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g

언더커버 플레이어

 

 

 

이제 겨우 1학기의 시작일 뿐이었는데 졸업 학년이 된 건축학과 5학년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졸업작품을 준비하기로 했을 때부터 예고되어 있던 강행군이었다. 마지막 학년. 제대로 된 커리큘럼을 따라 학점을 채웠다면 한창 전공을 들어야 하는 저학년에 비해 시간표에 여유가 많았다. 그렇게 남는 시간은 고스란히 졸업작품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

 

 

건축학도의 부푼 꿈을 안고 입학한 신입생 시절, 좀비와 같은 형상으로 강의실과 실습실을 오가는 선배들을 보며 자신은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부분 서서히 선배들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었다.

 

 

세팅하지 않은 머리로는 자취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던 그 또한 비슷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대충 씻고 말린 머리를 두어 번 털어 정리한 그가 건축대학 건물로 들어섰다. 내뱉는 숨 사이사이 짙게 섞여든 알코올 향에 그는 불쾌한 얼굴을 했다. 이 정도로 숙취가 심한 타입은 아니었는데.

 

 

 

어제 얼마나 마셨더라. 이 이후의 여유는 없을 것이라고 예감한 동기들과 가진 술자리였다. 피곤한 상태로 꾸역꾸역 마시다 보니 평소보다 쉽게 취한 듯했다. 선배! 어제 너무 무리하신 거 아녜요? 초췌한 얼굴을 한 그와 달리 신입생들은 산뜻한 모양새로 깔깔거리며 지나갔다. 더 대꾸할 힘도 없었기에 그는 비척거리며 실습실로 향했다. 이런 상태로 졸작을 진행할 생각은 아니었다. 같이 해장을 하기로 한 멤버들이 올 때까지 실습실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쉬기 위해서였다.

 

 

 

실습실은 등록된 학생만 출입할 수 있었다. 도어락에 학생증을 대자 문이 열린다. 안에는 이미 선객이 와있었다. 볼캡을 쓴 데다가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대부분 가려져 있었으나 간이침대 밖으로 발이 삐져나올 만큼 키가 큰 사람은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했다. 그는 잠들어 있는 동기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신의 책상 옆에 있는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딱히 자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선잠을 자고 있던 의식이 깨어났다. 그가 겨우 가물거리는 눈을 뜨자 들어오는 동기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왔어?”

“방금. 자고 있었구나.”

 

 

 

겨우 토대만 잡아놓은 본인의 졸작 옆에 베아탱이 조심스럽게 편의점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새 일어나 편의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옷까지 갈아입고 올 정도로 부지런한… 응?

 

 

 

“뭐야? 저 사람 누구?”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베아탱이 아닌 것을 깨달은 그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종종 실습실에 친구를 데려와 재우는 경우가 있었기에 유별난 일은 아니었으나 모르는 사람을 베아탱으로 착각하고 자연스럽게 같은 공간을 썼다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아, 이제 곧 갈 거야. 놀란 그를 보던 베아탱이 미안하다는 듯 봉투 안의 캔을 하나 건넸다. 포카리스웨트였다. 마침 목이 말랐기에 그는 사양않고 캔을 땄다.

 

 

 

“가엘, 일어나. 디자인과 수업 끝난 것 같던데.”

 

 

 

베아탱이 누워있는 이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그 손짓에 누워있던 사람―가엘이 몸을 일으켰다. 헐렁한 후드티를 입고 있었음에도 드러난 어깨선으로 보아 체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걷은 가엘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쓰고 있던 볼캡을 벗었다.

 

 

 

건축학과에서 제일 큰 베아탱과 비슷한 체격의 그는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부가 하얗긴 했으나 혈색이 좋아 창백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볼캡을 고쳐 쓰는 모습이 지나치게 낯이 익었다.

 

 

 

후드티 앞주머니에 있던 안경을 꺼내는 가엘을 보며 베아탱이 고개를 갸웃했다. 웬 안경? 베아탱의 질문에 가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뿔테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렌즈가 없음을 보여주고는 테만 있는 안경을 걸쳤다. 부드러운 인상이 반쯤 가려져 다른 사람 같았다.

 

 

 

“혹시나 해서. 안 가져와도 됐을 뻔했네.”

“캠퍼스 나가면 또 모르니까 잘 쓰고 있어.”

 

 

 

그 말과 함께 베아탱이 가엘에게 게토레이 캔을 던졌다. 날아오는 캔을 가볍게 낚아챈 가엘이 한 손으로 캔을 따며 말했다.

 

 

 

“이거 마시는 사진이라도 찍히면 계약 위반이야.”

“그럼 넌 포카리스웨트 말고 게토레이 광고를 찍겠지.”

 

 

 

가엘. 포카리스웨트. 광고.

 

 

 

“…아!”

 

 

 

그는 그제야 낯익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불과 보름 전, 본인이 세웠던 올림픽 신기록을 갈아치운 금메달리스트 가엘 샤젤은 이런 반응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어디?

도서관 근처 카페

곧 갈게.

 

 

 

짤막한 메시지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게바는 주변에 지나가는 이들의 인사를 받아주느라 바빴다. 개중에는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미안, 나 선약. 좀 이따 봐. 걸치고 있던 숄더백을 고쳐맨 게바가 도서관으로 향했다. 기다리라고 했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인도를 따라 예쁘게 심어놓은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1년간의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모교는 변함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다. 재학생뿐 아니라 근처 주민과 가까운 타 대학의 학생들도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게바는 피어난 꽃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이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변의 풍광을 눈에 담았다.

 

 

 

특히 고즈넉한 건물의 외양이 주변에 심어진 꽃나무들과 어우러진 풍경으로 인기가 좋은 도서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카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날씨가 좋아서인지 야외 테이블이 먼저 차 있었다. 바로 카페 안으로 들어간 게바가 내부를 훑었다. 가장 안쪽의 구석진 창가 자리. 얼굴의 반을 가리는 뿔테 안경과 볼캡 위로 뒤집어쓴 후드에 헛웃음이 샜다.

 

 

 

그가 테이블로 다가가자 손도 대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누가 이런 것을 시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접스러운 구성의 샐러드 도시락이 반쯤 비어있었다. 인사도 없이 맞은편에 앉은 게바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손을 뻗었다. 게바는 그가 먹는 것은 가리지 않아도 마시는 것은 물과 이온 음료 외에는 거의 손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마시려고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쭉 들이킨 게바가 말했다.

 

 

 

“너드 같아.”

 

 

 

너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장했지만.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도 가엘은 별다른 반응없이 플라스틱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찌르며 가볍게 받아쳤다.

 

 

 

“눈에 띄기 싫어서.”

“네 덩치가 잘도 가려지겠다.”

 

 

 

효과가 있든? 진심으로 궁금해진 게바가 물었다. 처음엔 못 알아보더라. 드레싱도 뿌리지 않은 풀을 찍어 방울토마토와 함께 입에 넣은 가엘이 대꾸했다. 웃기는 꼴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간 뉴스며 SNS가 시끄러웠으니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맞은편에 앉은 챔피언은 시들기 직전의 샐러드를 깔끔하게 비우는 중이었다.

 

 

 

“그 인터뷰가 오늘이랬나. 몇 시?”

 

 

 

친구들의 모교에 찾아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백수처럼 보이지만 가엘은 시즌이 끝났을 때 더 바빴다. 스케줄 중간중간 붕 뜨는 시간에 꾸역꾸역 두 사람을 찾는 것은 가엘의 몇 없는 취미 중 하나였다. 오래 알고 지낸 게바와 베아탱은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포크를 빈 도시락 안에 던져넣은 가엘이 손목에 감긴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2시간 뒤.”

“그 상태로 갈 건 아니지?”

“어차피 지면 인터뷰라 상관 없,”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는 얼굴의 게바가 단호하게 가엘의 말을 잘랐다. 눈을 치켜뜬 가엘이 이내 웃음을 참았다. 가엘이 재미있으라고 한 반응은 아니었으나 게바는 자신의 친구가 후줄근한(핏은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핏이 문제가 아니었다.) 차림새로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게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엘, 차 가져왔지.”

“응.”

“카드는?”

“지금 나 삥 뜯기는 건가?”

“입 다물고 일어나.”

 

 

 

농담할 시간도 없다는 듯 명령이 떨어졌다. 가엘은 느릿하게 일어나 마시다 남은 아메리카노 잔과 빈 도시락을 카운터에 반납했다. 뒤따라온 게바가 말했다.

 

 

 

“나가자.”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미용실부터.”

“그럴 필요 없다니까.”

 

 

 

가엘이 그렇게 말했지만 게바는 그를 무시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며 가엘의 등을 떠밀었다. 다행히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연 가엘이 게바에게 손짓했다. 어릴 적부터 교육받은 완벽한 에스코트였으나 차림새 때문인지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묘한 얼굴을 한 게바를 보며 가엘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조수석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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