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맹세하기 = 얼마 안 있어서 개박살난다는 뜻

글터디 12주차

글터디 by 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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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갑자기 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눈을 질끈 감자, 딱 기분 좋은 온도의 바람이 양 뺨을 훑고 지나갔다. 아마 방금 손가락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람에 날린 벚꽃 잎일 것이다. 마침 벚꽃이 한참 만개했을 계절이니까.

한참 동안이나 곁을 스쳐지나간 바람이 겨우 그나마 잠잠해져,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 까부터 줄곧 함께 있던 누군가가 먼 곳에 있다. 다만,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뜰 때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 로 눈이 부시다. 아까부터 봄 날씨 같지 않은 햇빛이 강렬한 탓이다.

“―――――.”

그 사람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지만, 바람 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데, 귀까지 잘 들리지 않는다니.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확보한 시야에서 결 좋은 금발이 찰랑인 다.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하얀 옷이 휘날리고, 흐릿한 이목구비 중 입술이 움직여 소리를 냈 다. 이해할 수 없다.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는 듯 그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그 모습에 눈을 뗄 수 없는 동시에, 무척이나 마음이 다급해진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감각이 불안을 부추기며 주인을 속인다. 착각이라고 믿고 싶은, 어쩐지 익숙한 상실의 예감이다.

“잠깐, 방금 무슨 말을…!”

이성과 상관없이 입이 크게 소리쳐 묻자니, 다시금 바람이 세게 불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즈음엔 지금까지 먼 곳에 있었던 그 사람이 불쑥 제게 가까이 얼굴을 들 이밀고 있었다. 이렇게 가깝게 있어도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니, 무척 답답한 일이다. 그런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흐릿한 인영이 갑작스레 저를 껴안는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겨우 안정된 시야인데, 그 사람의 품에 푹 파묻혀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나.”

귀에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작게 읊조린다.

“뭐?”

“일―어―나―라―고.”


코코노이가 급하게 벌떡 일으킨 상체가 아슬아슬하게 이누이를 스쳤 다. 하마터면 거하게 이마를 부딪힐 뻔했던 거리다. 환상통을 앓는 이 마가 욱신거려 괜스레 매만지며 식은땀을 닦았다.

도로록, 눈을 굴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보라는 듯 코코노 이가 이누이를 빤히 쳐다보자, 이누이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너무 안 일어나서.”

그럼 그렇지. 막 잠에서 깨 도무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키며, 코코노이가 작게 한숨을 쉰다. 그제야 기억이 하나씩 맞 추어진다.

최근에는 밤을 새워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 덕에 눈이 뻑 뻑해서 한참 미간을 주무르고 있자니, 이누이가 먼저 깨워줄 테니 눈 좀 붙이라고 했었고,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학교 옥상에 가져 다 놓은 쇼파는 몸을 구겨 누우면 이렇게 잠깐 편하게 잘 수 있어 좋았다.

…다만, 그렇게 불편하게 잠든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런 꿈을 꿀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괜히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이런 꿈을 꿀 바엔 차라리 자지 말 걸 그랬다고 속으로 곱씹고 있을 때, 이누이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둥거려? 한 번에 잘 깨지도 못하고, 끙끙대면서 앓고…. 야한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어.”

“뭐, 하.”

오래간만에 말문이 턱 막힌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물었을 이누이가 멀뚱멀뚱 코코노이의 답을 기다린다. 그야 모르니 묻는 말이겠지만, 죽은 제 누이가 나온 꿈을 하필 야한 꿈이냐고 묻는데 뻔뻔하게 대답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문득 꿈에서 느꼈던 불안이 저 덤덤한 얼굴과 겹쳐져, 울컥 짜증이 올라온다. 결국 코코노이는 죄다 꼴 보기 싫어져 손에 집히는 아무 물건이나 이누이의 저 뻔뻔한 낯짝에 집어던졌다.

“시끄러, 나갈 준비나 해.”

일부러 맞아준 게 분명한 이누이가 제 얼굴에 맞고 떨어지는 쇼파 쿠 션을 낚아챈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뭐가 풀려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라며 코코노이가 투덜대는 걸 들으면서, 계속 안고 있던 쿠 션을 쇼파 위로 가볍게 던졌다


한 번 와해될 뻔한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건재함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 수단이 어떤 것이 되어도 좋다. 머 릿수든, 벌어들이는 돈이든, 가만히 있는 조직에 덤비는 놈들을 잔혹 하게 밟아놓는 것이든. 그런 의미에서 10대 흑룡은 그럭저럭 왕도를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입에 남아있는 혈향을 느끼며 퉷, 하고 입 안에 고여있는 걸 뱉어낸 코코노이가 숨을 골랐다. 몸을 과하게 움직이면 몸의 피가 빨리 돈다 고 했던가, 움직일 때에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싸움이 마무리되면 몸에 남아있는 과도한 흥분감에 머리가 뜨끈해진다.

똘마니 머리를 얼마나 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파이프를 지지대 삼 아 벽에 기댔다. 자신의 숨소리를 배경으로 살벌한 소리가 들린다. 사 람의 피부와 뼈와 근육이 으스러지는 소리. 이누이일 것이다. 평소 잘 쓰던 잭나이프는 어디에다 버려두고 주먹질인지. 어처구니가 없어 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건성으로 한 번 이누이를 불렀다.

“야야, 그 정도로만 해.”

“…….”

별 다른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누군가가 처맞는 소리도 그친다. 됐다, 훨씬 골도 덜 울리고. 잡생각이나 떠올리며 아무래도 싸울 때 저도 모르게 깨물었는지 괜히 얼얼한 혀를 에에, 하고 내밀었다.

“코코, 다쳤어?”

축 늘어져 미동도 없는 상대를 훅 집어던진 이누이가 성큼성큼 코코노 이에게 다가왔다. 깜빡이지도 않는 눈이 제 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가만히 두면 손으로 잡아 채 꺼내보기라도 할 것 같은 이누이의 눈빛 에 무안해진 덕에, 코코노이가 냉큼 혀를 집어넣으며 작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냥 좀 쓰려서…. 너야말로 어디 다친 거 아니냐. 나이프는 어디다 두고 주먹질이야.”

“그래? 칼질보다는 주먹질이 좀 더 확실하지 않나. 뼈라도 부러지면 더 오래 아프고.”

“바보냐? 니 손이 더 아팠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저곳에 쓰러져 앓는 소리 를 내는 똘마니들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는 잭나이프가 보였다. 도망갈 놈들은 다 도망가고, 이곳에 남아있는 건 정말 도망도 갈 수 없을 큼 기력이 다한 녀석들이나, 기절한 놈들뿐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이프를 주워 가볍게 이누이에게 던지면서, 근처에서 정신을 잃지도 못하고 고통에 바르작거리고 있는 놈의 뒤통수를 발로 후린다.

“이미 시간은 훌쩍 지났겠고…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가자. 배고프다.”

나이프를 공중에서 낚아챈 이누이가 먼저 근처에 세워둔 바이크로 향 한다. 짐도 없이 훌쩍 바이크에 타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당연한 일이다. 누구의 손보다 이누이의 손이 가장 많이 탔을 물건이 니까. 자연스럽게도 뒷자리는 코코노이의 자리다. 뒤늦게 쫓아온 뒷자리의 주인이 바이크 뒷자리에 올라탔다. 어쩔 수 없이 이누이와 빈틈 없이 밀착하게 되는 거리다. 처음 바이크를 탔을 때, 딱히 잡을 곳이 없어 불안정함에 정색하던 코코노이의 팔을 제 허리에 둘러준 건 이누이였다. 그렇게 습관이 든 후부터는 말하지 않아도 바이크의 뒷자리에 탑승하면 가장 먼저 코코노이는 이누이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방금까지 잔뜩 몸을 움직이며 주먹질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바이크 가 달리기 시작해도 봄 날씨는 몸에 오른 열을 식혀죽기에는 너무 더 웠다. 더워서, 그리고 조금 피곤해서, 코코노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얼굴을 스치는 봄바람만 느껴질 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코코노이가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햄버거 조각을 입에 넣으며 7번째 햄버거 껍질을 구겼다.

패스트푸드점의 아르바이트생이 많이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늦은 시간, 너덜너덜한 남학생 둘이서 햄버거를 산더미처럼 사갔으니. 당당하 게 기분 전환이라도 하러 가지고 이야기한 것치고는 치졸한 메뉴였으나, 둘에게는 딱 적당한 메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싸 올걸 그랬어.”

이누이가 본인 몫의 햄버거를 베어 물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어처구 니없는 소리였다. 오늘의 모든 일정은 무엇 하나 제대로 계획된 것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낮잠을 잤고, 습격을 당했고, 햄버거로 배를 채웠고, 기분 전환으로 이런 곳에 왔다. 그런데 뭘 알고 도시락을 싸 오느니 마느니 한 단 말인가. 다만 코코노이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작게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웃기네. 이누피 너, 도시락 쌀 줄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네. 게다가 코코가 먹을 분량을 싸려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싸야 할지도 몰라.”

“참나, 꼭 네가 싸줄 것처럼 말하긴.”

둘 중 한 명이 도시락을 싸야 한다면 그건 아무래도 나겠지. 이누이는 앞치마 차림에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것보다 작업복에 공구를 들고 있 는 게 더 어울리니까.

마지막 햄버거까지 해치운 후 껍질을 와작 구겨 던지자, 울타리 겸 세 워놓은 철창 바깥으로 내놓은 다리가 덜렁거렸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 정이겠지만, 몇몇 층은 거의 다 완성된 채로 방치된 새 상가의 공사장은 봄의 늦은 밤 딱 숨어들기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층수도 꽤 되어 적당한 곳에 앉으면 마침 딱 이곳저곳에 만개한 벚꽃이 가로등 불빛에 꽤 경치도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딱 살랑거리는 정도의 바 람에 두 사람의 머리가 휘날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중, 이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아. 날씨도 그렇고.”

“갑자기 무슨 말이야?”

“깨달은 게 있거든.”

영문을 몰라 습관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코코노이를 빤히 응시하며, 이누이가 작게 고개를 기울이곤 담담히 말을 잇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구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딱 기분 좋았던 봄바람이 거세어진다. 높은 건 물들 사이에서는 강한 바람이 때때로 불기도 한다던데, 딱 그 꼴이다. 이누이가 마지막으로 조곤조곤 전했던 말이 결국 바람 소리에 묻힌다. 코코노이가 반사적으로 질끈 감긴 눈을 서서히 뜨자,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찬다.

문득,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난 잘 모르겠는데.”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 여전히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누이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코코노이가 씩 웃었다. 너였구나, 얄밉게 목소리도 제대로 들려주지 않던 사람은.

“앞으로도 이런 날은 매일같이 있을 테니까. 운이 좋은 날을 찾고 싶으면 다른 날로 해, 이누피.”

이누이의 말이 맞다. 어쩌면 아주 짧은 잠깐의 꿈일 수도 있다. 오늘 꾸었던 꿈보다도 더 짧은. 양지보다는 음지에 더 많이 발을 걸친 우리는 미래의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충분히 있다. 삶의 방식, 목표, 옆에 두는 사람들, 무엇이든. 그것이 허하는 한, 맹세한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와 함께 해주어서 고마워.

꿈속의 너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아카네가 아니었던, 세이슈인 너는.

쏴아아. 봄바람이 벚꽃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며 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잠시 주위를 채웠다. 아까의 거센 바람으로 꽤 높은 높이까지 올라온 벚꽃 잎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다가 다시금 추락한다. 꿈속에서 봤던 광경과 굉장히 흡사한 모습으로.

다만 이번에는 아주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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