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의 당신에게 전하는
마이후유 / 유료 웹공개
:: 도쿄 리벤저스
:: 사노 만지로 X 마츠노 치후유
:: 발렌타인데이 원고 유료 웹공개
달그락,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행동이 말끔히 멎었다. 고개 들어 시계를 보면 어느덧 밤 11시를 넘긴 늦은 시각. 깜빡, 얇은 눈꺼풀이 나릿하게 내려 감겼다가 도로 밀려 올라간다. 틱, 틱, 틱…. 귓가로 생생히 파고들어오는 소리라곤 적막 깔린 집안을 가득 메운 시계 초침음 뿐. 그런 잔잔한 시간 속에서,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이 시간까지 내리 부엌에 콕 박혀있던 소년은 막상 공복감보다도 더 커다란 하나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어느 누군가 그리 말했지. 사랑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고. 아무것도 몰랐을 어릴 적엔 그런가?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넘어가곤 했었는데. 잠시간 말없이 허공을 올려보던 바닷빛 눈동자가 슬몃 차분해졌다. …인제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진 테이블에 놓인 것은 오랜 사투가 만들어 낸 고독한 전장의 유일한 전리품. 검붉은 색을 띠는 매끈한 초콜릿들이 시야로 빼곡하게 차올랐다. 내일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평소 고마웠던 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
바로 그 전날 밤, 마츠노 치후유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제 마음을 건네기 위해 또 한 번의 바보 같은 짓을 한다.
―
남이 보면 이도 저도 아닐 사이. 도만 내 총장과 1번대 부대장에 불과한 거리감.
‘그 사람’과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이게 끝이다. 거슬리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깔끔한 문장들. 이따금 1번대 대장에게 이끌려, 혹은 중요한 건을 전달할 때 빼곤 직접적으로 단둘이 마주할 일은 결코 없는, 그런 사이. …그래. 이 사랑이 이렇게까지 아픈 이유는 오로지 혼자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치후유는 저 말을 한 사람을 꽤나 높이 평가했다. 이 이상 가까워질 수도, 달라지지도 않을 관계에 애달고 괴로운 것은 오직 자신뿐이니까. 아픈 사랑이란 건 결국 그런 결과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면 아픈 사랑이란 전제는 있을 수 없는 문장이 아닌가. …어차피, 이 감정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지만. 담담히 생각한 소년이 힘없이 웃음 흘렸다.
“…그러면서도 난 대체 무슨 짓을 하고있는 건지…….”
뭣도 아닌 제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제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
휴우…. 길고 긴 답답함 토한 치후유가 미간 구기며 톡톡, 손가락으로 전리품을 건드렸다. 어쨌든, 굳히는 것까진 성공했고…. 문제는 다음이다. 꿀꺽, 심각한 표정으로 한차례 침 삼킨 소년이 초콜릿 하나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쏙.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작은 초콜릿이다 보니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도 수월하게 넘어가는 건 합격인데. 눈을 질끈 내려감고 천천히 우물거린 치후유의 찡그려진 아미가 서서히 풀렸다. …응?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두 눈을 똥그랗게 뜬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 들어 잇속에 밀어넣는다. 달콤 쌉쌀하게 풍기는 카카오 내음, 코끝을 맴도는 향과 입안으로 번진 달달한 초콜릿의 맛. 사르르, 수면 위의 잉크처럼 녹아내린 초콜릿에 벙찐 표정 짓던 치후유가 이내 더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성공. 드디어 성공했다…! 지난 며칠의 뼈아픈 실책을 보상받듯 바로 전날에 찾아와 준 값진 성공. 하아아…! 안도의 숨 토하며 말갛게 웃어 보인 치후유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고개 숙였다. 맥없이 처진 손을 맞잡고,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린 한마디.
“…감사합니다…….”
모든 장기가 울렁울렁, 뒤집혀 버릴 것만 같은 벅참과 솟구쳐오르는 고양감.
내일까지 해낼 수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성공해 주다니, 이것이야말로 평생 있을 수 없는 행운이 아닐까. 워낙 손재주가 없어 녹이고 굳히는 것마저 잘 못하는 바람에 며칠간 반복된 연습도 실패, 실패, 또 실패의 연속. 그런 나날들을 지나, 2월 13일. 오늘. 생전 처음으로 성공한 발렌타인의 초콜릿이었기에 기분 좋지 않을 수 없었다. 푸스스, 아기자기한 초콜릿을 내려보며 부드럽게 미소 내건 소년이 곧 비뚤어진 자세를 바로 하곤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모양을 하나씩 골라내기 시작한다. 이건 찌그러졌고, 이건 애매하고…. 이거랑 이거랑……. 성심성의껏, ‘그 사람’을 향한 작고 작은 감정을 담아. 콩콩,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지는 느낌. …후우우…. 이윽고 포장지를 쥔 치후유가 한 번 더 목울대 울리며 긴 숨을 뱉어냈다. 떨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목표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거리. 포기와 진행의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래도 나는.
입을 굳게 눌러 다문 소년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 뻗어 완성된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데구르르, 투명한 봉투 안으로 넣어지는 초콜릿 하나.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보던 치후유가 다시금 느린 손놀림으로 초콜릿을 옮겨담는다. 하나, 둘…. 달달 경련하는 손과 그저 봉투에 초콜릿을 담을 뿐인 단조로운 움직임. 초콜릿을 받을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닌 도만의 총장인 마이키 군. …고작 나 같은 게 하늘보다도 높은 그 사람에게 초콜릿을…. 찰나에 복잡한 머릿속으로 휘몰아친 생각들을 집어삼켜 침침하게 가라앉은 눈의 치후유가 숨 조각을 짓씹었다.
―검붉은 초콜릿이 봉투에 넣어져 점점 묵직해지는 감각이 무섭다.
정작 이걸 받을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저 혼자만 한없이 무거운 마음을 담은 것 같아서.
‘…짝사랑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진작부터 진창에 빠져 더 나아질 것도 없는 상황.
쓰게 미소 지으며 초콜릿을 마저 옮겨 담은 소년이 끝내 머뭇거리던 손 내어 테이블 위에 놓인 태그를 조심스레 집어 든다. 얇디얇은 종잇장. 단지 이름 하나를 적기 위한 수단이지만, 제겐 그 무엇보다 귀중한 연결고리. 목구멍 안쪽을 지나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열기가 버거워 간신히 숨 조각 토해낸 치후유가 한 손을 가슴 부근에 얹었다. 갈빗대 아래, 격렬하게 요동치는 연정의 무게. 남몰래 품은 짝사랑의 무게. …원래부터 단 한 사람만을 가둔 심장의 무게. 저릿하게 쓰라린 심장이 대번에 저 멀리 굴러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음에도,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멈출 수 있을리 없다. 쿵쾅, 쿵쾅. 작은 다짐과 함께 펜을 집어 든 치후유가 미친 듯이 떨리는 손을 내려보며 헛웃음 지었다. …난, 마이키 군과 관련된 일엔 매번 이정도로 긴장하는구나. …이 또한 어쩔 수 없겠지. 좋아해 버린 사람이 져버리는 세계의 중심엔 자신이 있으니까. 마츠노 치후유는 그의 이름을,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위치였기에. 꾸우욱, 펜을 움켜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휴우…….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호흡.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머리를 드미는 열띤 숨결. 손 아래의 종이 태그. 그 위에 적힐 내용은 <마이키 군에게.> 짧은 한 문장뿐.
…고작, 그것뿐인데도.
파르르, 걷잡을 수 없이 경련하는 손에 이를 악문 소년이 한껏 미간 구겼다.
“…그만, 좀, 떨리라고…….”
물기 어린 음색으로 웅얼거린 치후유가 비어있는 팔뚝을 붙잡은 뒤, 찬찬히 글자를 써 내려간다. 꾸욱, 꾹. 그림 그리듯 태그를 노니는 얄쌍한 펜촉. 마, 이, 키…. 사각, 사각. 듣기 좋은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으나 집중해 글자를 적는 소년에겐 들리지 않았다. …군, …에…. 어떻게든 실수 없이 쓴 다섯 글자와 식은땀 범벅으로 축축해진 손아귀.
…제발. 손 올려 대강 땀을 훔친 치후유가 흐읍. 호흡을 멈추며 낮게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한, 글자만, 더…….”
간절한 마음을 실은 속닥임. 들릴 듯 말듯, 혹은 누구도 듣지 못했을 한마디. 혼자만이 오도카니 놓인 공간을 듬뿍 채운 작은 바람. 필사의 기운이 서린 소망을 들어주기라도 한 걸까. 하앗, 숨 삼킨 치후유가 진심 가득 담아 눌러쓴 펜촉을 살포시 떼어냈다. 검은색의 펜대를 치우면 온전히 드러나는 건 간결한 여섯 글자. <마이키 군에게.> 그 짤막한 선들을 내려보던 소년의 아미가 볼썽사납게 찌푸려진다. 술렁술렁, 오늘따라 유독 잠잠할 틈 없는 위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기분. 기껏해야 그 사람의 이름을 봤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가슴이 울렁거릴 일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치후유가 딱딱한 글씨체로 적힌 문자를 묵묵히 쓸어냈다. 둥근 손끝. 지문에 닿은 그 사람의 흔적. 얄팍한 활자로 적힌 짙은 애정의 자취. 하나하나, 마지막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내내 겪게 된 전부가 억겁과도 같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 일이, 제겐 왜 이리 힘들게 느껴지는지.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소년이 옆에 놓인 리본 끈을 태그의 구멍에 꿰어 넣었다. 스륵, 사라락―. 거칠면서도 매끄럽게 통과한 빳빳한 종이와 포장지를 그러모아 한 바퀴 둘러지는 리본 끈. …천천히, 연습한 대로만 하자. 빙그르르 두르고, 감고, 안쪽으로 꼼질꼼질 밀어 넣어 만들어진 귀여운 리본 모양. …했다. 슬쩍 매무새를 정리한 뒤, 살그머니 봉투를 내려둔 치후유가 경련하는 손 떼어내며 한발짝 뒷걸음질 친다. ……완성했다.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뜨면서 현실과 꿈을 분간 지으려 해보지만, 바로 앞에 자리한 물건은 성큼 다가온 소원의 집합체.
…진짜 완성해 버렸다……!
후우욱, 머리끝까지 단숨에 치닫는 감정에 감격스러운 표정 지은 소년이 오도카니 놓인 꾸러미를 응시하며 텁텁한 한숨 뱉어냈다.
“하아아아…….”
겨우 해냈다…….
툭, 주르륵―. 적잖이 안심한 탓일까, 벽에 닿자마자 맥없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린 몸뚱어리. 다리에, 손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하하, 하하하……. 덜덜덜, 여실히 오한 든 것 마냥 후들거리는 팔다리에 얼떨떨한 웃음 흘린 치후유가 도로 시선 올려 초콜릿을 담아냈다. 투명한 포장지,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오직 저 혼자 손수 만든 초콜릿. 마이키 군의 이름이 적힌 태그와 완벽한 자태를 뽐내는 귀여운 리본까지. 불현듯, 바람결 따라 살랑일 백금발과 늘상 자신을 응망하곤 했던 흑색 홍채가 눈앞으로 아른거리는 듯했다. 하아아아아……. 그새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을 마른세수하는 손 아래 땅이 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겁게 새 나온 숨결. 욱신대는 심장과 정반대되듯 점점 더 벅차오르기만 하는 마음의 대비에 소리 없이 입을 달싹인 소년이 결국 나직이 중얼거린다.
…만들면 뭐 해.
“…직접 줄 용기도, 뭣도 없으면서…….”
그래. 자신은 이 진심을 제대로 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겁쟁이였기에.
부스스, 얼굴 감싼 손을 떼어낸 치후유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겹겹이 붙어 너덜거리는 반창고를 멀거니 바라봤다. 며칠 내내 녹이고, 실패하고, 태우고, 버리고, 태우고. 그만치 간단한 것조차 못하는 제게 질려 얼마나 포기하고 싶었던가. 칼질이 익숙지 않아 베고, 베고, 베이고, 맨손으로 뜨거운 그릇을 쥔 탓에 데이고, 또 데이고……. 그러다 보니 금세 덧씌워진 반창고와 층층이 쌓여만 가는 자괴감. 픽, 쓰게 웃어 보인 소년이 마른 표피를 축였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같잖은 짓한다며 비웃었을까. …아니, 저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1번대 부대장인 마츠노 치후유는 주제도 모르는 놈. 제깟 게 감히, 도만의 총장님께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반창고를 어루만진 소년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다. …그래서인지, 손에 하나씩 늘어가는 반창고마저 마이키 군의 보이지 않는 거절로 느껴지곤 했는데. 하하하……. 가슴 한구석에서 바스러져 가는 감정의 무게에 잘게 웃어버린 치후유가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럼에도. ……그래. 그럼에도, 도서실에 들러 관련 책을 보고, 검색하고, 프린트해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도 실패한 수십번. 학교가 파하면 조금씩 재료를 사모아 도전을 거듭했다. ‘그 사람’에게 주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마이키 군’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 어떤 이는 그리 물을지도 모른다. …이유. ……이유랄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의 겨울. …그냥, 문득.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그가 3학년에 들어선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이 감정을 전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그뿐이다. 찌르르…,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먹먹해져오는 감각이 우스워 입술을 짓이긴 소년이 망막으로 빼곡히 들어찬 초콜릿을 응망한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귀여운 봉투. 마무리는 그 사람을 닮은 새빨간 리본 끈으로. 꾸물꾸물, 폐부 너머에서 북받친 복잡한 심경에 무릎 올려 얼굴을 푹, 묻어버린 치후유가 두 눈을 스르르 내려감았다.
‘…과연, 마이키 군이 좋아해 줄까.’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이건 보답받지 못할 감정이란 걸 안다. ……애초부터, 어떤 이보다도 잘 알고 있지. 산화된 거품처럼 잇속으로 한 번 더 읊조려진 문장.
막막하다 못해 음울한 마음을 실은 13일의 밤을 넘어, 다음 날이 찾아왔다.
2월 14일의 당신에게 전하는
신발장 문을 연 누군가의 손이 일순 굳었다.
멈칫. 자연스럽게 실내화를 꺼내 들려다 말고 허공에서 멎어버리는 움직임. 덩그러니 놓인 실내화 옆,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낯선 물건에 검은 비단 같은 눈동자가 나릿이 깜빡인다. 비좁은 공간 속 아담한 꾸러미와 붉은색의 리본 끈. 안에 든 것은 아기자기한 초콜릿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태그에 적힌 건 <마이키 군에게.> 단 한 문장. 그것도 자신이 이곳에 오면 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고스란히 신발장에.
째깍, 째깍….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도카니 선 채 신발장의 내부만을 주시하던 마이키가 느리게 손 뻗어 갈아신을 신발이 아닌 전혀 다른 물체를 집어 들었다. 바스락, 손에 착 감기는 봉투의 감촉. 찬찬히 포장지를 뒤집으며 보낸 이의 정체를 되짚어 보지만 찾을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저를 향한 여섯 개의 글자들뿐. 딱딱하고, 곧고, 선연한 글씨체. 꾹꾹, 눌러 담아 감정 실린 손 글씨로 적힌 자신의 이름. 태그의 문장을 엄지로 살살 문지른 소년이 차분히 숨 골랐다.
‘…실수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누가 봐도 제게 보낸 것이 확실하다. …그럼, 누가? 느즈막한 오전의 태양 빛을 받은 백금발이 바람결로 인해 눈부시게 비산했다. ……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걸? 별 하나 없이 캄캄한 밤 같은 호수로 초콜릿을 담아낸 마이키가 곧 홀로 선 공동의 신발장 부근을 휘이―, 둘러본다. 텅 빈 중앙현관. 이미 한창때의 수업 시간인지라 이렇다 싶을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는 너른 홀의 기묘한 적막감. 빛을 머금은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주인 모를 작은 감정 조각.
‘…교내. 신발장.’
터벅, 터벅. 신발을 갈아신은 뒤, 천천히 계단을 오른 그가 복도를 걸으며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자. 생각해보자. 쉬는 시간을 맞아 떠들썩하게 뛰어다니는 다른 반 아이들과 반대로 유일하게 고요한 3학년 교실. 네모난 문을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창가 맨 뒷자리에 다다른 소년이 덤덤히 의자를 꺼내 앉곤 심각한 얼굴로 초콜릿을 내려본다.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죄다 뿔뿔이 흩어졌으니 근처 학교에 다니는 놈들은 없고…. 텅 비어 앙증맞은 초콜릿만이 덩그러니 놓인 책상 위. 등교하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짓는 도쿄 제일의 살벌한 양아치. 힐끔, 몇 아이들이 이쪽을 바라봤으나 그 잠깐마저 두려웠는지 슬그머니 따라붙던 눈길도 금세 흐지부지 흩어졌다. …음……. 굳이 시간 내 여기까지 와서 장난칠 정신 나간 놈은 없으니, 결국 발렌타인 당일 아침에 이런 수제 초콜릿을 두고 갔다는 건―…….
‘이 학교를 나와 같이 다니는 이들 중 하나라는 뜻인데.’
톡, 톡. 마른 입술을 핥아낸 혀끝의 흐름 따라 곧게 뻗은 수려한 손가락이 책상을 두들겼다. 거슬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로.
학교. …학교라. 잔잔한 검은 홍채가 교실 한구석의 동급생들을 향한다. 속닥속닥, 여느 때처럼 조용히 떠드는 그들의 조심스러운 행보. 이쪽을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더없이 곤두세워진 감각에 저를 불편해하는 이들의 생각 따윈 훤히 보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흐음…. 심드렁하게 턱을 괸 마이키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저쪽은 가능성 없고.’
당연한 수순이었다.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기겁하며 창백해지는 애들이 실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던가―, 하는 만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으니까. 깜빡. 한차례 감겼다 뜨인 새카만 구슬이 책상에 놓인 초콜릿을 내려봤다. …그렇다면, 이 초콜릿은……. 스멀스멀, 체내에서부터 느릿하게 덮쳐오는 익숙한 기시감. 마이키 군―. 무수한 소음을 뚫고 귓가로 속삭여진 누군가의 언성. …이상하다. 분명, 뭔가 있었는데…. 분명……. 손가락 안쪽이 근질거려 재차 여린 살결을 짓씹은 마이키가 돌연, 두 눈을 크게 뜨며 턱을 괴었던 손을 떼어낸다.
“아.”
표표한 정적을 비집어 입밖으로 뱉어진 짧은 감탄사.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한 쌍의 흑색 보석. 주변 자리의 몇몇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지만, 고작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있다. 아니, 있다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지금으로 치면 가장 유력한……. 어쩌면…. 이건, 아마도……. 희뿌연 장막 저편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른 1번대원들을 떠올린 그가 입술을 여닫았다.
‘…설마…….’
설마, 그 아이들 중 하나일까? 밝은 머리칼 아래 매끈히 드러난 아미가 티 나지 않게 찡그려진다. …솔직히, 현재로서 제게 초콜릿을 건넸을 누군가의 높은 확률은 그들밖에 없다. 하지만……. 나릿이 시선 내려 꾸러미를 응망한 소년이 손 뻗었다. 바스락, 얄따란 촉감에서부터 건너오는 기이한 기분. 다른 이가 보더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는 평범하고 흔해 빠진 초콜릿이 아닌, 묵직한 진심을 담은 초콜릿. …그래. 이건 마트에서 파는 초콜릿에 우정이나 동경의 의미를 실어 대충 두고 간 것이 아닌, 하나하나 손수 만들고, 이름을 적고, 리본을 묶어 건넨 진심 초콜릿이었기에.
‘…그 애들 중에, 나한테 진심 초콜릿을 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나, 둘, 셋, 넷……. 1번대에 들어가 있는 이들의 얼굴을 되짚어 보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아 미간을 문지른 마이키가 굳게 입 다물었다.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무거운 감정. 짙은 눈썹을 늘어뜨린 소년이 목구멍 너머 몽글몽글 끓어오른 감각을 말없이 잇속으로 씹어 삼킨다.
…넌 대체 누굴까. 이렇게 초콜릿을 만들고, 포장해, 내 이름을 한 글자씩 적어넣으며 그 안에 육중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너는.
발렌타인의 오전, 도쿄 일대를 휘어잡는다는 도만의 총장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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