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원] 윤리적 관계 上

모원 by 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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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 번만 신청해주면 안 돼?”

[내가 형 꺼를 왜….]

“3명 못 채우면 강좌 폐강 당한다고 했단 말야.”

[아씨…그럼 나 맨날 밥 사줘]

 

형 밥줄 좀 지키자.

 

학사 강의는 폐강률이 거의 낮다. 원래 그렇다는 건 아니고 원진의 강의가 꿀강의라는 입소문이 퍼진 덕에 이번 학기에도 기본 수강생은 거뜬히 채워졌기 때문이다. 점차 늘려간 다른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꾸준히 올라온 에타 후기 덕에 원진은 강좌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치만 대학원은 다른걸.

 

대학원은 교수가 밭이었고 강사가 가뭄에 나는 콩이었다. 사람들은 죄다 자기가 뿌리내릴 교수를 찾았지, 가볍게 듣고 말 강사는 잘 선호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리도 많이 없어서 원진도 대학 강사나 꿈꿨다. 대학원 교수까진 목표로 하지도 않았었고.

 

함 선생, 이번엔 대학원 강의도 해보는 거 어때?

 

지도교수였던 김 교수의 지원 덕에 들어가게 된 대학원 수업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온갖 행사에 따라다녀 시중을 든 보람이 여기서 나온 건가. 알겠습니다! 하고 호기롭게 대답하긴 했지만, 그날 이후부터 하루하루가 걱정이었다. 학생들 수준이 너무 높으면 어쩌지. 내가 밀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떨리는 맘, 긴장되는 맘으로 개강한 1학기에서 원진은 학사나 석사나 거기서 거기인 학생들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김 교수가 밀어준 학생 둘과 호기심으로 들어 온 학생 하나. 간신히 셋을 채운 강의에서 한 달이 지나고 학생 하나는 개인 사정으로 휴학을 때렸고 나머지 학생 하나는 김 교수와 싸운 뒤 자퇴했다. 결국 6월 종강 시즌에 학생 한 명과 1대 1로 강의하게 된 원진은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생각하다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이거 이거 더 할 수 있나…싶었는데 어느덧 2학기가 코앞까지 다가와 버렸다.

 

[선생님. 3명 미만이면 폐강이세요.]

“아…그래요. 제가 지금 몇 명이죠?”

[1명이요.]

 

과 조교는 원진에게 참혹 같은 현실을 전해줬다. 맞다, 교수가 꽂아준 게 2명이나 되었으니 저번 학기를 유지한 거였지. 그래도 제한 인원이 2명까지라 누군가 지원해준다면 제가 사유서를 제출해 강좌를 유지할 순 있었다. 간신히 뚫은 이 자릴 막히게 할 순 없지. 그래서 원진은 급한 대로 그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군대 동기 놈의 동생인 형준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일단 수강 신청하고, 나중에 정정 기간에 취소해달라고.

 

“이번엔…몇 명일까요.”

[오…3명 됐어요. 강사님!]

“헉 진짜요? 대박.”

 

형, 했어.

 

날아온 형준의 문자에서 친구나 지인과 같이 수강 신청을 했단 말은 없었다. 그렇담 순전히 제 강의를 듣고 싶은 학생이 2명이나 됐다는 소리다.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아서, 원진은 그날 종일 싱글벙글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해요. 강사님. 최 교수님이 강의실이 좁다고 바꿔 달라고 하셔서…제가 안 된다고 했는데 강사님 학생 수가 제일 적으니까 괜찮다고….

 

안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겹쳤다. 전자는 나름 쓸만했던 강의실에서 깡통 같은 수준의 강의실로 제 수업 공간이 옮겨갔단 소식이고, 후자는 어찌 됐든 그 3명이 개강까지 함께 와줬다는 소식이다.

 

그거면 됐다. 더 바라는 것도 없다. 출석부를 받아 든 원진은 그간 고생해줘서 고맙다며 조교에게 커피를 건넨 뒤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싸가지 최 교수가 제멋대로 바꿔버린 좁디좁은 연구실로. 학생들에게 공지는 됐나요? 물어보니 다행히 문자는 날렸다며 걱정하지 말란 답이 돌아왔다.

 

“반갑습니다. 강의실이 바뀌어서 좀 놀랐죠?”

“교수님이세요? 와. 굉장히 젊으신데….”

“아하하…교수는 아니고요. 편하게 강사님이라 불러요.”

“그러게요. 완전 형 같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

“아하하…송.형.준. 선.생.이라고 했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사님.”

 

이건 뭐, 강의를 하라는 건지 데이트를 하라는 건지. 연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엔 4인 테이블 하나와 빡빡히 사방에 둘러싸인 서재들이 전부였다. 급한 대로 의자를 테이블 앞으로 빼 나머지 3명을 마주 보게 앉힌 원진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아 출석부를 폈다. 송형준…서우빈…구정모? 구정모라. 어디서 본 익숙한 이름인데. 흠…하고 안경을 치켜올렸다 내린 원진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뒤 다시 학생들을 봤다. 어쨌든 오티는 시작해야 했으니까.

 

“네 저는 부탁…아니 추천받아서 신청하게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서우빈 선생은요?”

“저는…정모가….”

“에?”

“아 아뇨. 저도 추천받아서.”

“그래요. 그러면 구정모 선생은….”

“궁금해서 신청했습니다.”

“궁금이요? 이 과목이요?”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형준이야 동기 놈과의 술자리 밥자리에서 종종 봤으니 가볍게 넘어가고, 우빈과 정모의 학과를 묻는데 들어보니 둘 다 경영 쪽이다. 엥, 그쪽 학과 사람들이 왜 내 강의를 수강 신청한 거지? 인문학에 가까운 원진의 강의는 그들과 전공성이 좀 동떨어져 있는데. 궁금해 정모를 보며 고개를 돌리니 정모가 시선을 잠시 바닥으로 떨구며 대답했다. 교수님…아니 강사님의 강의가 듣고 싶어서 신청했습니다. 저를…아세요? 이어진 원진의 물음에 정모만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네.

 

 

‘아니 회사 다니면서 뭐 하러 대학까지 다니려 그래?’

‘냅둬, 지 욕심이라잖아.’

‘저거 저거 얼마나 힘들 줄 몰라서 저래. 금방 관둘걸?’

 

탄탄대로였던 삶에 장애물이 끼어든 건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인서울은 당연하고 내로라하는 명문대 입학까지 꿈꿨던 정모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꽤 큰 타격으로 다가왔다. 첫 번째는 돈이 없다는 것, 두 번째는 제 존재 자체만으로도 돈이 든다는 것.

 

그래, 공부야 나중에 하지 뭐.

 

어머니와의 의논 끝에 정모는 군 제대 후 바로 회사에 입사했다. 빚을 갚는 게 먼저였다. 삶의 우선순위를 그쪽으로 두자 생각은 편했고 몸은 고됐다. 그렇게 몇 년. 사원으로 입사해 대리까지 올랐을 때,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정모는 대학에 입학했다.

 

사실 공부 그 자체를 하고 싶은 거였지 큰 목표는 없었다. 그래서 회사 일에 지장을 주긴 싫어 일부러 수업도 야간 수업을 택했다. 선택의 폭은 좁았지만 나름대로 할 만은 했다. 큰 대학이라 교양도 꽤 있었고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4년. 졸업을 목표로 학교에 다니던 중 정모는 한 교양을 듣게 되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다들 피곤하죠? 그래도 힘내 봅시다. 이 저녁에 이렇게 수업 들으러 온 여러분이 진짜 대단한 거니까요….’

 

더 노력해서 살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하고 싶은 만큼 공부하면서 재밌게 수업 진행해 봅시다.

 

함원진. 그는 정모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젊은 강사였다. 학생인가? 싶을 정도로 앳된 얼굴에 나이 든 사람처럼 보이겠답시고 쓴 안경이 오히려 매력 포인트가 되어버린 사내. 귀엽게 생겼네.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모는 제가 저도 모르게 턱을 괴고 그를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 정도로 괜찮은 얼굴이긴 했지. 그때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강의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교양의 느낌을 살려 깊게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겉핥기 수준으로 시늉만 내는 것도 아니었다. 준비를 많이 해 온 듯, 그는 다수의 학생이 최대로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강의를 이어갔다. 젊은 강사의 패기였는지 유능한 인재의 실력이었는지. 어쩌면 둘 다인 것 같았지만 그 강의는 정모가 들은 교양 중 가장 재밌는 강의였다.

 

종강이 아쉬웠던 유일한 강의. 4년간의 대학 생활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던 수업. 회사 일이 바쁘게 돌아가 다른 강의엔 못 나간 적이 몇 번 있었어도 절대로 그 강의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그 덕에 아이러니하게 그와 대화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다음에도 들어야지. 무의식중 이미 수강을 확정한 정모에게 학교는 야속하게도 원진의 강의를 들려주지 않았다. 혼자 다니던 대학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부재를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야 정모는 그가 잠시 타 대학으로 옮겨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강의계획서에 적힌 번호를 보고 연락도 할까 싶었으나 그 정도의 용기는 안 나 마음을 접었었다. 사실 무슨 이유로 그에게 말을 걸까 싶어서. 그래서 나중에 다시 그가 돌아온다면 좋겠거니. 하고 생각만 하고 말았었는데.

 

무사 졸업 후 석사 진학을 택한 건 순전히 제 욕심이었다. 당시 정모의 지도교수 추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모 자신의 욕심이 커져서 진학한 게 맞았다. 기왕 공부를 시작한 거 끝을 보고 싶었다. 여러모로 제 인생에 도움이 되는 선택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냥. 학위를 따고 싶었다.

 

함…원진?

 

그랬던 석사과정에서 원진을 다시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다른 학과 강의는 뭐가 있나 심심해 뒤적거리던 도중 정모는 컴퓨터 화면 속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흔한 이름은 아니기에 어? 하고 들어갔는데 제가 보관했던 원진의 강의계획서의 번호와 이메일이 똑같았다. 그래서 정모는 수강을 신청했다. 폐강될까 혹시 몰라 저와 동갑이자 같은 대학 동기인 우빈까지 끌어들이면서.

 

 

아, 제 강의 들으셨었구나.

 

학사 때는 학기마다 못해도 100명은 들어갈 넓은 강의실에서 강의했던지라. 원진이 정모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원진의 수업은 조별 과제를 하는 것도 개인 발표만 하는 것도 아니어서. 조용히 수강만 한다면 존재감 없이 종강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뭐, 이렇게까지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지만. 그것도 원진이 바쁘고 정모가 정신없을 때의 일이라 아귀가 맞물렸을지도.

 

그에 비해 지금 강의실은 좁고 작았다. 고개를 돌리면 큰 눈과 바로 눈이 마주친다. 책상 앞 가운데 자리에 앉아 그 뜨거운 시선을 피한 원진이 반가워요. 하고 인사하며 씩 웃었다. 정모는 그런 원진을 말없이 빤히 쳐다봤다.

 

 

정정 기간에 취소하겠다던 형준은 들을 만한 강의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원진의 강의에 남았다. 3시부터 6시까지인 강의 시간 덕에 넷은 종종 강의가 끝나고 난 뒤 저녁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티 다음 주 수업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대부분 정모가 주도하고 형준과 우빈이 호응하면서 이루어지곤 했다. 본인이 하는 말로는 퇴근 시간에 차가 밀리니 늦게 가기보단 그냥 밥 먹고 편하게 집에 가자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원래 이런 친목 좋아하시나 봅니다? 처음 정모가 이를 권유했을 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저도 좀 당황스러워 안경을 추켜올렸다. 허나 식사도 때우고 좋잖아요. 라는 딱딱한 답만 들려오곤 끝이었다. 웬일이래? 회사 회식도 거의 참여 안 하는 네가? 직급이 다르지만, 나이는 같아 회사 밖에선 친구 먹었다던 우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를 증언하다 결국 정모의 손에 입을 막혔다.

 

“…이상 요약을 마치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정한 주제와 논평 발표해주시죠.”

“네. 전 우선 이 논문이 2000년대 초반에 발표된 것에 주목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시대와 가치관이 많이 다른 점이 있겠죠. 그러다 보니….”

 

강의는 무난했다. 솔직히 우빈과 정모가 속한 과의 전공과 내용이 거의 무관했기에 그리 표현한 거였지 원진이 선별한 논문과 주제를 잡고 토론을 이어가는 강의 방식은 흥미를 끌 만했다. 정모는 이 강의를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과 전공생이 없기에 조금 가벼운 느낌의 논문을 고른 게 신의 한 수였을까. 처음엔 버겁다고 찡찡대던 형준도 몇 주 밥을 먹고 나니 꽤 괜찮은 발표를 내보이며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은 좀 빨리 끝났네요. 다음 주는 추석이라 휴강입니다.”

“강사님은 명절에 고향 내려가세요?”

“본가가 서울이라 딱히 어디 안 갑니다. 가족끼리 모이긴 하겠죠. 선생님들은요?”

“저야 뭐 아래로 열심히 내려가야죠. 어우, 멀어.”

“저도…이번 주말부터 내려가기로 했어요.”

“구정모 선생은요?”

“저도 본가가 서울이라, 뭐….”

“그럼 아쉬운데 우리 오늘은 한잔하고 헤어질까요?”

 

 

대학 후문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학생들의 손엔 죄다 샛노란 소맥 잔이 들려있다. 그다지 술을 좋아하는 인물들이 아니라서 여태까진 밥만 먹고 헤어졌는데, 오늘은 그래도 다음 주에 쉰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다들 술 한 잔 홀짝이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후문 내 가장 맛있는 고깃집에 예약을 걸어놓고는 모두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회사 다니면서 대학원 다니는 거 안 바빠요?”

“대학 때서부터 하니까 할만하더라고요.”

“전 이놈 때문에 같이 대학원 가게 된 거라서요.”

“와 진짜 대단하시다.”

“사장님 여기 맥주 두 병이요! 아 소주도 한 병 더요!”

 

느릿하게 구워지는 돼지고기를 올리고 미리 나온 계란찜을 안주 삼아 잔을 든다. 기어코 소맥으로 달려 보자며 신이나 술을 섞은 형준이 강사님도 한 잔 받으라며 연연노란 잔을 내밀었다. 주량이 높진 않았으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던 원진은 웃으며 잔을 받아 든 뒤 이어지는 건배사에 짠하고 맥주잔을 신나게 맞부딪쳤다.

 

“주량이 어떻게 됩니까? 함 강사님은.”

“그냥 뭐…적당히….”

“처음부터 소맥 마셔도 괜찮아요?”

“야, 뭐 흑기사라도 해주게?”

“아이 이 정도는 마십니다아.”

 

막 입에 털어 넣으려는데 정모가 손을 뻗어 원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처음 겪는 가까운 스킨십에 놀라 원진이 몸을 멈추자 그가 묻는다.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마실 필요 없어요. 다정한데 어딘가 이상한 그 말에 원진은 어깨를 으쓱한 뒤 들었던 잔의 소맥을 시원하게 삼켰다.

 

오랜만의 알코올이다. 대학생 땐 좋아서 친구들이랑 마시러 다녔고, 대학원생 땐 교수들 때문에 억지로 마시곤 했는데. 그 덕분에 원래 좋아했던 술에도 정나미가 싹 떨어져 버렸지 아마. 한 잔을 깔끔히 원샷한 원진이 잠시 추억에 잠겨 빈 잔을 봤다. 기분 좋게 술 마시는 건 정말 간만이다 싶어서.

 

“아 맞다, 전 이따 여친이 데려올 거 같습니다. 퇴근하고 데리러 온다네요.”

“너 나랑 같이 네 차 타고 왔잖아.”

“그니까, 너 알아서 택시 타고 가라고. 발 없냐?”

“우빈쌤 여친 있었어요?”

“제가 말을 안 했나요?”

 

말 안 했거든요. 놀람 반 신기 반으로 벌떡 일어선 형준이 조르륵 우빈의 잔에 술을 따른다. 애인이 있었구나. 하긴, 다들 한 인물들 하니 없을 리가 있겠나. 형준의 연애 사정이야 뻔할 뻔 자로 알고 있기에 원진은 저도 모르게 남는 멤버 하나인 정모를 흘깃 봤다. 정모도 애인이 있으려나. 당연하겠지. 없을 리가 없겠지. 에라이 지금 내가 뭐 하는 건가. 취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언제부터 사귀었냐는 예의상 던진 말에 술기운이 오른 우빈이 종알종알 제 연애사를 읊기 시작했다. 협력업체 직원이었는데 어쩌고 멋있었고 착했고 예뻤고…. 수저로 탕탕 계란찜 뚝배기를 내리치다 한 숟갈 맛나게 퍼먹은 그는 형준에게도 여친이 있냐고 물었다가 있다는 그의 대답에 흥분해선 연애 토크를 이어갔다.

 

“그럼 함 강사님은요?”

“에? 아니, 예?”

“만나는 사람 있어요?”

 

무심코 던진 우빈의 질문에 웅크려 익어가는 고기만 보던 정모가 원진을 바라봤다. 그가 놀람을 억지로 참으며 술을 받는 원진에 시선을 고정한다. 확연하게 변한 태도가 이상해 원진도 정모와 눈을 마주하는데 형준이 산통을 깨며 소주를 조록 따랐다. 형…아니 강사님 저번에 선봤다면서요.

 

에이…그거야. 부모님이 하도 난리라 시늉으로 본 거지.

 

그러니까 원진은…제가 죽어도 선에 성공하지 못할 거란 걸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그다지 자신의 연애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애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원진의 삶에 약간의 의문만 가지셨을 뿐. 공부하고 취업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쓸데없는 관심을 써 시간 빼앗기는 걸 매우 싫어하시던 분들이었다. 그 덕에 원진은 편하게 남자들과 만났고.

 

대학 강사랍시고 좀 번듯한 직장을 얻고 나니 다음 달부터 주야장천 선 자리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이모 고모. 부모님의 지인,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 전부 다. 그러나 대부분 원진이 거절했고, 그럴 수 없는 경우엔 몇 번 형식적인 만남을 이어간 후 거절당하거나 거절했다.

 

아들, 연애라도 좀 하지 그래?

 

너도 나이가 찼으니 만나는 사람 좀 데려오라는 고리타분한 말이 민망하도록 원진의 연애는 사실 끊임없이 이어져 왔었다. 언제부터? 부모님이 제게 걱정 없던 고등학생 때부터. 그리고 대학원생 때까지 내내.

 

뭐, 결과적으론 전부 비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게 줄곧 이어졌던 원진의 연애는 대학 강사로 취직하기 전에 끝을 맺었다. 그의 전 애인은 취준생이었는데 원진의 취업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 바로 헤어짐을 통보했었다. 자격지심이 레전드인 싸가지 하남자. 그게 그가 했던 마지막 연애였다.

 

 

“즈는 누나가 데리러 와서 가께여-!”

“그래요…가요. 담주 추석 잘 지내고!”

“오늘 정모 좀 부탁합니다. 다담주에 뵈어요, 강사님!”

“네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술을 마시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정모의 나이가 저보다 두세 살은 많다는 거였다. 그래서 직급이 과장씩이나 되는구나. 대학생 때 저를 만났다기에 어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 제 팔도 덥석덥석 잡았겠지.

 

고기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정모는 원진의 선 얘기가 나오자마자 소맥을 들이붓더니 맛탱이가 가버렸다. 가게 테이블엔 고갤 처박은 시뻘게진 얼굴의 정모만이 남아있다. 집이 어디냐 물어도 대답을 안 한다. 그렇다고 지갑까지 꺼내 집을 확인하긴 그렇다 싶어 대리를 부른 원진은 일단 본인 집 주소를 불렀다.

 

키는 멀대 같이 크기만 해서는…. 술도 그냥저냥 마시는 것 같던데 왜 갑자기 급발진해서. 대리기사의 도움으로 정모를 뒷좌석에 앉힌 원진이 숨을 골랐다. 그래도 남자랍시고 몸이 꽤 무겁다. 이마에 고인 땀을 닦으며 조수석으로 이동하려는데 길쭉한 손이 나타나 또 한 번 원진의 허릴 콱 잡는다. 으악! 놀란 원진이 뒷걸음질 쳤지만, 그는 더 강하게 원진을 껴안았다. 이거 안 되겠군. 무턱대고 떼어놓긴 어려울 것 같아, 원진은 대리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곤 정모와 함께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럼, 구정모 선생은요? 만나는 사람…있습니까?’

‘…없죠.’

‘이 새끼 진짜 없어요. 그건 제가 보증하죠. 강사님.’

‘넌 또 뭘 보증까지…됐어, 인마.’

 

그건 좀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궁금했다. 제가 보기에 정모는 어디 모자란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제 이상형을 취합한 인물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한 달 넘게 만난 시간 동안 이상한 짓도 한 적 없었다. 그 정도 인성에 성격이면 여자들이 줄을 서고도 남을 텐데. 뭐, 줄까지라는 말이 좀 그렇다면 부모들이 선 자릴 제시 하고도 넘칠 텐데.

 

생각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 잠이 든 정모의 정수리가 툭 하고 원진의 어깨로 떨어졌다. 조그만 머리통이 숨 소릴 내며 원진과 닿는다. 다음부턴 술 좀 작작 마시라 해야지. 아까 도와준 것을 더해 대리비를 얼마 드려야 할지 가늠하며, 원진도 알콜에 의해 점점 감겨오는 제 눈꺼풀을 닫았다.

 

 

“손님….”

“…….”

“손님 도착했습니다.”

“아…아! 네네.”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번뜩 일어난 원진이 죄송하단 말과 함께 서둘러 대리비를 지급했다. 감사하단 인사와 함께 기사가 떠난다. 원진은 여전히 널브러져 자는 정모를 봤다. 이걸 어떡한담.

 

구정모 선생, 좀 일어나봐요. 네?

 

어깨를 톡톡 치다 두 팔을 잡아당겨 몸을 일으켰다. 으으응 하는 소리와 함께 정모가 느릿하게 일어난다. 얼마나 마신 거야 진짜. 일단 집에 데려다 놓지 싶어 원진은 그의 팔을 제 몸에 걸며 느릿하게 차 문을 닫았다.

 

커다란 정모의 몸이 원진의 온몸에 그대로 달라붙는다. 알코올 향이 진득하게 묻은 숨이 귓가에 여과 없이 도착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감과 동시에 정모가 걸어놓은 팔로 원진을 꽉 끌어안곤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함원진…교수님? 평소에 부르던 호칭과 좀 다르다. 아이, 나 교수 아니고 강사라니까. 짜증을 섞어 대답한 뒤 도어락에 손을 대는데 정모가 원진의 어깨에 볼을 비비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

 

그렇게 내 수업이 좋았나. 끝없이 들러붙는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휴, 드디어 집에 왔네. 한숨과 함께 재킷을 벗어 바닥에 던지는데 움직이는 원진의 몸을 정모가 잡아당겨 와락 껴안았다. 왜 이래, 진짜? 저도 취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놀란 원진이 정모를 쳐다보니 달빛만 간신히 비치는 집안에 정모가 새까만 눈을 하고 원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뭡니까 이게 지금.”

“…여자 친구…있어요?”

“에? 갑자기?”

“…아까 못 들어서.”

“뭘 그런 걸…없으니까 선을 봤죠.”

“그럼…있었던 적 있습니까?”

 

무슨 소리지. 여자 친구가 있었던 적이 있었냐를 묻는 건가. 그게 왜 궁금한 걸까 하다가도 원래 술에 취하면 진심만 남는 법이니 궁금할 만도 하겠다 싶어서 원진은 순순히 대답했다. 있었죠. 그게 뭐 국가기밀 수준의 비밀도 아니었기에. 더군다나 제가 만난 여자들이란…자각하기 전에 사귄 여친이었거나 자각하고 나서도 부모님 등쌀에 밀려 잠깐 만났던 여자들 뿐이었으니까.

 

대답을 마치는데 정모가 몸을 더 붙여온다. 이미 가까운 상태에서 가슴이 바짝 붙는다. 제 몸에서 나온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술 냄새가 퍼진다. 두 눈을 느리게 깜박이자 정모가 다시 물었다. 그럼, 남자는요.

 

“남자친구는…있었습니까.”

“…….”

 

의도가 불분명한 질문에 이번엔 원진이 정모의 눈을 봤다. 새까만 시선이 제 온 얼굴을 훑는다. 흘러 붙은 몸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실은 그냥 밀어내면 그만인 건데. 그러고 싶지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있었죠.”

“…….”

“근데 그건 왜…읍.”

 

뒤통수로 옮겨간 손이 정수리를 꽉 당겨 안는다. 고개를 비튼 정모가 원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숨이 쏟아진다. 원진은 팔을 뻗어 정모를 끌어당겼다. 온몸이 뜨거웠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많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편히 보시도록 링크공개에서 전체공개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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