿀꺽 삼키고 만반에 준비를 갖춘 태섭은 도둑의 몰골을 보고 전의 상실 해버렸다. 태섭의 동생만 해 보이는 청소년 둘이 태섭을 보고 굳었다. 형제인지 친구인지 모를 둘, 그중에 하나는 시동을 걸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다른 아이가 망을 보고 있었다.
태섭은 노인이 바이크 수리를 마치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큰 차를 끄는 건 너무 많은 이목을 끄니 바이크로 이동해야 더 안전하다는 말을. 그 말대로 바이크를 지켜야 하는데 저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태섭은 답을 낼 수 없었다.
태섭이 멍청히 서서 망설이자 우성이 어느 사이에 다가와 옆에 서 있었다. 주변을 망보던 소년이 우성의 등장에 적잖게 당황하고 시동을 걸던 소년에게 서두르라고 윽박질렀다. 마침 시동이 걸리며 요란한 소리가 나자 자신이 막겠다며 그대로 달리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신호로 우성은 투포환 마냥 자리에서 튕겨 나가 소년에게 뛰어들었다. 우성의 발에 차여 뒤로 나동그라진 소년은 호기롭게 외친 것과 달리 그대로 쓰러져 아무 반항도 못하고 겁먹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바이크를 몰던 소년도 한순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 핸들에서 손을 떼고 덜덜 떨었다. 우성은 넘어진 소년이 엉금엉금 기어와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을 벌레 보듯 흘깃 쳐다보더니 그 손을 짓밟았다.
우성의 손아귀에 소년의 얼굴이 전부 가려졌다. 바이크에 올라탔던 소년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고 바닥으로 패대기 친 우성은 다리를 콱 밟고 분질러버렸다. 태섭은 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에 고막이 찢어질 거 같았다. 정신이 마모되는 충격에 아찔해졌다. 태섭은 우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차마 지켜보기가 어려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겁에 질린 소년이 자신에게 덜덜 떨며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우성은 눈동자를 데굴 굴려 태섭을 흘긋 보고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우는 소년의 배를 걷어차버렸다. 그 옆에 나뒹굴던 소년의 멱살을 잡아 안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아직 싸움이 익숙하지 않아 매서운 타격음과 달리 우성의 손에도 생채기가 났다. 우성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요히 주먹을 휘두르다가 간신히 서 있는 태섭에게 손짓하며 들어가라 했다. 태섭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괴로운 신음을 내다가 골프채를 손등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쥔 채 소년의 앞에 저벅저벅 걸어갔다.
소년은 입술 사이로 피를 질질 흘리며 알아 듣기 힘든 발음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무릎을 꿇어보려 시도하며 태섭에게 양손을 싹싹 빌며 빌었다. 태섭은 이를 악물고 골프채를 들어 소년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 대만으로 기절한 소년을 보고 태섭은 너무 괴로웠지만 변해버린 우성의 모습이 더 고통스러웠다. 다른 소년은 기절한 소년이 죽은 줄 알았는지 울부짖었다. 주먹에 피를 뚝뚝 흘리던 우성이 잠깐 태섭 쪽을 본 틈에 허둥지둥 소년이 도망쳤다. 우성이 그 뒤를 쫓으려 하자 태섭은 저 정도면 돌아올 생각도 못 할 거라며 그냥 보내주자 했으나 우성은 야구 배트를 고쳐 쥐었다.
"태섭아, 난 지키려는 거야."
그 말에 태섭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태섭을 쳐다보지도 않고 마당을 나선 우성이 얼마 가지 않아 근처에서 절규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한참 뒤에 나와서 포대를 펼쳤다. 기절한 소년을 옮기고 나서 우성이 돌아왔다. 우성은 태섭에게서 골프채를 뺏어 들어 마당 아무 데나 던져버리고 피 묻은 야구 배트로 의식 없는 소년의 머리를 박살 냈다.
쨍강. 머리통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온 것을 보고 야구 배트를 집어 던진 우성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당에 남은 노인과 태섭은 포대로 시체를 잘 감싸다가 장갑을 낀 노인이 태섭에게 수건을 건네면서 적막이 깨졌다. 우성에게도 건네지 않은 수건을 왜 하는 의문에 노인은 대답했다. 태섭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른 수건을 축축하게 적신 태섭을 빤히 보던 노인은 친구와는 달리 아직 마음이 남아 있어서 괴로운 거라며 그래도 그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들을 말인가 싶어 얼굴을 닦던 태섭은 노인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노인은 사람을 죽이는데 동조한 목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자신은 지옥에 가더라도 태섭은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태섭은 자신이 사람을 안 죽여서요? 라고 되물었다.
노인은 우성이나 자신은 이 지옥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태섭은 영영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다는 답을 꺼냈다. 노인과 태섭의 대화를 나누던 중 다시 나와서 집 밖에 있던 시체를 회수한 우성이 다리를 잡고 질질 끌어와 마당에 내려놓았다. 노인이 새 포대를 꺼내오려 하자 우성은 밧줄은 없냐고 물었다. 창고에서 밧줄을 찾아온 노인이 내밀자 그것을 시체의 발목에 묶어달라고 했다. 노인은 대꾸 없이 고분고분하게 우성의 요청대로 발목에 밧줄을 단단히 묶어 줄을 내밀었고 우성은 그것을 바이크에 고정했다.
"핏자국으로 도로까지 표시 해두면 아무도 침입할 엄두도 못 내겠지."
노인은 그 말에 수긍했는지 별 다른 말 없이 다른 시체가 담긴 포대도 마저 바이크에 묶었다. 태섭만이 유일하게 수긍하지 못하고 신음을 앓았다. 우성은 짐을 가득 매달고 바다로 질주했다.
태섭은 들어가자는 노인의 말에 잠깐 밖에 있겠다며 부드럽게 거절했고 노인은 두 번 권유하진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태섭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름의 끝자락에 걸쳐 있어서 아직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태섭의 뒷덜미에 내리 쬐는 햇빛이 따끔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피부가 따갑지 않아졌을 때 우성이 돌아왔다. 무엇을 하다 돌아온 건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는 것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태섭의 앞에 우두커니 선 우성을 올려다보니 검은색 반팔은 핏자국 하나 없어 보였다. 눈가도 더 이상 붉게 물들어 있지 않았다. 태섭은 속에 울컥하고 넘어오려는 것을 겨우 꿀꺽 삼켰다. 우성도 이제 울지 않는데 태섭이 염치 없이 울어선 안될 일이었다.
살인은 지긋지긋하다.
여름은 끝나고 가을이다. 주변에 살아남은 사람은 이 집 구성원 만이다.
가끔 들리던 총성 소리도 이제 더는 들리지 않아 총알이 떨어진 건지 아님 아무도 남지 않은 건지 궁금했다가도 이내 그 궁금증도 증발 되어 사라졌다. 태섭은 긴 팔을 꺼내 입고 마당으로 나와 차량에 얼마 남지 않은 식품을 마저 다 안으로 옮기다 오래된 혈흔 자국을 쳐다보았다. 우성의 말대로 저 핏자국이 경고문이 되어 그 일이 일어난 후 침입자는 커녕, 얼씬 거리는 사람 조차 없었다.
태섭은 우성에게 이제 식품이 떨어져서 구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며 안방에서 나온 노인에게 식품을 구하러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노인은 그런 태섭을 빤히 보다가 어디가? 되물었고 태섭은 노인이 기억을 못하던 말던 개의치 않고 다시 말한 뒤 식탁에 메모도 따로 남겼다. 우성은 먼저 밖에서 바이크에 탑승한 채로 태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치매 같지?"
"그런 거 같은데."
이웃집에서 훔쳐 온 바이크를 타고 우성이 선두로 질주했다.
우성은 어느 순간 정신이 팍 나가버린 노인을 떠올리며 지나친 외로움을 못 견디고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방에서 잘 나오지 않던 노인이 언젠가부터 식사도 거를 정도로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안방 앞에서 노인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안에서 무언가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문을 쾅 열고 노인이 메스를 두 사람에게 겨냥했다.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 누구냐며 소리 지르는 노인의 눈빛이 낯선 이였다.
우성은 혹시라도 메스가 태섭을 스칠까 봐 태섭을 등 뒤로 밀며 노인을 발로 차려 했지만 태섭이 우성의 팔을 잡아당겨 두 사람의 간격을 벌렸다. 태섭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가드한 우성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노인은 느릿하게 한 발자국 씩 걸음을 떼었다. 그러다 문밖으로 완전히 다 나왔을 때 맥 없이 메스를 놓쳤다.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둘을 지나쳐 떨어진 메스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입을 떠억 벌린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제정신을 차렸는지 한동안 별말 없이 둘을 응시하다가 쾅 문을 닫고 그 안에 웅크렸다. 먼저 발걸음을 뗀 것은 태섭이었다. 부엌에서 무언가 뒤지는 소리가 나더니 간단한 먹을거리를 안방 앞에 둔 태섭은 조심스레 노크했다.
"식사 해야 지킬 힘도 생기는 거예요."
그 뒤로 노인의 정신을 나날이 오락가락해졌다. 하루에 몇 시간을 제정신으로 보내는 건지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니 가늠이 가질 않았다. 우성은 오히려 위험 분자가 스스로 고립된 것이 낫다고 생각해 점차 노인을 잊어갔다. 오직 태섭만이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태섭은 액자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쓸다가 후, 입김을 불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의 미소가 보관을 잘못해서인지 빛바래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른 새벽 잠들어 있는 태섭을 안고 있던 우성이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태섭의 숙면에 방해될까 봐 최소 밝기로 설정해둔 화면을 보자 원래대로라면 추수감사절이었을 날이 성큼 다가왔다. 반팔에서 긴팔로, 그리고 외투를 꺼내게 되면서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날짜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는 태섭이. 피할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은 허황된 도피였다.
태섭보다 일찍 순응한 우성은 말하지 않을 뿐 태섭이 잠들었을 때 한 번씩 확인했었다. 태섭과 얼마나 같이 시간을 보낸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그저 궁금했다.
"음..."
품에 안겨 꼼지락 거리는 태섭의 움직임에 우성은 핸드폰을 닫고 베게 아래에 집어넣었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태섭의 몸에 벽이라도 쳐진 것 마냥 허공을 선을 따라 쓰다듬고 만지고 쓸었다. 우성의 눈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충혈되어 있자 걱정이 들었던 태섭은 왜 잠을 못 자는 것인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우성은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자세가 불편해서 라고 대강 둘러대었는데,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태섭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바디필로우가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바디필로우 하나를 구하는 것이 쉽진 않아서 또 다시 반나절 고뇌하던 태섭은 특단의 조치라며 자신의 품을 주었다.
우성은 진심으로 그런 태섭이 기가 차고 웃겼다. 우성의 마음을 모르니 저런 결론을 낼 수가 있구나. 태섭이 하는 짓을 보면 결코 둔한 사내가 아니었지만 그런 점 때문에 되려 태섭 스스로 자신에게 무던해졌다. 우성은 그냥 포기하고 그마저도 순응하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우성이 태섭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입장이었던 적이 있던가.
우성은 태섭이 주는 대로 품에 끼고 누웠다. 준다는데 거절하는 건 또 말도 안 되지. 잠 못 드는 우성을 위해 고민하는 뒤통수가 사랑스러워서 충동적으로 우성은 태섭의 뒷덜미를 쥐고 그대로 입술을 고정시키고 입 안으로 집어넣는 짓을 할 뻔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없으니 사고가 점점 과격해졌다. 우성은 그럴 때마다 주먹을 꽉 쥐어서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패여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우성이 달이 떠 있는 동안 실컷 허공을 움켜 쥐고 입 맞추자 날이 밝았다.
"어제는 잘 잤어?"
"응, 확실히 안고 자니까 편해서 조금이라도 잤어."
"얼마나 잤는데? 조금 잔 걸로는 눈 안 돌아올 거 같다..."
태섭은 눈을 비비면서 깨자마자 우성의 안부를 물었다. 이게 연인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연인에게나 이러지 않던가. 우성은 태섭에게 하얀 거짓말을 뱉었다. 당연하게도 태섭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아직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으로 우성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품에서 얼굴만 내민 태섭은 나른하게 풀려 있어서 그것을 지켜본 우성은 혀뿌리에 고인 침을 모아 꿀꺽 삼켰다. 아, 태섭이 마셔주었으면 좋겠는데. 진짜 그렇게 하기 전에 주먹을 꽉 쥐고 삼켜버렸다.
"오늘 며칠이야?"
"...11월 15일."
베개 위로 딱딱한 촉감을 느꼈는 지 태섭은 우성에게 오랜만에 날짜를 언급했다. 우성은 태섭의 표정을 살피다가 핸드폰을 꺼내 태섭에게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태섭은 멀뚱멀뚱 숫자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안 했다.
"태섭아.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 너는?"
"다음 주 추수감사절이더라. 간만에 먹을 거 찾으러 갈까?"
"조금만 더 자다가."
늦가을로 들어서면서 바닷가에 돌아다니던 잔해들은 모래사장에 빠진 귀중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딘가 존재하기야 하겠지만 행방을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바이크를 타고 바닷가 도로를 달리던 둘은 기름도 떨어지고 해를 끼치는 존재가 없단 것을 알게 되면서 잠을 들쑥날쑥하게 잤다. 배고플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이성이 아닌 본능에 의해 살아갔다.
노인 없이 둘이서만 식사 한지도 두 달이 되었다. 가끔 안방에서 들리는 흐느낌만이 이 집에 살아있는 유령이 있단 것을 알리는 단서였다. 태섭은 항상 식사를 마치면 우성에게 정리를 맡기고 미리 따로 빼두었던 먹기 쉬운 음식을 따로 안방 문 앞에 준비해두었다. 그런 태섭의 모습은 죄수에게 사식을 넣어주는 교도관이었다. 굳이 죄수와 다른 점을 꼽으라 한다면 노인은 우리에 직접 고립된 것이었다.
안방 문에서 등을 돌린 태섭이 밖에 나갈 채비를 하러 먼저 올라갔다. 쓰레기 정리를 마친 우성도 씻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려다가 오랜만에 열리는 문소리를 듣고 안방을 주시했다. 작은 틈에서 깡마른 손이 나와 우성에게 손짓했다.
"도... 와주게..."
숫돌에 날붙이를 갈 때 들릴법한 쇳소리가 우성을 불러세웠다. 우성은 턱을 괴고 2층을 올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골프채를 챙겨 노인을 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는 약품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돌려 노인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턱에 허연 터럭을 두른 것 마냥 수염을 기른 노인이 부탁을 청했다. 수염이 올라간 것을 보니 웬일인지 노인은 드물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우성은 바로 용건이나 말하라며 팔짱을 풀지 않고 문에 기대 언제라도 나갈 의사 표시를 했다.
"열어... 보게."
청진 가방을 건네려다 놓친 노인의 손을 보고 쯧 혀를 찬 우성이 허리를 숙여 주웠다. 노인을 향한 의심을 접지 않으면서 안에 든 내용을 확인한 우성은 우뚝 굳었다. 총이었다.
"송에게... 부탁하면... 안 들어... 줄 것 같아서... 자네에게...부탁하네."
총은 우성의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손에 전달되는 무게는 확실히 태섭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총 쏠 줄 모르는데."
"안전장치는...풀었네. 방아쇠만..."
떠듬떠듬 말하던 노인은 손짓으로 우성에게 가까이 오기를 종용했다. 우성은 총구를 노인에게 겨누고 다가갔다.
"노망난... 노인의...소원을... 부탁하네..."
얼룩진 뺨을 한 좀비의 옆에 털썩 앉은 노인은 입에 씌웠던 재갈을 풀었다. 입이 자유로워진 좀비가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울음을 토했고 노인은 그것을 달래듯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우성은 예상치 못한 노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게걸스럽게 노인의 입가를 물어뜯는 좀비와 고통스러워하지만 거부 하지 않고 폭력적인 입맞춤에 노인은 순종했다. 우성은 그 순간 본인은 신을 혐오하지만 그래도 노인의 신에게 둘이 같은 곳으로 갈 수 있게 기도하겠다고 말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태어난 날은 달라도 한날한시에 떠날 순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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