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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의 날

 

 

소년이 사는 지역은 일 년의 반절은 비가 오는 곳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흐린 날이 많아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점점 광맥이 말라가는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 외의 사람들은 거의 근처 도시로 떠났다. 상단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는 펠리스 영지의 끝자락에 남은 것은 다 허물어져 가는 펠리스 남작의 별장뿐이었다.

 

 

 

그런 지역에 조금이나마 활기가 돌게 된 것은 2년 전, 남작의 별장에 찾아온 소년 때문이었다. 다른 사용인은 없이 집사장 하나만을 데리고 온 소년은 도시로 갈만한 사정이 되지 않는 이들을 저택의 사용인으로 고용했다. 소년의 생활을 위해 상단이 오가고 시장은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소년에 대한 소문은 제각각이었다. 남작의 사생아, 라는 소문은 지나치게 뻔해 싫증이 난다는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소년은 죽을병에 걸려 요양을 온 병약한 이였다가도 최근은 인간이 아닌 자식이 창피했던 남작이 영지 별장에 가둔 것이라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었다. 펠리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외출이 금해져 있었기에 소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소년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남작의 정당한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병치레 없이 매우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운동신경이 없는 것과는 별개였다.) 햇빛에 나가면 타죽거나, 사용인을 잡아먹는 괴물도 아니었다. 까탈스러운 장남의 등쌀에 밀려 쫓겨나다시피 별장에 오게 되었음에도 소년은 구김살 없이 사용인을 대했다.

 

 

 

소년이 꽤 좋은 주인이었던 만큼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바뀌는 일이 없었다. 소년 또한 폐쇄된 관계의 안락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랬기에, 갑작스럽게 새 사용인이라고 등장한 남자가 매우 껄끄러운 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남자의 억양에는 이 지역 특유의 사투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저택에 왔던 다른 사용인들과 달리,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남자의 태도에 소년은 잠시 본가에 있는 아버지가 그를 위해 보낸 가정교사가 아닌가 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마침 별장의 서재에 있는 책은 다 읽은 참이었다.

 

 

 

그러나, 새 고용인의 짐가방을 받아든 메이드는 얄짤 없이 하인들이 쓰는 별채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마도, 양친이 보낸 감시자인 모양이었다. 드물게도 심기가 뒤틀린 소년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시종도 풋맨도 필요가 없는데.”

“도련님.”

 

 

 

평소에는 귀족 가의 자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격의없이 구는 소년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었다. 남자의 곁에 서 있던 집사장이 난감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고용인에 대한 인사권은 제가 맡겨주셨잖습니까. 점잖은 목소리가 조금 애원하는 기색을 띠고 있었으나 소년은 모르는 척 굴었다.

 

 

 

“메이드라면 모를까. 돌아가라고 해.”

“메이드는 괜찮은 겁니까?”

 

 

 

면전에서 자신의 거취가 정해지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음에도 별 흥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허? 소년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메이드로 고용해주시죠.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을 먼저 피한 것은 소년이었으나 소년은 그렇게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내일 재단사를 부르도록 해. 새롭게 옷을 맞춰줘야겠네.”

 

 

 


 

 

“여기, 아직도 먼지가 그대로 있는데. 제대로 청소한 거 맞아?”

“주의하겠습니다, 도련님. 제 시야에는 닿지 않는 곳이라서요.”

“잘 알겠으니까 입 다물고 닦아.”

 

 

 

치즈펠의 목소리에 짜증이 더해지자 약삭빠른 메이드는 더 말대꾸하는 일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에이프런에 두른 끈에 걸어둔 행주를 뽑아 든 그는 행주에 물도 묻히지도 않은 채 치즈펠이 가리킨 책장 위를 한 번 훔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치즈펠의 이마에 힘줄이 돋는다. 먼지가 더 쌓이잖아. 그의 지적에 메이드가 행주와 함께 꽂아두었던 먼지떨이를 뽑아 책장을 훑었다. 먼지를 털었던 적은 있는지 새것 같은 먼지떨이가 엉망으로 책장을 훑는다. 그냥 나가라…. 꽉 다문 잇새로 폭발하기 직전의 목소리가 샜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메이드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정신 사납게 곁을 맴돌던 메이드가 나가고 나서야 치즈펠은 숨을 골랐다.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긁는 메이드가 저택에 들어온 것도 벌써 3주째였다. 보통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큰 키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전용 복장을 한 거구의 남자가 저택을 휘젓고 다닌 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는 소리였다. 괴상한 조합에 볼 때마다 놀라던 것도 한때였다. 남자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자신의 신경줄에, 치즈펠은 인간의 적응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는 했다.

 

 

 

패기 있는 제안으로 고용된 메이드는 본인이 큰소리를 친 것과는 다르게 메이드로서의 점수는 0점에 가까웠다. 예의 있는 행동거지나 말투, 멀끔한 외양으로 보아 집사장이 그를 풋맨으로 쓸 계획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메이드로 계약된 사용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있었기에 치즈펠은 그의 서투른 일처리를 탓하지 않았다. 계약서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자를 고용한 뒤, 집사장에게 요청해 보게 된 고용 계약서에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집사장보다 많은 액수를 받는 풋맨이라니 말이 되는가? 치즈펠은 아주 잠깐 집사장의 인지 상태가 정상인지 의심했으나 집사장은 이제 막 50을 넘긴 사람이었다. 노망이 나기에는 이른 나이란 소리였다. 적절한 쓰임이 있어 고용한 사람이랍니다. 집사장은 본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자신을 따른 유일한 사용인이었다. 그 후로 치즈펠은 남자-모로의 고용에 관한 이야기는 화제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집사장에 대한 배려와는 별개로 모로의 행태는 정말로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그는 엄연히 저택의 사용인이었음에도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치즈펠이 목격할 때마다 주방장과 노닥거리며 티 타임을 보내질 않나, 정원 한복판에 누워 볕을 쬐는 것이 다였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치즈펠은 그를 불러서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고 했다. 제대로 하는 꼬라지를 본 적이 없어 금세 내보내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청소를 한답시고 열린 창밖을 바라보자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치즈펠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비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

 

 

 

2년 만에 처음 하는 손님맞이에 저택의 사용인들이 허둥거렸다. 다행히 집사장의 지시로 간신히 구색은 갖췄으나 손님은 못마땅한듯했다. 애당초 변두리 땅에 버려진 자신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기대하고 오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치즈펠이 속으로 빈정거렸으나 겉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사촌을 반가워하는 낯을 하고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사용인들은 바꾸는 게 좋겠구나, 시즈.”

 

 

 

촌구석이라 그런지 형편없군. 꼬투리가 잡히자 양옆으로 사열해있던 사용인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제 식구들인걸요. 치즈펠은 그렇게 말하며 사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치즈펠의 시선이 사용인들의 면면을 훑었으나 실내에서 일해야 할 메이드인 모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빠져주는 게 도움이 되었기에 그는 내심 안도했다. 메이드 전용 복장을 한 거구의 남자가 저택에 있는 꼴을 보였다간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때맞춰 번개가 번쩍였다. 며칠 지낼만한 날씨더니, 곧 시작일 모양이었다.

 

 

 

사촌은 저녁 식사시간 내내 까탈스럽게 굴었으나 치즈펠은 그를 대하는 법을 알았다. 적당히 그의 말을 듣는 척 하며 얼마 전 들여온 독한 와인을 먹여 재우면 끝이었다. 간단한 방법이지만 헛소리에 대꾸해주는 것은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피로가 몰려온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귓가를 울리는 천둥소리에 오늘 밤은 잠들기 힘들 듯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었다. 치즈펠이 종을 집어 들었다. 모로를 부를 때 쓰는 전용 종이었다.

 

 

 

*

 

 

 

거세게 내리는 비는 시야 확보를 어렵게 했다. 이런 날을 고른 것을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그 행운은 모로 본인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날을 잡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불운함을 탓하고 있을 것이다. 꽤 좋네. 비는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상하게 했으나 모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목까지 감싸고 있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길게 뻗은 다리에 각종 무기가 가지런히 벨트로 매여 있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소음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피스톨을 뽑아 든 모로가 얌전히 치맛자락을 내렸다. 잠입한 놈들이 보고 있다면 기함을 할 장면이었겠으나 달빛 한 점 없는 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원 한복판에 번개가 내리쳤다. 정성 들여 다듬은 정원수 하나에 불이 붙었지만 세찬 비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시선이 빼앗기기 쉬운 상황이었음에도 모로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쥐새끼가 셋. 저런 것들을 몰고 온 병원균도 친척이랍시고 집에 들이다니. 남작 가의 도련님은 어지간히도 얕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건 너무, 기운 빠지는데.”

 

 

 

피스톨을 쥔 손을 똑바로 들어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때맞춰 울리는 천둥소리에 모로는 방아쇠를 당겼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깨끗하게 정원을 치운 모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멀끔한 몰골을 한 채 저택의 본채로 들어섰다. 사용인들마저 별채로 물러가 고요한 저택에 청량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 본인이 어떤 일을 당할 뻔했는지 알기나 하는지. 모로가 헛웃음을 흘리며 저택 중앙의 계단을 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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