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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갚자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선생님. 정중한 말투와 더불어 따라붙은 호칭을 떠올리던 치즈펠은 히죽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간수했다. 나름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 벌써 몇 년 째지만, 제대로 된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흠흠. 역시 번듯한 곳이라 그런가, 마음가짐이 훌륭하단 말이지. 귀에 이어폰을 꽂아넣은 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버튼은 몇 줄이나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회사에 다니는구나. 프리랜서인 그와는 동떨어져 있는 세상이다. 새삼스러운 감개였다.

점심 시간도 지나고, 업무가 한창인 시간인 탓에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빠르게 1층에 도착했다. 빌딩 정문을 빠져나온 그가 신호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집에 들어가면 작업 계획을 세우고, 아니 그 전에 미뤄둔 청소를 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나서 보내준 원고를 확인하고… 아차. 작업을 시작하면 분명 나가기 싫어질 테니까 식료품도 쌓아 둬야했다. 바뀐 신호를 확인하고 신호등을 건넌 치즈펠은 빌딩 앞의 주차장에 발을 들였다. 차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곳을 가로질러가는 것이 빨랐기에 그는 주차되어 있는 차 사이를 요령껏 가로질렀다. 출퇴근의 러시만큼은 아니지만 차들은 간간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빠앙.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던 차 두 대가 치즈펠을 발견하고는 클락션을 울렸다. 이크.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그가 움찔하며 주차된 차량들 사이로 몸을 피했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두 대의 차는 짧은 기싸움을 벌였고 이윽고 한쪽 차가 움직였다. 운전자는 불만스러운 듯 치즈펠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는 가볍게 시선을 무시하며 핸드폰 화면을 터치해 노래를 다음 곡으로 넘겼다. 기다리던 맞은편의 차 또한 지나가자 치즈펠은 그제야 차 틈에서 빠져 나왔다. 여전히 차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기에 그는 주차된 차 쪽에 붙어서 걷기로 했다.

조심한답시고 차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던 탓인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 났다. 카 액세서리라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모양이지. 핸드폰으로 다음 미팅 계획을 확인하던 치즈펠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한 손길로 어깨의 가방끈을 당겼다. 쉬이 딸려오지 않아 조금 더 세게 당기자, 가방은 금세 딸려왔지만 노래가 울리고 있는 이어폰 너머로 무언가 똑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등골이 서늘해 진다. 캘린더 화면을 넘기던 손가락도 멈췄다.

…!

시야의 끄트머리로 슬쩍 보이는 차종은, 공영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외제차였다. 평소에 관심이 없는 탓에 브랜드명을 알 수는 없었지만 존재 자체가 이질적인 차는 여기 늘어서 있는 자동차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비싼 차일 것이라는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참이나 굳어 있던 치즈펠은 간신히 고개만 돌려 상황을 확인했다. 보닛 끄트머리에 붙어 있던(것이라고 추정되는) 은빛의 천사 엠블럼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악!”

참혹한 사건현장이다. 치즈펠의 입에서 무심결에 비명이 새어 나왔다. 보험처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자동차 관련 보험은 들어 놓지 않았는데…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엠블럼을 집어 들었다. 깔끔하게 떨어진 단면에, 붙여 놓을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붙였다가 티가 나는 것은 두번째 문제고,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엠블럼을 보닛 위에 조심히 내려놓은 치즈펠이 가방을 뒤져 메모장을 꺼낸 후 한 장을 뜯어냈다. 보닛을 받침 삼아 허리를 굽힌 채 또박또박 연락처를 적어 놓는다. 번호만 남길까 하다가, 변명 같지만 짧은 메모도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꼭 변상하겠습니다. 불어 온 바람에 메모지가 날아가지 않도록 와이퍼와 앞유리의 사이에 끼운 치즈펠은 보이지 않는 차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엠블럼만 붙이는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겠지. 블랙박스의 불빛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는 자리를 뜰 때 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강렬한 기름 냄새에 운전석에서 내리던 모로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래서 직접 오기 싫었는데. 가볍게 자동차 문을 닫은 그가 정비소의 널찍한 마당을 가로질렀다. 시원시원한 걸음걸이에 자동차를 살피던 정비공과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부담스러울 법한 시선 집중에도 모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사람들을 무시했다. 정비소 안쪽, 사무실이라는 플라스틱 간판이 붙은 실내 공간이 있었다. 안쪽에는 볼일이 없었기에 모로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TV를 시청하던 이가 벌떡 일어나 사무실 바깥으로 나와 모로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그간 형 차를 조금 빌려 쓰느라. 수리는 다 됐나요?”

모로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비소의 한 켠으로 모로를 안내했다. 수리된 차들은 마당 한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지만 그곳에 모로의 차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차들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차고의 문으로 향했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키 하나를 꺼내더니 차고의 문을 열었다.

정비소에 들어오던 2주 전의 그 날부터, 직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롤스로이스 팬텀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집 하나 없는 은빛의 차체 위로 대낮의 햇살이 미끄러져 반짝였다. 보닛 위에 손을 얹은 모로가 미소를 지었다. 엠블럼의 수리 뿐 아니라 기분전환 삼아 시도한 도색도 깔끔하게 마무리 된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금고로 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 안에 있던 자동차 키를 꺼냈다. 유난스러운 반응이라고 모로는 생각했지만, 출시가만 7억에 가까운 차를 다루는 것으로는 지나치게 당연한 행동이었다. 모로는 키를 받아 드는 것과 함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바로 타고 나갈 수 있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차 타고 오지 않으셨…”

“아. 그건 맡기고 가려고요.”

물론 결제는 형이 합니다. 저렇게 단언하는 이상, 모로가 몰고 온 차는 상당히 중상을 입고 있음이 틀림없다. 결제를 위해 사무실로 향하던 남자가 자동차 잠금이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스팔트에 끌리는 철제 바퀴 소리가 유난히 조용한 아파트 단지 내에 울려 퍼지자 치즈펠은 목을 움츠렸다. 이곳의 주민들은 매우 예민해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도 민원을 가장한 시비를 걸고는 했다. 주변의 도로까지 아파트 소속의 사유도로여서 외부의 차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 아파트는 무언가를 배달하러 오기에도, 배달을 받기에도 최악의 장소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평생 발을 들일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던 날, 친절한 경비원(보통 생각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아닌 젊고 건장한 사람이었다.)이 아니었다면 그는 짐수레의 존재도 모르는 채 맨 손으로 짐을 들어 옮겼을 것이다. 직접 하지 말고, 사람을 써. 집주인이자, 하우스 메이트이자, 치즈펠의 고용주이기도 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큰 짐이 오가는 이사 날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일상적인 장보기에 사람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래저래 복잡하게 얽히긴 했지만 그는 이 집의 입주 가정부였다. 장을 보고,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오는 것 또한 치즈펠의 업무 중 하나였다.



“오늘도 고생이시네요.”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젊은 경비원들이 아파트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다. 오며 가며 제법 마주친 적이 있어서인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가벼운 목례가 되돌아왔다. 대체로 재수없는 느낌의 동네이긴 하지만 안심은 된단 말이지. 아이들을 키운다면 좋을 것이다. 아이도 없는 주제에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던 치즈펠이 어느새 뒤에 따라붙은 차를 보며 움찔했다. 벌써 퇴근했나? 인도 안쪽으로 피한 그가 유심히 번호판을 살폈다. 차종은 다르지만 풍겨오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물론, 번호는 아는 것과 달랐다.


이름도 모를 외제차를 부숴 먹은 것이 벌써 세 달도 전의 일이었지만 그 사고는 아직 치즈펠의 뇌리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엠블럼 수리 값이 그렇게 비싸?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가격이었다. 차주와 얽히며 애인도 생겼고, 그 애인의 집에서 동거까지 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이득을 본 셈이지만 더 이상 외제차와 엮이는 일은 사양이었기에 그는 이미 차가 지나간 도로에서 더욱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낯선 차는 방문객용 주차장에 멈췄다. 그러는 사이 아파트 현관 입구에 도착한 치즈펠이 익숙하게 입구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자국 하나 없이 닦인 유리로, 방금 차에서 내린 양복 차림의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비쳤다.


열렸습니다.


늘 듣던 기계 음성에, 남자를 유심히 관찰하던 치즈펠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뒤에 선 남자는 재촉하는 일 없이 치즈펠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훤칠한 키에,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이다. 연예인인가? TV를 자주 보지않는 그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빤히 보고 있던 것을 들킬까 싶어, 치즈펠은 얼른 시선을 돌리고 앞서 걸었다. 엘리베이터는 마침 1층에 서 있었다. 낑낑거리며 짐수레를 끌고 타는 치즈펠과 달리 남자는 우아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유가 묻어나는 행동거지에 기시감이 들었다. 그가 인식할 정도면 남자는 상당히 유명한 연예인이 틀림없었다.


38층.


버튼을 누르자 확인하는 것처럼 짤막한 음성이 흐린 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남자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서 있었다. 뭐지? 치즈펠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같이 탄 남자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 이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무리가 있었다. 아름다운 성격을 가진 그의 하우스 메이트는 소음을 참을 수 없게 못 견디는 사람이어서 같은 라인의 아래층과 위층, 그리고 같은 층의 옆집까지 죄다 사들였다고 했다. 요새 회사 일로 바쁘다더니, 일이 덜 풀렸나? 옆집에 세를 주는 건가? 온갖 추측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남자는 짐을 가진 치즈펠이 먼저 내릴 수 있도록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치즈펠이 수레를 끌었다. 남자도 당연하다는 듯 그의 뒤를 따라왔다.


옆 집(이라고 하나 상당히 멀었다.)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는 치즈펠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잘 닦인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나는 선명한 구둣발 소리가 조금 섬뜩했다. 도어락 앞에 멈추자, 따라오던 발소리도 멈췄다. …혹시 강도인가? 자신의 물건이야 그렇다 치고, 집 안에는 어지간한 백화점 명품관은 부럽지 않은 의류와 액세서리들이 널려 있었다. 치즈펠이 조금만 더 명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남자가 걸친 양복이 모로가 출퇴근용으로 가볍게 입는 명품 브랜드의 기성 양복보다 훨씬 비싼 물건임을 눈치챌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자신이 장보러 나갈 때 걸친 가디건이 명품 브랜드의 일상복 라인인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안 열고 뭐하나?”



미적거리는 치즈펠의 움직임이 의아했는지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 뜬 채 말을 걸어왔다. 강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신뢰감이 있고 진중한 목소리다. 그 쪽이 강도일까봐요. 라는 대답은 나오지 못한 채 눈동자를 굴리는 치즈펠의 모습에 무표정하던 남자의 눈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내가 열까?”


“아, 아뇨!”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치즈펠의 의심이 단번에 걷혔다. 뭐, 집주인의 친구라거나 그럴 것이다. 치즈펠이 입주하고 나서는 덜해졌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 이 집은 집주인의 친구들에겐 아지트 비스무리한 것으로 쓰였다고 했다. 치즈펠 또한 수리비 문제로 이 집을 방문했던 날, 제 집처럼 활보하는 집주인의 친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애인이기도 한 사람은, 어마무시한 부자인만큼 여러 분야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연예인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문을 열자 남자는 집주인이라도 된 양 자연스레 열린 문을 잡고 서서 먼저 들어가라는 듯 치즈펠에게 손짓했다. 치즈펠이 수레에 올려 둔 박스를 들어 집 안으로 옮겼다. 수레를 돌려주러 가야하지만 손님을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신발을 벗은 남자가 거실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모습에 치즈펠은 더 이상 그를 의심하는 일 없이 사온 것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집 안을 터는 일 없이 거실 소파에 앉은 남자는 잠깐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엿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치즈펠은 관심을 거두고 정리에 몰두했다. 마침 선반에 놓인 커피가 눈에 띄었다. 카페인이 지나치게 잘 듣는 체질이라는 이유로 애인으로부터 커피 금지령을 받았지만 오기 전에 마신다면 문제 없을 것이다. 물을 올리고 필터를 찾아 뒤적이고 있자,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커피 마시려고 하는데.”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치즈펠이 머쓱함에 먼저 말을 꺼냈다. 남자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다가왔다. 모로가 직접 갈아낸 커피 가루가 담긴 통을 들어 가볍게 냄새를 맡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용으로 쓸 잔을 꺼내는 사이 물이 끓자 남자는 가스레인지를 끄고 능숙하게 핸드 드립 주전자를 들었다.



“아, 제가 할게요!”


“이 정도는 내가 하지.”



태어나 부엌일은 고사하고 펜과 젓가락 밖에 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는 드리퍼에 끼워진 필터를 적신 뒤 능숙하게 물을 부었다. 치즈펠이 원두를 붓자 그 위로 물을 부어 서버 위로 커피를 내리는 일련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치즈펠은 동그랗게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카페 사장이세요?”



천천히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확인하는 남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휘어 웃었다.



“아니.”


“역시 연예인? 아, 제가 TV는 별 관심이 없어서…”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그럼 모델.”


“틀렸어.”



바리스타(처음 물었던 카페 사장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셰프, 큰 키로 온갖 운동 종목을 대며 선수일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으나 남자는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힌트도 없는 스무 고개가 이어지는 사이 커피가 다 내려졌는지 그는 치즈펠의 앞에 놓인 머그에 커피를 따라주는 것으로 스무 고개의 끝을 알렸다. 적당히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치즈펠이 투덜거렸다.



“아니, 이런 사람이 회사원일 리도 없고.”


“맞아, 회사원.”


“…예?”



치즈펠은 자신이 커피를 삼키는 중이 아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입 안에 액체가 들어 있었다면 저 대답을 듣자 마자 다 뱉어 냈을 것이다. 눈 앞의 잘생긴 사람이 회사원이었다는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퇴근할 시간이던가? 아닐텐데. 안 마신 척 하기에는 온 집 안에 이미 커피향이 가득하다. 아니, 그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였으니 정상참작 해 줄지도 모른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문이 열렸다. 평소에도 굳이 마중을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찔리는 일이 있었기에 치즈펠은 은근슬쩍 자신의 머그를 싱크대로 치워버리고는 주방을 나섰다. 지금 막 귀가한 이는 평소에는 본 적 없는 다급하고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놀라서 묻는 치즈펠을 보며 그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 왔다며.”


“…형?”


“벌써 갔어?”


“내 동생 얼굴은 보고 가야지.”



어느새 뒤에 선 남자가 치즈펠 대신 대답했다. 밝아지려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치즈펠은 현관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쩐지, 본 적 있는 얼굴이라 했더니 연예인이 아니라 둘이 형제였…



“뭐????”



한 박자 늦은 반응에 집주인, 모로가 이마를 짚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와 형은 처음보는 사람도 형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닮은 사이였다. 저 사람이 형인 줄도 모르고 집에 들였다는 것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쓸데없이 더욱 친절했을 모습을 상상하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게다가, 저 인간이라면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즈펠을 구워 삶았을 것이다. 모로가 형에게 눈을 흘겼다.



“얼굴 봤으니까, 가지?”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애가 깊은 것도 아니었다. 얼굴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로는 지적하지 않고 그저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모로의 말에도 형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별 일이네. 네가 모르는 사람도 집에 들이고.”


“신경 꺼.”


“밀비가 아쉬워하더라.”


“걔네 집이 내 집 보다 더 넓어.”


“옛 친구들에게 소홀해진 것 아냐?”


“걔들한텐 소홀할 것도 없어서.”



끼어들 틈 없이 이어지던 형제의 대화가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자 사이에 서서 눈치를 보던 치즈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3인분으로 할까?”



큭, 하는 웃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모로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20년 전이었다면 주먹이 나갔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형제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거북했던 듯 치즈펠이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 복도를 벗어났다. 사라진 뒷모습을 쫓는 시선에 모로가 짜증스럽다는 듯 제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팔짱을 낀 채 벽에 삐딱하게 어깨를 기댄 그의 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모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정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모로의 짜증 같은 것은 정말로 별 것 아니라는 태도였기에 더더욱 짜증이 치민다.



“재미있는 친구네.”


“관심 갖지 마.”


“그렇게 말하면, 없던 관심도 생기겠는데.”



그의 형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모로의 경고를 허투루 들을 사람은 아니겠지만 현명한 만큼 모로의 분노가 허용하는 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 풀에 지쳐 그만 두겠지만, 모로는 치즈펠에게 접근하는 형을 그냥 둘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형 또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로가 짜증스럽다는 듯 형의 어깨를 치며 복도를 벗어났다.


주방을 살피자, 정말로 3인분의 식사를 만들 모양인지 냉장고 안을 뒤적이는 뒷모습이 반겼다. 벌써 쌀은 씻어 안쳤는지 밥솥 타이머가 작동하고 있었다. 말없이 냉장고를 밀어 닫자, 방해를 받은 것이 귀찮다는 듯 찡그린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외식하자.”


“아, 셋이서?”



그럴 리가. 빈정거림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모로는 미소를 지었다. 화가 난 것은 형 때문이지, 치즈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게다가, 화를 내는 것 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다.



“아니, 저 쪽은 형수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아…!”



형수님은 커녕 애인도 없을 것이다. 졸지에 형을 유부남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모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복도에선 들리지 않겠지만 뭐, 들어도 상관 없었다. 아 그래서 대답을 안 하신거구나. 치즈펠은 혼자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간다니까 배웅할 겸, 바로 나가자.”


“바로?”


“싫어?”



허리에 팔을 감고 가볍게 끌어당겨 속닥이자 단번에 빨개지는 귓가와 목덜미에 모로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형이 그런 일 없다며 돌아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보이는 인파에 모로는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한시라도 빨리 회사와 멀어지고 싶은 퇴근시간에, 업무에 지친 직장인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어진 불길함을 느낀 모로가 발걸음을 늦추고 상황을 살폈다. 정문을 나서기 전, 몰려든 사람들의 머리 너머 보이는 낯익은 자동차를 보자 자신의 불길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가 주먹을 쥐었다.


모로는 그제야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를 깨달았다. 번화한 도심 한복판에서 외제차는 그다지 보기 힘든 존재가 아니었지만, 국내에 들여온 수가 한 손에 꼽히는 스포츠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브랜드나, 차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는 스포츠카를 무시하고 지나치기는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차가 이런 평범한 오피스 빌딩 앞에 서 있다면 그 차를 타게 될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지사. 딱히 씀씀이에 대해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의 주목은 원하지 않았다.


선망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차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뒤를 지나친 모로가 그 차와는 상관이 없다는 양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섰다. 알아서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였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모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키의 소유자였다.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망할. 오지 않겠다는 듯 헤드라이트만 깜빡이는 자동차를 보며 모로는 빠른 걸음으로 자동차에 다가갔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차 문이 열린다. 평범하게 옆으로 열리는 것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문짝에 사람들 사이에 감탄이 흘렀다.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싱글거리는 낯짝에 모로는 들고 있던 종이 쇼핑백을 집어 던지며 조수석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은 이의 품 안으로 떨어진 쇼핑백 안에서 색색의 포장지로 쌓인 것들이 몇 개 쏟아져 나왔다. 난데없는 습격에도 운전자는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임자가 있어도 여전히 인기 좋네.”


“출발이나 하지?”



깔끔하게 그의 말을 무시한 모로가 턱짓하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승차감이라는 점에서 실력은 합격점이었지만 모로에게 형의 운전 실력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무심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업무용의 자잘한 연락이 들어와 있었으나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고 가장 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스케줄 없으니까 안 나가고 기다리고 있을게. 두시간 전에 읽었던 메시지다. 그 외의 새로운 연락은 없었다. 스케줄에 변동이 없다는 것은 좋은 거지. 아침부터 크게 틀어져 버린 자신의 하루를 떠올린 모로가 한숨을 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문제없이 잘 굴러가던 차가 출근길 도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퍼진 것이 시작이었다. 보험사를 불러 처리를 하고, 수리를 위해 보낸 것은 좋았으나 모로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동은 차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집에 있던 치즈펠이, 그가 있는 장소로 택시를 불러줄 때까지 모로는 겨울의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상주하고 있는 운전기사들이 떠오른 것은 회사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그리고 집에 두고 온 물건을 떠올렸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모로에겐 차도 기력도 없었다. 그나마, 아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미리 집에 연락을 넣어 퇴근길을 부탁했던 것인 데…



“집으로 데려다 주면 돼?”


“주소도 안 받고 왔어?”


“집에서부터 에스코트할 줄 알았지.”


“시끄러워.”



면허증을 딴 이래 운전대를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이 하는 도심 주행 치고 모로의 형은 복잡한 도심을 그럭저럭 능숙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동하는 시간마저 스케줄로 꽉 차 있는 바쁘신 분의 운전이었지만 모로는 심드렁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선 카 오디오 대신 콧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모로 자신도 상당한 마이 페이스의 사람이라 자각하고 있지만 형은 그보다 더했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바에는 상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아. 근데 오늘 그 가게 가려고?”


“왜.”



꿍꿍이가 있는 듯 웃고 있는 모습에 퉁명스러운 대꾸가 무심결에 튀어나갔다.



“…그냥 물어봤어.”



대답하기 전의 짧은 침묵이 상당히 거슬렸으나, 혼자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 대고 무슨 일이냐 묻고 싶지 않았기에 모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을 유지한 채 목적지 근처에 다다르자, 모로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된다. 거리를 걷는 다른 사람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심결에 허물어지는 얼굴에 옆자리의 형이 눈웃음 쳤지만 모로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세워.”


“왜?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쓸데없이 눈만 좋아서는. 모로의 요구는 가볍게 묵살당한 채, 차는 정확히 목적지 앞에서 멈춰 섰다. 본 적 없는 스포츠카가 멈추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차를 바라보는 치즈펠의 시야를 차단하듯 모로가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이네요. 틈을 놓치지 않고 살가운 척 건넨 형의 인사에 치즈펠 또한 꾸벅 마주 인사를 했다. 이 정도는 참아주지. 치즈펠의 코트깃을 정리하던 모로가 뒤를 돌아 운전석의 형을 바라보았다.



“얼른 가. 교통사고 조심하고.”


“고마워. 데이트 ‘잘’ 하고.”



‘잘’에 묘하게 액센트를 주는 것이 거슬려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지만 형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 않고 윙크를 한 번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마음에 안 들어. 얄미운 뒤꽁무니에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런 품위 없는 짓을 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가볍게 숨을 고른 모로가 기다리고 있었을 자신의 애인을 돌아보았다.



“형님이 데려다 주신 거야?”


“형을 부른 건 아니었는데 쓸데없이 왔네.”


“어떻게 올까 걱정했는데, 진짜 잘됐다. 형님이 친절하게 태워 주시고.”



혈육의 험담이라는 것이, 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 밖에는 안되는 일인지라 형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던 탓인지 치즈펠은 그의 형에 대해 지나치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모로는 그저 강제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의 얘기로 눈 앞의 연인에게 불쾌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모로는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추운데 안에서 기다리지. 왜 밖에 나와 있었어.”


“…아?”



모로의 걱정에 돌아온 것은 늘 있었던 바보 같을 정도로 씩씩한 대답이 아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껄끄러웠던 예감이 마음 속에서 고개를 치켜든다. 설마. 그는 불 꺼진 창문을 애써 무시하며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문고리에 무언가 걸려있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안내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닫았길래… 그냥 이 앞에서 만나자는 건가 싶었지.”



CLOSED.


오너 셰프와 친한 사이라면 번거롭게 예약을 하지 않아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 자리가 있었기에 일정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휴무 일이라고 해도 직접 부탁한다면 기꺼이 가게를 열어 자리를 내어주었겠지만 그는 당연하게도 연락조차 잊고 있었다. 이래서였군. 형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린 모로가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겨울 바람에 애처롭게 덜컥이는 안내판을 당장 바닥에 내팽개치지 않은 것 만으로도 그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가만히 평소와 다른 모로의 상태를 살피던 치즈펠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그럼.”



안 괜찮을 건 없지. 모로가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분위기 있는 식당이라면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알고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날이 날인데다, 당일 예약인만큼 그의 성에 찰 만한 자리는 아니겠지만…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아는 가게였어?”



비싸 보이지 않는 가게라고 해도 미식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진 퀴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의외라 모로가 새삼스럽다는 듯 치즈펠을 바라보았다. 감개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치즈펠이 그쪽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게 말고, 이 동네.”


“자주 왔어?”


“당연하지.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학교야.”


“졸업한지 10년이나 됐는데 우리, 라고 할 것 까지야?”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별 것 아닌 말에도 재깍 반응하는 모습에 모로는 배배 꼬인 마음 속이 상당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그가 세웠던 일정의 상당수가 틀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로는 웃었다. 뭐, 정 안된다면 조금 촌스럽기는 하겠지만 근처 호텔 라운지에 가는 방법도 있었다. 촌스럽기는 해도, 괜히 왕도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아, 맞다. 그 가게 아직 있나?”



무언가 생각난 듯 치즈펠의 눈이 동그래진다. 가게? 응. 내가 진짜 자주 가던 집 있거든.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 흥미가 동한다. 함께 지낸 지 꽤 된 것 같은데도 치즈펠의 입맛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제 입에 맞는 것을 먹을 때는 곧잘 먹는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은 예약도 하기 힘든 고급 요정에서 몇 젓가락 깨작거리고 마는 때도 있었다. 그런 치즈펠이 자신 있게 자주, 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 놀라웠다. 주소록에서 몇 개의 직통 번호를 찾던 모로의 손이 멈췄다.



“거기 가보자.”


“어딜?”


“방금 말한 가게.”


“…어?”


“열었을 거 아냐.”


“아. 진짜? 뭐… 다른데 가는 거 아냐?”



당연하다는 듯 모로라면 플랜 B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치즈펠의 믿음에 모로가 쓰게 웃으며 닫힌 가게를 턱짓했다. 저런. 더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깨달은 치즈펠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평소였다면 곱게 넘어가주지 않았겠지만 모로는 별다른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는 치즈펠을 바라보았다. 아직 있나봐! 모로와 달리, 치즈펠은 다행스럽게도 오늘 치 행운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



“…괜찮겠어?”


“뭐가?”


“아니, 뭐. 아냐.”



스테인리스 컵에 생수를 따르던 치즈펠이 말끝을 흐렸다. 모교 근처에 오는 것은 졸업하고 나서 상당히 오랜만이었고, 드물게도 당황한 모습의 모로가 또 드물게 허락해준 메뉴 선정에(모로는 평소에 치즈펠의 식생활을 탐탁치않아 하는 사람이었다.) 신나서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만으로도 이 가게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는 남자가, 등받이도 없는 조악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못할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치즈펠은 그저 물만 홀짝거렸다.


모로는 다리를 꼰 채 앉아 탐색하듯 가게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바쁘게 살던 그 시절에 거의 집 같이 들락거리던 가게이기 때문인지 치즈펠은 집으로 모로를 데리고 온 기분이었다. 평생 제대로 된 분식을 입에도 대본 적 없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이런 음식을 먹여도 되는가? 치즈펠이 고민했지만, 겉보기로는 평범하게 먹음직스럽지만 실제로는 굉장한 맵기를 자랑하는 이 집의 오므라이스를 먹여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킨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치즈펠은 은근슬쩍 자신 몫으로 정해 두었던 돈까스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잘라줄까? 어린애 취급하듯 가벼운 물음이었으나 그 안의 다정함을 모르지 않는다. 돼, 됐거든? 난데없는 친절함에 양심이 찔린 치즈펠이 말을 더듬거렸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기에 모로는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앞접시에 자신의 몫을 덜었다. 자르는 것이 고기인지, 접시인지 느낄 새도 없이 치즈펠의 신경은 온통 모로에게 쏠려 있었다. 예의 같은 건 따질 필요 없는 평범한 분식집이었음에도 자연스레 몸에 밴 우아함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때?”



지나치게 칼질을 해 너덜너덜한 튀김옷이 분리된 돈까스를 얼른 입 안으로 감춘 치즈펠이 물었다. 맛있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모습에 치즈펠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매운 것을 먹는다는 건 치즈펠이 유일하게 모로를 이길 수 있는 분야였다. 그보다도 매운 것을 못 먹는 모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새 맛이 바뀌었나? 치즈펠이 숟가락을 들어 맛을 봤다.



“어때?”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아챘을까.



“일부러 그랬지.”


“먼저 말 안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니, 내가 좀 잊어버릴 수도 있지.”


“아, 그러세요?”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가지고 있는 철칙이었기에 그 후로는 가위바위보나 끝말잇기 같은, 평소의 모로라면 절대 어울려주지 않았을 게임 따위를 하며 시킨 것을 말끔히 해치웠다. 물론 대부분의 승리는 모로가 가져갔기에 치즈펠의 입은 매운 것을 먹어 퉁퉁 부어 있었다. 배불러서 기분 나빠. 치즈펠이 투덜거렸지만 모로는 코웃음 치며 지갑을 꺼냈다. 안쪽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든 검은색 카드에 치즈펠이 기겁을 하며 그것을 도로 집어넣게 했다.



“여기 백화점 아니거든!”


“아, 맞다.”



모로가 자잘한 소비를 할 때나 쓰는 플래티넘 카드를 꺼내는 것 보다도(이것도 분식집에서 꺼낼 것은 아니었다.) 치즈펠이 현금을 꺼내 계산하는 것이 빨랐다. 다시 지폐를 꺼내려는 모로의 팔을 붙잡은 치즈펠이 인사를 하곤 가게에서 강제로 끌고 나왔다. 평소답지 않게 엉성한 점이, 한심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치즈펠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불만스럽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모로도, 웃고 있는 치즈펠의 모습에 힘이 빠졌는지 표정을 풀고 가볍게 웃고 있었다. 한참이나 웃던 치즈펠이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차도 없으니까, 걸어서 갈까?”


“길은 알고?”


“모르면 지하철 타지 뭐.”



가시지요. 내밀어진 작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모로가 조심스레 마주 잡아 쥐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놀랐잖아!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치즈펠이 불만스럽게 소리를 질렀지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모로는 가볍게 치즈펠의 몸을 받치고는 쥐고 있던 손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목적지인 집으로 가는 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아, 예전에는 여기에…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치즈펠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끝이 가리킨 장소 보다도 대학 시절 팬시점에서 샀다는 낡은 손목시계가 모로의 눈에 매우 거슬렸으나, 공교롭게도 준비한 선물은 집에 있었다. 모로는 오늘의 불운함을 탓하는 대신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거기에 가면, 있지… 밤샘작업 하느라 엉망이 된 애들이 맞이하는데…



“있잖아.”


“응?”



말을 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직한 부름에 치즈펠은 하던 말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모로를 올려다보았다. 허리를 굽힌 모로가 치즈펠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어…? 어…?”


“뭐해. 안 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의 모로가 여전히 얼떨떨하게 서 있는 치즈펠을 재촉했다. 옆에서 함께 걷는 발소리에 모로는 웃었다. 거리를 걷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예전 의견 따위는 무시하기로 했다. 욕심쟁이인 그에게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



“아, 이런.”



멈춰선 앞차에서 비상등이 깜빡이는 것을 본 그는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하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차 안에 흐트러진 초콜릿들이 신경 쓰여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가 살짝 부딪힌 모양이었다. 교통사고 조심하고. 웃고는 있었지만 잔뜩 가시 돋친 동생의 악담이 떠올랐다. 알았다면 퍽 기뻐했을 상황이었지만 동생은 자리에 없었다.


흠. 사고를 낸 장본인이면서도 남자는 차분한 얼굴로 비상등을 켠 채 차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들이 받힌 앞차도 남들이 흔하게 굴릴 법한 외제차인데다 그의 차는 본가의 차고에 있던 차들 중에서도 꽤 눈에 띄는 녀석으로 집어온 탓에 신호대기 중인 운전자들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흘끔거리고 있었다. 앉아서 앞차의 상태를 살피니 범퍼가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뒷목이라도 잡고 나오려나? 직접 운전을 해본 적이 많지 않은 그로서는 사고를 낸 적이 없었기에 주워들은 지식들로 생각이 흘렀다. 합의금 몇 푼 쥐어 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귀찮게 일이 커지는 것은 질색이었기에 그는 망설임없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네, 전무님.


“지금 내가 사고가 나서요.”


보험사 연락해 두겠습니다. 차는 새로 보낼까요?


“아. 차는 됐고. 여기가…”



어디였더라. 주변의 표지판을 살피기도 전에 앞차의 차주가 내리는 것이 먼저였다. 4,50대나 탈 법한 묵직한 중형 세단과는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남자였다. 기껏해야 그의 또래쯤 되었을까? 짙은 머리색과 햇빛을 덜 본 듯한 흰 피부에 순간, 그가 아는 사람과 착각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뒷목을 잡는 일 없이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차 상태를 확인하던 차주는 바른 걸음으로 운전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좀 이따 전화할게요.”


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직접 상대하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가까이 다가와 창문을 두드리는 손짓에 그가 창을 내렸다. 비싼 스포츠카와 사고가 났다는 것에 안절부절 못할까? 한순간 닮았다고 착각했던 ‘누군가’의 반응을 예상하며 그는 차주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워하는 비장의 미소였으나 차주는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선한 반응이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곧 보험처리…”


“별거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갈 길 가죠.”



뭐?



“그럼 이만.”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그는 차주가 차로 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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