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세일] 원수와의 키스에선 침을 뱉어라

장세일이 술김에 실수해서 서혜성과 싸우는 이야기

군만두 가게 by 이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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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인 A, B루트 스포일러, 강압적인 요소 주의해주세요.

 


 

 

 

 

 

 

그러니까, 장세일이 죽도록 피하고 싶었던 서혜성과 지금 단둘이 화장실에 남게 된 건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술이 원수라 했던가. 세일도 술이라면 가까이 두고 싶기보단 척을 지고 싶은 쪽이었다. 그런 세일의 마음과는 반대로 FD로서 일하다 보면 술잔이 오가는 자리에 필연적으로 눌러앉아 있어야 할 때가 종종 있는 법이었다. 그게 아니면 내일을 어떻게든 견뎌낼 임시 방책으로 술의 힘을 이용해야만 한다던가. 이런 이유로 세일이 술에 익숙해진 건 본인의 의지였기보다는 으레 방송국 관계자로 근무하며 자연스레 스며들게 된 것이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베리드 스타즈, 약칭 베스타. 세일이 FD라는 직책으로 몸담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이 자리는 그 시청률이 기존 최고점을 꺾어 만들어진 자리였다. 세일은 시청률이 어찌 됐건 심신 양면으로 피곤함에 절은 몸을 일단 눕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시즌 최고 시청률 기록이라는 찬란한 업적 뒤로 세일은 기존의 수치를 깨뜨리기까지 소모품으로 갈려 나갔다. 그러한 기간 동안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적어도 세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당사자조차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진행한 참가자 뒷조사는 세일이 이러한 자리를 마냥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신승연 PD의 물불 안 가리는 방식은 사람 한 명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닐 만큼 독했지만 그만큼 신통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결과가 사실을 말해줬다.

 

새어나가면 너나 나나 그대로 끝이야.

 

누굴 붙잡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세일은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얹은 것처럼 마음이 갑갑했다. 씹어 넘긴 것 보다 들이켜 마신 게 훨씬 많았다. 세일이 속으로 삼켜온 한숨의 횟수만큼 술잔이 채워지고 다시 비워졌다. 잔에 담긴 것을 삼키면 삼킬수록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꿈의 저편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올 때쯤 세일은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바람이라도 쐬는 걸 택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굴면 안 됐다. 그건 세일이 바라지 않아도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곤 했으므로.

 

불판과 부대낀 사람들의 온기로 후끈했던 실내와 달리 식당 밖은 세일의 머리에 한 번 찬물을 끼얹어준 느낌을 줄 만큼 차가웠다. 자신처럼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들이 문 앞에서 담배를 피웠고 퇴근 시간대 맞은편 도로에서 차량이 끊임없이 도로를 타고 넘나들었다. 정신이 몽롱해서 인적 없는 건물 사이로 걷기까지 가로등도 자동차가 내뿜는 불빛도 넘실넘실 춤춘다. 세일은 몸 안에 갇힌 더운 숨을 허공으로 내보냈다. 구름처럼 몽실몽실 하얗게 피어오르는 하얀 입김이 완연한 겨울이란 사실을 증명했다. 술기운으로 불그스름해진 살갗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기분이 좋았기에, 세일은 잠시 눈을 감고 냉랭한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댔다.

 

“뭐하냐?”

 

우리 장세일 FD 님. 정적을 가르는 껄렁한 목소리에 세일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지겹도록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가 여기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인데.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가라 좀.”

“허, 싫은데?”

 

서혜성, 하필 이럴 때 나와 있을 줄이야. 타이밍도 이런 타이밍이 없다. 세일은 술을 연거푸 들이켰을 때보다 더 골이 지끈지끈 아파온다. 짜증스러운 마음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뱉은 말에 혜성은 한 마디도 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세일의 가시 돋친 대답에도 혜성은 세일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분위기라곤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 당돌함에 세일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매번 이겨 먹는 것도 귀찮은 세일이 빠르게 체념했다. 술기운에 귀가 홧홧했다.

 

그래, 술기운 때문에.

 

“나도 별로 아는 체하고 싶진 않았는데 장 FD 님이 워낙 작아야지, 막 눈에 팍 들더라고?”

“…너는 차라리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그나마 좀 봐줄 만할 텐데 어떻게 한마디도 안 지냐.”

 

예상치 못한 세일의 대답에 혜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사 빠진 사람처럼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뭐? 야… 취했냐? 이거 장세일 입에서 나온 칭찬이라니 좀 당황스럽다?”

 

서혜성과 장세일, 둘 사이가 앙숙인 건 그들을 생판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응당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방송 관계자가 아닌 서혜성 팬덤까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두말하면 입만 아픈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건 무엇보다 당사자였다. 만약 세일에게 혜성에 대한 단점을 말하라 시킨다면 초면부지의 사람을 붙잡고도 침이 마르도록 열변을 토할 인물이었다. 그런 장세일이 칭찬이라니, 하마터면 혜성은 여기가 술자리란 사실을 잊을 뻔했다. 그제야 당황했던 혜성의 얼굴이 자신감을 되찾았다.

 

“니가 보기에도 역시 내가 좀 괜찮아 보인다, 이거지? 장 FD도 인정하는 내 매력, 크, 나중에 다른 소리 하기 없기다.”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뻥치기 없기. 알지? 그 말이 진심이었든 술김이었든 어쨌거나 세일이 한 말 덕에 서혜성은 기고만장해선 목소리를 높였고 그에 따라 입가에 겨울꽃이 피었다 사라졌다 하길 반복했다. 서혜성이 자기 대단한 줄 알고 떽떽거리는 꼴만 보면 속이 뒤틀리는 세일이었으나 그날은 이상하게 화도 안 났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뒤떨어지는 실력에 비해 불공평하게 반반한 얼굴,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밀어붙였다. 세일은 평소라면 재수 없다며 치를 떨었을 조잘거리는 혜성을 말없이 응시했다. 세일이 혜성을 향한 눈빛이 날 서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랐다.

 

“서혜성. 가까이 와봐 좀.”

 

세일이 혜성을 향해 손가락을 끄덕였다. 혀가 자꾸 꼬여 들어가는 걸 세일은 간신히 참았다.

 

“어, 그래. 잘생긴 얼굴 지금 실컷 봐둬라. 나중에 보고 싶다고 울지나 말고.”


세일 FD 님은 좋겠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거? 나중엔 이런 거 공짜로 하지도 못할걸. 그야 나중엔 내가…

 

영원히 재잘거릴 것 같았던 혜성이 말소리가 한순간에 멎는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혜성은 눈 깜빡일 생각조차 못한 채 굳어 있다. 세일이 입을 맞춰온 건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일의 한 마디에 신이 나선 열 마디가 넘도록 떠들던 혜성의 한쪽 팔을 세일이 잡아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가까웠던 적이 있었던가, 싶었던 거리가 훅 좁혀지더니,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그리고 그다음엔… 지나치게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떠한 감정도 사고도 없이 오히려 백짓장처럼 머리가 하얘진다는 걸 혜성은 깨달았다.

 

혜성은 이 상황이 돌아온 몰래카메라 같은 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다. 방송 중 일부러 남자 간 애틋한 퍼포먼스를 취하게 해 특정 취향을 가진 팬덤의 지지를 유도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은가. 이것이 PD님이 밀어주는 새로운 방식이라 생각하자니 혜성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촬영 중도 아니었고 어딘가 숨어 있던 카메라맨이 갑자기 튀어나와 놀라게 할 만한 정황과 장소는 더욱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일에게서 술 냄새가 진하게 났기에 혜성은 가장 믿고 싶었던 유력한 가능성을 포기했다.

 

세일의 입맞춤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동시에 뜨거웠다. 신체의 여린 살을 가만히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뜨거운 게 찬바람이 스치면 꺼져버릴 촛불 같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내일이면 다 잊으라는 것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런 점이 이상하게도 혜성의 기분을 제대로 더럽게 했다.

 

맞닿았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진다.

 

“얼굴값 좀 해라… 서혜성….”

 

혜성이 마주 보는 세일의 얼굴이 어딘가 안쓰러운 사람 쳐다보는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어 혜성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여태껏 혜성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일의 표정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낼 수도 이딴 건 대체 누가 시킨 거냐며 따질 수도 없었다. 차라리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건지 혜성은 울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혜성이 반응 출력에 실패한 기계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적 세일은 있어야 할 자리로 먼저 돌아가고 없었다. 혜성은 세일이 제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소름 끼치도록 간지러운 느낌에 치를 떨며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세일은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전날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과음한 탓에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출근길에 곧 죽을 몰골로 숙취 해소제를 사 마셔서 다행일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세일은 지금 세면대 대신 변기를 붙들고 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수도꼭지에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는 물이 세일의 손을 적신다. 그 덕에 정신이 어느 정도 선명해진다. 오늘 서혜성은 무슨 영문인지 세일을 뚫어 죽일 것처럼 쳐다보았다. 세일은 일부러 서혜성 쪽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으나, 시종일관 그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그 눈길이 어찌나 뜨겁던지 세일은 자기 뒤통수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다.

 

그런데, 대체 왜?

 

세일은 아마도 그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날 회식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안타깝게도 세일은 술잔을 든 이후로부터의 기억은 말끔하게 전소된 상태였다. 뭔가 대형 실수라도 했나. 그렇다 간주하고 세일이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오늘 만났던 사람 치고 어딘지 난감한 기색을 표한다던지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제게 따로 건네 오는 말도 없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서혜성만 유독 저 난리 통이었다. 서혜성 옷에 토하기라도 했었나? 그럴 추한 꼴 보일 바에야 차라리 한 대 치고 말지.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세일은 그날 혜성을 과연 만나기나 했는지 자체가 가물가물했다.

 

확신이 결여된 추측만이 의미 없이 이어지자 세일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서혜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얘기를 물어보는 건 물론이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짜 이미 기억나지 않는 걸 떠올리려 애쓰는 것까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서혜성을 있는 힘껏 피해 보리라 세일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혜성이 세일을 무슨 사냥감처럼 쥐 잡듯 잡아 대려는 건 여태껏 겪어 본 적 없었기에 세일은 자신을 찾는 신승연 PD가 반가워 보이는 둘도 없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서혜성을 마주치면 안 된다. 세일의 직감이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세일은 오늘만 넘기면, 일단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세일 FD님이 내 열렬한 시그널을 무시하니까 내 마음이 아주 찢어지겠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세일은 이렇게까지 간담이 서늘해질 줄은 몰랐다. 서혜성이 어떻게?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있자니 거울 속 인영이 점점 가까워진다. 타일 바닥이 울리는 소리 뒤로 화장실 문이 불길하게 찰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창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고 세일의 가슴이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쿵쿵거렸다.

 

“이제 불러도 쳐다도 안 보시겠다.”

 

혜성이 세일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제 쪽을 보게 했다. 서혜성.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포말처럼 흩어졌다. 그제야 세일의 눈에 혜성의 얼굴이 들었다. 서혜성은 드디어 목표물을 잡았단 사실에 즐거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어딘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마른침을 삼키느라 세일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울렁였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냐? 기억을 못 하는 거야, 모르는 척이야? 모르는 척이면 좀 섭섭한데.”

“뭐가. 너랑 할 얘기 같은 거 없는데, 시간이 남아도나… 비켜.”

“어허. 난 할 얘기 많거든?”

 

세일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 애썼다. 혜성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혜성의 이런 반응을 보아 유추하건대 분명 자신에 대한 덜미를 뭔가 잡은 것이리라 세일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듣고 싶지도 않았다. 들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하여간 세일은 서혜성 혼자 좋은 일이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세일은 혜성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내려 했으나 그건 어깨를 더욱 단단히 붙들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내빼지 못하게 하려는 작정으로 잡아 그 힘이 어찌나 드세던지 세일은 제 어깨뼈 윤곽이 짐작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혜성은 이곳에서 결판을 낼 작정이었다.

 

“장세일. 어제 일 기억 나냐고, 안 나냐고.”

 

올 게 왔구나. 세일은 짧은 몇 초간 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전부 뇌까렸다. 세일은 세면대 옆 기둥에 머리를 박고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혜성이 만약 이런 범주까지 계산하고 세일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거라면 그거 하난 제대로 했다며 칭찬이라도 하고 싶었다.

 

“뭘! 대체 뭘 말하는 건데! 사람 다짜고짜 붙잡고 하고 싶은 게 뭔데!”

 

개 같네. 세일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세일이 단호하고 강경하게 모른다며 잘라두자 혜성은 어이없단 듯이 진짜 기억 안 나는 건가, 중얼거리며 어깨를 붙들고 흔드는 통에 머리가 울려 신경질이 났다.

 

“아 진짜 몰라!! 모른다고!!! 기억 같은 거 안 난다고! 말해도 안 믿을 거면 대체 왜 물어보는데! 고집부리지 말고 놓으라고!”

 

세일은 악에 받쳐 한바탕 소리를 질렀다. 텅 빈 화장실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왕왕 울렸다. 돌아온 건 의외로 정적, 세일의 어깨를 잡아 흔들던 손길도 어느새 멈춰있었다. 뭐지? 이걸로 된 건가. 서혜성이라면 거하게 지랄할 줄 알았는데.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문이나 잠그고 겁주려 하질 않나. 무슨 감금 쇼라도 할 예정이었나.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란 판단에 세일은 혜성의 손을 매섭게 쳐내고 굳게 닫힌 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단 나가자, 생각을 정리해도 나가서 하자며 세일은 혜성을 스쳐 지났다. 그런 세일을 말없이 눈으로만 쫓던 혜성의 표정이 매서웠다. 돌연 혜성은 무슨 생각인지 세일의 손목을 단번에 낚아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옥죄어 들어와 세일은 절로 윽, 하고 신음했다.

 

아, 기억이 안 난다고. 혜성의 두 눈이 불길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건 앞뒤 안 재고 모든 걸 태우는 불같기도 했고, 손끝만 스쳐도 온몸이 얼 것만 같은 얼음 같기도 했다.

 

“그럼 기억나게 해줄게.”

“야… 서혜성…….”

 

이 미친 새끼…. 뒷말은 겹쳐진 입술에 장렬히 틀어 막혔다. 당황해서 피할 낌새도 못 느꼈던 세일이었다. 왜 흔히 드라마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주인공을 향해 멀리서부터 돌진해도 결국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치이곤 하지 않던가. 세일의 등이 문에 쿵 소리 나며 부딪혔다. 단단한 철제문에서 풍기는 냉기가 점퍼 아래로 파고들어 소름 끼치도록 서늘했다.

 

씨발. 혀는 왜 쓰는데. 이 미친놈.

 

혜성이 마른 잎을 축이는 것처럼 세일의 아랫입술을 핥아 오자 세일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주먹을 쥐고 어디 하나 부러뜨릴 작정으로 날리려 했으나 남은 손마저 휘어 잡혀 문으로 밀어 붙여졌다. 이 자식 힘이 원래 이렇게 셌던가? 세일이 힘을 주어 밀어내면 밀어 내려 할수록 그보다 더한 힘으로 압박해 저항을 헛된 일로 만들 뿐이었다. 화장실 문과 서혜성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세일은 돌기 직전이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이로 건드는 서혜성에게 입을 열지 않고 버티는 일뿐이었다.

 

“입 열어.”

 

혜성은 세일의 입술이 꾹 다문 조개처럼 벌어지지 않자 귓전에 낮게 으르렁댔다. 세일은 혜성이 떨어져 나간 때를 놓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개새끼,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라고 이렇게 새롭게 정신이 나갔냐. 지금 놔주면 봐준다, 아니, 한 대만 맞자. 그렇게 발악하는 입술이 자신의 것이 아닌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소리 좀 낮추지? 나 지금 서혜성이랑 뭔 일 있다, 광고를 해라, 광고를.”

 

이게 진정하게 생긴 상황이냐며 세일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런 상황을 남에게 들키는 건 죽는 것만큼이나 싫었기에 혜성의 말대로 목소리를 낮췄다. 어, 그래야지. 혜성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고선 뼈대가 그대로 잡히는 세일의 손목 한쪽을 놓아주었다. 피도 안 통할 정도로 거세게 쥐고 있던 악력이 사라져 해방감이 세일이 해방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손목을 풀어주었던 손아귀가 대신 세일의 얼굴을 붙잡았다. 혜성의 커다란 손이 세일의 뺨을 우악스럽게 짓누르자 다시 한번 입술이 맞물렸다. 세일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날이 선 눈으로 서혜성을 노려보았다. 눈에 선 실핏줄이 터질 것 같았다. 혜성은 그 눈만 바라보아도 세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박히는 것 같았다.

 

어쭈.

 

혜성의 혀가 세일의 입안으로 배려 없이 파고들었다. 장세일은 눈 한번 감지 않고 서혜성을 노려보았다. 너 죽여버린다, 내가 죽여버린다. 혜성은 살의가 담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일의 안을 헤집었다. 혀를 얽었다 풀어내고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지독하게 괴롭혔다. 타액이 진득하게 오가고 세일은 혜성의 어깨를 밀어내는데 질려 멱살을 셔츠가 구겨지도록 말아 쥐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세일에겐 영원처럼 길었다.

 

“씨발!”

 

육중한 바위처럼 꿈쩍도 안 하던 혜성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세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세일의 성난 눈빛이 당장이라도 혜성을 덮칠 것처럼 이글거렸다. 공적인 장소만 아니었어도 당장 혜성에게 달려들었을 세일이었다. 하필 이딴 꼴이 벌어진 게 제 근무지였던 탓이 혜성에겐 다행이었고 세일에겐 불행이기도 했으며, 유일한 제어 장치이기도 했다.

 

“와, 왜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내고 그러나? 이제 좀 기억이 나? 니가 어제 나한테 한 거 똑같이 해준 거잖아. 이러다 죽이겠어?”

“뭐?”

 

텅 빈 외마디가 비틀린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세일은 자신의 머리로는 상상도 못 한 미친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져 헛웃음을 쳤다. 야, 웃기다. 서혜성 진로 바꾼 거 아냐? 개그맨으로. 내가? 내가 뭐가 좋다고 술 마시다 너랑 입술을 비벼. 그럴 바에야 그 자리에서 술잔에 코 박고 죽는 게 낫지. 세일은 짓씹듯 답했으나 그것이 머리를 거쳐 가는 것인지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 지껄이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술 먹고 나오는 게 본성이란 말도 있는데 모르시나?”

 

혜성은 세면대에 침을 퉤 뱉고는 복수라도 성공한 사람처럼 비열하게 웃었다. 세일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서혜성놈이 한 말을 인정하는 건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것보다 싫었지만 어쨌든 사실이라 간주하는 걸 해보잔 말이다. 그렇다면 그때 나 때문에 기분이 졸라 더러웠으니까 깔끔하게 한 대만 맞으라고 타협이라도 봤으면 분하지만 그러자고 수긍했을 일이었다. 도대체가 뭐 잘못 집어 먹어서 돌아버린 것도 아니고 그걸 똑같이 돌려주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야, 속고만 살았나…. 못 믿는 건 아니지? 생각해 봐, 나라고 이런 거짓말을 하고 싶겠어? 내가 수고스럽게 이런 짓까지 재현해 줬는데 말이야.”

“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냥 니가 멋대로 한 거잖아! 너라면 믿겠냐? 지나가던 개도 안 믿겠다. 대체 그리고 그걸 왜 똑같이 하고 앉아서……. 하, 서혜성 이 미친, 진짜….”

 

세일은 죽여 버리고 싶단 뒷말을 삼키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고 혜성은 거울을 보며 건성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저 새끼는 뭐가 좋다고 지금 키들거리고 자빠진 거지? 거울에 비친 혜성을 바라보자니 세일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어제 자기가 주사를 부렸건, 말건 도저히 이해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일이 열불이 터져 뭐라 말도 못 잇고 씩씩거리자 먼저 입을 연 건 혜성이었다.

 

“아니, 생각해봤는데, 나만 당하는 건 좀 빡치잖아?”

 

이 또라이 새끼. 패기 넘치는 발상에 세일은 그만 턱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안 그래? 너도 한번 느껴보라고.”

 

세일이 기가 막혀 야, 너, 외마디 운을 떼며 몸을 떠는 동안 혜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까지 깨끗하게 씻었다. 세일은 어떤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화가 난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헤아릴 이성이 없었다. 그저 어떠한 감정이 몸 안을 가득 채워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세일이 아무래도 둘 다일 거라 겨우 가늠할 수 있었을 때 가까이 다가온 혜성이 물기 있는 축축한 손을 세일의 어깨에 얹었다. 그에 반사적으로 세일의 얼굴이 험상궂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일 FD 님 가벼운 주둥이 간수 좀 잘하시고. 그러다 술김에 사람 여럿 울리겠어?”

 

혜성은 뼈와 살이 되는 충고랍시고 어깨를 툭툭 두들기곤 그대로 세일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혜성은 어쩐지 마음이 탁 턴 것처럼 가벼워져 손까지 가볍게 흔들었던 것이다. 열 받아서 고꾸라질 것 같은 건 세일과 반대로 혜성은 오늘 마주친 순간부터 난장판을 만들어 놓기까지 재수 없는 게 여상하기 그지없었다. 그 점이 세일을 더욱 열 뻗쳐 돌아가게 만들었다. 혜성의 손이 닿았던 어깨가 물로 젖어 축축했음에도 용암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WBS에서 진작 사퇴하지 않은 걸 이토록 후회한 적 없었던 세일은 결국 외마디 비명을 터트렸다. 신 PD한테 깨지고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나오는 걸 봤단 것을 포함해 이젠 무슨 일인지 히스테릭하게 소리도 지르더라, 같은 이야기가 장세일 FD의 소문에 추가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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