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원] Magnetic Love

모원 by 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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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정모 형이랑, 뭐 있죠.

아니!?!?!?!?

 

시작은 어느 평범한 오후의 학과 실 안.

 

시뻘건 얼굴의 원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콰당탕 소리가 나며 앞에 쌓아둔 전공 책이 와르르 무너진다. 다행히 둘밖에 없어서 아무도 그 난리에 뭐라 하지 않았다. 당황한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전공 책을 주워 쌓으며 허겁지겁 대답한다. 아니? 아닌데? 절대 아닌데? 정말로 아닌데? 불가한데? 그럴 리 없는데? 니가 잘못 생각하는 건데? 너 완전 잘못 짚었는데? 래퍼도 아니고 속사포로 내뱉은 말에 형준의 표정이 썩었다. 왜 저래. 형준은 원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있군.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점심이 지난 과실은 평소보다 복작복작했다. 뭐, 흔하디흔한 일상이라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공강을 맞아 언제 처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소파에 누워 으어억 소릴 지르던 원진이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누구야! 소리치니 성민과 형준이었다. 원진이 아끼다 못해 옆에 끼고 사는 후배 둘.

 

“우리 덩민이-. 밥 먹었어?”

“아까 조지고 왔어요.”

“내가 사준다 했잖아!”

“아, 그만 좀 사줘요. 부담스러워!”

“그냥 즐기라니까??”

“싫어!!”

 

성민에게 점심을 까인 원진은 저를 지나치는 형준을 붙잡고 밥 먹자 소리쳤다. 형이 사줄게! 어림도 없다는 듯 형준이 팔을 물리치며 바로 답한다. 아까도 전에 세림이 형이 사줬거든요. 아뿔싸, 먹잘알 박세림한테 선수를 뺏기다니. 그러면 다음번엔 나랑 먹자 꼬드기는데 형준이 알겠다며 대충 말하곤 과실 안 사물함에 전공 책을 넣곤 쏙 사라졌다. 빕스 갈까? 뒤통수에 대고 소릴 지르니 구라인 걸 아는 형준이 뒤도 안 돌아보고 문밖을 나선다.

 

배고파 죽겠는데 혼자 먹긴 싫었다. 혼자 못 먹는 건 아니지만 그냥 기분이 그렇단 말씀. 입술을 삐죽이던 원진은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하곤 누워있던 몸을 바르게 일으켜 앉았다. 원진의 시선이 묘하게 그를 향했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이. 어 하이. 인사를 주고받는 와중 그가 원진을 본다. 원진은 그 찰나를 피해 눈을 피했다. 정모다. 그가 원진을 빤히 보더니 성민을 향해 물었다.

 

“원진이 왜 혼자 있어?”

“밥 못 먹었대요.”

“진짜? 왜?”

“몰라요.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요.”

“원진아. 밥 안 먹었어?”

“뭘 알아놓고 또 물어봐요.”

“와 함원진 선배한테 싸가지 보소.”

“강민희 지는 형 소리도 잘 안 붙이면서.”

 

정모와 같이 수업을 듣고 온 민희가 원진을 놀리며 그의 곁에 앉았다. 오늘 굶으려고요? 놀리며 말하자 원진이 닥치라며 손을 휘젓곤 다시 죽 늘어졌다. 몰라. 타이밍 놓쳤어. 원진의 답에 민희가 히죽히죽 웃으며 원진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나랑 야구 봐요, 형. 봐주면 밥 같이 먹어줄게. 야구야 원래 둘이 자주 보던 사이니 그냥 하는 말이다. 뭐 먹을래요? 민희가 다시 물어온다. 원진이 눈을 감고 천천히 메뉴를 생각했다.

 

그냥 민희와 밥 먹을까 싶었다. 굶자니 오후 강의가 있어 배고플 것 같기도 했고. 고민에 빠져 눈을 깜박이는데 가까워진 민희와의 사이를 비집고 정모가 들어선다. 뭘 야구로 꼬드기고 그래. 안 그래도 둘이 자주 보는걸. 조금 전보다 한 톤 낮아진 정모가 자연스럽게 원진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이 쉼도 없이 원진의 어깨에 톡 내려앉았다.

 

“밥 시켰어. 너 자주 먹던 걸로.”

“…에?”

“나가서 사 먹기 귀찮아서. 나도 여기서 먹으려고.”

“형 내 꺼는?”

“넌 나가는 거 아니었어? 나랑 밥 먹자고 말 안 했잖아.”

 

…평소엔 나랑 같이 밥 먹었으면서.

 

정모의 다른 손이 원진을 잡았던 민희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허공에 손이 뜬 민희가 멀뚱하니 정모를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식이나 먹지 뭐. 뒤따라 들어오는 우빈을 향해 휘휘 인사한 민희는 둘을 내버려 두고 홀연히 자리를 떴다.

 

다음 강의가 있다며 성민도 떠난 과실. 둘만 남은 소파 위 정모가 눈을 감고 꾸물대다 원진의 허벅지 위로 머릴 대고 누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딱딱하게 앉아있던 원진은 고요한 정모의 얼굴 위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피곤해? 정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배달을 기다리는 고요함이 어색해 원진이 정모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고 삭삭 흔들었다. 몇십 가닥씩 잡고 위로 올렸다 떨구기를 반복해도 가만히 있는다. 많이 피곤하나. 두 손바닥으로 그의 부드런 볼을 짜부시켜 눌러도 으음 소리만 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뽀뽀하고 싶다….

헉, 미쳤지 함원진.

 

정신이 멍해지니 본능적인 생각이 고개를 확 들고 일어섰다. 그건 절대로 안 돼 머릴 좌우로 털고 소파 헤드에 머릴 기대니 그제야 정모가 눈을 뜨고 원진을 바라본다. 누워서도 한껏 잘생긴 얼굴. 어쩐지 억울해져 원진은 손으로 정모의 볼을 쭉 늘렸다.

 

“왜 말 안 했어.”

“뭘요.”

“밥 안 먹었다고.”

“뭐…우리가 보고할 사이도 아니고….”

“사준다고 했잖아.”

“매번 어떻게 얻어먹어요.”

“지금도 이렇게 얻어먹잖아.”

“아 됐어. 더치해 더치.”

“다음부턴 말해.”

 

너 밥 굶어서 쓰러진 적 있잖아.

사람 쪽팔리게 1학년 때 일을 가지고….

 

고리짝 시절 기억으로 아직도 저 난리람. 정모의 말에 민망해진 원진이 큼큼 헛기침했다. 시험공부 한다고 1학년 1학기 때 몬스터만 마시고 버텼던 날 터졌던 일. 과 수석을 차지하고 싶어 일주일 내내 밤을 새우며 하루에 한 끼도 겨우 먹고 버텼는데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난 후 그대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그게 하필 같이 수업을 들었던 정모 앞에서였고.

 

그날 이후로 학과에 소문이 쫙 나서 원진은 한동안 온갖 선배들과 교수한테까지 밥을 얻어먹고 다녀야만 했었지 아마. 결과는 어땠냐고? 당연히 1등이었지만 불러온 파급 효과는 굉장했다. 예컨대 만나기만 하면 밥은 먹었냐고 물어오는 동기나 선배들이 생겼다던가.

 

 

“말 안 하면 다음에 백 번 더 같이 먹을 거야.”

“농담은….”

 

이렇게 제 식사에 집착하는 구정모 같은 사람이 생겼다던가.

 

 

그러니까.

구정모라는 사람과 저를 이야기하자면

사연이 꽤 길었다.

 

시작은 간단했다. 그냥 학과 선배였다. 더 친하지도 덜 친하지도 않은 애매한 사람. 유독 잘생겨서 인기가 많고 착하지만 딱딱해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 형들은 저들의 동기랍시고 정모를 아무렇지 않게 놀렸지만, 후배들은 사실 정모를 어려워했다. 그 특유의 시니컬한 대답과 태도 때문에.

 

원진은 그런 정모와 유독 과목이 겹쳤다. 그래서 자주 얼굴을 봤고 밥을 먹었었다. 저녁에 수업이 끝날 땐 술도 같이 마셨다. 평소 학과 술자리엔 참여도 안 하던 정모는 원진만 끼면 후문 술집을 잘만 다녔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선후배 형·동생 사이라고 생각했다. 저와 정모는.

 

어느 날 정모는, 군대에 간다고 했다. 말을 듣는 순간 그를 보지 못하겠구나 싶어 우울해졌다. 잘 다녀와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데 그날 정모가 원진과 단둘이 술을 마시자 했다. 좋죠. 어깨를 으쓱한 뒤 내놓았던 긍정의 대답. 아쉬울 것도 바랄 것도 없어 만든 술자리였는데.

 

그날.

술자리를 가졌던 그날 밤에.

 

사람의 머리칼을 손에 쥐면 그렇게 보드랍게 흩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콧대가 맞닿으면 어떤 느낌이 나는지도. 감각이 지독히도 예민한 기관 중 하나가 입술이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취기가 잔뜩 올라 콧숨에서도 알코올 향이 올라오는데 들러붙은 입술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정모의 손이 제 뒤통수와 허릴 잡는 게 느껴졌다. 추잡하게 흐른 침이 무색하도록 흥분한 온몸이 서로를 마구 갈구했다.

 

소주를 두 병 넘게 마신 것 같은데. 평소엔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것까지 원진은 전부 기억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아래 희끄무레하게 켜진 가로등. 살던 원룸 근처로 원진을 데려다주다 그의 손을 잡은 정모의 뜨거운 손바닥. 행위가 이어지는 내내 떨리던 속눈썹.

 

그날 밤. 원진은 정모와 꽤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그다음엔?

 

그런 건 없었다. 방학이 찾아왔고 구정모는 군대에 갔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원진도 머릴 깎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게 눈 감추듯 시간을 보내고 비슷한 시기에 제대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먼저 앉아있던 정모와 어색하게 재회했고 뒤늦게 손 인사를 했다. 그게 다였다. 그날의 사건에 대한 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서 원진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

 

 

사건 발생 당일

 

“표를 구했다고?”

“이 몸이 얻어 왔다는 말씀.”

“다른 애들은? 안 간대?”

“형, 가겠어요? 야군데. 아 진짜. 두산이랑 기아라니까?”

“야. 가서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울 일 있냐?”

“뭘 또 고능한 사람들끼리 싸우긴 싸워. 갈 거죠?”

 

점심은 결국 셋이 함께 먹기로 했다. 원진이 그렇게 하자고 말한 탓이다. 오늘도 나가기 귀찮다는 원진의 말에 정모가 과실로 배달시켰다. 그렇게 정모를 가운데 두고 앉은 원진과 민희가 야구 얘기로 침을 튀기고 있었다. 막 배달 온 국밥 3개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두 놈은 오늘 저녁 열리는 경기 얘기에 정신이 없다. 야구엔 ‘ㅇ’만큼의 관심도 없는 정모는 입술을 일자로 만들고 재미없게 대화를 듣다 불쑥 말을 잘랐다. 나도 보러 갈래. 그 말에 민희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 대꾸했다. 형 야구 모르잖아요. 그 말에 기분이 나빠 정모가 팽하고 고개를 돌린다. 나도 알아.

 

“뭘 알아요. 일루수가 누구야?”

“푸하학. 이루수는 뭐야?”

“나도 야구 안 다니까?”

“형 삼루수는 모른다고 해줘야죠-. 아이, 참.”

“됐어, 인마. 이따 저녁에 연락해라.”

 

정모와 함께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야구에 관심도 없는 사람까지 데리고 야구장에 가는 건 그에게 오히려 민폐 같았다. 재미도 못 느낄 게 빤했고. 둘이 잡은 약속에 정모가 원진을 쳐다보다 입술을 삐죽 내민 뒤 그걸 숨기려 아랫입술을 바로 깨문다. 그 모습이 웃기고 어이없어 원진은 그가 귀엽게도 삐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야구장 안 맛집을 검색하겠다며 민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든가 말든가 신경도 안 쓰는 정모의 귀를 조심스레 끌어당긴 원진이 민희가 과실을 나가자 씩 웃으며 속삭였다. 나중에 내가 야구 알려줄 테니까. 그때 같이 가요. 그제야 정모의 뚱한 표정이 좀 풀린다. 원진은 그마저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

 

“에-야구장이지 어디예요.”

[…….]

“강민희랑 있죠. 경기 시작하니까 끊어요.”

[…….]

“뭘 또, 됐어요. 알아서 잘 가요.”

“뭔데요? 구정모?”

“어, 정모 형.”

“왜 전화했대요?”

“몰라 저녁 먹냐고.”

“야구장 가니까 야구장에서 먹지 뭘 묻는대.”

“나도 모르겄다.”

 

시끄러운 야구장 사이로 간신히 벨이 울렸다. 누군가 싶어 받아보니 정모다. 밥을 먹었냐는 흔해 빠진 질문에 어이가 없어진 원진이 의문 띤 목소리로 답했다. 잘만 대화가 이어가다 경기 얘기가 나오니 끝날 때 데리러 오겠단 말이 붙는다. 아니 내가 뭐 고딩이냐고. 자기가 보호자도 아닌데 과보호다. 웃기고 어이없어 원진은 그냥 전화를 끊었다.

 

뭘 형을 챙겨요? 왜?

후배 챙겨주나 보지.

나는 후배가 아니다?

그건 학교에서 자주 만나니까….

아니. 형도 형준이나 성민이 따로 안 챙기잖아요.

 

근데 구정모는 하네.

 

정모에게서 전화는 늘 자주 왔다. 밥 먹었어? 과제 다 했어? 일어났어? 너무 세심한 거 아니냐 싶겠지만 다 이유는 있었다. 같이 듣는 수업 시간이 아침부터 점심까지인 탓이었다. 제가 지각할 것 같으면 그렇게 연락이 왔고 과제 마감일이면 꼭 저렇게 전화가 왔다.

 

구정모가 그렇게까지 친절한 사람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는 후배의 인사나 다정하게 받아줄 정도의 사람이지 후배의 안녕까지 챙겨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모의 학과 행사 참여 비율은 현저히 낮았다. 그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원진에게 전화에 참여 여부를 묻곤 했다. 그는 원진이 오지 못한다면 거의 오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온다고 해서 다 갔던 것도 아니었지만.

 

원진은 그게 후배를 잘 챙겨주는 건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리사랑이 하고파 형준과 성민에게도 자주 밥을 샀다. 영화도 주로 민희나 동기들과 함께 봤다. 정모는…. 정모랑은 그런 걸 잘 못했다. 이상하게 못 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민희가 원진을 빤히 노려본다. 갈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아 원진도 머리를 털곤 앞을 바라봤다. 야 경기 시작한다. 울려 퍼지는 응원가에 일단은 현실의 감정은 잊기로 했다. 지금은 눈앞의 야구 경기와 치맥이 더 중요했다.

  

*

 

경기는 엎치락뒤치락했다. 처음엔 두산이 앞서가더니 나중엔 기아가 치고 올라왔다. 박빙의 승부에 경기장 안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이닝 때마다 불이 붙었다. 타자가 바뀔 때마다 응원가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각자 팀의 타자가 베이스에 설 때마다 원진도 민희도 고래고래 노랠 불렀다. 깡-! 소리와 함께 타자가 시원하게 안타를 치고 달려간다. 우어억 소릴 지르던 원진은 유격수가 그 공을 깔끔하게 잡아내자 합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제와 그제 경기는 기아가 야무지게 졌건만, 오늘은 왜 반대로 흘러가는 건지. 승리 요정이 되지 못한 원진이 기분 좋아 날뛰는 민희를 붙잡고 억지로 어깨동무했다. 그런 둘을 중계석에서 놓칠 리 없었다. 카메라가 둘 앞을 왔다 갔다가 하자 민희가 신이나 브이를 한다. 어쩐지 괘씸해 원진은 그 브이를 입으로 크아앙 먹었다가 저도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6회 말을 지나자 경기는 제대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선수들이 하라는 야구는 안 하고 코미디 쇼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가 더 실수하나 내기를 하는 탓에 열불이 터진 원진은 매점에 가 맥주를 사 마셨다. 쟤네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공을 구경하러 온 거면 그냥 여기 있지 왜 저기 있냐? 내가 뭐 이딴 꼬락서니 보려고 돈 내고 들어온 줄 아나? 맵디매운 말들이 오가는 와중 원진의 핸드폰이 또 윙윙 울린다. 그러나 이번엔 선수가 막 홈런을 날리는 찰나였기에 원진은 전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키스까지 했는데 반응 없는 거면 끝 아니야?

 

원진의 연락이 없다. 어디냐고 묻는 연락엔 읽고 씹은 지 오래다. 자존심 다 죽이고 전화도 걸어 봤건만 받지 않는다. 저만 또 이렇게 안달이 났지. 입술 끝을 깨물었다 푼 정모는 죄 없는 핸드폰만 가만히 노려봤다. 중계화면에서 민희와 원진을 본 탓이다. 마음이 괜히 이상했다.

 

세림에게 에둘러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있었다. 좋아하는 애가 있다고. 술김에 입까지 맞췄는데 돌아온 말은 없었다고. 물론 거기에 제가 입대를 했고 걔도 입대했단 말은 생략했지만. 반쪽짜리 이야기를 들은 세림의 답은 빤하디빤했다. 걘 너한테 관심 없는 것 같은데.

 

물론…원진이 제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거기다 민희에게도 여자친구가 있는 걸 알기에 민희와 원진 사이에 무슨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해도 질투는 저절로 생겨났다. 야구장에 가서 만날 모르는 사람들까지 상상했다. 처음으로 스포츠 경기를 챙겨볼 걸 하는 후회도 샘솟았었다.

 

나를 싫어하는 걸까? 함원진은.

 

그런 걸까 곱씹어보면…절대로 아니었다. 원진은 제 연락이면 될 수 있으면 답장했고 어쩔 수 없었을 때도 나중에 답을 꼭 보냈다. 연락이 끊긴 적이 없었다. 밥도 자주 먹었다. 싫다거나 바쁘다고 내빼는 경우는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없었다. 그래서 어려웠다. 그의 마음을 가늠하기가.

 

당당하게 좋아한다 고백하기엔 무섭고, 빙빙 돌려 말하면 알아먹지 못하는 관계. 그런데도 정모는 원진이 자꾸만 보고 싶었다. 심심할 때면 생각이 났고 만났을 땐 닿고 싶었다. 이런 제 마음이 무엇인지는 이미 입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 왜.”

[야 후문 집이냐?]

“안 나가.”

[에이, 애들끼리 술 마시는데.]

“됐어. 나, 일 있어.”

[중간고사도 끝난 새끼가 뭘. 여기 민희랑 원진이도 왔어.]

“뭐? 어딘데.”

[얘네 야구 보고….]

“어디냐고.”

 

야구 개같이 했다고 빡쳐서 왔던데. 방금 합류했어.

 

원진의 소식에 정모의 몸이 벌떡 일어선다.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그가 우빈에게 술집 이름을 말하라 재촉한다. 어디라고 중얼대는 우빈의 말과 함께 정모가 겉옷을 주워 입곤 용모를 확인했다. 심박수가 조금 전보다 조금 더 올랐다.

 

 

오늘 술 안 마시면 그 새끼들이 아니라 내가 미친놈이다.

 

아슬아슬하게 진 패배. 상대 팀의 승리에 원진의 속에 열불이 났다. 기분 좋아 한잔해야겠다는 민희의 말에 원진은 가만 안 두겠다며 민희와 택시를 타고 후문 술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마시고 있는 자들이 있을까 싶어 애들에게 연락하니, 아니나 우빈과 태영이 앨런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뒤늦게 합류하자마자 원진은 소맥을 섞어 마셨다. 뭣 같은 놈들이 하필 거기서 점수를 내주는 바람에 아깝게 졌다는 말을 거친 단어와 섞어 발언했다. 승리한 민희도 기왕 이길 거 확실하게 이기지 왜 이렇게 안달복달 이겼냐며 투정 부리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원진보단 분노가 훨씬 덜 했다.

 

재미 보러 야구 보러 간 놈들끼리 왜 화는 내고 돌아오냔 핀잔이 뒤따랐지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술을 마시기 위한 모임이었으니까. 챙하고 잔을 부딪쳐 끝없이 알코올을 들이켠다. 우빈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건 눈치채지 못하고.

 

“아씨 담에 경기 보러 또 가. 난 진 거만 봐서 억울하니까.”

“지금 야구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가능하겠어?”

“몰라 천장 뷰라도 상관없으니까 가야겠다고오-.”

“어? 형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내가 짜증이 나서 진짜….”

“어 왔냐. 앉아 앉아.”

 

술자리에 뜻밖의 사람이 왔다. 열 번 부르면 아홉 번은 거절하는 구정모가. 그것도 한 번은 원진이 껴 있다고 말해야 오는 그가. 뭐, 하기야 민희도 오랜만의 술자리에 합류한 거였으니. 우빈이 신나서 다들 불렀을게 빤했다.

 

“많이 마셨네.”

“집에 있었어요?”

“그래서 데리러 가겠다고 했잖아.”

“택시 타고 잘만 왔네요, 뭘.”

“내일 알바 있지 않아?”

“없어요. 일요일에 있지.”

“…….”

“이야 살벌하네. 그만 대화하고 술이나 마셔.”

 

원진도 제가 참 이상했다. 정모 앞에만 서면 말이 틱틱거리게 뱉어졌다. 마치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삐친 것처럼. 제 말에 정모가 저를 마주 보고 앉는다. 술을 권하는 우빈에 손을 내밀어 잔을 거부하고선. 물컵에 물을 조르륵 따른 그가 빤히 원진을 봤다. 그게 기분이 이상해 원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곤 술을 흡입했다.

 

*

 

원진이는 내가 데려다줄게. 나 술 조금밖에 안 마셨으니까.

 

결국 취하고 말았다.

술자리가 파하자 정모는 비틀대는 원진을 붙잡고 일어섰다. 각자 근처에 사는 터라 알아서 흩어진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으나 원진은 가만히 정모의 손에 저를 맡겼다.

 

민희의 연락을 받은 여친이 그를 찾아오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알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후문 근처 원룸에 사는 원진을 아는 정모가 익숙한 밤거리를 향해 걸었다. 옆엔 축 늘어진 원진을 허리에 끼고선.

 

“잠깐 앉아있어.”

“왜요. 나 버리고 가게?”

“뭐 좀 사게.”

“그 와중에 몸까지 챙겨?”

“내 몸 말고 네 몸이요.”

 

길목 언저리에 있는 편의점 의자에 원진을 잠시 앉혔다. 술기운을 물리쳐줄 이온 음료와 숙취 해소제를 사 오자 반쯤 눈을 감은 원진이 알아서 낚아채 받아 마신다. 거부도 없이 내어준 정모가 맞은 편에 앉아 그를 마시는 원진을 바라봤다.

 

“너 주량 넘긴 것 같던데.”

“와 내일 죽겠네.”

“해장국 사놔야겠다.”

“그냥 편의점 계란국 사 먹으면 돼요.”

“그거 가지곤 부족하지.”

“아 술 깼다. 데려다줘서 고마웠어요. 먼저 가요.”

 

정모가 해장국을 사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의도를 알아챈 원진이 거절을 에둘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뭐라도 좀 마셨다고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천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차피 근처가 집이기에 터덜터덜 걷기 시작하는데 뒤따라온 정모가 굳이 제 팔에 팔짱을 낀다.

 

맞닿은 살에 감각이 이상했다. 취기가 덜 가셔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강아지풀이 팔에 살랑이는 기분. 팔을 털어내려 다른 손을 드는 데 정모가 그사이 힘을 준다. 그게 이상해 빤히 그를 봤다. 그러자 아까부터 저를 보던 정모와 눈이 마주쳤다. 해서는 안 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입술까지 올라온다. 참을까 참지 말까 고민하다 결국 걸음을 멈췄다.

 

“…저기.”

“…….”

“…궁금한 게 있는데.”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누런 가로등에도 빛이 나고 있었다. 원진은 제가 넘어질까 봐 다리에 힘을 준 정모를 확인했다. 정말로 정말로 심장이 이상했다. 누가 간지럼이라도 태운 양 벅벅 긁고 싶을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원진이 술기운을 빌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문장이 한참이나 늘어졌지만 정모는 그다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혹시…혹시 나.”

“…….”

“……좋아해요?”

“…….”

“…에헤이. 아니다. 농담이에요. 취해서 별소리를….”

“어.”

“……어?”

“너 좋아해.”

 

혹시 지금 시간이 멈추었던가.

 

새벽의 가로등 아래 원룸촌 골목길. 한두 사람이 드문드문 오가다 결국 인적이 뚝 끊겨버린 곳. 충격에 말을 잃은 원진을 향해 얼굴을 더 가까이 붙인 정모가 들리지 않을 수 없도록 확실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좋아해.

짧고 깊은 고백이었다. 죽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자석 같이 서로에게 끌리지만 딱 붙지 못하고 빙빙 도는 모원이 보고 싶었어요

다음편은… 스토리를 아직 못 짜서 모르겠네요. 사실 이거 진짜 오래 전에 썼는데. 앞의 글이 예상외로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에 비공개로 놔둔걸 업로드 합니다. 편하게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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