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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킹

 

 

방송 장비를 세팅하려는 사람들이 체육관 입구부터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리그가 한창일 때나, 2주에 한 번씩 업로드되는 구단 자체 컨텐츠를 위해 촬영을 하는 일은 많았지만, 현장을 오가는 이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리고 선수가 나타난다면 말을 거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들은 지금 막 체육관에 들어온 모로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슨 촬영이에요?” 

 

 

 

먼저 도착해 몸을 풀고 있던 선배들의 옆에 슬쩍 자리를 잡고 앉은 모로가 물었다. 다리를 펴고 가볍게 허리를 굽히자 지나가던 트레이너 중 하나가 인사 대신 모로의 등을 가볍게 눌렀다.

 

 

 

“쓸데없는 데 관심 두지 말고, 몸이나 풀어둬.”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는데.”

 

 

 

모로 외에도 선수단 전체가 어색한 듯 주변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평소와는 규모부터 다른 촬영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창 시즌 중의 경기 때나 이 정도일까. 주변에 있던 선배 중 하나가 옆구리를 쭉 펴며 모로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아까 보니까 샤젤 왔던데.”

 

 

 

세상에는 많은 샤젤이 있겠지만 여기에 앉은 이들이 공통으로 알만한 샤젤이라고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코치의 무릎이 떨어지자 상체를 일으킨 모로가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흥미가 생긴 모양인지 시선이 모여들었다. 어휴. 잡담은 적당히만 해라. 트레이너는 더 설명해주는 일 없이 모여 앉은 그들의 곁을 떠났다.

 

 

 

“어떤 샤젤? 테니스?”

 

 

 

누군가의 짐작에 모인 이들이 가볍게 술렁였다. 샤젤은 펜싱, 유도―둘이나 있었다―, 테니스, 수영에 있었는데 테니스의 샤젤이라면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WTA 싱글 랭킹 20위 안에 드는 멜라니 샤젤이었다. 6피트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와 그만큼이나 시원한 플레이로 이전부터 꽤 열렬한 팬층이 있는 선수였다.

 

 

다섯 명이나 되는 샤젤 중 홍일점의 이름이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모로의 생각은 달랐다. 멜라니 샤젤은 분명 인기 있는 선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방송 인력을 움직일 만한 사람이라면…

 

 

 

“어, 왔다.”

 

 

 

체육관 입구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던 선배가 소리를 내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만고만한 키의 스태프들 틈에서 머리 하나는 불쑥 큰 이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종신 계약을 맺은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심플한 셋업을 입은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가장 먼저, 감독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에는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주장과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선수들은 그제야 뜬금없는 가엘 샤젤의 방문 이유를 알아차렸다.

 

 

주장인 피레스가 함께 일하고 있는 스포츠 에이전트는 업계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하는 큰 손이었는데 그런 그의 관리를 받는 선수 중 가장 유명한 선수를 꼽으라고 한다면, 지금 피레스에게 팀에 대한 소개를 듣고 있는 저 ‘수영의 샤젤’인 가엘 샤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리그 내에서는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피레스마저도 태양 앞의 별빛으로 만드는 선수의 등장에 다들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살피고 있었다. 집합. 설명이 끝난 피레스의 호령에 모로 또한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감독과 주장, 그리고 가엘 샤젤 앞으로 모여들었다.

 

 

특집 프로그램으로 오늘 하루동안 우리랑 함께 운동을 하게 될 거야. 주장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모로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는데, 조명에 비친 머리카락에는 은은하게 갈색빛이 돌고 있었다. 생각보다 작네. 턱을 올리면 딱 좋을 높이의 정수리에 모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장의 소개가 끝났는지 가엘이 선수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어지는 박수에 모로 또한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다가 문득 고개를 든 가엘과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시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

 

 

 

 

오늘 하루를 위해 구단에서 특별히 제작한 전용 유니폼을 입고 무릎과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한 슬리브를 한 가엘이 선수들 틈에 섞여 함께 준비 운동을 시작하자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가엘은 남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성격은 아닌 듯했으나 가볍게 오가는 질문에는 스스럼없이 대답해주었다. 오랜 지인을 대하기라도 하듯 자연스러웠으나 누구와도 할만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묘하다고 모로는 생각했다.

 

 

그런 대화 속에서는 왜 하필 배구를 하러 왔냐는 질문에 배구 시청을 꽤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운동을 하게 된다면 배구를 해보고 싶었다는 꽤 흥미로운 것들도 있었다. 배구 선수였어도 잘 어울렸을 것이라는 의례적인 칭찬이 뒤따랐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가벼운 러닝이 이어졌다. 가엘 또한 선수들과 함께 2열로 섰다. 6피트 3인치인 감독과 비슷한 걸 보면 신발을 신고 있어도 실제 키는 6피트를 조금 넘는 정도일까. 1인치? 2인치? 딱 신발을 신은 정도로 변하는 신장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을 것이다. 세터라면 조금 큰 키겠지만, 아닌 이상 애매하지 않나. 심드렁하게 그런 생각을 한 모로가 흐트러지는 숨을 심호흡으로 정리했다.

 

 

러닝 후 코치진들이 공을 가져오자, 선수들은 각자 짝을 맞춰 서로 공을 주고받았다. 피레스가 나서서 가엘에게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1피트에 가깝게 차이가 나다 보니 피레스는 가엘을 향해 구부정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퍽 친밀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팀원들은 유명인에게만 다정한 주장이라며 가볍게 피레스를 향해 야유했다.

 

 

 

“그럼 같이해볼까요?”

 

 

 

피디가 제안하자 감독과 코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치 중 하나가 네트 옆에 섰다. 가볍게 올라오는 토스를 스파이크로 처리하는 간단한 준비 운동이었다. 가엘이 난감한 얼굴을 하며 선수들과 섞여 줄을 섰다. 모로의 뒤에 있던 선배 중 하나가 자신의 뒤에 선 가엘을 돌아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긴장되지 않으세요?”

“웃음거리만 안됐으면 좋겠습니다.”

 

 

 

덤덤한 가엘의 대답에 여기저기 웃음이 터졌다. 호쾌한 소리와 함께 늘어선 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기에 모로는 가볍게 도움닫기를 한 후 거침없이 팔을 휘둘렀다. 정확히 맞은 모양인지 꽤 큰 소리와 함께 반대쪽 코트 구석에 공이 처박혔다.

 

 

 

“웰즈. 힘 좀 들어갔는데?”

“눈도장 좀 찍어볼까 하고요.”

 

 

 

모로가 너스레를 떨며 줄의 가장 뒤로 갔다. 몇 명이 더 지나고 나서야 가엘의 차례가 되었다. 모두 숨을 죽인 채 가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침묵에도 가엘은 부담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중으로 공이 뜨는 것과 동시에 두 걸음의 도움닫기. 그리고 이어지는 매끄러운 스파이크. 깔끔하게 코트에 내리꽂혔다가 튕긴 공이 바닥을 굴렀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폼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가볍게 착지한 가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늦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에 호응하듯 가엘이 웃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산뜻한 미소였다.

 

 

 

이어진 미니 게임에서도 가엘은 포메이션을 바꾼다는 기본적인 규칙을 잊는 등의 자잘한 실수를 제외하고는 깍두기 취급을 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플레이 상의 활약이 괜찮은 편이었다.

 

 

 

“가엘 선수에게 갑작스럽게 블로킹을 당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인터뷰를 위해 체육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던 모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플레이 중에도 팀의 선배들에게 꽤 놀림을 받았던 일이지만,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피디의 뒤에서 소리 없이 웃는 선배들의 모습에 모로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멍청하게 대답했다가는 끝장이었다.

 

 

 

“내년 드래프트 순위가 꽤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치있는 모로의 대답에 피디도 마음에 든 듯 활짝 웃었다.

 

 

마무리 운동을 하면서도 모로는 자신이 보았던 눈빛을 생각했다. 그의 스파이크가 정확히 가엘의 손바닥에 걸렸을 때, 두 사람은 네트를 두고 서로만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내 무감하던 옅은 색의 눈에 스친 찰나 간의 희열. 선을 그으며 적당히 남들을 상대하던 가엘이 아닌, 진짜 가엘 샤젤이었다.

 

 

라커룸에서 나온 모로는 샤워실로 향하는 팀원들을 역행해 떠나왔던 코트로 향했다. 마무리 인터뷰를 마친 가엘이 주변의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로는 성큼성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로는 줄곧 손에 쥐고 온 것을 가엘에게 내밀었다.

 

 

 

“이거, 떨어트리셨길래요.”

 

 

 

그것은, 모로의 핸드폰이었다. 다짜고짜 내민 남의 핸드폰을 미묘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가엘이 모로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모로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가엘, 핸드폰 가지고 왔었어? 놀란 듯 묻는 스태프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엘의 목소리가 귀에 걸렸다. 응. 하마터면 놓고 갈 뻔했네.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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