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1회차 (1)

2019.08.18

레이엔리 니어 오토마타 AU,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 있음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진 도시였다. 그들의 문명을 잃은 인류는 절망했다지만 세월이 더해지자 마냥 참담한 광경은 아니게 되었다. 파편의 날은 무뎌지고 식물이 피어나 틈새를 메웠다. 육중한 나무는 건물에 얽혀 숲을 이루었고 새나 다람쥐 따위의 소동물이 깃들어 살았다. 언젠가 인류의 귀환을 위해 복원해야겠지만 지금 광경도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부도 현 생태의 분포와 현황을 파악하라고 하지 않는가? 엔리카는 씨앗 샘플을 채취하며 그리 생각했다.

해서, 그와는 무엇을 조사하게 될까? 엔리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는 아직 멀었는지 아직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포드에게 괜히 시간을 물어보았다가 오후 두 시이나 그 기체와의 접촉 시간은 확정된 바 없으니 그전까지는 본 임무에 매진하라는 쌀쌀맞은 권고나 들었다.

“그렇지만 포드. 나는 새 동료가 궁금한데.”

포드 쪽에서 뻔한 말을 하기 전에 엔리카는 먼저 말을 꺼냈다.

“S형은 호기심이 왕성하도록 조정되어 있잖아. 더군다나 첫 동행 임무인데. 내가 궁금해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함께 할 동료 기체에 대해 이름과 타입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잖아? 사령관님도, 오퍼레이터인 아이든도.”

“고찰: 이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함. 권장: 해당 위치에서 지속적으로 대기.”

 

포드의 대답은 똑같았다. 엔리카는 괜히 시무룩해져서 나무뿌리에 앉아서 턱을 괴었다. 가만히 있다 보니 의문이 피어올랐다. 상부는 왜 동행지시를 내린 것일까. 조사임무는 대부분 스캐너들이 혼자서 수행하는데. 처음 명령을 전해 받았을 때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궁금한 것이 많은 엔리카에게 군대라는 조직은 그다지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이유는 알 필요 없고 그냥 수행하라는 방식이 박힌 곳이었다.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엔리카는 바이저 뒤에 가려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S형의 전자두뇌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그러나 사고의 진행은 금세 멈췄다. 별 정보가 없으니 뛰어난 두뇌도 별 소용없었다. 시무룩하게 있던 엔리카에게 포드의 음성이 들렸다.

“보고: 한 개체의 비행 유닛이 접근 중.”

“아!”

엔리카는 생각을 그치고 벌떡 일어났다. 한낮의 하늘이었지만 유성처럼 환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

 

비행 유닛이 착지한 곳에서 한 기체가 비틀거리면서 내렸다. 낙하 중에 대기권에 의한 마찰을 통과하는 일은 큰 무리가 가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바르게 서고 엔리카를 보았다. 내려오는 도중에 다가오는 엔리카를 보았을 것이다. 엔리카는 가벼운 걸음으로 맞이하였다. 상부의 이유는 무엇일까 싶은 의문은 밀리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검은 제복과 파란 머리칼이 광풍에 흔들렸다. 눈은 엔리카와 마찬가지로 바이저에 가려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배틀러 레이피스. 저는 스캐너 엔리카라고 합니다!”

엔리카는 활기차게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맑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레이피스는 잠깐 머뭇거렸던 것 같다. 초면의 이에게 익숙지가 않아서 행동을 고르듯. 그러니 이내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따라 나왔다.

“이미 아시겠지만, 배틀러 레이피스에요.”

 

*

 

스캐너, 그러니까 S형은 그 작은 몸과 신속하고 조용한 해킹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숨어서 들어가 높은 곳이나 구석진 곳에서 적을 지켜보며 정보를 습득하고 몸만 빠져나오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엔리카에게 이렇게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본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만요, 레이피스!”

다급한 외침이 굉음에 묻혔다. 그러나 굉음을 만든 장본인은 잘 들은 기색이었다. 기계 생명체를 베어내고 이어진 엔진의 폭발을 곁에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엔리카를 돌아보았다. 태연한 시선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그리 말하며 뒤로 돌아 사선으로 기계 생명체를 배었다. 그것이 파드득거리며 공격해 오려는 것을 검을 위로 솟구쳐서 찔렀다. 철판에 검이 박혔고 발로 밀어내어 검을 빼냈다. 이어 다음으로 덮쳐오는 이를 상대한다. 이들을 충분히 압도하는 실력이었다. 엔리카가 만류하려 들었던 것이 의미 없게도..

무엇이 문제냐고요? 이렇게 많은 적성 상태의 기계 생명체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문제지요! 본래의 혼자의 임무라면 이런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피스는 발을 딛었고 평화롭던 개체들은 순식간에 위협적으로 변해 그들은 엔리카와 레이피스에게 달려들었다. 수는 한눈에도 열 기가 넘었다. 엔리카는 반사적으로 물러나려고 했다. 물러나고, 안전한 곳에서 추격이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레이피스는 포드에게 사격을 명하고 신중하게 석궁을 쏘았다. 활이 한 발, 한 발 적중했고 폭발이 일었다. 기계 생명체가 이곳에 올 때까지 수가 반으로 줄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레이피스는 석궁을 놓고 검을 뽑았다. 그 정도의 수의 기계 생명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자세였다. 도리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석궁을 사용할 때 보다 빠르게 기계 생명체를 배었다.

저것이 배틀러, 그러니까 전투에 특화된 B형일까? 생각해보니 혼자 움직였던 엔리카는 전투에 임하는 B형을 본 적이 없었다.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으나 충분히 그의 역량 내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유형이 질색하는 암호를 S형은 어렵지 않게 풀어내듯.

고민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지?? 엔리카는 검을 잡았다가 놓았다. 익숙지도 않았거니와 그와 어떤 방식으로 전투에 어울려야 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의 검의 범위 안에 들어가면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그때 땅이 진동했다. 엔리카는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후방에서 다른 기계 생명체 무리가 접근 중이었다. 그중에는 거대한 기기도 있었다.

“레이피스!”

이번에도 그는 들었다. 시선이 빠르게 엔리카 쪽을 스쳤고 그것들의 접근을 보았다. 그러나 사방에서 맹렬하게 달려드는 상대를 두고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엔리카는 그를 보았다가 뒤를 돌아 적들을 보았다. 저들은 자신이 맡는다. B형에게 거대한 기기는 몇십 번 공격해서 온몸을 부숴야 하는 어려운 상대겠지만 S형에게는 커다란 기기가 더 유리하다. 어떤 상대든 속으로 순식간에 파고들 수 있는 비수가 있으니.

엔리카는 두 손을 가장 거대한 기계에게로 뻗었다. 기계에 접속하는 동안 세상이 흐려졌다. 정확히 말하면 감지 영역이 시각센서에서 전뇌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해킹을 피하지 못했다. 엔리카는 그것의 전뇌 공간으로 진입했다.

기계 생명체 내부의 보안 시스템이 엔리카를 공격한다. 엔리카는 시스템의 공격을 피하면서 보안을 뚫어내었다. 밖에서는 B형이 물리 공격으로 싸우듯 이곳은 스캐너의 전장이었다. 이곳에서의 공격은 소프트웨어의 손상으로 이어진다. 치열한 공방이 일어났다. 그러나 엔리카는 전뇌 공간 깊숙이 진입했고 주도권을 탈취했다. 그리고 내부 엔진 활동을 폭주시켜 과부하가 걸리도록 설정을 조작하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레이피스는 순간 엔리카가 이상하게 느려진 것을 보았다. 막지 못한 공격이 그녀를 적중한 것 같았다. 마지막 세 개의 기계를 동시에 베어내고 엔리카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완벽하게 파괴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엔리카는 곧 본래 속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기계 생명체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폭발이라 나머지도 전부 휩쓸려 파괴되었다. 레이피스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보았다. 엔리카는 주저앉으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엔리카? 설마, 다쳤나요?”

그 행동은 정말로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아서 레이피스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엔리카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피로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리 전투에 있어서 호흡을 맞춰야 할 것 같아요.”

*

“그때 말이에요. 당신이 다친 줄 알고 무척 걱정했었어요.”

레이피스는 나지막이 고백했다. 처음에는 엔리카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게 스캐너의 해킹이거든요.”

“하지만, 엔리카. 그렇게 순간적으로 의식이 나가는 것은 전투에 있어서 위험하지 않나요? 빈틈이 된 사이에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요.”

“해킹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기계 생명체와 접속을 오래 유지하는 건 애초에 위험해서 1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 내로 끝나는걸요. 당신의 시각센서가 민감했기 때문에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지, 아닌 이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해요.”

“그렇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걸요.”

잔잔한 음성, 나지막한 눈. 엔리카는 문득 그런 걱정을 처음 들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간 홀로 일했기 때문이다. 결과만을 보고 받는 이들은 과정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른다. 동행하며 과정을 지켜보고 걱정해주는 이. 엔리카에게 그런 기체는 레이피스가 처음이었다.

“이건 그냥 스캐너의 방식일 뿐이라니까요.”

걱정이 따스했지만 익숙하지가 않았다. 엔리카는 쑥스러워져서 목덜미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모르니까 걱정하는 것이리라. 엔리카는 과대 해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직 타인의 행동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유독 그리 묻는 것뿐이리라..

“내가 당신이 싸우는 방식을 몰라서 놀랐듯이.”

“이런.”

레이피스의 얼굴에 난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화살을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화살마다 작은 폭파 장치가 달려있다.

“내 화살은 하나하나가 작은 기계예요. 여기, 보이죠? 이 부분이 추가로 폭발을 일으켜요. 혹시 폭발 때문에 많이 놀랐나요?”

엔리카는 처음보는 무기가 신기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많이 놀라기는 했어요. 다만 그건 폭발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달려든 것 때문이에요.”

배틀러는 대게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의 온유하고 차분해 보이는 모습에서 호전적인 성향을 연상시키기는 어려웠다. 그가 실제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사실 엔리카는 그 포위 상태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었다. 레이피스가 고민하다가 물었다.

“기계생명체를 두려워하나요? 당신이 두렵다면 충돌을 최대한 피해볼게요.”

엔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인류를 위해서 싸우는 군인이에요. 그들을 두렵다고 피할리가 있나요. 다만, 정도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렇게 달려들었다가 포위당하면 어쩌려고요.”

“포위요? 그 정도 달려드는 것 정도는 별로 문제가......”

“그렇지만 지켜 보는 입장에서는 조마조마 했다고요.”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까 했던 말이 상대가 바뀌어 되풀이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엔리카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나서면 갑자기 제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니까요. 앞으로는 행동을 정하고 나가요.”

레이피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물었다.

“매번 전투 시작 전에 계획을 맞춰야 하나요? 그러기엔 급박한 상황도 있을 텐데.”

“오래 같이 다니면서 조율이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동행지시가 오래 지속되면요. ......”

레이피스는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반면에 엔리카는 명확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그보다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익숙해진다면, 일걸요?”

엔리카는 경쾌하게 몸을 돌렸다.

“이번엔 스캐너의 임무에 동행해볼래요?”

 

*

 

“우리는 현장 조사를 주로 맡아요. 조사는 광범위에 걸쳐져 있어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옛 인류 문명의 유산을 조사하는 것이에요. 방치되어 있는데 현재 요르하에서는 보수할 인력까지는 없거든요.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죠. 좀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부식이나 노후화 상태를 조사해두고 있어요.

또 다른 중요한 임무는 기계 생명체에 대한 조사예요. 요르하가 지금 가장 신경쓰고 있는 상대이기도 하니까요. 적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전투에 있어서 중요하지요. 기계 생명체는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어요. 요르하 단원이 같은 방법으로 계속 공격하면 그에 대한 대책을 찾고 그 방면으로 발전한 새로운 기종이 나타나기도 해요. 손을 놓고 있으면 어느 순간 요르하 단원들이 당해버리겠죠. 그래서 끊임없이 그들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이건 어쩌면 직접 상대한 레이피스가 더 잘 알겠지요.”

엔리카는 신이나서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레이피스는 지루해하는 기색없이 잘 들어주었다. 엔리카는 레이피스에게 설명하다가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임무인데요. 지구의 환경을 살피는 것.”

둘은 도시의 외각으로 빠져 걷고 있었다. 지대는 높았고 무너져가는 도시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엔리카는 폐허 도시와 근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 섰다. 세찬 바람이 불었고 벽처럼 세워진 건물들 너머의 광경이 아래로 펼쳐졌다.

“지구에는 다양한 환경이 있어요. 이곳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지만 그것은 본래 지구의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이리 바꾼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이 없는 지금은 지구의 본래 것이 자리를 되찾고있는 중이에요. 물론 인류의 유산이 사라져가는 것은 서글프지만요, 기록에 의하면 인류가 떠나기 직전의 자연은 크게 파손된 상태였대요. 따라서 지금의 현상은 지구가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회복된다는 것이 과거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니에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생명들이 나타나고 있죠. 우리는 그런 생명체를 모으고 기록하고 있어요. 후에 인류가 돌아오면 그들이 변한 지구에 적응 할 수 있게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사령부에서 내세운 이유지만 ...... 꼭 그것이 아니더라고, 지구가 변하고 새로운 생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은 경이롭지 않나요?

기계 생명체처럼 네트워크를 갖춘 것도 아닐 텐데, 요르하처럼 누군가가 연구해서 개별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도 아닌데 환경에 의해 새로운 생명들을 탄생하고 있잖아요. 대체 어떻게 그리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것일까요? 나는 그런 자연과 자연을 빚어낸 환경에 대해 알고 싶어요.”

간질거리는 감각이 기분 좋게 올라왔다. 마침 바람이 좋았다. 유쾌한 충동이 들어 엔리카는 바이저를 벗었다. 한층 선명한 색채의 자연이 눈에 담겼다. 바람에 의해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 사이로 간간히 엔리카의 자색 눈동자가 경이로운 광경을 담고 빛나고 있었다. 그 광졍을 지켜보던 레이피스 또한 조심스럽게 바이저를 풀어내었다. 빛을 받아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색채는 식물의 잎을 닮아 있었다. 레이피스는 나지막히 말했다.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나도 알고 싶어요.”

자색의 눈과 연두색의 눈이 마주쳤다. 엔리카는 미소를 한가득 담아 지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꺼내고 공감을 받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 그러나 그때는 그것을 이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레이피스는 엔리카의 말이 인류 대신, 인류가 존재하지 않기에 생긴 현 광경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레이피스. 당신은 우리가 동행 임무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엔리카가 어느 날 물었다. 레이피스는 긴장을 서서히 세웠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것은 그에게 간단한 일이었다. 레이피스는 웃으며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나는 알 것 같아요.”

그 말에는 반사적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엔리카의 시선은 밖을 향해 있었다. 마주하지 않기에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오늘 그곳은 정말 위험했어요. 이토록 위험한 곳에 나 혼자 임무를 나갔더라면 분명 순식간에 기계 생명체에게 당했겠죠. 당신이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레이피스.”

아, 그것이었구나. 그는 지나치게 세운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천만에요, 라고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감사 인사를 표하는 것 치고는 공허하고 서글픈 목소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반사 인사를 그대로 받아 드는 대신 엔리카의 이름을 진지하게 불렀다.

“엔리카.”

엔리카는 답하지 않았다. 레이피스는 일어나 엔리카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엔리카의 시선은 어딘가에 못 박혀 있었다. 레이피스는 그 방향이 오늘 임무를 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보지는 않았지만 가까워지니 표정을 넘겨 볼 수 있었다. 엔리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엔리카.”

레이피스는 재차 이름을 불렀다. 엔리카가 쉽사리 입을 떼지 않자 레이피스는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엔리카를 올려보았다. 가지런히 모은 손 위에 그의 손이 얹어졌다. 안드로이들에게도 온기가 있다. 손에서 손으로 작은 떨림과 온기가 가만히 전해졌다.

“무슨 일인가요? 괜찮아요. 내게 말해줘요.”

“이건...... . 당신이 싫어하거나 가치 없다고 여길 고민일 것 같아요.”

“괜찮아요, 엔리카. 나는 그러지 않을거예요. 괜찮으니 말해줘요.”

엔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레이피스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질문을 물리지 않는 것은 친절한 태도 이전에 계획적인 전략이었다. 그는 엔리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고 싶었고 알아야 했다.

“왜 그 많은 안드로이드가 희생당해야 했을까요?”

레이피스는 엔리카의 의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이 오전에 향했던 곳에는 안드로이드의 시체가 끝없이 널려있었다. 인조 피부가 갈기갈기 찢겨, 내부부품이 드러나 있는 광경은 참혹했다. 예상했었다. 수많은 기기의 블랙박스의 신호가 그곳에서 끊겼기에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처럼 쌓인 광경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이 시체를 살피는 동안 강대한 기계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레이피스가 정예요원이라고 하지만 버거운 상대였다. 엔리카는 상부에 후퇴를 요청했다. 그러나 기각당했다. 단호한 지시를 듣고 그제야 어째서 그 많은 안드로이드가 죽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사령부는 , 옛날 문서의 기록에 의존해서 말하자면, 불을 땔 때 땔감을 넣듯 요르하 단원들을 밀어 넣었어요. 무르게 임해서는 기계 생명체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최소한 단원들을 생각했다면 물러나서 제대로 된 팀을 짜서 다시 상대하게 할 수 있었잖아요. 그것이 더 효과적일 테고요. 사령부가 이것 하나 떠올리지 못할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기계 생명체를 물리쳤다. 그래도 그런 광경을 보면 임무에 대한 회의가 피어오르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인류가 안정적이며 평화로울 때 인류는 인간 개개인이 고귀하다고 말하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에 남게 된 안드로이드들은 그 기록을 보관했다. 그러다 보면 인류와 최대한 유사하게, 마음마저도 닮도록 빚어진 안드로이드 중 하나가 기록을 읽고 공감하며 은연중에 자신들에게도 적용하는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엔리카의 눈이 열기를 띄었다.

“우리는 인류를 위해 싸울 의무가 있지만, 죽어도 백업된 데이터로 되살아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쓰고 버리는 부품처럼 취급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안드로이드가 고통받는데.”

그들은 시체 속에 섞인 생존자 안드로이드를 발견했었다. 이미 반파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아직 살아는 있었다. 그러나 전장 이탈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그저 고통에 겨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보던 엔리카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 순간이 다시 올라와 엔리카의 메모리를 지배했다. 북받쳐서 다시 눈물이 울컥 새어나왔다. 레이피스는 그것을 가만히 듣다가 손을 뻗어 엔리카의 눈물을 쓸어주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음색이었다. 레이피스는 부정하지도 나약하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등에 손이 내려앉았고 이내 토닥이기 시작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요, 엔리카. 하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답답하면 얼마든지 이야기해줘요.”

엔리카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전투에 임해서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군대에서 그 말은 좀처럼 꺼낼 수 없었다. 말하지도 전에 거부당하리라 생각했다. 안도일까, 해방감일까? 아니면 그도 아닌 다른 것일까? 몸에 힘이 빠졌고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레이피스는 엔리카가 무너지지 않도록 끌어안았다. 엔리카는 레이피스에게 매달려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흐느꼈다. 레이피스는 여전히 엔리카를 다독이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은 엔리카의 뒤쪽의 벽을 향하고 있었다. 벽 위에 타는 것 같던 엔리카의 눈을 그려졌다. 레이피스는 자신이 엔리카와 동행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파트너 S형 엔리카는 불온 분자로 뻗어 나갈 가능성이 다분했다.

 

*

 

“그 기계 생명체는 관할 구역에서 몇 주나 자리를 잡고 있었거든. 겨우 하나의 개체였는데 요르하가 대처하지 못한다니, 말이 안 되는 짓이지. 대원들에게 알려진다면 사기가 크게 떨어졌을걸?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아닐까?”

엔리카는 그녀의 담당 오퍼레이터 아이든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그게 다야?”

“뭐가 더 필요한데?”

“네 말은 고작 사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이야?”

“엔리카. 너는 모르지. 우리 오퍼레이터들은 그런, 네가 생각하기에 자잘한 요소가 안드로이드들의 상태를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알거든.”

엔리카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자 아이든은 툭 뱉었다.

“정 납득하지 못 하겠으면 사령부에 직접 물어봐.”

“이미 물어봤어.”

“진짜? 빠르네. 그래서 뭐라는데?”

“내가 알 필요 없대.”

“그건 맞는 말이지. ...... 엔리카. 왜 그렇게 봐.”

섭섭한 심정을 가득 담아 말했는데 그런 답이 나오자 엔리카는 아이든을 쏘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 보아도 태도가 달라지는 건 없어서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나는 내 방에서 쉬러 가볼게.”

“그래라.”

아이든은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엔리카가 돌아서서 몇 걸음 내딛었을 때 아이든은 문 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엔리카. 저번에 동행하게 된 대원은 어때? 잘 맞아?”

“네가 알 필요 없어, 아이든.”

엔리카는 농담으로 아까 들은 말을 아이든에게 돌려주고 빠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이든이 황당한 표정으로 보았다가 뒤늦게 외쳤다.

“엔리카. 나는 네 담당 오퍼레이터거든!”

엔리카는 그때쯤 방 근처 복도로 나와 걷고 있었다. 진짜로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고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해줄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에 속내를 털어놓았던 일이 떠올랐다. 속이 개운해지는 동시에 그 직후에 안겨 울기까지 했던 것이 떠올라 내부 엔진이 요동쳤다.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안드로이드이고, 앞으로 계속 임무를 하며 마주할 사이인데. 당장 다음 임무에서 얼굴을 마주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레이피스를 마주쳤다. 그는 벙커에 난 창으로 지구를 보고 있었다. 엔리카는 난감해져서 눈을 굴렸다. 다음 임무고 뭐고 지금을 어떻게 해야 하지? 엔리카가 굳어있는 동안 그가 먼저 엔리카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돌아섰다.

“당신이군요, 엔리카.”

레이피스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저번에 바이저를 벗은 모습을 보았기에 그 눈가가 어떻게 휘어질지 그려졌다. 엔리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레이피스. 그러니까 ...... ”

어떻게 해야 할까? 사과해야 하나? 엔리카가 갈등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 날 일은 사과할게요.”

레이피스는 침착하게 지켜보며 물었다.

“어느 것에 대해서 말인가요?”

“저번에 전투가 끝나고......제가...... ”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지? 전의 전투로 마음이 심란해서 그를 붙잡고 토로했다는 것. 그러다가 울먹였고 끝내는 울어버렸다는 것. 그를 붙잡고 그에게 매달려서 그에게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는 것. 제법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안겨서 운 것은 다른 일이지 않은가? 실례 이전에 다른 문제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그때 일이라면 당신이 내게......”

“잊어주세요! 내가 당신에게 실례를 끼쳤어요.”

엔리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빠르게 뱉으며 엔리카가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정적 후에 레이피스의 답이 들려왔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엔리카.”

레이피스는 바이저 뒤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만약 엔리카가 그날 했던 발언의 무게를 깨닫고 자신에게 공유한 것을 경계한다면 앞으로의 일은 더 어려워진다. 엔리카가 화들짝 뒤로 빠지지 않도록 말을 세심하게 골랐다, 친근하게, 다정하게.

“당신이 내게 털어놓은 것들은 당신의 ...... 보물이었잖아요. 나는 당신이, 그런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는 것이 기쁜걸요. 그런데 그것을, 잊으라니.”

엔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울었던 기억이 강렬해서 그 직전의 상황이 비교적 흐렸던 탓이었다. 레이피스는 그 사이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

“아니면 내게만 말한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었나요?”

“아니요, 그건 ...... 당신에게 처음으로 말했던 것이에요.”

확산된다면 위험해질 사상이다. 아직은 엔리카 혼자, 그리고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라. 레이피스는 미소를 지었다.

“거 봐요. 내게만 말해준 것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해주는 당신의 표정에 내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안드로이드에게는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부 장치에 전기 신호가 회로를 타고 전해지며 자잘한 모터와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청각 센서를 건드렸다. 온 신경이 대상에 집중한다. 해킹할 때, 전투에 임할 때처럼, 그러나 위험하지는 않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나도 알고 싶다고. 이번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나도 알고 싶어요.”

묘하게 붕 뜬 것 같은 감각 사이에서도 그 음성이 선명하게 닿았다. 이어 온 사고를 지배하는 것 같다. 이건, 그러니까, 감정 반응이다. 명령 이외에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는, 혹은 반대로 하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 생기는 것. 요르하 대원에게 감정을 가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데...... 그러나 이름도 모르는 감정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일단은 앞의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족시켜서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알겠어요. 당신에게 알려준다고 약속할게요.”

그 말에 레이피스는 미소를 지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엔리카는 감정의 이름을 알더라도 제어하지 못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46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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