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기타

[필립유나] 가장 사소한 욕망

2021. 11. 27

2023년 7월 프로젝트 문 사상 검증 및 직원 부당 해고 문제 발생 이전에 작성된 글입니다.

현재 프로젝트 문 장르 창작 및 소비 없습니다. 단순 백업을 위해 업로드합니다.

  • 필립→유나.

  • 새벽 사무소 접대 이전 (+불완전한 우는 아이의 책장 이전) 을 상정했습니다.

  • LoR 리우 협회 2과 접대 이후/엔딩을 보기 전에 쓴 글이기에 일부 공식 설정과 맞지 않은 언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역시 도시에도 계절은 있구나.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남자는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습한 공기가 무겁게 몸을 감쌌는데 이제는 제법 쌀쌀했다. 겉옷 없이 문을 나서는 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일몰도 빨라졌다. 가뜩이나 출퇴근 시간도 일정하지 않은 직업이다. 이제는 정말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하는 건 그른 듯했다. 하늘을 태우는 노을이 창밖에서 넘실거렸다. 검정과 파랑의 경계에 있는 도화지 위에 주홍빛 물감이 후두둑 쏟아진다. 붉은빛이 사무실을 무섭도록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을 태워버리려는 불길을 닮았다. 거대한 세계의 법칙은 이따금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해가 질 때, 정확히는 노을이 사무소에 번져 나갈 때 필립은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새벽 사무소보다 낮은 곳에 있는 건물들이 붉게 물들어나가는 모습이, 그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여기 경치 좋지?”

 “……선배.”

 갑작스런, 그러나 낯설지 않은 목소리. 쿵쿵대던 심장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뛰었다. 남자는 몸을 튼다. 선배.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것마냥 유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인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우스웠다. 이렇게 빈틈투성이인데도 해결사라고 할 수 있을까. 속이 답답했다. 여자는 바깥을 내다본다. 필립이 그랬듯이. 남자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필립의 시선은 밖이 아니라 안에 머문다. 정확히는 한 사람에게. 커다란 불길이 유나의 청록빛 머리 위에서 너울거리다가 이내 잡힌다. 유나의 주변만큼은 처음부터 붉은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것 하나가 남자의 숨통을 콱 틀어막았다. 여자가 익숙하게 창틀에 팔을 얹는다.

 “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긴 내 전용석이었는데 말야.”

 “죄, 죄송해요…….”

 “왜 사과를 해? 사과받자고 한 얘기 아닌데.”

 반사적으로 필립이 흐리게 사과를 뱉어낸다. 몸이 움츠러든다. 필립은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해결사라는 위험한 일에 몸담고 있으니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양상이 조금 달랐다. 그는 늘 얇은 껍질을 두르고 있었다. 누군가 손을 얹기만 해도 그 온기에 부식될 막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포장지가 사라지면 내부의 물건은 어떤 형태로든 손상되기 마련이었으므로 내내 뜯지 않고 내버려 두고 싶었다. 지금도 필립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선배는 무슨 얼굴을 하고 계실까. 아무 일도 아닌데 괜히 겁이 났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뱉는 사소한 말에도 남자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곤 했다. 살바도르 취향의 두툼한 양탄자가 깔린 바닥이 눈에 걸렸다. 바닥조차 노을이 묻어 붉은빛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네 개의 발이 있다. 유나의 신발 위로 피가 튀어 있었다. 시선이 멈췄다. 그뿐이었다.

 “그냥 필립, 너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좋다고.”

 “……”

 “내가 좋아하는 걸 남도 좋아하면 기쁜 법이거든.”

 카펫 아래로 하체가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오랫동안 들었다. 아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필립은, 두 발로 바닥에 발을 딛고 있었다. 고개를 든다. 변함없이 유나는 그 자리에 있다. 더는 밖을 내다보지 않고 창을 등진 채 이쪽을 바라본다. 그 등 뒤로 노을이 조각난 파편들이 부딪힌다. 시선의 끝에는 필립이 있다. 하얗고 얇은 커튼이 바람에 너울거린다. 커튼과 베일의 차이가 그저 드리우는 장소뿐이라면 지금, 커튼은 베일일 것이다. 베일이 얼굴을 가린다. 선배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으므로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 떠나서 이왕 오래 같이 일할 거, 사무소에 마음 가는 구석 하나쯤 있으면 좋잖아.”

 오래, 같이. 두 단어가 그의 속을 헤집었다. 아주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잔잔했던, 아니 잔잔했다고 생각한 호수 바닥에서 기포가 올라온다. 제대로 터지지 못하고 포말은 가라앉는다. 여자는 그대로 창으로부터 멀어진다. 창문과 유나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필립은 그 주인 대신 남겨진 흔적만을 본다. 잔영은 거대했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는 영역과 닮았다. 유나는 걸음을 옮길 때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공간이 밝아진다. 불을 켜러 가셨던 거구나. 남자는 생각한다. 인공적인 빛은 노을이 던지고 간 불길을 먹어 치운다. 유나는 여전히 필립을 바라본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 낯에 선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정한 웃음이었다. 저녁노을을 닮았다. 아니다. 새벽을 여는 등불 쪽에 더 가까웠다. 신기루처럼 그것은 곧 사라진다. 그때부터 그는 감히 제 심박수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어떠한 쉼표도 없이 심장이 뛰었다. 마음 가는 구석.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유나가 테이블 위에 첼로 케이스를 올려놓고는 뚜껑을 연다. 손길 하나하나가 신중했다. 의뢰를 처리할 때면 눈으로 다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칼날들이 얌전하게 잠들어 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굳은 채로 묻어 있다. 날을 하나씩 살피던 여자는 혀를 찼다. 필립은 그저 옆에서 일련의 과정을 말없이 지켜본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공방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날이 좀 무뎌졌네.”

 대뜸 유나가 말을 뱉어냈다. 굳이 어떤 공방이라고 이름을 대지는 않았으나 새벽 사무소 사람은 모두 스티그마 공방의 무기를 썼다. 필립 역시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앞으로 쓸 무기는 직접 골라야 하지 않겠나. 주저하던 그에게 살바도르가 그리 말했었다. 눈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지 분간할 수 없는 이질적인 공간 속, 검 한 자루가 유난히 눈에 밟혔던 걸 기억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건 이미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둥지에 자리 잡은 4급 해결사 사무소에서 쓰는 무기가 저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나중에 몰래 찾아 본 스티그마 공방제 무기는 상상을 훌쩍 넘는 값이었다. 물론 한평생 열심히 일하면 감당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으나 해결사 일을 막 시작한 청년에겐 버거운 가격대였다. 이걸 어떻게 갚지. 몇 날 혼자 끙끙 앓던 끝에 그는 하나뿐인 선배에게 그 얘기를 넌지시 털어놓기도 했었다. 선배. 스승님께서, 갑자기 무기를 사주셨는데요……. 그 말이 전부였다. 그 짧은 한마디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유나는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우린 동료잖아. 영감님도 참, 입사 선물로 애를 괴롭히면 어떻게 해. 그랬던 것 같다.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필립은 이 사람들이 좋았다. 존경했다. 감히 그들처럼 될 수는 없어도 언젠가 대등한 자리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종종 셋이서 의뢰를 처리하러 가면 뒤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있었다. 살바도르 씨와 유나 씨에 비해, 새로 온 사람은……. 그 뒷말은 듣지 못했다. 언제나 두 사람이 더 큰 소리로 다른 얘기를 꺼내곤 했으므로 묻혀 버렸다. 이번 의뢰가 끝나면 본가에 부모님을 좀 뵈러 다녀오려고요. 우리 애도 유나 양의 절반만이라도 효도했으면 좋겠네. 잘 다녀오게나. 그런, 의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소한 이야기들. 필립은 유나가 본가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뒤에서 속닥대던 말도 어쩌면 좋은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내용물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은 자연히 불안으로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계속 노력하면 되는 일이었다. 노력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꼭 필요했다. 만약 정말로 같은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다면 필립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저, 선배…….”

 “왜?”

 막 수화기를 들어 올리던 유나가 다시 그것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언제나 남과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곤 했다. 필립은 그러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은 반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나의 두 눈을 좋아했다. 겨울이 옅어지고 봄이 막 세상에 발을 들일 즈음 올라오는 어린잎의 색이었다. 차마 오래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혼자 남을 때면 오랫동안 그 빛을 곱씹곤 했다. 입이 몇 번이고 열렸다가 닫힌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스티그마 공방…….”

 운을 뗀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는 선배의 눈치를 살피고자 했다. 하지만 시선이 다시, 그 발끝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나의 신발에는 여전히 피가 묻어 있었다. 이미 다 굳고 말았다. 닦아내려면 한참을 긁어내야 할 것이었다.

 “그 얘기 하려고 뜸 들인 거야? 너도 참.”

 “안 될, 까요?”

 “안 되는 게 뭐가 있어? 겸사겸사 너도 무기 손질 좀 받고 오면 되겠네.”

 “……네, 감사합니다.”

 무게 없는 승낙이 떨어진다. 유나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그제야 필립은 고개를 든다. 선배는 이미 몸을 숙이고 있었다. 조명의 빛이, 그 옆얼굴의 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선배에게선 빛이 났다.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 없는.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적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입을 뗀다. 네, 새벽 사무소인데요. 무기에 이상이 좀 생겨서. 지금 따로 예약이 없다면 찾아 뵈어도 될까요. 네. 그럼 2명 갈게요. 감사합니다.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끊는다. 몸이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켠다.

 “가자. 오면서 앞에 차 대놨어. 스승님껜 내가 따로 연락 드릴게.”

 “아, 운전은 제가…….”

 “됐어, 필립. 넌 아직 가는 길도 잘 모르잖아.”

 또다. 상냥한 미소가. 그 얼굴에 짙게 깔려 있었다. 그렇게 웃는 사람이라고 과거의 그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의 여자를 기억했다. 어딘가 차갑고 날이 선 인상이었다. 닿으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남자는 이제 여자로부터 새어 나오는 온기가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다 녹아내려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었음에도 여전히 그는 닿는 것을 두려워했다. 필립. 선배가 제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태어나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닿을 때의 다정한 소리를 좋아했다. 선배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정할 수도 없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말할 수는 없어도 많은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게 그가 품고 있는 욕망이었으나 뱉어낼 수 있는 표현은 고작 이 정도였다. 같이 가고 싶어요, 도 같이 갈래요, 도 아닌 같이 가도 될까요.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의 최선이었다.

 유나는 사무소의 불을 껐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졌는지 더는 붉은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불은 공간을 다 태우고 재를 남겼다. 검은 재가 공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밤이었다. 저녁. 밤. 그리고 새벽. 밤은 끝이 아니고 시작도 아니었으며 하다못해 중간 지점도 아니었다. 저녁과 밤과 새벽과 지나치게 사소하여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시간들은 모두 연속된 스펙트럼상에 놓여 있다. 그 위에서 어느 한 순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을 명확하게 짚어내기란 불가능하다. 밤도 마찬가지였다. 밤의 시작점과 끝점은 뚜렷하지 않다. 그저 밤이 세상을 덮는 것뿐이다. 제 몸에 묻은 재를 털어내는 밤 곁에 허가받지 않은 새벽이 내려앉는다. 공간을 메우는 것에는 어떠한 승낙도 필요하지 않다. 그곳에서 거부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꾸,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 오고 낯선 감정이 기웃거렸다. 이제 그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노크도 없이 제 세계로 들어 온 사람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의도된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상관없었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게 신념의 파편이 되어 줄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더 늦기 전에 가자.”

 “죄, 죄송해요…….”

 “사과받자고 한 말 아니라니까.”

 유나는 안과 밖의 경계에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여자는 망설임 없이 나아간다. 문 바깥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는데도 그는 선배의 등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밝기가 다른 빛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필립은 유나의 뒤를 따랐다. 빛에 이끌리는 나방이 이런 기분일까.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문을 닫았다. 안에서 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사무소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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