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Eorzea
잠깐만.
목소리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들어왔던 느긋한 목소리와 달리 긴장하고 있었다. 치즈펠이 움직임을 멈췄다. 방과 후의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운동장에는 아직 부 활동을 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지만 거의 텅 비다시피 한 교사校舍, 그것도 4층의 교실에 신경을 쓸 만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들려온 목소리인지 알아차리는 것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보나 마나, 그 귀찮은 서번트일 것이다. 치즈펠은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손을 움직여 교과서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목소리는 아랑곳 않고 이어졌다.
“서번트의 기척이다.”
알게 뭐야. 난폭하게 가방의 지퍼를 잠근 치즈펠이 한 쪽 어깨에 가방끈을 걸쳤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과제니 시험이니 하는 것들로 꽉 차 있어서 ‘저런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당번인 날이기도 했다. 창문이 잘 잠겨 있나 꼼꼼히 확인한 그는 칠판 구석에 걸린 자물쇠와 열쇠를 챙겨 들어 교실을 나섰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따라오는 기척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매우 거슬렸지만 일일이 화내는 것은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랬다간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 의도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치즈펠은 최선을 다해 모른 척을 했다. 그렇지만 마냥 참아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걸이가 평소에 비해 난폭해져 있었다.
교무실의 지정된 자리에 반 열쇠를 두고, 남아 있는 선생님들에게 사탕이니 젤리니 하는 것들을 받아 들고 나서야 치즈펠은 건물을 나섰다. 운동장에 남아 있던 이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어 아는 체를 하며 교문을 빠져나갔다. 흐음. 인사를 나눌 때 마다 평가하듯 짧은 감탄을 내뱉는 이에, 치즈펠은 결국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만해.”
“뭐를?”
“내 주변에 얼쩡거리는 것.”
“그치만, 나를 소환한 마술사는 너니까.”
네 마력이 있어야 현계가 가능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건가? 마스터.
뻔뻔스럽게 이어지는 대답에 반박할 말이 없어 치즈펠은 입을 다물었다.
*
성배전쟁에 대한 지식은 다소나마 알고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상당히 그 피가 옅어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치즈펠은 어엿한 마술사 가계의 후계자였다.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전수한 마술적인 지식 따위는 없었다. 그의 가문은 마술사로서 ‘근원’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 가문이었다. 몇 대에 걸쳐 이어오던 마술 각인이 열화 되어가던 그때, 나아가지 않는 연구를 계속해 나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가문은 조율사를 고용해 큰 비용을 들여 각인을 수복하는 것 대신, 마도魔道에서 등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요즘에야 어지간히 오래된 명문 마도 가문이 아닌 이상, 과학에 마술이 따라 잡힌 시대가 도래했으니 마침 잘된 일인 거라고 치즈펠은 늘 생각했다.
본래라면 마도와는 관계없이 평범하게 자란 그가 ‘성배 전쟁’에 대한 지식을 얻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다. 흥미가 생긴 것이 있다면 쉽게 잊지 못하고 끈질기게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치즈펠은 그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에 재미를 느끼고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 ‘그곳’을 발견했던 것은 유달리 추웠던 겨울날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일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지만 벌을 받느라 그곳에 들어갔다는 것만 기억난다. 반성할 때까지 있으라는 말과 함께 치즈펠은 마당 한 편의 창고에 갇혔다.
어두운 곳은 싫어! 울며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렸지만 어린 자신은 꽤 큰 잘못을 저질렀던 모양이었다. 가두겠다고 겁만 주던 평소와 달리 어머니는 정말로 치즈펠을 안에 둔 채 그곳을 떠났다. 천장에 작게 난 창문으로부터 쏟아지는 달빛이 전부인 곳에 갇혀, 꽤 오랫동안 울었던 것 같다.
들으라는 듯 소리 내어 우는 것 마저 지쳤을 때가 되어서야, 치즈펠은 그 안이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책장(텅 비어 있었다.)과 알 수 없는 도구들이 잔뜩 먼지가 낀 채 구석에 놓인 책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준비된 거대한 홀인 것도 같았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벽면으로는 좀체 볼 일이 없는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바닥의 중앙에는 언제 그렸는지 빛이 바래버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대한 원 안에, 또 원. 그 안에 그려진 육망성과 알 수 없는 문양들. 이제 다 됐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찾으러 올 때까지 처음 보았던 문양에 마음을 빼앗겨 있었다.
그곳을 나온 치즈펠은 도대체 어떤 곳인지, 무엇을 위한 곳인지 알기 위해 부모에게 물어보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 그저 창고라는 답만 돌아왔다. 큰 문양이 그려져 있었어! 그렇게 설명했지만 그런 것은 본적 없다며 즉시 부정당했다.
그렇게 큰 문양을 못 봤단 말이야? 실망하는 것도 잠시, ‘그곳’에 대한 답은 의외로 빠른 때에 알 수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늘 병석에 누워있던 조부에게서 부름이 있었다. 문양을 보았다고? 조부는 놀란 듯 병실을 찾아온 치즈펠을 바라보았다. 병상 옆의 보호자용 침대에 앉은 치즈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조부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우린, 마술사 가문이었단다.
누구나 자신이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실제임을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치즈펠은 단언할 수 있었다. 처음 ‘마술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심장이 뛰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어떻게든 마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조부의 병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마술사로서의 대가 끊긴 것은 조부의 조부가 살아있던 시절. 어렸던 조부의 단편적인 기억과 얼마 전수하지 못한 지식에 의지한 이야기였지만 ‘특별함’을 인정받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문의 뿌리에 기꺼이 관심을 보이는 손자가 기특했던 것인지, 조부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의 치즈펠에게 어릴 적 보았던 ‘그곳’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곳은,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마술사의 공방이었고 ‘근원’으로의 길을 열기 위한 싸움을 위해 서번트를 소환하던 곳이라고 했다. …서번트? 치즈펠이 되물었지만 조부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기력과 기억이 다해간 조부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책 몇 권을 치즈펠에게 주었다.
1년 뒤, 성배 전쟁이 열린단다.
조부의 유언이었다. 마술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손자에게 마지막으로 알려주려던 정보였던 것인지, 아니면 손자와 비슷할 정도로 ‘마술사’ 세계를 동경한 조부의 은근한 부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치즈펠은 1년 후의 그날까지, 조부의 유언을 잊지 못했다. 물려받았던 책을 들고 공방에 발을 들인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소환된 성배. 마술사들의 대전이 벌어지는 장소. 적당한 마술 소양을 가진 마술사.
나는 정말로 마술사인 걸까. 치즈펠은 줄곧 인식하고 있던 자신의 ‘특별함’을 시험할 좋은 기회일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소환의 날.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책에는 서번트를 소환하는데 필요한 과정이 쓰여 있었다. 마법진을 그리고, 소환의 제물이 될 ‘성유물’을 준비하는 등의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마술에 대해 무지한 치즈펠에게는 본다고 해서 바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소환절’이라는 구절을 읊는 것 뿐이었다.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내 아래에, 내 명운은 그대의 검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천장에 작은 창이 나 있었지만, 창문을 연 기억은 없었다. 그는 아랑곳 않고 다음 구절을 외웠다.
“성배의 의지에 따라 이 뜻, 이 이치를 따른다면 응하라. 맹세를 이곳에.”
나는 영원히 모든 선을 이루는 자, 나는 영원히 모든 악을 누르는 자.
살랑임은, 돌풍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제대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온 몸의 혈액이 요동치는 것이 피부밑으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와중에, 오른쪽 눈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책을 쥐지 않은 오른손을 간신히 들었다. 손등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해서 보고 있을 틈은 없었다. 치즈펠은 당장에라도 녹아 내릴 것 같은 오른쪽 눈을 손으로 눌렀다. 눈가를 덮는 손이 유달리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대는 삼대 언령을 두르는 일곱 하늘, 억지의 고리로부터 오라, 천칭의 수호자여.”
그대로 눈동자가 녹아 없어졌다고 느낄 만큼 강렬한 통증이 찾아 든다. 결국 무릎이 꺾인 치즈펠이 책을 놓치고는 바닥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돌풍은 서서히 가시고 있었다. 눈의 통증도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나아져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던 모양인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니,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피? 손바닥에 묻어난 자신의 피를 얼떨떨한 눈으로 보고 있느라, 치즈펠은 밀폐되어 있는 공방 안에 자신 말고도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낯선 발소리가 나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쏟아지는 달빛을 그대로 받으며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천장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키가 컸지만 거대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어두운 공방 안에 달빛을 받은 머리칼이 뿌옇게 빛난다. 양 쪽의 색이 다른 눈이 치즈펠을 향했다. 성공, 한 건가? 남자가 치즈펠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치즈펠은 무심코 엉덩이를 뒤로 뺐다. 남자의 표정이 흐트러진다. 웃는걸까. 묘한 표정의 남자는 더 이상 치즈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묻겠다. 낮고, 힘 있는 목소리.
“그대가 나의 마스터인가?”
*
이래저래, 애물단지 같은 저 서번트와 지낸 것도 벌써 사흘째였다. 처음 공방 안에서 만났던 때를 제외하고, 늘 영체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학교의 다른 사람에게 들킬 일은 없었지만 그의 서번트는 보이지 않는 대신, 성배 전쟁에 참가할 것을 끊임없이 종용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관둘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서번트는 사흘째 지치지도 않고 성배 전쟁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근원으로 갈 수 있는 열쇠이자, 만능의 원망기인 성배를 얻기 위해 벌어지는 마술사들의 전쟁. 단순히 마술 실력을 겨루는 일이었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치즈펠로서는 무리라며 발을 뺐을 것이다. 하물며 목숨을 건 전장. 소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목숨을 걸 만큼 간절한 것도 아니었기에 치즈펠은 성배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주택가에 접어들자, 인적은 확실히 드물어져 있었다. 주변을 살핀 치즈펠이 목소리를 높였다.
“널 부른 건, 단순한 시험이었다고.”
“그런 건 상관없어. 성배는 네가 마스터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걸 테니까.”
“필요 없으니까 너 있던 데로 돌아가는 게?”
“끝이 오지 않는 한 돌아갈 수는 없지.”
“끝?”
“네가 다른 마스터에게 죽거나, 내가 패배해 사라지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하는 태도가 너무 얄미워서, 치즈펠은 그가 있을 법한 공중을 힘껏 노려보았다.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 요는, 그의 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한참 자리에 서 있던 치즈펠이 다시 발걸음을 뗐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치즈펠이 외출할 때 마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저 서번트는, 집 안에서 만큼은 공방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누군가 성배 전쟁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보낸다면 저 서번트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위험.”
갑작스레 강한 힘이 치즈펠을 뒤로 끌어당겼다. …넘어진다! 치즈펠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행히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누군가의 팔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치즈펠의 허리를 감아 안고 있었다. 피부로 전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익숙한 마력의 흐름.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이 치즈펠은 자신의 서번트를 올려다보았다.
“너, 내가 밖에서는 함부로 나타나지 말라고…!”
“아, 긴급 상황이라서.”
태연함이 지나쳐 뻔뻔한 대답과 달리, 눈빛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자신만만한 듯 웃고 있는 얼굴에 별다른 위기감은 들지 않는다. 일견 부드러워 보이지만, 선이 굵고 고집스러운 얼굴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홀리듯 서번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잠시였다. 근처에서 제트기라도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소음에 치즈펠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서번트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검을 뽑아 날아온 것을 쳐냈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부딪힌 화살이 바닥을 굴렀다.
“아, 정말 적성에 안 맞는 클래스라니까.”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통통 튀는 듯한 목소리였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치즈펠 또래로 보이는 이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커다란 후드에 청바지. 나름대로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치즈펠은 잠시, 마스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풍겨 나오는 마력은 일반적인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아처인가.”
“알면서 묻는 거, 좀 촌스럽지 않아?”
“쓰러트려야 할 상대 정도는 확인차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과연 세이버. 고지식한 기사님이네.”
소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나눌 말은 없었다. 거대한 마력의 충돌에 치즈펠이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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