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고죠유지] 우리가 ◾️◾️◾️ 진짜 이유

주막집 by 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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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후배 AU

  • 적폐 주의

  • 고죠 쓰레기 아니에요… 아닙니다……. 아닐걸요……?

“유지, 나 좀 봐…”

쪽.

“나 좀 봐줘… 응?”

쪽, 쪽. 얼굴 곳곳 연달아 내리찍는 입술 도장에도 이타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꾹 감고 있을 뿐.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음이 착잡했다.

“유지… 제발…….”

이름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애달프게 울린다. 유일하게 이타도리를 휘두르던 그의 어여쁜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이타도리는 늘 말했다. 웃는 게 참 예쁘다고. 그러니까, 그의 무기는 이미 효용성을 잃은 것이다.

“그만… 그만해.”

꽉 그러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이타도리는 단호히 거절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곧있으면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이타도리 유지는, 그 누구보다 이별을 바라지 않았다.

“……”

“부탁할게. 제발 나랑 헤어져줘요.”

이별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 진짜 이유

w. 靑 

바닥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수많은 발길에 채이고 더러워져 서서히 녹아갈 즈음. 그날은 따스했음에도 꽃비처럼 눈이 흩날렸다. 도톰한 베이지색야상을 걸친 이타도리는 새하얀 눈을 맞으며 학교 앞에서 파는 것이 아닌, 전문 꽃집에서 산 꽃다발을 한아름 품고 산뜻하게 발걸음을 놀렸다.

바야흐로, 선배의 졸업식 날이었다.

“선배, 졸업 축하해.”

그는 말갛게 웃는 이타도리의 얼굴을 힐끔 보고서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진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의례적인 태도. 고작 건넨 것이라고는 의례적인 말. 그럼에도 이타도리는 꿋꿋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기에. 속없는 사람처럼 실없이 웃는 이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

“선배, 혹시 잠깐 시간 돼?”

“시간?”

건조한 시선이 다시 한 번 이타도리를 향했다. 번지르르한 얼굴에 짤막하게 귀찮은 기색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하기 좋은 날이긴 하지.’

이미 그는 이타도리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했다. 지난 일 년간 그의 주위에 맴돌며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티를 냈으니. 아마 이타도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고죠가 제 의도를 알아챘음을. 그도 그럴게, 이타도리는 애당초 고죠를 향한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항상 고백할 기회만 엿보다가 번번히 놓친 나머지,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오늘은 이타도리에게 있어, 종착역이었다.

졸업식이라고 교내 곳곳에 사람이 즐비한 탓에 조용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는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니, 빨리 찾지 않으면 이번 고백도 무산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쓰레기장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해도 여기까지 발길이 닿진 않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코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퍼지는 구리구리한 냄새와 지저분하게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를 보니, 도저히 고백하기 적격인 장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최악이었다.

“할 말은?”

뚱한 얼굴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응시하는 것도 잠시, 보다 더한 얼굴을 한 고죠가 의중을 물었다. 아니.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채근한다는 표현이 옳겠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이타도리를 채근했다. 듣기도 전에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여기서 하려던 말은 아닌데….”

“말 해.”

“좋아해, 선배!”

순간 이타도리가 고죠의 품을 향해 돌진했다. 퍼억. 몸을 세게 부딪힌 고죠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본래 이타도리가 그린 그림은 포옥, 이었지만, 현실은 몸통 박치기였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두 남정네의 따스한 포옹이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감자 같은 게 진짜…!”

“윽… 미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하여튼, 좋아해 선배.”

답은 당연히 싫다, 였다. 동아리 활동 필수라는 엉터리 교칙 때문에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든 독서 동아리에서 만난 이타도리는 제게 어지간히 귀찮은 존재였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제게 찾아와 모르는 것을 묻질 않나, 어떤 책이 재미있냐며 자기는 이런 책이 좋다 묻지도 않은 것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나, 어쩌다 독후감 파트너가 되었을 때에는 할 이야기가 많다며 온종일 저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거기다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이리불쑥, 저리불쑥. 온갖 곳을 싸돌아다니는 통에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그 잠깐 사이 얼굴에 상처를 만들어 온 적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가 양호 선생님이 퇴근한 뒤라, 따갑다고 칭얼대는 녀석의 얼굴을 붙잡고 알코올 솜으로 소독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만약 이런 녀석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제가 뒷치다꺼리를 하게 될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런 귀찮은 짓은 죽어도 사양이었다.

“그래.”

“뭐라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꽉 끌어안고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타도리가 고개를 확 들었다.

“해보자고. 연애.”

그러니까, 제가 녀석의 고백을 받아준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두 달 전, 바들바들 떠는 것이 보기 싫다며 던져준 야상 점퍼의 옷깃 틈으로 붉게 달아오른 귀가 보였다.

***

매우 험난할 거라 예상했던 연애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이타도리는 매사에 매우 당찼으며, 강단있는 아이였다. 한마디로, 고죠가 뒤치다꺼리를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타도리의 넉넉한 인심과 세심한 배려 덕에, 도움을 더 많이 받았다.

예를 들자면, 급한 팀플로 인해 데이트를 미뤘을 때에도.

- 괜찮아. 선배도 대학 생활은 해야지. 영화는 후시구로랑 볼게.

데이트를 하다가 과제를 할 때에도.

- 괜찮아. 나 책 읽으면 돼. 저번에 읽던 책 뒷 이야기가 궁금했거든. 거기 주인공이…….

심지어는 이타도리가 다쳐서 병원에 갔을 때에도.

- 괜찮아. 교수님이 오라는데 가야지.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도 않았고.

이타도리는 늘 관대했다. 그래서 괜찮다는 의미가 퇴색되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그 뒤에는 당위성까지 부여해주었으니. 그러한 일들이 반복될수록 고죠의 죄책감은 점차 희미해졌다.

“선배, 오늘도 바빠?”

“어, 좀.”

“그럼 나 구경이라도 하면 안 돼?”

전화 너머로 섭섭한 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또다시 데이트를 미룬 그였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학업이 핑계였고, 같은 이유로 데이트를 미룬 것이 자그마치 한 달이었다. 고죠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실 그다지 바쁘진 않았다. 중간 고사가 한 달도 남지 않은 터라 공부에 매진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런데, 연인이 되고서 처음으로 요구한다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 어찌 거절할 수가 있을까.

“그러든가.”

“나 진짜 방해 안 하고 구경만 할게!”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여기까지 전해들렸다.

“선배!”

“빨리 왔네.”

“보고 싶었어.”

전화를 끊고 채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타도리가 찾아왔다. 이타도리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며 고죠에게 쏙 안겼다. 마음 같아선 그리웠던 만큼 그를 억세게 끌어안고 싶었지만, 이전에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 더는 달려들지 않았다.

“손에 든 건 뭐야?”

고죠가 건성으로 이타도리의 등을 토닥이며 넌지시 말을 돌렸다.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것이 낯간지럽기도 했고, 딱히 돌려줄 말도 없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타도리는 해맑게 웃는 낯으로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 선배 단 거 좋아하잖아. 간식으로 먹으라고 사 왔어.”

세련된 폰트로 프랑스어가 휘갈겨진 투명한 봉투 너머로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간식 따위들이 보인다. 그간 잠식되어있던 죄의식이 목을 옥죄었다.

“하…. 이런 거 필요 없으니까 다음부턴 빈손으로 와.”

의례적인 감사 인사도 없었다. 그저 꽉 조이는 목을 긁적이며 등돌릴 뿐. 제 주인에게 전해지지 못한 간식 봉투가 이타도리의 손에서 초라하게 흔들렸다.

‘선배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지. 내가 오늘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선배가 바빠서 내가 온 거니까. 응. 그런 거야.’

이타도리는 애써 자기 위안을 해보았지만, 입가에 쓸쓸함이 묻어나는 건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고죠는 몇 시간 내리 전공 서적만 들여다봤다. 따사롭게 비추던 햇살이 사라지고 날이 깜깜하게 저물 때까지, 책에다 고개를 처박고 꿈쩍을 안 했다. 이타도리는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흐트러짐 없는 고죠를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진짜 열심히구나. 이타도리는 구경만 하겠다고 했지만, 정말 구경만 하진 않았다. 요즘 새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꽤 흥미로웠던 터라, 고죠가 공부하는 동안 완독할 예정이었다. 누군가는 그럴 거면 뭐하러 만나느냐 타박할 수도 있지만, 이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서로의 일상에 스며드는 것. 낭만적이지 않은가. 이타도리는 고죠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굳이 바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딱히 할 말이 없어도, 편안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 그런 일상 같은 존재.

고죠의 앞에 자리를 잡은 이타도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서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열었다. 오늘은 이걸 완독해야지. 그러나 이타도리는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고 음미하며 읽는 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곧게 펴고 있던 허리가 자연스레 굽어지고, 집중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반듯하게 나열된 활자들이 춤을 추듯 선율을 타고 책밖으로 튀어나오고, 살아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클래식 음악이 고막을 적시다 뚝 끊겼다. 아, 이 인물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지. 그 사실을 깨닫자 마자 유지는 테이블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하품을 하며 고인 눈물이 눈가에 달랑거린다. 한 차례 눈가를 가볍게 비빈 이타도리의 눈이 나른하게 풀렸다. 이타도리는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로 고죠의 얼굴을 쫓았다. 원래의 목표는 완수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제가 뱉은 말을 수행하는 것이니, 죄악감 따위는 없었다. 고죠는 난시 교정 안경이라는 얇은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귀에 걸린 얄쌍한 금테가 그와 잘 어울린다. 아래로 갈수록 원형이 좁아지는 알은 그의 턱선과 비슷했고, 투명한 알 너머로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금색과 어우러져 고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야. 특히 뭔가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콧잔등을 찌푸리는 얼굴은 정말이지,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정도였다. 몇 시간 내내 그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좋은 시간이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런 사람이 제 애인이라며 동네방네가 떠나가라 소리쳐도 모자랄 판국에, 그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외로워졌다.

‘선배, 우리 같이 있는 거 맞지?’

못내 내뱉지 못한 검은 응어리가 이타도리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인다.

***

고죠 사토루는 맹점이 있다. 귀찮음. 뭐든 깊게 생각하는 것이 귀찮았던 그는 제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단정 짓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결국 그를 말로로 접어들게 만든다.

“과팅?”

“응. 관심 있으면 오라고….”

동기로 추정되는 사내가 쭈뻣쭈뻣 말을 건넨다. 뒤에서는 서너명의 남정네들이 아닌 척 이 자리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대충 짐작이 가능한 상황에 고죠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런 경우에는 딱 두가지가 문제였다. 머릿수가 모자르다거나, 얼굴 마담이 없거나. 친분도 없는 자신이 필요한 일이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정정한다. 후자 밖에 없었다.

“그, 싫으면…….”

“그래.”

“으, 응?”

“간다고.”

평소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을 이야기였다. 그러니, 먼저 과팅을 권유한 사내마저 놀란 거겠지. 하지만 본인 딴엔 그럴 마한 이유가 있었다.

바야흐로, 며칠 전.

- 선배, 나 오늘 못 만날 것 같아.

아주 찰나의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아닌 이타도리 쪽에서 약속을 변경하는 건 이례적인 상황이었기에. 

“왜?”

- 그게…….

유지 빨리 안 와? 수화기 너머 사뭇 거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죠는 음량을 최대치로 키우고서, 보이지도 않는 상대를 노려보기라도 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변이 시끄럽다. 영화관? 아냐. 더 시끄러워. 어디 오락실이라도 갔나? 그러기엔 조용한데. 전화 너머의 둘은 잠시 투닥거리는가 싶더니, 곧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의 눈에서 안광이 시퍼렇게 빛났다.

왜 약속을 미루는 건데? 왜 전화 너머로 다른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왜 그 남자랑 같이 있는 건데? 나는 이유라도 있었잖아. 날 좋아한다면서. 그런데 왜, 나한테 다른 남자의 목소리를 들려줘. 대체 왜.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것들이 내부에서 마구잡이로 뒤엉킨다. 속이 들끓었다. 갑자기 미루는 약속. 낯선 남자의 목소리. 황급히 끊은 전화. 머릿속을 뒤죽박죽 뒤집어놓던 것들이 한데 모여 응어리를 지더니, 팍! 터지며 머리를 탁하게 물들인다. 모든 시그널이 한곳을 가리켰다.

“허, 지금 바람 피는 거야?”

그렇게 결론 내린 고죠는 집을 나서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냥 기분이 나빴다. 그래. 기분이 나빴다.

재차 발길을 돌린 고죠가 짐들을 바닥에 툭툭 떨어뜨리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서늘한 가죽의 질감이 피부로 전해진다. 머리에 열이 오른 그가 본능적으로 서늘함을 쫓아 구석에다 제 머리를 욱여 넣었다. 주름진 가죽이 뽀드득 소리를 낸다. 제가 좋다고 할 땐 언제고, 다른 남자라니. 공허함이 상당했다.

“저, 사토루 군은 취미가 뭐야? 사토루라고 불러도 되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고죠가 살짝 상기된 볼을 하고서 제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물결치는 갈색 웨이브, 흑진주를 빼다 박은 까만 눈동자, 웃을 때마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길을 지나다가도 뒤돌아볼만큼 상당한 미인이었다. 대상이 고죠 사토루만 아니었더라면.

“그런 거 없어.”

“진짜? 사토루 주말에는 뭐 하는데?”

“아무것도.”

“그렇구나. 그럼 나랑 놀면 되겠다!”

은근슬쩍 제 손등 위로 올라온 작은 손을 보며 고죠가 일순 미간을 좁혔다. 제 살갗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온기가 불쾌했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것은 제 연인이라 불리우는 한 사람의 잔상이었다.

‘그 녀석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만, 둘은 잠자리도 가졌다. 스무 살과 열여덟 살. 잠자리를 안 가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한창 혈기왕성할 때다. 둘의 스킨십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먼저 입을 맞춘 것은 이타도리였으나, 먼저 침대로 밀친 건 고죠였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에, 둘은 서로가 첫 경험이란 사실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불쾌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좋았다. 제 손에 얽어들던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 닿은 곳마다 데일 것처럼 뜨겁던 온기. 짐짓 상념에 잠겨들 뻔한 고죠를 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깨웠다.

“사토루?”

“아.”

상념에서 깨어난 고죠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제 손을 치웠다. 역시 불쾌했다. 그것이 첫 번째. 그 다음으로는 앞에 놓여져있던 사케 잔을 말끔히 비웠고. 마지막으로는…….

“주말에 애인 만나.”

술주정인지 뭔지 모를 양심고백을 했다.

“어?”

“주말에 애인이랑 데이트 한다고.”

고죠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에게 다시 한 번 단도리를 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홧김에 따라나서긴 했지만, 복수한답시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제 성미와 맞지 않았다. 이런 시덥지 않은 짓거리를 할 바엔 직접 따지는 게 몇 만 배는 나았다.

그러나 고죠는 당차게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과는 별개로, 한동안 가게 근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이 훅훅 올랐다. 고작 사케 한 잔에 볼이 뜨겁다. 열만 식히자. 열만. 그 생각으로 흡연 구역으로 마련된 벤치에 앉아있기를, 벌써 십 분. 직접 따지겠다는 일념은 진즉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종적을 감추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가 하나 있었다.

고죠보다 더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사람. 우연히 발견한 현장을 지켜보며 직접 따져야 할지, 종적을 감추고 사라져야 할지,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사람.

“선배…….”

“…유지?”

이타도리 유지. 바로 그의 애인이었다.

이타도리는 한참을 고민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애인이 어떤 맛을 가장 좋아할지, 수십 가지에 달하는 종류 중, 어떤 류의 과자가 가장 입맛에 맞을지. 마냥 단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애인의 입맛은 좀 까다로웠다. 무조건 달기만 해서도 안 되고, 합성착향료가 많이 가미된 것을 싫어한다. 또한 혀에 부드럽게 감기는 식감을 좋아한다. 전형적인 까다로운 도련님 입맛……. 하지만 즐거웠다. 이를 위해 페스트푸드 알바를 시작했으나, 대학 입학 이후로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는 고죠를 위해 자신이 뭐라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그의 입맛을 생각하며 간식거리를 고르는 것은 이타도리의 일상에 조그마한 낙으로 자리 잡았다.

저번엔 초코로 샀으니, 이번엔 딸기로 사볼까. 눈앞에 알록달록 색깔 옷을 입은 마카롱들을 훑어 보며, 이타도리가 들뜬 기색을 드러냈다. 입맛이 까다로운 고죠가 유일하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먹었던 마카롱 가게였다. 말도 없이 왔다고 화내진 않겠지? 고민 끝에 마카롱 몇 구를 고른 이타도리는 이번에도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마카롱을 손에 꼭 쥐고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가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바쁘다고 잘 보여주지 않는 용안을 몇 시간 내리 구경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산뜻하게 뜀박질을 하던 걸음이 점차 느려지고 무거워지더니, 이내 멈추고 말았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건가 싶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라는 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존재감. 저런 피지컬이 흔하진 않지.

‘근데, 집이라고 하지 않았나?’

결코 훔쳐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절로 눈이 갔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고죠는 어딘가 어색했다.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면서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 하며, 이런 따스한 날씨에 제 옷을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의 허리가 둘러주질 않나,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몸소 나서서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배려가 몸에 베인 것이라며 뭉뚱그리기에는, 모두 생소한 것들이었다. 댕- 댕-. 머릿속에서 경쾌한 종소리가 울린다. 보통 사랑에 빠질 때 들린다고들 하는 종소리가, 이타도리는 지금 들렸다.

처음 제가 고백했을 때, 선배가 자신을 좋아해서 받아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노력하면 좋아해주지 않을까, 제가 더 다가가면 선배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이따금씩 찾아오는 외로움을 견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저 보채는 어린 애가 아니라, 바쁜 것도 포용할 줄 아는 편안한 애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온기를 나누었을 때, 행복했다. 드디어 선배와 같은 곳에 서게 되었다고. 조금씩 자신을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표면 밖으로 끄집어낸 적이 없을 뿐,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전부 제 착각이었다.

선배는,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

숨소리가 흐드러진다. 가슴이 먹먹하고, 목울대가 따끔거렸다.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 서서 그가 사라지고 없는 자리를 응시했다. 뭔가 뒤죽박죽 섞여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검은 응어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듯 목젖을 수없이 쳐댔다. 그래서 다시금 그 자리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도,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지금 다가가면 전부 쏟아내버릴것 같아서. 놓아주지 못할 그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이타도리는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오해한 것이길. 끝까지 타당한 근거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찾아낸 것은, 거추장스러운 제 미련이었다. 어디에도 오해는 없었다. 부정하고 싶은 제 모습만이 있었을 뿐.

“미안. 미안해요.”

“…….”

이타도리는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 반복하고서 고죠에게 등을 보였다. 오랜 고뇌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 치고는 빠른 도망이었다. 하지만 당황조차 하지 않은 그를 보며,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그를 추궁할 수도 없었고, 차마 이별을 고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고죠는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술기운에 졸음이 몰려왔음에도, 눈을 감지 못했다. 왜? 고작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왜 제가 이런 고생을 감내하고 있는가.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상관이야. 밤새 뒤척이며 수십 번도 제게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감은 눈 위로 이타도리의 상처 받은 얼굴이 수없이 덧그려졌다. 해가 뜨고 제일 먼저 핸드폰을 찾았지만, 알림창에 기록된 것은 죄다 학교 관련 연락이었다. 이타도리에게서 온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

“하, 나 보고 어떡하라고.”

고죠는 풀리지 않은 실타래로 온몸을 꽁꽁 묶고서 머리를 감싸맸다. 먼저 연락이 오면 구구절절 변명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화가 안 풀리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고 사과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지 안에 제가 먼저 연락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변명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었다. 그렇게 연락을 기다리는 일 분 일 초,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속이 썩어문드러졌다.

학교마저 자체휴강을 때린 고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침체된 기분. 우울감. 무기력증. 고죠에겐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이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차라리 숨을 쉬지 않는 것이 편할까. 잠시 숨을 멈추어 보기도 했다. 이내 숨을 참는 것이 더 귀찮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그리고 이들 중, 가장 낯선 것은 공허함이었다. 정적, 적막, 싸늘함. 그 모든 것들이 바늘처럼 살갗을 찔렀다. 공허하고, 외로웠다. 괴로웠다.

너 또한 내가 없는 순간들이 외로웠을까. 그간 제 행동을 돌이켜보면, 제가 있는 순간들에도 너는 외로워했던 것 같다. 같이 있는데 외롭다니. 말이나 되는 건가. 나는 그런 적 없었던 것 같은데.

호박색 눈동자 위로 넘실거리는 눈물. 그리고 제게 보인 등이, 파라노마처럼 흘러간다. 생각해보면, 그간 수없이 등을 보였던 저와 달리, 이타도리가 먼저 등을 내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등이 애처롭게 떨렸던 것 같기도 하다. 고죠가 제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그 애처롭게 떨리는 등을 달래주고 싶었지.’

하아. 숨을 깊게 내쉰 그가 거듭 마른 세수를 하고서 눈을 감았다. 이게 뭘까. 뭔가 전부 망가진 느낌. 아니지. 기실 완성된 적도 없었다. 부실 공사가 이제야 드러났을 뿐이다. 늦던 빠르던 언젠간 무너졌을 것이다.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뭐가 무너진 건데. 불쑥 미운 소리가 머리를 디밀었다. 웃기게도 고죠는 단서도, 과정도, 결과도, 전부 손에 쥐고 있었으면서, 여태 원인을 찾지 못했다.

- 전화, 받았네요.

“…….”

- 강의 중이면 어쩌지 했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네요.

“…오늘 안 갔어.”

- 아… 그래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 그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연락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전보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떨떠름하게 되묻는 말투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약간의 물기가 묻어나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 심장이 미친듯이 뜀박질을 하는 소리가 고막까지 둥둥 울렸다.

- 우리, 잠깐 만날까요?

그건 자신을 추궁하는 말도, 설명을 바라는 말도 아닌, 마지막 매듭을 짓고자 하는 말이었다.

고죠는 집앞 공원에서 초조하게 이타도리를 기다렸다.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 이미 닳아진 손톱 끝이 모나게 삐죽인다. 이타도리는 제가 가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공원에서 보자며 전화를 끝마쳤다. 자신의 구역에도, 제 구역에도, 더 이상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명이 너무 확실해서, 속이 쓰렸다. 위장이 뒤틀릴 것 같았다.

“선배.”

귀에 선연하게 꽂히는 상냥한 목소리에 고죠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온몸에 어색함을 두른 이타더리는 어울리지 않게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왜. 고죠가 자기도 모르게 이타도리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나 할 말이 있어.”

이타도리가 살짝 고개를 틀어 손을 피했다. 고죠는 닿지 못한 제 손을 보며 동그랗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

“네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짜증나서, 그래서 홧김에 나갔던 거지, 아무 일도…!”

“선배, 우리 헤어지자.”

…뭐?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관계의 마침표였다. 이타도리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발길을 돌렸고, 고죠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정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세차게 뛰던 심장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그러고 나니, 딱 한 가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있었다. 자신은 이타도리를 보낼 수 없다는 것.

“유지, 잠시만.”

빠른 걸음으로 이타도리를 다잡은 고죠가 어깨를 돌려세웠다. 어떻게든 잡아야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러나, 이타도리의 얼굴을 본 순간 말문을 잃었다. 이타도리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끝까지 제게 보이기 싫어서 태연한 척, 의연한 척, 버틴 것이었다.

“…유지.”

“저 갈게요.”

옷소매로 눈을 벅벅 닦더니, 고죠의 손을 뿌리친다. 어이없게도 고죠는 이때 원인을 알았다. 내쳐진 손보다, 이타도리의 우는 얼굴이 더 가슴 아려서. 그 얼굴이 너무나 외로워보여서. 미안한 마음에 기어이 눈물이 비집고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은 이타도리를 좋아하고 있다고.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타도리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 벌써 반년. 애당초 좋아하지 않았으면 그 긴 시간동안 이런 유치한 연애놀음에 어울려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하다.

“미안해. 내가 몰랐어. 널 외롭게 하는 줄 알면서, 내가 내 마음을 몰라서… 그래서 외면했어. 질투에 눈이 멀어서 과팅까지 나갔으면서, 멍청하게 내가 그걸 몰랐어.”

줄줄줄. 변명의 연속이었다. 퍽 모양새는 빠졌지만, 상관 없었다. 너에게 꼭 전해야만 했다. 제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도서부에서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마음에 품었노라고. 그저 제가 멍청해서 몰랐던 것이라고. 그러니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그만. 그만해요.”

“내가 몰라서 그랬어, 유지. 이게 좋아하는 건지 몰라서….”

“그만해….”

이타도리가 듣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다. 얼굴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큼지막한 손이 볼을 감싸고 든다. 말랑한 것이 이마에 내려앉고, 이타도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유지, 나 좀 봐….”

쪽.

“나 좀 봐줘… 응?”

쪽, 쪽. 얼굴 곳곳 연달아 내리찍는 입술 도장에도 이타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꾹 감고서 인내했다. 늘 괜찮다고 말해주던 이타도리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사실은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음이 착잡했다.

“유지… 제발…….”

이름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애달프게 울린다. 유일하게 이타도리를 휘두르던 그의 어여쁜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이타도리는 늘 말했다. 웃는 게 참 예쁘다고. 그러니까, 그의 무기는 이미 효용성을 잃은 것이다.

“그만… 그만해.”

꽉 그러쥔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둥근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이타도리는 단호히 거절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곧있으면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끝을 보지 않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다.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그것이 그에게 가는 길이라 끝없이 믿었다.

“……”

“부탁할게. 제발 나랑 헤어져줘요.”

하지만, 혼자 하는 연애의 말로는 결국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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