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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유나] 기원의 기원

2023. 02 배포전 발간

2023년 7월 프로젝트 문 사상 검증 및 직원 부당 해고 문제 발생 이전에 작성된 글입니다.

현재 프로젝트 문 장르 창작 및 소비 없습니다. 단순 백업을 위해 업로드합니다.

2023년 진행된 프로젝트 문 오프라인 배포전 <도시의 밤, 안전유희동호회 2회>에서 판매한 책입니다.

필립과 유나가 사귀게 되는 IF입니다. 외전은 실물책 한정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포스타입에서도 동일한 가격으로 판매중입니다.


기원의 기원

기원(祈願) [명사]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빎

기원(起源/起原) [명사] 사물이 처음으로 생김. 또는 그런 근원.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무척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늦은 시간 역시 아니었다. 그저 겨울일 뿐이었다. 필립이 숨을 뱉어낼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흔적을 남겼다. 귀가 얼어붙을 것만 같다. 이미 단단히 얼었는지도 모른다. 춥다.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지각은 아니었으나 조금 더 빨리, 사무소에 가고 싶었다. 집에 있어봤자 춥고 외로울 뿐이었다. 어차피 추울 것이라면 사무실로 향하는 길 한복판에서 떠는 게 훨씬 나았다.

외로움을 피해 집을 나섰으나 사실 남자가 그 감정을 인식하게 된 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외로움이란, 오랫동안 그저 개념적인 무언가에 불과했다. 외롭지 않아본 사람만이 외로움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한때 그의 삶은 늘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기쁨을 알고, 그들과 분리되어 있을 때의 쓸쓸함을 안다. 공간적으로도 그러했다. 설령 아무도 없더라도 사무실에서 다른 이를 맞을 준비를 하면 외롭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의 집은 그런 공간이 되어주지 못했다. 가족과 같이 살지 않아서.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필립은 가족과 함께 살 때도 그랬다.

새벽 사무소로 향하는 길은 낯설지 않고 익숙했다. 몇 달을 지나다닌 길이었다. 눈 감고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아직은 시간이 일러 문을 연 가게가 드물었다. 이제 막 영업을 준비하는 곳도 있었다. 새벽의 거리는 희뿌옇고 어두침침했다. 겨울 안개가 두껍게 꼈다. 필립은 그것을 몸에 두르고 계속 걸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루뭉술한 주변 공기 속에서도 그것만은 뚜렷해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선명했다. 안쪽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그건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의 습관이었다. 필립은 물건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걸 좋아했으며 거기에 능했다. 곧 열쇠가 열쇠 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찰칵 소리가 났다. 문고리가 돌아간다. 사무소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살바도르는 필립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곤 했고 유나는 지난 밤 늦은 시각의 의뢰를 처리하느라 평소보다 늦게 출근하겠다고 어제 사무소를 나서며 미리 선언한 참이었다. 그러니까, 온전한 필립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사무실의 바닥을 쓸고, 먼지를 닦고, 그가 좋아하는 허브티를 한 잔 마실 즈음이면 스승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겠지. 별일 없는 한 그게 필립의 오전 일과였다. 문을 열었다.

사무소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는데. 필립은 눈을 의심했다. 소파에 누군가 있었다.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누워 있었다. 겉옷으로 야무지게 얼굴까지 가린 채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신발을 보고 그게 누군지 알았다. 눈에 익은 신발이었다. 유나 선배. 실제로는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는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선배라고만 불렀다. 울리지 않은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겼다. 선배의 신발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필립은 유나의 눈을 대개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 곧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걸 도저히, 온전하게 받아낼 수가 없어 늘 눈을 피하곤 했다. 바닥을 바라보는 일도 잦았다. 그 과정에서 유나의 신발이 눈에 익는 건 자연스러웠다. 유나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굳이 그것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는 일부러 돌아서 소파로 향했다. 행여라도 유나를 깨울까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여자가 덮고 있는 것은 새벽 사무소의 일원들이 공통으로 입는 불에 잘 타지 않는 소재의 옷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이런 겨울에 덮고 자기엔 추울 텐데. 그는 힐끔 사무소 구석에 깔끔하게 개여 쌓인 담요 몇 장을 바라보았다. 매주 세탁하는 깨끗한 것들이었다. 새벽 사무소는 사내 복지가 여러모로 좋은 편이었고 사무실이 둥지에 있어 뒷골목의 밤에 휘둘릴 위험도 없었다. 퇴근이 늦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사무소 내에 침구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누군가 보면 끔찍하다고 비명을 토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해결사의 삶이란 그런 법이었다. 필립 역시 입사 당시에 그런 설명을 들었다. 허나 둥지, 그것도 사무실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사는 그에게는 크게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유나에게는 다른 얘기였을 것이다. 여자는 뒷골목에서 살았으므로. 이따금 선배와 스승님이 대화를 나눌 때 듣고 있노라면 뒷골목의 밤을 피해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겠구나, 하고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걸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필립은 담요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담요에서는 당연하게도 좋은 냄새가 났다. 사무소 특유의 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을 들고 유나에게 돌아왔다. 조금 답답해 보여서 코트를 걷어 냈다. 코트 안의 유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게 어쩐지…… 귀여웠다. 스쳐서는 안 될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다 못해 가득 메웠다. 자각했을 때 담요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필립?”

“……”

뒤통수 위로 음성이 내려앉았다. 평소보다 낮은, 잠에서 막 깬 목소리였다. 낯설지 않으면서 낯설었다. 쉬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목뒤가 딱딱하게 굳은 것만 같았다. 아니다. 단단히 얼어붙었다.

“담요 덮어 주려던 거야? 고마워.”

“아……. 네.”

여자는 기지개를 켰다. 떨어진 담요를 주워 든다. 먼지를 턴다. 그, 일련의 자연스러운 동작이 필립에게는 어색했다. 남자는 겨우 고개를 든다. 눈앞에는 조금 흐트러진 선배가 있다. 아주 조금이었다. 막 잠에서 깼으면서도 여자는 잘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까지도, 좋았다. 좋아했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목덜미를 긁적인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내부는 덥지 않았다. 그는 결코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다. 겨울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어제 일이 늦게 끝났거든. 까딱하면 뒷골목의 밤에 걸릴 것 같아서, 그냥 자고 갔어.”

“아.”

답은 예상했던 그대로 돌아오지만 필립은, 뭐라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의미 없는 추임새를 흘려보낼 뿐이다. 유나는 그의 붉은 얼굴을 굳이 짚어 내지 않는다. 필립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거울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제 얼굴을 볼 수 없다. 올라가는 체온만이 선명했다. 그는 유나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원체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유난히 더 헤매곤 했다. 선배 앞에만 서면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는 더 엉망이 되었다. 선배는 멋진 사람이었다. 동경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이제 아닐지도 모른다. 모른다. 그 단어에는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필립은 제 마음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늘 그러했듯이 발밑을 보았다. 유나가 신발을 신는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슬그머니 필립은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생긴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여자가 겉옷을 두른다. 언제나의, 유나 선배였다. 조금 초췌한 낯조차도 여자를 이루는 일부가 되어 녹아든다. 유나는 문 앞에 섰다. 조명이 들어왔다가 곧 꺼진다. 얼굴 위로 빛이 한 무더기 쏟아지다가 이내 가려진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난 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아, 자, 잠깐만요.”

남자가 황급히 여자를 불러 세웠다. 저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만 그저 조금이라도 여자를 더 보고 싶었다. 그 마음이 남자를 기꺼이 조종했다. 여자의 손은 문고리에 올라가 있다. 유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막막했다. 필립은 유나의 표정을 알지 못한다. 긴 그림자가 경계가 되어 목 윗부분을 잘라내듯 가리고 있었다.

“왜?”

“그, 커피라도 드시고…….”

남자의 입이 달싹거렸다. 핑계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그랬다. 명백한 핑계였다. 어차피 매일 보는 사이인데 뭐가 그렇게도 급했을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 위로 가볍게 내려앉은 졸음과 피로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필립은 제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낯선 것에 붙여지는 이름을 그는 모른다. 대신 차를 잘 탔다. 새벽 사무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살바도르가 특히 그가 내오는 쌍화차를 좋아했다. 유나 역시 필립이 타는 커피를 기꺼이 반기고는 했다. 필립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그냥, 이유 없이 기뻤다.

“아, 나 자다 올 거라서, 괜찮아.”

“아, 네…….”

“그럼 수고하고, 나중에 보자.”

나중에 봬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필립은 어떤 말을 뱉어야 할지 망설였다. 그리고 그, 의례적인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딸랑. 새벽 사무소에 걸맞은 경쾌한 음이었다. 문은 굳게 닫혔다. 처음부터 열리지 않은 것처럼. 공간에는 고요만이 남고 왠지 모를 적막이 깃든다. 필립은 한숨을 뱉어냈다. 문득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유나가 누웠던 자리에 주저앉는다. 대체 왜 이럴까. 필립은 긴장이 체질인 사람마냥 새벽 사무소의 사람들 앞에 서면 바짝 긴장하고는 하였으나 유나 앞에 설 때와 살바도르 앞에 설 때의 감각은, 이상하게도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동시에 들켜서도 안 되는 마음이기도 했다.

“청소, 해야지…….”

필립이 작게 읊조렸다. 아무 소리 없던 공간을 그의 음성이 메운다. 그것은 분명 덤덤했으나 자조가 짙게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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