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g

마킹

문득 느껴지는 허전함에 모로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자신의 옆자리를 쓸었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온기는 없었다. 상대방의 패턴을 생각해보자면 지금 시각이라면 가벼운 조깅 후, 샤워까지 끝내고 나갔을 시간이다. 세계선수권이 끝나자마자 선수촌에 입소한 첫날이었음에도 몸에 익은 루틴은 깰 수 없던 모양이었다. 먼저 들어와 기다린 사람을 위해 하루 정도는 건너 뛰어주지. 태평한 생각을 한 모로가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직 풀지 못한 채 방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캐리어였다. 캐리어의 주인은 가장 먼저 짐을 정리하고 싶어했지만, 새벽까지 치대던(그는 종종 모로의 행동들을 그렇게 말하곤 했다.) 모로를 우선해 주었다. 흐흥.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낸 모로가 욕실로 향했다.

자신이 배정받은 방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으나 모로는 거리낌 없이 남의 욕실을 사용하는 것을 택했다. 더 자도 돼. 잠결에 입맞춤과 함께 귓가에 닿던 목소리가 떠올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훈련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갈까. 아마, 그도 식당에 있을 것이다. 가기 전에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모로가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언제 꺼낸 것인지, 화장실 수납장 안에는 어느새 곱게 개켜둔 수건들이 쌓여 있었다. 수건을 걸친 채 욕실을 나온 모로가 좁고 살풍경한 방 안을 살폈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던 국가대표 단복 또한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모로를 대신해 방에 들렀다 온 것인지 세탁된 속옷까지 함께 있는 것을 본 모로가 멋쩍은 듯 한숨을 쉬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어?"

운동복 상의에 팔을 끼워 넣자마자 느껴지는 위화감에 모로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바로 상의를 벗은 그는 안쪽의 세탁 라벨을 확인했다. 깨끗하다. 벤치에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다가 섞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간단하게 표시를 해두던 모로의 것이 아니었다. 3XL. 사이즈 또한 모로의 것보다 한 치수가 작았다.

바뀌었군. 어차피 단복은 한 벌 더 있었기에 굳이 작은 것을 입고 갈 필요는 없었다. 방으로 가야했다. 상의를 다시 옷걸이에 걸어두려던 모로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다시 상의에 팔을 끼워 넣었다.

*

아침 훈련시간이 가까운 시각이었기에 국가대표 선수촌의 식당에서는 선수들의 아침 식사가 한창이었다. 식판을 집어 든 모로가 왁자지껄한 안을 살폈다. 아는 얼굴들이 건네는 인사를 가볍게 받은 모로는 쉽게 찾던 얼굴을 발견했다. 그만큼이나 화사한 금발 머리카락 사이, 유난히 차분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하나가 있는 조합.

모로 외에도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청소년 때부터 선수촌을 들락거리던 고참이라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사촌이라는 끈끈한 관계에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로 떨어져 있는다고 해도 '샤젤'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중에서도 가엘 샤젤에게는? 못해도 모로 정도의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없을 터였다.

적당히 먹을만한 것들을 담은 모로는 그들과 두어 테이블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의 은근한 관심에도 가엘은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주변에 있는 자신의 사촌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미 식사는 끝났는지 주스를 마시던 그는 사촌 중 누군가가 던진 농담에 가볍게 웃고 있었다. 상의 지퍼는 끝까지 채워져 있었으나 품이 헐렁하게 늘어져 안에 받쳐입은 면 티셔츠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가엘. 옷 사이즈 잘못된 거 아냐?"

그 모습이 꽤 거슬렸는지 가엘의 옆에 앉아있던 사촌 중 하나가 말을 걸었다. 펜싱의 샤젤이었다.

"내가 신청한 거 맞아."

가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모로가 큭 하고 짧게 웃었다.

"..."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조금 놀란 모로를 발견하고 눈을 휘어 웃던 가엘이 이내 평소의 덤덤한 얼굴을 했다.

"가엘. 이제 옷 크게 입는 건 그만 둬. 26살은 키 클 나이가 아니니까."

"시끄러워."

장난스럽게 말하는 유도의 샤젤을 흘겨 본 가엘이 컵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눈이 마주쳤지만 바라보는 시간은 짧았다.

*

아침 식사와 달리, 각자 정해진 훈련시간 뒤에 갖는 점심시간은 종목별로 제각각이었다. 배구는 꽤 이른 편이었고 수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배구팀이 갖는 휴식은 한시간 반이었기에 모로는 느긋하게 수영장으로 향했다. 사촌들과 함께 먹는 아침을 제외하고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식당을 나서는 가엘은 잠시의 휴식시간조차 수영장에서 보냈다. 굳이 모로가 아니더라도 함께 선수촌에서 생활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아는 습관이었다.

밖에서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다른 이들과 달리 가엘은 예상대로 수영장에 있었다. 저래서 피부가 잘 안타나. 수영장 입구에 기대어 선 모로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며 가엘을 바라보았다. 수영복 차림에 스포츠 타올을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엘이 모로의 방문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천장 조명에 번들거렸다.

"수영장은 관계자 외 출입금진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수영장을 울렸다. 입구에 있는 모로에게 다가온 그는 지퍼를 채우지 않은 모로의 상의를 발견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을 향해 앞장섰다. 모로가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복도에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애인이어도요?"

"내 애인이 배구 국가대표긴 한데, 스태프는 아니니까."

"그럼 개인 스태프라고 하죠."

"개인 스태프 아무나 안 뽑아."

가볍게 받아친 가엘이 라커룸을 열었다. 자신의 라커를 연 가엘은 입고 왔던 모로의 운동복 상의를 꺼내주었다. 모로 또한 걸치고 있던 상의를 벗어 가엘에게 건넸다. 받아든 상의에서 나는 진한 향에 가엘이 눈을 치켜 떠 모로를 바라보았다. 힐난하는 것 같기도, 무언가를 묻고 싶은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둘 다일지도 모르지. 가엘을 내려다보던 모로가 미소를 지었다.

"향수 냄새."

가엘이 짧게 말했다.

"제 옷인줄 알고."

"그렇게 바보일 줄은 몰랐는데."

거짓말이라는 것은 두사람 모두 알고 있었기에 가엘은 더 모로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의 옷을 걸친 모로가 가엘의 손에 들린 상의를 뺏어 그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가엘은 수영장 특유의 냄새와 함께 섞여든 자신의 향을 풍기고 있었다. 물 속에 들어가면 흔적도 없어지겠지만 모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키스해도 돼요?"

*

"내가 키스 전에 이런 걸 묻는 타입이었던가?"

"우와악!"

뒤에서 들려오는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자리에 앉아있던 치즈펠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런 것 치고는 빠른 손놀림으로 랩탑을 닫은 것은 칭찬해줄만 했으나 아무래도 집중하고 있는 사이 모로는 내용을 다 읽은 모양이었다. 더 숨길 것도 없었기에 치즈펠은 뻔뻔하게 응수했다.

"뭐! 왜! 뭐!"

"...말을 말자."

"...차라리 말을 해."

"그래. 그럼 한 마디만 한다."

한숨을 쉬는 모로의 모습에 치즈펠의 어깨가 축 쳐졌다. 취미는 존중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로가 나쁘게 생각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치즈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모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키스할 땐 안 묻고 해도 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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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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