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한문, 열려 있습니다.

마음을 보내 주시어요.

광한전 by 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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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할 일

유성못가에 매어둔 쪽배 확인하기

말리고 있는 계화 뒤집기

묘동들 머릿수 헤아리기

광한전 내부 등불 단속

광한문 단속

 

“후욱.”

이게 마지막 등불입니다. 그래도 광한전은 완전히 어둠에 잠기지 않지만요. 유성못에서도 은은한 빛이 일렁이구요, 월면에도 아주 엷은 빛이 스며있거든요. 또 가끔씩 제존께서 다녀가신 날에는 용마루 위에 별빛도 머무른답니다. 언제고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저는 달에 사는 토끼이자 광한궁의 묘동, 복아라고 합니다. 오늘 할 일은 평소보다 조금 많았어요. 왜냐면 청지기 김 씨 어르신이 안 계신 날이었거든요. 아마도 그분이 광한궁에서 가장 오래 지낸 분이실 거예요. 거의 모든 일들이 청지기 어르신을 거쳐 분배되고 마무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이 광한궁의 주인이란 뜻은 절대 아니에요. 그렇게 말했다가는 경을 칠 걸요. 김 씨 어르신은 늘 이 궁의 주인에 대해 말씀하셨거든요. 천궁 상량에 오르신 달의 주인 말이에요.

청지기 어르신이 낭랑께서 비록 우리 곁에 실재하지 않더라도 항상 함께하신다고 이야기하면, 수행 중인 어린 묘동들은 대부분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저도 그랬어요. 한 이백 년쯤 전까지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거든요. 제가 이젠 어엿하게 수행 마쳐서 광한궁 영패도 받았단 말이지요. 그런 말쯤은 이해하고도 남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해만으로는 모자랐던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운명 느끼기에는 안즉 미력한 존재였던 탓일까요. 저는 정말이지 이날 만나게 될 존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따지고 보면 항시 광한문 앞에 서서 머리만 치켜들면 곧장 볼 수 있는 존재였는데요.

“어….”

저는 닫으려던 광한문 손잡이를 쥔 채로 우두커니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 일을 김 씨 어르신께 뭐라고 보고하면 좋을까요? 시키셨던 일 완벽하게 다 해놨습죠- 하고 뻐기려던 계획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안녕하시오. 기별 없이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오.”

예기치 못한 방문객은 풍채 몹시 당당하되 위압감을 주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제존보다도 더 크신 듯했는데, 제가 숫제 목이 꺾어져라 고개를 치켜드니 얼른 몸을 낮추고 줄여 주셨단 말이지요.

“궁주께서 안 계신 줄로 알되 그럼에도 불쑥 찾아오고 만 것은… 사실 천심 받들었다거나, 혹은 어떤 직감이 스쳤다거나 하는 계시를 따른 것은 아니었소. 다만 잊고 있던 마땅한 도리를 떠올린 탓이외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마주쳐본 적은커녕 현상하지조차 않으신 분을 모신母神으로 모실 텐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가 어디서 비롯한 존재인지 상당히 뚜렷하게 알고 있거든. 제존께서 늘 두르고 다니시는 피백이 나의 허물과도 같았소. 그 물건, 월신께서 둘러주신 휘광이었노라 제존께서 뽐내듯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 달빛과 별빛 섞여서 이 용태龍態 이루었으니 당연히 나는 그분께 성심 받았다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여태 찾아 뵈옵지 못한 것이 내 몹시….”

빛무리 같은 백발을 가지런히 빗어 동곳 찌르고 늘어뜨리셨는데, 그것을 보고 저는 이분의 정체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하. 밤하늘의 은하수룡이 광한전을 찾아오신 거예요!

“어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존함이.”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마 날이 새도록 사죄를 반복하실 것 같아서 저는 염치 불고 말을 막아 그대를 무어라 불러드리리까 여쭈었습니다.

“미리내라고 하오. 헌데 그대는… 내 듣던 것과는 퍽 다른 듯한데.”

“아, 미리내 님. 평소였다면 청지기 김 씨 어르신이 맞이하셨을 겁니다. 아마 들으신 이야기도 그분의 것일 공산이 높구요. 한데 그분께서 금일 제게 소임을 일임하시고 자리를 비우신바, 제가 대신 청지기 노릇을 하고 있던 터라. 저는 복아라고 부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정말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착 깔고 양손을 제자리에 묶어두려고 노력했습니다. 제존 앞에서도 이렇게 애썼던 적이 없었어요. 그야 그분은 맨날 저를 먼저 장난감 공인 양 집어 들고 배에 얼굴부터 묻으셨으니까!

아무튼. 이 용종께서 찾아오신 연유를 듣자 하니, 제가 감히 궁주 부재를 핑계로 막아서고 돌려보낼 만한 일은 아닌 듯했습니다. 일단 저 또한 제존께옵서 항시 두르고 다니시던 피백의 내력을 알고는 있었거든요. 그분이 얼마나 아끼는 물건이었는지도 직접 보아 알았고요. 별신 달신께서 그 신성 한데 섞으신 데다가, 지극한 마음 장구한 세월 쏟았다면 뭐…. 바로 그런 것에서 신령이 비롯하는 법인 줄을 저도 익히 알지요. 즉 따지고 든다면야, 이 용종께서 월선 낭랑의 흔적 찾는 것을 말릴 수 있는 자격이 한낱 섬토인 제겐 없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등불마저 다 꺼진 광한전에 예비된 바 없던 손님맞이를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는다면 청지기 어르신도 나무라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한 손에 등롱 하나만을 밝혀 쥐고 그분을 안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쉽게 되셨습니다…. 하필 어르신 안 계실 때 오셔서. 저보단 그분께서 월선 낭랑을 더 잘 아시거든요.”

당연한 일입니다. 저야 어린 묘동이고. 그 어르신은 고릿적부터 낭랑의 오른손이었다고 하셨어요. 듣기로 낭랑께서 스무 천령과 합심하여 세상 빚으실 적에 그분 기억 영존토록 손쓰셨다지요. 그러니 아마 김 씨 어르신이셨다면 이 손님에게 들려드릴 이야기도, 보여드릴 것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러지 못하는 저로서는 퍽 죄송스러운 노릇이었지요.

“글쎄, 그리 생각하지는 않아도 될 듯하네. 아까도 말했지만 기별도 선약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것은 내 쪽일뿐더러….”

미리내님은 문득 말미를 흐리시더니, 잠시 사위를 천천히 둘러보셨습니다.

“등불은 내일이면 다시 켜게 될 것이옵고. 유성못도 수위가 줄었다 늘었다 한답니다. 다시 이만큼 찰랑찰랑 차오를 거예요. 또….”

저는 괜히 변명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가장 밝고 환한 묘정을 보여드리지 못한 게 자꾸만 아쉬워서요. 사위가 다소간 어둑한 대신에 계화 향이 약해진 빛 만큼 주변을 채우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그럼. 그렇겠지. 잘 알고말고. 오늘이 삭이지 않소.”

그래서 저는 달의 주기를 알고 있노라 말하신 미리내 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이 삭인 것을 알고서도 예까지 오셨다고요. 그건 꼭….

“김 씨야. 어디 있느냐? 너 자꾸 이렇게 직무유기할래?”

그 순간 저 바깥에서 대문을 쾅쾅 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왔습니다. 아뿔싸. 선객 맞이한답시고, 까맣게 잊어버려 늦고 말았구나 싶어 저는 펄쩍 뛰었어요. 김 씨 어르신이 신신당부하신 것이 있었거든요.

‘허고, 혹시 제존께서 행차하실지 모르니깐 염두에 두거라. 오늘이 삭이지 않느냐.’

잊을 게 따로 있지! 저는 허둥지둥 미리내 님께 잠깐만 기다려 주십사, 읍하였습니다.

“아이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몸이 둘이면 참 좋을 텐데 아직 분신술에는 능하지 못해서요….”

…헌데,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미리내 님을 예 망부석 시켜두고 제존 맞이하러 휭 가버리는 것도 조금 이상한 일이다 싶더라고요. 낭랑께서 이 용종의 모신 되신다면은 제존께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이 두 신령을 제가 각각 따로 맞이할 이유가… 있을까요?

“저… 함께 가시겠습니까? 제존께옵서도 아마 같은 연유로 찾아오셨을 텐데….”

그리고 저는 되돌아온 미리내 님의 말씀에 아, 이거 말실수했구나… 하고 깨닫고 말았답니다.

“제존께서도 그분 흔적 찾으시는가.”

웃전 심중 함부로 헤아린 죄에 방정맞게 떠든 죄까지. 내가 방금 구업 지었구나 싶어 이마를 탁 치고만 싶었죠.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 얻지 못한 어린 것들이나 할 법한 짓이고요! 업보에는 업보로 상쇄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성심껏 하는 것 또한 선업이지 않겠어요. 저는 대답 대신 미리내 님을 모시고 제존 앞에 나아갔습니다. 성신과 은하수룡 한데 계시니 은은한 빛도 솔찬히 밝더라고요. 그야말로 만월 같은 날이 됩디다.

“명경님!”

“어 복동이! 왜 니가 나오느냐!”

“오늘 김 씨 어르신 안 계십니다!”

“얼씨구. 허면 네가 광한문 앞에 딱 지키구 서얄 것 아냐.”

“선객 있사와요.”

“장선이? 아닌데. 고놈은 달 밝을 때만 와서 청승 떨잖아.”

“아 아니요!”

…미리내 님 앞에서 애써 잡은 무게가 홀라당 깃털처럼 날려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더 악쓰기 전에 미리내 님이 나서주셔서 다행이었지요. 제존께서는 낄낄 웃으며 제 머리를 마구 문지르다가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온 이를 보고는, 그저 딱 한 마디 하셨답니다.

“오.”

저는 주안상 봐 드리겠나이다 하고 얼른 물러났지요.

 

제일 높은 누각, 광한루에 매인 풍경이 간만에 옥음 내는 날이었습니다. 두 분께서 게 앉아 무슨 얘기 나누셨을는지, 저는 몰라요. 제가 알 일도 아닌 것 같구요. 저는 분수를 잘 아는 묘동이랍니다. 다만….

두 분 떠나시고 나니 광한전이 엄청나게 휑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빈 병이며 그릇 이고 누대에서 내려오는 길도 한세월인 양 느껴졌고요, 모두 잠들어 기를 편 고요는 야속하게까지 느껴집디다. 고작 두 분 왔다 가신 건데도요.

“묘정님,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달님 향한 마음들 날로 커져 가는데, 이 일을 어찌하실 거여요.”

저는 큰 신령이었던 적 없는 소심한 섬토인지라. 그 마음들의 크기가 무서울 지경이란 말이에요. 월선 낭랑께서는 까짓 이만큼은 돌아볼 만큼도 안 된다 싶으시려나요. 에구구, 또 또 함부로 생각하지. 버릇 고쳐야 마땅할 터인데 말이에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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