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이담] 문답
동인의 힘으로 어떤 방에 갇혀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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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담님. 일어나보세요.”
공구가 이담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구가? 하지만 어떻게? 화들짝 놀라 일어난 이담은, 제 앞에 있는 구를 보고 놀라기를 잠시,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하얀 방의 모습은 결코 저가 머물던 동굴의 것이 아니라- 주변을 대강 둘러보고는 떨떠름한 낯으로 물었다.
“공구, …여긴?”
“글쎄요, 저도 눈 떠 보니 여기 있었습니다. 나갈 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각성자의 짓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에요…….”
…문이 없다고? 검은 눈이 전보다 세세하게 주위를 훑었다. 크지 않은 작은 방, 그 가운데에 있는 소파 하나, 방석 두어 개,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문이 없다. 창문은 물론.
“아무래도 갇힌 것 같습니다.”
“이런…….”
평소와 다름없이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공구야 워낙 적이 많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저까지 가두는 것은 정말, 무슨 속셈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걸……. 한숨을 내쉰 이담은 흘끔, 태연해보이는 공구를 보고, 다시 말끔히 흰 벽을 바라보고…….
“…벽, 부술 수 있겠느냐?”
“마침 저도 그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했다. 물러서 계세요. 소리가 조금 클 지도 모릅니다…… 자칫 파편이 튀어 다칠 수도 있고요. 이담이 반대쪽 벽으로 거의 붙다시피 하자, 공구는, 숨을 한 번 짧게 내쉬고, 발을 딛어, 체중을 실은 뒤돌려차기를 시전했다—
—쾅-! 방을 가득 메울 정도의 굉음이 났으나 벽은 여전히 멀쩡했다. 흠집도 안 났네요……. 표면을 더듬어보던 구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이것만 믿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웃음이 잦아들자 그는 정말 곤란하다는 낯이 되었다. 이곳에 언제 왔는지,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는지, 시간이 가늠되지는 않았으나 만약 오래 되었다면, ……. 유교가 저를 찾고 있을 터였다. 갑자기 사라졌으니 분위기가 많이 혼란스러울지도 몰랐다. 정이 많은 이들이니, 나를 많이 걱정할텐데…….
어디 문이라도 숨겨져있을까, 벽을 짚어보던 이담은 문득 소파 위로 시선을 주었고, 그 위에서 정갈하게 접힌 쪽지를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흰색이라 그간 눈에 띄지 않았던 성 싶었다.
“…구야. 이리 와 보련.”
공구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와 저보다 조금 작은 이담의 어깨 너머로 그가 펼친 종이에 쓰여져 있는 문구를 확인했다. 손글씨로 쓴 것이 아닌, 글자가 인쇄된 종이였다. 아직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남아있는 일부 코어구역에서나 아주 간간히 볼 수 있을만한.
『각자 상대방에게 던진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 뭐 이런 걸.”
“당황스럽군요……. 상당히 뜬금없고요.”
뜬금없는 것은 애초에 우리가 여기 갇힌 상황부터가, ……. 말하려던 이담은 그냥 관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쪽지에 적힌 대로라면,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상대가 솔직하게 답해야만 나갈 수 있는 듯 싶었다. 믿어야 하나?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그들을 여기 가둬놓았는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일단 좀 앉아서 얘기를 할까요. 공구의 제안에 이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는 딱 다 큰 사내 두 명이 나란히 앉을만한 크기였다. 오. 푹신하다……. 맨바닥에-나름-두툼한 요를 깔고 생활한지 열다섯 해는 족히 넘긴 이들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푹신함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할까요? 아니면… 먼저 질문하시겠습니까?”
“…순서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만.”
“하면 그저 되는 대로 할까요.”
빨리 답할 수 있는 쉬운 것으로 물어봐야지, 생각하던 이담은, 곧 유순하게 눈을 깜박이는 공구를 보고, 문득 묻고싶은 것이 떠올랐다. 물론 공구라면 제가 어떤 것을 묻든 솔직히 답하겠지만, 이 질문만은 어째 말을 돌릴지도 모를 것 같아서…… 그는 이 기회에 확실히 하기로 했다.
“공자는, …네가 이름을 빌린 사상가는 살신성인을 논했다 들었다만.”
스스로를 죽여 인을 이룬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시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공구는 일단 고개를 주억였고 이담은 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매듭지었다.
“…너도, …그럴 셈이냐.”
이담은 공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법이 없었다. 첫 만남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그를 다시 전쟁터에서 구했을 때도, 그의 목숨을 붙여놓고 같이 있던 짧지 않은 시간들과 적지 않은 만남들, 그 속에서 언제나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건네는 이는 공구였다.
그러니 이것은 이담이 공구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너는 네 자신을 죽여 난세를 닫을 셈이냐고. 그는 자신이 살려놓은 아이에게 죽음을 묻는다.
공구는 말이 없다가, 설마하니 그런 질문을 하실 줄 몰랐다는 듯 눈을 깜박이고, 할 말을 고르며 입을 몇 번 벙긋이다가도, …곧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웃음지으며 답했다.
“…이 보잘것없는 목숨으로 난세를 끝낼 수 있다면. 망설일 것 없지요.”
아, 너는, 난세와 함께 죽겠구나. 이담은 깨달았다. ‘공자’는 제 죽음으로 난세를 닫을 것이다. 새로운 치세에, 피에 젖고 폭력에 물든 상징은 더이상 필요치 않겠지요. 한 마디 답하고 나서 그저 웃을 뿐 입을 열지 않는 그는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이담은 공구가 죽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제 첫 번째 환자였고, 알게모르게 정든 이가 죽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무리 이담이 죽음에 익숙해진 난세의 의원이라 하더라도. 공구가 죽는다면, 이담은 꽤, 어쩌면 많이, 슬플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제 차례인가요.”
상념에 빠졌던 이담은 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질문하려무나. 공구는 잠시 눈을 굴리며 무엇을 물어볼지 생각하다가, 질문이 떠올랐는지, 이담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는 가볍게 들리기까지 한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금 스스로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제가 죽으면, 이담님께서는, 절 위해 울어주실건가요?”
“…공구.”
입꼬리를 편안히 늘인 그 웃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담은 어쩐지 그가 서글퍼보이는 것이었다. …울음이라. 이담은 문득 자신이 마지막으로 울어 본 지가 언제인지를 헤아려 보았다. 이미 십 년은 훌쩍 넘었을 과거, 도가 떠난 이후, 자신도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 날……. 그래서 저는 공구가 죽으면 슬퍼할 것은 맞으나 과연 눈물을 흘릴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울어 본 적이 이리 아득한데…….
이담이 답을 못 하고 있자 공구는 조심스럽게 제 오른손을 뻗어 이담의 왼뺨에 대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듯 살며시 눈가를 쓸었다. …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때면 제가 이렇게, 눈물을 닦아드리지 못하잖아요……. 이담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다정하게 제 뺨에 닿는 온기에 기대어 공구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서 답해야 하는 것도 그만 잊고서. 그러자니 공구는 실없이 웃고, 이번에는, …그럼에도 울어주신다면, 당신에게 저는 당신이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 정말 기쁠 거예요…… 하고 또 웃는다. 하여간 웃음이 헤픈 이였다.
이담은 그제야 제 마음을 깨달아, 솔직히 답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구야, 나는-”
-달카닥. 금속음이 이담의 말을 끊었다. 검은 눈 두 쌍이 일제히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벽면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문이 생겨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빛이 아찔했다.
“문이 생겼네요.”
“…내가 아직 답하지 않았는데도.”
“뭐, 어찌 됐든, 나가게 되었으니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어쩐지 공구는 이담의 답을 듣는 걸 피하려는 듯 굴었다. 공연히 말을 돌린 그는 벌써 문간에 서서 손을 내민다. 이만 나갈까요, 이담님. 그 손을 기꺼이 잡으며 이담은, 그가 했던 질문의 답 대신, 옛적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건넨다.
“공구.”
“네, 이담님.”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한다.”
공구는 다만 흐리게 웃었다.
이윽고 그가 문을 완전히 연 순간, 시야를 가득 채운 눈부신 빛 때문에 이담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니 자신이 머물던 동굴이었다. 공구는 함께 있지 않았다. 제 사람들에 돌아갔겠거니, 이담은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어쩐지 피곤했던지라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네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나는 내 손이 닿는 한 너를 살려낼 것이다. 구. 몇 번이고 다시.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해. …나는 어쩌면 네 죽음이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구나.
…당신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내 목숨을 귀히 여기라 거듭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그것만큼은 제가 들어드릴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공자’는, 인과 사랑을 내세우면서 피를 흘리고 폭력을 행사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은, 난세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짐이 옳습니다. 제가 살아있으면 오히려 혼란이 끊이질 않을 거예요.
…제 과업이 끝나고 당신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할 뿐입니다. 이담님. 부디, …….
‘공자'가 날개를 전부 없애고 죽었다. 날개가 없으니, 이제 시간이 지나면 각성자는 사라질 터였다. 술렁이던 세상이 점차 조용해지고 있었다.
난세가 끝났다.
‘공자’의 장례식은 한 시대를 닫은 사람의 상례 치고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전후 수습에 바빠 아직 성대한 제를 지낼 만한 여력이 없는 탓도 있었다.
이담은 울지 않았다. 그는 편안히 미소지으며 잠든 듯 관 안에 누워있는 공구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말없이 자리를 떴다.
이담님. 당신은 제 장례식에 와주실까요?
공구. 네 장례식에서 나는 울지 않았단다.
날개의 전소와 ‘공자’의 죽음은 난세를 끝낼 만한 것이겠죠.
너는 난세를 닫았다.
제가 죽어도 제 사람들은 잘 이겨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묻고 싶은게 너무 많구나. 이젠 대답을 들을 수조차 없는데도 말이야…….
…….
언제부터 넌 네 죽음을 계획하고 있었느냐. 어쩌다 그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공자’의 영향력이 어느정도 커졌다 싶었을 때, 날개를 모으기로 결심했을 때, 각성자를 향한 민간인들의 적의를, 저를 향한 경계와 선망을 동시에 느꼈을 때— 그 모든 순간에서 저는 제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정말 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느냐? 너는 무슨 생각을 하며 마지막이 될 아침을 맞고— 생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리 편안히 미소짓고 있었느냐. 구야.
오래전부터 결정내렸던 제 선택이고, 후회는 없습니다만, 저도 사람인지라, ……. 어째 마음이 술렁이는 것도 같습니다. …이담님. 당신이 보고싶어요. 아무 생각 않고, 당신 품에 기대어, 눈을 감고 가만 있던 날들이 그립습니다. 마음껏 슬퍼하고 아파하고 두려워했고, …사랑했던, 한동안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순간들이.
저는 사람들에게 ‘공자’였고 앞으로도 그리 기억되겠지요. …하지만 당신만은 저를 구로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지나친 바람일까요?
‘공자’는 사람들에게 상징으로서 오래도록 기억되겠지. …그러니 나는 너를, 이립을 갓 넘은 어린 청년으로서의 공구를 기억하기로 했단다.
제가 바라 마지않던 세상을 제 눈으로 볼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네가 기원했던 세상을, 내 눈에 온전히 담고, 언젠가 너를 다시 보게 되는 그 날이 온다면, 네게 전해주마.
당신도 저를 그리워할까요……, 저를, 보고싶어 할까요, 제가 지금 그렇듯, …….
부디 기다려주겠느냐. 구야.
……. 이제 곧 아침이 밝습니다.
네 웃음이 그립구나.
언젠가 다시 뵐 날이 온다면, …그땐 웃으며 만나요. 막사를 나선 공구의 눈에 태양빛이 시리게 부딪혔다. 내일의 자신은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사람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 공구에 대한 기억도 언젠간 흐려질 것을 이담은 알았다. 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구태여 기억을 붙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다만 가끔 그 웃음이 머리를 스치고, 평화롭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너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생각이 드는 것을 기꺼워 할 뿐이었다. 이담에게 남은 시간은 재건되는 세상을 속속들이 둘러보기에 충분할 만큼 많았다. 또한 그가—어떠한 방식으로든—애정했던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기에도.
그렇게 이담은 오래도록 공구를 위한 장송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이제 배경색을 검은색으로 바꾸고(글리프는다크모드기능이없던데… 갤럭시면 설정>디스플레이>다크/아이폰이면 설정>디스플레이 및 밝기>다크 하시면됩니다) 방 탈출한 시점부터 다시 읽으시면 됩니다. 즐감하십시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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