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코코아 마시멜로 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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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코코아 마시멜로 토치
눈이 옴팡지게 내렸다. 엘리멜렉 베레신스키가 찜해둔 침실에 누운 그자가 썩지 않을 거라는 게 달카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엘리멜렉은, 도착하자마자 나름으로 기대를 품고 침대에 짐가방을 부렸는데, 반대편 바닥에 시신이 누워 있는 걸 발견한 첫 목격자였다. 덕분에 달카 페트란의 ‘주요 용의자’ 목록에 올라 있었다.
작금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개 그 주제였다. 달카가 파하하 웃으며 외쳤다.
“농담일세! 나는 친우를 믿거든.”
라디오에서 간간이 끊어지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파가 잡힌다는 의미였지만, 견디다 못한 샘 미드루프가 라디오를 툭 꺼버렸다.
사실 내던져서 부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달카의 얼굴에 문득 시든 표정이 스쳤다. 곧장 건초 이파리 하나를 우물거리면서 밝아졌지만.
누구도 기분 좋기에는 글러 먹은 날씨다.
특히 샘은 이 쓸데없이 활달한 자들에게 끌려 나온 처지여서 더 그랬다. 그는 겨울이 싫었고, 1월이 별로였다. 한낱 계절에 취할 생각이야 없었지만 아직 걸려 있는 리스며 트리며 미련 뚝뚝 흘려대는 철 지난 캐럴은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수녀복을 입은 시체는 십자가를 꼭 쥐고 있었다.
목걸이가 아니라, 순은으로 만든 진짜 십자가. 심지어 아직 따스했다. 그걸 발견한 엘리멜렉은 이상한 소리를 내지른 다음 바로 전화기를 들었으나 전화선이 끊겨 있었다.
그는 구시렁거리며 시체를 빤히 바라보았고, 곧 흥미를 잃은 채 아래층을 향해 통보했다. 자기들, 여기 시체 있어.
일 층 거실과 부엌을 어슬렁거리며 커피포트를 찾던 달카가 계단을 쿵쾅쿵쾅 뛰어올랐다. 칸마다 고무를 댄 카펫을 깔아 놓은 계단과, 매우 폭신한 양탄자를 깐 계단참은 그 소리를 약간 줄여주었다. 시끄럽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그때부터 재즈를 틀어 놓았고 샘은 구석 자리에서 아직 싱싱한 행운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냥 모두에게서 등 돌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마구간 대신 차고가 딸린 별장이라는 게 샘이 입에 담은 유일한 정보 값이었다.
“이거 진짜 은인가? 깨물어 볼 텐가?”
달카가 쭈그려 앉은 채 말했다. 그새 짐 더미에서 깨끗한 돋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화장대에 앉아 얼굴에 분을 두들기던 엘리멜렉이, 그쪽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금도 아닌데 왜 깨물어? 자기, 딱 봐도 값지잖아. 하여간에!”
그가 깔깔 웃는 걸 뒤로하고 달카는 시체를 곳곳이 살펴보았다. 사진을 찍어 둔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무거운 짐은 들고 올 새가 없었다. 엘리멜렉의 거대한 짐가방만 해도 뒷좌석을 꽉 채워서, 나머지 둘은 초라한 차림으로 와야만 했다. 샘이 구겨 앉길 자처해서 망정이지 여행 인원수가 하나 줄 뻔했다. 물론, 샘은 엘리멜렉이 자신을 쫓아내려고 그랬다는 걸 알기야 했으나…….
아무튼 카메라가 없어서 달카는 방의 전경을 스케치해 두었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뜯어낸 행운목 잎사귀를 우물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후경직도 안 일어났고, 십자가가 조금 검어졌나? 수녀치고는 비싼 걸 들고 다니는…… 아! 저걸세! 벽에 걸려 있던 거구만. 난로 위에 십자가 모양 자국이 있잖아. 연기가 거기만 안 태운 거지. 그리고…… 어, 근데 왜 수녀가 여기 있나? 엘리멜렉, 자네 지인 사유지라며. 아는 거 없는가?”
“모르지, 누구였는지도 기억 안 나. 그냥 여길 언제든 써도 된댔으니 온 거지. 마침 아름다운 계곡도 보고 싶었고. 미드루프 저 멍청이는 왜 데려온 거야?”
“오오. 또 발견했네. 목덜미에 침이 꽂혀 있어.”
달카는 잔뜩 흥분해서 가늘게 떨리는 손에 장갑을 꼈다. 여기까지 손이 얼어붙어 떨어지는 걸 방지해 준 고마운 사슴 가죽장갑은, 섬세한 일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몇 번의 시도 끝에야 침을 집어낼 수 있었다.
몸에 박혀 있는 침은 빼면서 놀랄 만큼 길었다. 절반 이상이 꿀이나 호박즙 같은 불투명한 노란색 액체를 묻히고 있었다. 슬쩍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무취인가? 무미인지 막 확인해 보려는데 엘리멜렉이 싫은 소리를 했다.
“시체 두 번 치울 일 있어?”
그때 샘이 말했다.
“……뭐, 시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달카가 달아오른 뺨을 빛내며 외쳤다.
“살인일세, 새미!”
“‘새미’?”
샘이 ‘살인’을 이야기할 때와 동일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이건 사건이라고. 전화기가… 이럴 수가. 전화선이 끊어져 있잖아!”
한참 늦은 발견이었다. 엘리멜렉이 덧붙였다.
“벌써 다섯 시야. 우체국 닫았을걸.”
“이런 눈발을 헤치고 갈 수 있다면.”
가볍게 빈정거린 샘이 달카 곁으로 다가왔다. 쭈그려 앉더니, 시체가 신고 있는 공단 구두에 시선을 주었다.
수녀의 소지품이라기에는 역시 너무 비싸 보였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샘이 무심코 말했다.
“지푸라기가 있는데.”
“응? 뭐라고 했나? 지프?”
“지푸라기.”
수녀의 발 근처에 마른 짚 몇 가닥이 떨어져 있었다. 수정 화장을 마친 엘리멜렉은 짐가방에서 꺼낸 유리병과 립스틱을 화장대 위에 따박따박 놓았다.
이중 법률에 제일 능통한 건 그였으나, 미제 사건에 제일 흥미가 없는 것도 그였다. ‘그냥 죽은 사람’ 같은 건 아무런 재미도 돈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샘이 고개를 갸웃하며 흥얼거렸다.
“따뜻해.”
엘리멜렉은 푸른 녹색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놓다가, 멈칫했다. 그들은 이 별장에 들어설 때 아 살겠다, 고 이야기했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낸 건 달카뿐이었고 샘은 차고를 꼼꼼히 구경 중이었다. 멀잖은 과거에 마구간이었던 걸 개조한 것 같다고 하면서.
왜 따뜻했을까. 이 빈집에.
방에서는 건초 냄새까지 났다. 시골이 다 그렇지 여겼으나 이상한 일이다. 이곳 스토브는 목탄을 썼고, 사람이 없었으니 불을 피웠을 리도 만무했다.
달카가 부지깽이를 쥐고 벽난로를 쑤셨다. 그 바람에 재가 일어서 샘은 재채기했다. 그가 말했다.
“……코코아나 마셔야겠군.”
그냥 혼잣말이었는데, 모두가 찬성했다. 이 싸한 곳에서 나가고 싶었을지 모른다.
다시 ‘그래서 뭐 어쩌라고’로 돌아와서.
그들은 손에 디자인이 다른 법랑 컵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샘은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그려진 제일 깊은 컵을 쥐었는데, 그 때문에 음료가 식지 않아서 여전히 입을 못 대고 있었다.
엘리멜렉이 제일 좋은 소파에 앉아 몸을 묻었다. 받침대에 발까지 올리고서야 후, 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곁탁 위에 올려둔 휴미더 상자에서 시가를 고르는 손놀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노곤한 눈빛으로 시가를 문 그가 나이프를 꺼냈다.
달카가 지적했다.
“흉기인가?”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어?”
“마시멜로가 없군. 실망스러운걸.”
달카는 말을 돌렸다. 그는 벽난로 위에 올망졸망 올려둔 액자를 겨누어 보았다.
무슨 조지 2세 시절에나 유행했을 화풍으로 여자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한 명은 지금 엘리멜렉이 앉아 있는 푸른 소파에 웅크린 소녀였고, 한 명은 엄격해 보이는 인상의 하녀로 보였다. 아마 소녀가 자랄 때마다 새로 그린 듯 다섯 점이었고 동일 인물이라면 어린 시절만큼 미인으로 크지는 못한 듯했다.
여기에 살던 사람일 거라고, 달카가 말했다. 엘리멜렉이 대꾸했다.
“하! 전혀. 여기 주인은 유대인 할멈이야. 독신인 데다가 아주 괴팍하지.”
“기억도 안 난다고 하지 않았나.”
샘이 뜨거운 컵을 쥐었다 놓았다가 하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예리한 발언이긴 했다. 달카는 이 대화를 스케치북 다음 장에 기록하고 있었다.
샘은 말라가는 앞 머리카락을 슬슬 만지며 덧붙였다.
“여기 오자고 한 사람이 제일 수상해…….”
“하, 떠넘기려고 하는 사람은 어떻고?”
“자, 자. 다들 진정하게. 범인은 이 안에 없어.”
그러더니 달카는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이 안에 있어’라고 할 걸 그랬다.”
“아무튼 시체가 안 썩는다니 다행인걸.”
“물론, 약간 부패하겠지. 미드루프가 윗방에서 자기로 하지.”
엘리멜렉의 말에 샘이 정색했다.
“악취미 인간…….”
“뭐, 문제 있어?”
“부엌에서 자고 만다.”
사람이 싫다는 건 죽은 사람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둘 중 하나 고르라면 후자긴 하다. 샘은 자기가 한 말을 재고해 보기 시작했다. 일 층에서 저 둘이랑 부대끼는 것보다 윗방이 나을 수도 있었다.
달카가 물었다.
“차고에 뭐 없던가? 아무거나 다 말해 보게.”
“음…….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차가 한 대.”
“뭐?! 차종은?”
“폰티악. 검은색.”
“지랄을 해, 자기.”
엘리멜렉이 가볍게 논평하고서, 잘 그어 놓은 시가 끄트머리에 두 번째 불을 갖다 댔다. 성냥불이 손톱에 닿을 때까지 깊게 들이쉬었다가 손을 흔들어 끄고서는 만족스레 연기를 뿜었다.
샘이 가볍게 코를 쥐었다. 그 바람에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달카는 장갑을 뺀 손으로, 조금 전 발견한 장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에 못생긴 돋보기를 얹은 채여서 눈동자가 엄청나게 작아 보였다. 그가 묻지도 않은 걸 떠들기 시작했다.
“흠. 무슨 진액인가? 독 같지는 않은데. 4인치 정도군. 호박 주스 냄새가 조금 나……. 살해 도구라면…….”
“멍청아. 그런 걸로 누가 죽여? 반 센티 박기도 전에 반격당하겠지.”
“그것도 그래. 하지만 사후에 넣은 거라고 보기엔 이상하지 않나?”
“목적이 있겠지. 재미거나.”
재미로 살인하는 사람은 길가에 천지로 널렸다. 샘은 드물게 엘리멜렉에게 공감한다는 듯한 옅은 표정을 지었다. 달카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얼굴을 짐작하기 힘드니까.
눈은 마음의 창, 그 말을 달카는 믿었다. 탐정의 직관은 주로 눈빛에서 발휘된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멜렉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그는 믿었다. 샘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엘리멜렉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달카는 믿었다.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아직 사람은 안 죽였으니까… 아마도?
“치정이면 딱 내 입맛인데.”
엘리멜렉이 시가를 맛보며 중얼거렸다. 수녀와 살인과 치정이라니. 꽤 군침 도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이 점을 검토해 보는 동안, 샘의 머그가 드디어 식었다. 그가 굳은살 박인 손으로 능숙하게, 뜨거운 법랑을 쥐고 홀짝거렸다. 혀에도 굳은살이 박이면 좋을 텐데. 그럼 맵고 쓴 음식도 그냥 먹을 수 있고.
달카가 다시 라디오를 켰다. 노이즈 사이에 뜨문뜨문 지역 뉴스가 송출됐다.
- 치익… 폭설은 …칙…지속될 전망… 즈즈즉 시 주의가 필요하며, …… 해피 뉴 치직이어!
지랄이군.
샘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부엌에서 자야겠다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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