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g

일거양득

“씨발. 쓸데없이 넓어갖고.”


지나가는 이가 아무도 없는 탓에 가니메데스는 목 끝까지 올라온 험한 말을 시원하게 뱉어냈다. 짜증스러운 손길로 넓은 모자챙을 꾸욱 눌러쓴 그가 지도 앱을 켰다. 앱을 실행해봐도 선수촌 내부의 자세한 지도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대표라는 신분으로 10대 시절부터(그때는 상비군이었지만.) 제집처럼 뻔질나게 드나드는 놈들과 덩달아 주말마다 ‘데이트’란 명목으로 선수촌을 드나들던 붕어 똥 같은 놈과 달리 가니메데스는 오늘로 이곳이 초행길인 참이었다. 외출이라며. 지들이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왜 안에서 모여? 투덜거리면서도 가니메데스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지금 있는 곳을 설명할만한 단서를 찾았다. 본인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모르고서야 데리러 오라고 패악을 부릴 수도 없었다. 가니메데스는 여차하면 마른 생선이 될 때까지 아스팔트 위에 너끈히 드러누울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식의 협박은 상당히 잘 통하는 편이었다.

커다란 부지에 으레 있는 거대한 지도는커녕 안내판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 인도를 따라 조금 걸어보았으나 안에 들어가서 무슨 운동을 하는 곳인지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는 이상 겉으로는 알 수 없는 건물들만 멀리 보였다. 그냥 찾아내라고 하자.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낸 가니메데스가 핸드폰의 주소록을 뒤적이던 참이었다.


가장 가까운 건물 입구에서 남색 져지 차림의 사람 몇 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을 본 가니메데스가 깜짝 놀라 코너를 돌아 몸을 숨겼다. 잘나신 아폴론님이 본다면 소동물이냐고 낄낄거렸을 모습이었으나 가니메데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웨이트가 어떻니 하며 이야기하던 이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가니메데스는 그들에게 배구장으로 향하는 길을 물어볼 것을, 하는 후회가 스쳤다. 이미 멀어진 이들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가니메데스는 고개를 쭉 뺀 채 뒷모습만 보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맞은편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한 명. 좋은 기회였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물을…”


거리가 꽤 있어서 목소리가 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히 걸음이 빨라진다. 하늘이 가니메데스를 버리진 않은 모양인지 건물에서 나온 남자가 가니메데스를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어? 일방적이지만, 익숙한 얼굴에 얼빠진 소리가 샜다. 긴장이라도 풀린 건지 멀쩡히 그를 향해 걷던 다리가 삐끗했다. 가볍게 비틀거리자 상대가 뻗은 손이 넘어지지 않도록 가니메데스의 손목을 가볍게 붙들었다. 가까워지자 상쾌한 샤워코롱 향이 났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와, 실물이네.


뉴스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던(다시 말하지만 일방적으로.)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있었지만, 가니메데스는 여즉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치즈펠이 잔뜩 다운받아 저장한 영상과 사진 중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남자―가엘 샤젤은 살펴보는 시선에는 익숙한 듯 동요 없는 태도로 가니메데스의 용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푸른색 보정을 강하게 넣었던 사진들만 봐왔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훨씬 옅은 색의 눈동자였다.

“아, 배구 훈련장이 어디쯤 있을까요?”

설명해준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장소에서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으나 그와 마주친 것 만으로도 가니메데스에겐 큰 소득이 있었다. 수영장으로 오라고 하면 알아서 오겠지. 물끄러미 가니메데스를 내려다보던 가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우니까, 바래다 드릴게요.”


에엑?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이라 자부하는 가니메데스가 치즈펠이나 낼 법한 괴상한 소리를 여과 없이 내지를 정도로 예상외의 전개였다. 친절하게도 가엘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앞장섰다. 몇 걸음 떨어져 걷는 가니메데스의 발치까지 기다란 그림자가 닿았다. 흘긋 뒤를 돌아본 가엘이 가볍게 물었다.


“가족분 만나러 오셨나요?”

“아뇨. 친구예요.”

“아아. 다음엔 정문에서 보자고 하는 게 좋아요.”

더 캐묻는 일 없이 가엘은 웃으며 그렇게만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무리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어지간히 많은 사람을 상대해 본 티가 났다. 가니메데스가 속으로 그런 감상을 하는 사이 앞서 걷던 가엘이 걸음을 멈췄다. 여태껏 오면서 본 적 없던 작은 표지판들이 이제야 보였다. 동쪽을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에 쓰인 글자가 단번에 눈에 띄었다. 배구장 50m.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가엘은 갈림길의 왼편인 실내 훈련장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가니메데스 또한 표지판이 일러준 방향을 향해 걸었다. 배구장보다 조금 가까웠던 핸드볼장을 지나자 보이는 배구장 입구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호리호리하게 큰 인영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자신을 이만큼이나 고생시킨 저 멀대 같은 놈에게 한바탕 퍼부어야 속이 시원했겠으나, 의도치 않게 귀인을 만난 가니메데스는 가까워진 그에게 중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분노를 삭였다. 인사도 생략한 채 다짜고짜 보이는 손가락 욕에도 상대는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보자마자 욕이야, 무슨.”

“정문까지 나왔어야 할 거 아냐. 상도덕 없는 놈.”

“말했잖아. 뒷정리는 랜덤이라고.”

“‘아폴론’님이 정리도 해?”

“…쫌.”

“됐고. 치즈는?”
“매점.”

“아주 지 구역이지.”


가니메데스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리자,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인지 멀리서 음료수 캔 두 개를 양손에 쥔 치즈펠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양궁장으로 가자.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가니메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헤맬 일은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잘 찾아왔네! 해맑게 인사하는 치즈펠의 얼굴이 오늘만큼 얄미운 적이 있었던가. 조금이라도 모로를 빨리 만나야겠다며 약속 시각은 개나 주고 아침 일찍 혼자 출발한 치즈펠과 그것을 말리지도 않은 모로. 이 얄미운 붕어와 붕어 똥 같은 자식들을 골고루 엿먹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온화하게 웃은 가니메데스가 치즈펠의 손에서 잽싸게 사이다를 낚아챘다. 모로에게 스포츠음료를 건네다 난데없이 음료를 빼앗긴 치즈펠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아, 진짜.”

“치즈펠. 너 내가 누굴 만난 줄 알아?”

“누구.”


사이다나 내놔. 귀인의 정보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치즈펠의 시선은 가니메데스가 열심히 흔들고 있는 사이다 캔에 꽂혀 있었다. 다시 캔을 건넨 가니메데스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가엘 샤젤.”

“뭐???”


대답과 동시에 치즈펠이 무심결에 딴 캔으로부터 사이다가 터져 나왔다. 치즈펠의 양손이 엉망이 되자 모로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닦아주는 모로에게 손이 잡혀있던 치즈펠이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어, 언제? 오늘? 어디서?”

“5분 전?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진짜? 가엘 선수였다고?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냐? 사촌이나?”

“사촌들은 금발이라며. 그리고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그 얼굴을 봤는데. 착각하겠냐?”

“당연히 아니지. …아! 왜 나는! 왜? 아니….”

“너는 수영장 근처에서 헤맬 일이 없으니까?”


안타까움에 비명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는 치즈펠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 가니메데스가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는 모로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다음부턴 마중 나와 줄 거지?”

“…무조건.”


뺀질뺀질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은 간데없이 착잡함과 질투가 섞인 얼굴로 패배 선언을 하는 친구를 보며 가니메데스가 산뜻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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