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意識
올림픽 폐막 하루 전이었다. 선수단 숙소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 마침 오늘 있었던 남자 배구 결승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종목을 따지지 않고 모두가 축하하기 바빴다. 포디움의 가장 높은 곳. 그 자리에 서는 순간의 기쁨은 같은 선수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희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내일 있을 폐막식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지만 경기를 치룬 당사자들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숙소 근처를 서성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멀리 있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 통화 중인 경우가 많았다.
모로 또한 잠들지 못한 선수 중 하나였다. 올림픽은 모로 웰즈의 또다른 무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완벽한 올림픽 데뷔였다. 프로생활 2년차, 첫 국가대표 출전에 당당히 주전으로 활약하며 금메달까지 따냈다. 예선 경기의 활약 때부터 최우수 선수로 뽑힐 것이라는 찬사 또한 끊임없이 그를 쫓아다녔고 결국 MVP까지 쟁취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시즌이었다. 지금 막, 통화 중이던 연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만 아니었다면 모로는 조금 더 성취감에 빠져 있었을 터다.
시상식 후, 숙소로 돌아와 확인한 핸드폰에는 축하 메시지와 함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남아 있었다. 모로는 망설이지 않고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후로 이어진 통화는 귀국이 이틀이나 남았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시간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단번에 깨 버린 사태의 발단은, 통화를 마치며 무엇이 가지고 싶냐는 모로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뭐?”
국가대표 선수단 기수旗手를 맡은 자신에게 팬티 한 장만 입고 귀국 해달라고 했어도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해줄 자신이 있던 모로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되물음이 터졌다. 통화 중인 상대는 그 물음이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탓에 생긴 의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또박또박 한 글자 씩 힘주어 다시 대답해 주었다.
“가.엘. 선수 말야.”
“가엘?”
“응. 이번 400m 자유형 너무 멋있었어.”
“수영의, 샤젤 말하는 거지?”
“응응! 사인! 받아다 줘!”
일부러 들으라는 듯 ‘샤젤’이라 말했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듯 해맑은 대답에 모로는 속으로 앓으며 이마를 짚었다. 사실 사인을 받아 달라는 부탁은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서로 간에 친분이 없다고 해도 지인이나 가족에게 부탁을 받고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는 경우는 흔했으니까. 모로의 어이를 출타하게 만든 근본적인 문제는 사인을 받아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름’에 있었다.
국가대표 선수 중에는 ‘샤젤’이라는 패밀리 네임을 쓰는 선수가 다섯이나 있었기에(놀랍게도 서로 사촌들이었다.) 이름을 불러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종목을 붙여 불렀다. 그리고 샤젤이 둘이나 있는 유도와 달리, 수영의 샤젤은 가엘 샤젤 한 명 뿐이었다. 굳이 이름으로 불러 구분할 필요가 없는 상대인 것이다. 업계(?)와는 전혀 관련 없는 치즈펠의 입에서 자연스레 이름이 흘러 나오는 것에 모로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지만 영상 통화가 아니었기에 그것이 치즈펠에게 전달될 일은 없었다.
“아무튼, 너무 부담스러워한다 싶으면 안 받아줘도 돼! 그냥, 가능한 경우에만. 무리하지 말고, 알겠지?”
확실히 대단한 선수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모로는 그를 의식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신기록 세운 거 진짜 멋지더라. 고등학생 때 자기가 세운 올림픽 신기록도 같이 깬 거잖아.”
세계 일류 레프트.
코트 위의 아폴론.
이 외에도 모로를 찬미하는 수식어는 많았지만 ‘세계 신기록 보유자’ 타이틀은 존재하지 않았다. 배구는 기록 스포츠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으나, 모로는 오랜만에 그것이 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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