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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모

성 내는 고요했다. 변경백이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할 때 마다 으레 있는 일이었으나 치즈펠은 평소와 다른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포식자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기이한 정적이었다. 한낮임에도 느껴지는 한기에 그는 괜스레 자신의 팔을 한 번 쓸었다. 근처의 숲을 한바탕 휘젓고 온 후라서 햇빛과 체온으로 달궈진 팔은 따뜻했다. 병사들은 출전했다 하더라도 경비병이나 다른 사용인들은 아주 많이 남아있을 터였다. 다들 있어요?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치즈펠이 무심결에 뒷걸음질 쳤다. 단단한 것에 뒤통수가 부딪히자 그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깜짝이야!”



아무도 없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치즈펠은 안도의 숨을 뱉었다. 뒤에 서있던 남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치즈펠이 부딪혔던 자신의 가슴팍을 쓸고 있었다. 미안해요! 치즈펠이 허둥대며 사과하자 남자가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표정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웃는 얼굴을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상냥하게 대하면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라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북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온후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그는 조용한 얼굴로 내부를 훑고 있었다. 손님일까? 치즈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찾아왔어요?”



변경백의 성을 찾은 손님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예의 있는’ 말씨는 아니었으나 치즈펠은 자신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남자의 연한 푸른색 눈에 잠시 이채가 깃든다. 음? 치즈펠이 고개를 갸웃했다. 햇빛의 장난이었던 모양인지 처음 봤을 때와 다른 것은 없었다. 남자는 무언가 생각하듯 치즈펠을 빤히 바라보다가 질문에 답했다.



“웰즈 공작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모, 아니, 아니. 공작님이 지금…”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전해 줄까요?”


“아뇨. 받을 것만 받아가면 됩니다.”



제멋대로 예의를 차린 치즈펠의 물음에 산뜻하게 대답한 남자는 거침없이 홀을 가로질렀다. 큰 키 만큼이나 빠른 걸음이었다. 변경백, 웰즈 공작이 자신이 없는 성 내를 누군가 휘저어 놓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치즈펠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혹여 불똥이 튈 새라 부지런히 그 뒤를 쫓았다. 따로 안내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거침없이 성의 가장 깊숙한 내성內城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성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계단 앞에 다다라서야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성 내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웰즈 성 전체에서 가장 강한 방어마법이 깔린 곳이 바로 이 내성이었다. 어지간한 귀족과는 격을 달리하는 웰즈 공작을 지키기 위해 내성은 보통의 성보다 훨씬 위험하고 고위의 마법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깔린 마법진들은 내부는 물론 외벽까지 단단하게 감싸고 있어서 인간은 물론 마수魔獸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성 어디든 가도 좋다고 허락 받은 치즈펠 조차 내성에는 걸음 하지 않았다. 치즈펠을 위해 기꺼이 방어마법을 새로 짜겠다고 말한 공작과 달리 성의 방어마법을 담당하는 마법사는 탐탁치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이 짠 방어 마법이 주인에게 익숙해지는 것에는 시간이 걸렸다. 별궁의 서재를 집무실처럼 사용하며 자주 들락거리고 있었기에 치즈펠로서는 불만이 없었다.


그랬기에 결계를 넘어 내성에 걸음한 남자의 모습에 치즈펠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어마법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 걸까? 치즈펠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지만 마법은 착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어째서? 치즈펠의 의문에도 남자는 답하지 않은 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향했다. 별궁의 마법사가 이변을 알아채고 달려올 때까지, 치즈펠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물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들이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쓰러질 정도로 거센 압박 속에서도 남자는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로는 구축할 수도 없는 섬세한 마법진은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연약하게 깨져갔다. 쉽지 않은 것을 파괴했음에도 남자는 감흥 없는 눈으로 앞만 보며 걸었다.


남자는 곧, 문 앞에 섰다. 금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쥐자 손아귀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대로 손목이 날아갔을 강력한 마법이었지만 남자에게는 정전기만큼의 자극도 주지 못했다. 마법이 비명을 지르며 주인이 아닌 자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 만큼 가볍게 그 힘을 내리누르며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서재는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다행히 그가 찾는 것은 책이 아니었기에(책이었다고 해도 그는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찾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공간의 모든 것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자연스레 책상으로 다가간다.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손을 뻗어 두번째의 서랍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열 때 삐걱이며 반항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다였다. 안에 든 것은 낡은 로켓과 공작의 인장이 찍힌 채 봉인된 봉투 뿐이었다.


칠이 다 벗겨진 싸구려의 로켓을 발견하자 표정이 없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내려앉는다. 거침없는 손으로 로켓을 집어 든 남자는 양 손으로 로켓을 쥔 채 한숨을 쉬었다. 함부로 그의 물건을 가져간데다 건방지게 거래까지 제안한 공작이 치룰 대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성의 사용인들에게 분풀이를 했으니, 남은 몫은 공작의 것이었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뒤를 따르던 소년을 떠올렸다. 교육받지 않은 말투와 행동거지. 초반에는 그저 성의 사용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용인이었다면 근 한 달이나 지하 감옥에 있던 자신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공작이 소년을 꽤나 싸고 돈 모양인지 소년은 그를 경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손님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함부로 덤벼든 공작에게 아끼는 소년을 죽여 본보기를 보이는 방법도 있겠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을 한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그의 취미에 맞지 않았기에 남자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문득, 로켓과 함께 놓여있던 봉투에 호기심이 생긴다. 남자에게 충동은 매우 드문 감정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웰즈 공작 본인, 수신인은 제국 수도의 아카데미 원장이었다. 그 나이에 새삼스레 아카데미에 들어갈 것은 아닐테고, 독신인 그에게 아카데미에 보낼 만한 자녀 또한 없었다. 자연스레,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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