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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빚어 만든 별은 어디에서 빛나는가 (리퀘스트)

지인 리퀘스트 / 2022. 06. 05

시즈루 토아 X 호시노 아카리

<녹아들어 포말로써 하나가 될> 후일담

 수면 아래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거울 저편의 세상처럼 멀고, 또 아득하게 아름다웠다. 수면을 통과하여 해저에 아롱아롱 닿는 빛은 지상에서보다 훨씬 눈부셨다. 시시각각 변하는 오묘한 색채를 띠는 세상이다. 희끄무레한 푸른 빛이기도 했고 노을을 받아 타오르는 빛을 띠기도 했다. 땅 위에서 마주했던 물체에 비유하자면 살구색을 띠는 산호들은 보석 같기도 하고 이국적인 꽃 같기도 했다. 낙원과도 같은 풍경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남자가 갈망하던 천국이자 평생을 안주하기로 마음먹은 안식처였으므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연인의 꼬리가 느슨하게 흔들린다. 꼬리만이 아니다. 머리칼 역시 물살에 휩쓸려 같이 흐느적거린다. 태양 아래서 빛나던 것은 물 아래에서도 빛이 나기 마련이다. 색이 조금 옅어질 뿐이다. 여전히 금사(金絲)를 녹인 것만 같다. 익숙하게 손을 뻗는다. 거부는 돌아오지 않는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아찔할 정도로 생생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는다. 그러한 광경조차 세계의 일부 같았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상앗빛 비늘로 뒤덮인 꼬리가 제 꼬리 위로 겹쳐 있다. 이따금, 파도가 그 베일을 걷어 내면 리테의 꼬리를 볼 수 있었으나 온전한 상태로는 보기 힘들었다. 이런 식으로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 아래로 스며드는 빛에 비늘이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리테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의 꼬리는 붉었다. 모발 색을 닮은 걸까. 그 원리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이었던 자가 인어가 된 원리를 알 수 없듯이. 다만, 리테가 그 색을 좋아했기에 상관없었다. 이따금 수면을 헤치고 노을빛이 들어오곤 하는데 그 색보다 붉고 찬란하면서 만질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리테가 좋다면 전부 좋았다.

 우리의 지느러미 색은 각자 하나로 구성되어 완전했으나 종종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쌍의 인어들의 꼬리에는 이질적인 색의 비늘이 하나씩 툭 박혀 있곤 했다. 나는 그것을 리테에게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자연히 얘기해주리라고 생각했다. 리테는 나로 인해 바빠졌다. 인어가 한 때 인간이었던 것을 이곳에 데려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므로 책임질 일이 많은 듯했다. 홀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리테가 태어난 이후로는 처음 일어난 일이라고 수군대는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런 순간이면 뒤에서 물거품이 일었으나 그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게 기뻤다. 생경한 상황에 적응하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 리테가, 그 리테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게 좋았다.

 유년을 기억한다. 목판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판화와 같은 시기였다. 그 틀로 계속해서 기억을 찍어냈기에 기억은 점점 짙어지기만 했다. 리테. 나의 갈라테이아. 요정이라고 불러야 할까 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게 무엇이든 그녀가 내 생명의 소유주임에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내 숨통의 주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 기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왔다.

 새벽 무렵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안개가 흩뿌려지는 곳이었다. 그 고장 사람들은 안개를 벽이라고 불렀다. 짙고 뿌연 하얀 벽. 그것에 손을 뻗어 헤집을 때 잡혀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잡히면 도망가야 한다고 친척 어른들은 내게 단단히 일렀었다. 아니, 애초에 새벽녘에는 바닷가에 가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사람을 꾀어 잡아먹는 괴물이 산다고. 그것은 오래되어 눅눅한 먼지가 쌓인 전설이자 경고이자 규칙이었는데 어린 내 눈에는 퍽 우습게 보였다.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들조차 그런 옛이야기를 두려워했다는 게 웃겼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괴물이 문제가 아니라, 약한 몸 탓에 휴양하러 온 친척 아이가 바다에 빠져 실종되는 게 더 문제였을 터이니 그런 말로 둘러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에는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꾀어내는 측면이 있는 법이다. 남부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괜한 호기심이 동해 새벽녘에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던 것도 지금까지 선명했다. 그것은 필시 일시적으로 불어난 궁금증이 아니라 어떤, 운명에 의한 움직임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났다. 워낙 고운 모래여서일까 발을 움직일 때마다 신발을 파고들고 모래가 바닥을 감쌌다. 걷기 불편했다. 들었던 대로 안개가 짙어 앞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모든 게 오히려 궁금증을 북돋웠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앞을 보았다. 오르페우스가 된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걸음은 바닷물이 신발을 적실 즈음이 되어서야 멈췄다. 운무가 그 이마를 쓸고 있어 표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바다가 지평선 너머까지 옅게 발려 있었다. 왠지 모를 엄숙함에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야 할까. 갑작스레 겁을 주워 먹었다. 모래사장에 널리고 널린 게 그것이었으므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는 법을 잃어버렸다. 안개에 둘러싸인 채로 그저 해변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저기.”

 가날픈 목소리였다. 딱 두 음절이었는데도 그 말에 노래하는 듯한 음색이 배어 있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고개가 돌아갔다. 틀림없이 바다 방향에서 난 소리였다. 나는 사람을 꾀어내는 괴물을 만난 걸까. 그럼에도, 어쩐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몸과 물의 움직임은 닮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바다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음성이 다시금 울렸다.

 “그, 이쪽이 아냐, 반대쪽이야.”

 어딘가 곤란한 기색이 느껴졌는데도 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첨벙대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행여라도 놓칠까 발을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진다. 조금만 서둘러도 숨이 금세 차올랐다. 헉헉대는 소리의 뒤를 따라 모래를 밟을 때마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든 것이 녹아 공간을 구성한다. 나는 마침내 모래와 안개가 섞이는 경계면을 마주한다. 목소리의 주인은 거기에 있었다. 그림자가 하늘거렸다.

 “고마워.”

 그 모습을 채 눈에 담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달려온 탓에 목이 멨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환희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숨을 몇 번이고 토해낸다.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신발 아래로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모래 입자가 아닌 그, 주인을 비로소 눈에 담는다. 그 순간을 몇 년이 지나고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안개의 하얀 부분에서 원료를 추출하여 조각한 것만 같은 얼굴과, 세상의 모든 금을 긁어모아 그대로 실을 뽑아낸 듯한 머리칼만으로도 충분했을 터인데 조물주의 농간인지 더한 것이 있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한 쌍의 찬란한 보석. 암염의 붉은 빛과 잿빛을 모두 구현한 눈은 분명 바다 요정의 것이었다. 먼저 감사 인사를 뱉어냈음에도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말하는 법도, 내가 누구인지도, 왜 여기까지 왔는지도 그 모든 것은 허상처럼 떠나갔다. 요정에게 홀린 사람. 모든 게 떠난 자리에 사실만이 남았다.

 “너는 날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게 그녀가 제대로 읊어낸 첫 마디였다. 눈꼬리가 가볍게 휘어진다. 미소 짓는다. 일련의 과정이 아주 천천히, 느린 왈츠 곡의 템포로 흘러간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힘겨웠으나 나는 해내고 말았다. 심장이 수평선 끝까지 내달리다 겨우 돌아온다. 끊임없이 쿵쾅댄다. 이것은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발생한 박동이 아니다. 심장의 주인이었던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 내 심장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요정이 이제 그 소유권자였다.

 “나, 나는 테디야.”

 파도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짧게 해안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면 요정의 꼬리 일부분이 보였다. 다리가 아니라 꼬리였는데 이질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봄 같은 색이었다. 옅은 상앗빛 비늘이 햇빛도 없는데 저절로 빛을 발하는 게 눈부셨다.

 “테디.”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그 이름을 천천히 맛본다. 부르는 이가 드문 애칭이었다. 가족조차 애칭으로 자주 부르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그리 불리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요정 앞에서는 아이테르-테티스 네이옌 글라키예가 아니라 오로지 테디로 존재하고 싶었다. 금빛 요정이 그 이름을 음미하다가 마침내 미소 지었다.

 “그럼, 나는 리테라고 불러줄래?”

 “리테?”

 “응. 원래는 갈라테이아지만, 그건 너무 길잖아.”

 리테. 그 이름을 나는 한참 씹어 즙을 내고 맛을 보았다. 달았다. 마침내 바다 요정은 바다 요정이 아니라 리테가 되었다. 아름다운 바다 요정 갈라테이아. 내게는 그저 리테. 리테가 자신을 리테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아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것은 필경 뇌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충격에 상응했을 것이다. 쓰러지듯 혹은 기어가듯, 혹은 무릎을 꿇듯 나는 그렇게 모래사장 위로 주저앉았다. 물 위로 올라올 수 없는 요정, 아니 리테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게 또 왠지 모르게 좋았고, 동시에 그런 표정을 짓지 않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그날을 포함한 그 이후로 많은 얘기를 했다. 친척 어른들은 거의, 아니 정말로 매일 안개가 두텁게 발린 해안가를 서성이는 나를 걱정하였으나 만류하지는 못하였다. 실제로 해변을 거닐기 시작하면서 창백했던 안색은 보기 좋게 달아올라 누가 봐도 병약한 소년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므로. 리테는 늘, 비슷한 시간에 뭍으로 올라왔고 나는 모든 시간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안개가 짙게 내려앉을 무렵부터 만나 헬리오스가 마차를 서쪽 하늘로 끌고 내려감에 따라 바다 위로 그 불길이 거꾸로 솟을 즈음에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우리는 늘 아무것도 아닌 얘기와 동시에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내게는 리테와 나눈 모든 게 중요했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내가 시간을 보낸 공간을 좋아했으나 그 자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리테가 있었으므로. 리테와 함께 보낸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 전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비극은 행복의 무대 뒤편에서 극을 올릴 준비를 한다. 우리, 어쩌면 오로지 나의 비극은 내가 이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러니까 내게는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는 점에서. 애초에 요양 명목으로 찾은 남부였기에 당연했다. 명실상부하게 이곳으로 온 이후부터 내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곳 의사는 내 상태를 진찰하며 남부의 맑고 상쾌한 공기와 신선한 해산물의 상호 작용 덕택이라고 소견을 밝혔으나 그게 아님을 나만이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호전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이곳을 떠난다면 원래대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모두가 기뻐하며 북부의 부모님께 연락을 취했다. 떠나야 할 날이 슬금슬금 기어 오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나 힘은 일절 없었다. 소년이란 그런 법이었다. 그때 속을 끓게 만드는 열꽃을 느꼈다. 그것은 처음으로 겪는, 내부를 헤집는 격통이었다. 달콤하고 아릿한 감정이 아니라 선연한 고통이었다. 내게는 힘이 필요했다. 영원히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나의 갈라테이아와 아주 긴 시간 함께 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를 원했다. 나는 그것을 감히 힘으로 부르기로 했다.

 돌아가야 할, 정확히는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올수록 속이 부글거렸다.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속을 음식으로 채울 수 없었다. 공복을 메울 만한 것은 신선한 바닷바람과 짙은 안개와 리테의 목소리 정도였다. 그랬다. 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나는 줄곧 해안가에서 사는 사람처럼 굴었다. 다만 그 사실을 리테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그 애가 안색이 안 좋다며 다정스레 걱정을 실어 그 하얀 진주와 같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어주는 것을 기다렸을 뿐이다. 마치 마지막 순간처럼.

 “테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리테.”

 처음부터 서로 그랬으나 거기에 비해서도 우리는 처음보다 꽤 친숙해졌다. 이런 접촉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목이 막혔다. 누군가가 꾸욱 조르는 감각이 올라왔다. 서늘한 손이 얼굴을 감싼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만다.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리테랑 있으면 하나도 안 아파.”

 “정말?”

 “정말.”

 눈을 뜨면 그 시야를 침범하는 것은, 기대했던 대로의 금빛 요정이었다. 경애하는 갈라테이아. 감히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일 수 없는 존재. 소유격이 붙어야 하는 것은 내 이름 앞이었다. 너의 테디이기를 늘 바랐다. 그렇기에, 그랬기 때문에 입을 열기가 두려웠다. 어떻게 갈라테이아의 소유물이 그 곁을 떠나겠는가. 그 허락을 감히 어떻게 구하겠는가. 무엇보다 내게는, 새로운 낯빛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떠나는 것에 대해 화를 낸다면 다시는 만나주지 않을까 두려워할 테고 실망하거나, 또, 아주 만약 눈물을 보인다면 내가 발을 돌려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랬다. 그 반응이 어떠하든 나는 이미 요정의 포로인 것을.

 “있잖아, 리테…….”

 그러니 말끝이 자연스레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정말로 거의 매일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었으니까.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리테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것은 또 나름대로 어떠한 정신적 자극이 되었음에도 슬퍼하는 얼굴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적어도 내 안에서는 그러했다.

 “나, 내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됐어.”

 “응?”

 “그러니까, 당분간, 아니 아주 긴 시간 동안…… 여기 못 올 거야.”

 손끝이 모래밭 위에 춤을 추며 호선을 그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손톱 아래로 모래가 파고든다. 손이 모래를 파고든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박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연신 쿵쿵 뛰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리테와 나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고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곳에 오지 못할 날이 온다는 것과, 당장 내일부터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조금 더 일찍 말해야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이 순간을 나중으로 미뤄두고 싶었다.

 “때가 온 거구나.”

 리테는 늘 그랬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 애가 뱉는 말들은 모두 한 곡의 노래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한 채로 그저 끄덕일 뿐이다. 그러나 대개 리테는 해변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리테와 가까워지는 형국이 되고 만다. 자연스레 멀지 않은 거리로부터 좋은 향기가 훅 끼쳐 왔다. 거기에 반응하여 스르르 입이 열린다.

 “내가 했던 말, 혹시 기억해?”

 “테디가 한 말이라면 전부 기억하고 있는걸.”

 요정이 소리를 엮어내며 웃는다. 수면으로부터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듯한, 혹은 반대로 수면으로 빗방울이 떨어질 때 나는 듯한 맑은소리였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내용까지 포함한 전부가 완전했다. 말 뒤에 붙은 조사들조차 완벽했다. 내가, 한 말이라서. 내가 했던 말이니까…….

 “남부 제독이 되면, 저기 보이는 성에서 살 수 있다고, 그러면 지금처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잖아?”

 “응. 그랬었지.”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리테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게 안개 속에서도 선명했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에 가깝게 나풀거린다. 꼬리 끝의 얇은 부분은 색도 질감도 모두 값을 가늠하기 힘들 귀한 비단을 닮아 있었다. 손에 닿으면 찢어져 버릴 듯한 것. 나는 입을 채 닫지 않고 답한다. 맹세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꼭 제독이 되어서 다시 리테를 만나러, 데리러 온다고 약속할게.”

 “약속하는 거야.”

 보석을 박아 넣은 두 눈이 일순 빛을 토해냈다. 그 눈이 반짝이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 궤가 달랐다. 눈가에서 일렁이던 액체가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고체가 되는 기적을 나는 보았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는 전설이 진짜라는 것을 그 순간 처음 알았다. 리테가 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낸다. 옅게 붉은빛을 띄는 보석들이었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성스러웠다. 신께 맹세코 리테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황홀했다. 이유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알고 있었다.

 “선물이야, 테디.”

 리테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이 온전한 내 것이었다. 방금 진주를 흘렸던 사실이 무색하게도 수줍게 웃는 그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갈라테이아의 모든 모습에서 나는 그녀를 향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느낀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망설이게 되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마음이었다. 동시에 갈라테이아에게 털어놓기 두려운 것. 적어도 떠나는 순간에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나는 비겁하지 않았다.

 “고마워. 꼭 돌아올게.”

 리테가 내게 준 진주를 처음 본 순간에는 붉은색이 돈다고 생각했으나 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면 옅은 크림색도 함께 묻어났다. 나는 그게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리테를 떠올리게 하는 색채였다. 진주 몇 알을 손에 꼭 쥔 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셔야 한다는 당부를 들은 것 같기도 하였으나 내게는 이 일이 더 중요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또 돌아올 수 없을 시간이었기에.

 “테디.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음…… 리테 생각?”

 “테디도 참.”

 “정말이야.”

 수면 위로 파도가 치며 그 아래에서는 물거품이 들끓는다. 순식간에 나의 시간은 과거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현재로 돌아온다. 정말이야, 리테. 나는 늘 네 생각을 해. 곁에 있어도, 곁에 없어도. 입을 벌려도 물이 들어오지 않음을 알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문다. 그저 연인이 다정하게 제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을 느낀다. 나와 리테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했다. 나는 리테를 끝내 데리고 가지 못했다. 나를 데려가 준 것은 리테였다. 오히려 그게 더 기뻤다.

 “오늘 헤엄치는 법 한 번 더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그랬었지. 아직 조금, 무서워서…… 리테의 손을 빌려서 연습하고 싶어.”

 슬그머니 물결을 헤치고 리테의 손을 쥔다. 따뜻하고 습한 손이다. 수영을 못 하지는 않았으나 리테와 있을 때면 종종 헛발질을 하고 만다. 리테 앞에만 서면 꼬리가 맥을 못 추곤 하는 것이다. 리테 없이 혼자 남을 때면 처음부터 이랬던 존재마냥 헤엄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이 또 신기했다. 그러니까, 리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또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는 것이다. 갈라테이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짓는다. 자, 이렇게. 요정은 춤을 추듯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흔적이 물 위에 호선을 그린다. 나의 티타니아. 나의 여왕.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니라, 내가 새벽에 마주한 현실. 리테의 뒤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당연하게도 자연스레 헤엄칠 수 있다. 지상의 왈츠를 추듯 우리는 박자를 맞춰 움직인다. 수면을 뚫고 내려오는 햇빛 없이도 리테의 꼬리 비늘은 반짝인다. 이질적인 빛없이 같은 색으로 가지런히 빛나는 꼬리에, 문득 질문을 던지고 만다.

 “그러고 보니, 리테.”

 “응?”

 “다른 분들을 보니까…… 꼬리에, 다른 색 비늘이 있던데.”

 “아, 그건 말야.”

 리테가 헤엄을 멈추고 꺄르르 웃었다. 물거품이 한 차례 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다. 빛이 흩어지고 다시 모인다. 내게는 언제나 리테가 가장 반짝이는 빛이었다. 어째서 바다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다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영원을 맹세한 증표야.”

 일순 사고가 멈추고 다시 돌아간다. 가지런히 박혀 있는 리테의 우윳빛 비늘들이 시야를 전부 차지한다. 모든 게 반짝거린다. 빙빙 도는 것일지도 모른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이내 그 해상도를 되찾았을 무렵, 입은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만다. 늘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말이 있었다. 처음 봤던 순간부터 입 밖으로 아주 자연스레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 드는 것을 겨우 집어넣었던 나의 대사. 마침내 수면 위로 떠 오르게 된 말. 뱉어낸 형태는 다르지만 그 뜻을 헤집어 보면 결국 같은 내용인 무언가.

 “그럼, 리테. 우리도 교환할까?”

 리테는 말이 없다. 거품조차 올라오지 않는다.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전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거절당한다고 해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냥 전하고 싶었다. 지금껏 말과 행동으로 보였으나 이제는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싶었다.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게, 내가 너의 것임을.

 “그래도 돼?”

 “당연하지.”

 “한 번 하면 무를 수 없는걸.”

 “그렇다면 더더욱.”

 리테가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비늘에 손을 뻗는다.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모든 것이 섭리대로 돌아간다는 인상의 동작으로. 이 극의 유일한 관람객처럼 나는 그것을 본다. 지상에서 조명이 쏟아진다. 갈라테이아가 내게 그것을 건넨다. 오래전, 진주를 선물했을 때와 같은 얼굴로. 그때와 같은 사랑스러움으로. 그러나 다른 게 있다면 갈라테이아는 울지 않는다. 미소 짓는다.

 나는 가장 남의 눈에 잘 보이는 자리의 비늘을 뽑아냈다. 이 바다의 주민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상앗빛 비늘을 가진 가장 아름다운 요정 갈라테이아와 영원을 맹세한 이가 누구인지. 내게서 영원이라는 이름을 앗아가 소유한 자가 누구인지. 일련의 행위는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갖는 의미 탓에 황홀하기까지 했다. 각자의 손에는 서로를 닮은 비늘이 들려 있다. 반짝거리는 작은 보석 조각과 같은 것. 반지를 대신하여 서로가 서로의 것임을 증명하는 신체의 일부. 그러나 나는 갈라테이아의 것이나 갈라테이아는 나의 것이 아니다. 리테를 감히 나의 소유라고 부를 수 없었으므로. 단지 나는 이제 이 세계의 규칙에 편입되어 내가 리테의 소유임을 증빙하는 의식을 치르고 싶었다.

 상아색 사이의 붉은 빛과, 붉은색 사이의 상아색 중에 어느 것이 더 눈에 띌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게 설령 무슨 색이든 이질적인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꼬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물질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물결이 등을 밀었다. 나는 부드러운 금빛 천을 헤집으며 그 천의 주인에게 입을 맞췄다. 우리가, 우리가 된 이후로 나누는 처음이었다. 달고, 어쩔 수 없는 짠맛이 났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였다. 리테는 눈을 감는다. 서로 다른 비늘 색이 낳은 영원이 발하는 빛이 눈 부셔서 나 역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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