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과 우화
남궁혁 악몽노가리 기반
괴담과 우화羽化
그가 두려움을 알게 된 것은 강호에 나선 다음이었다. 따라서 아해 시절 뒷간 가는 길 공포라거나, 퀴퀴한 어둑서니 냄새에 관해서 그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떠올려 보자면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치마 밑단을 툭툭 턴 가솔이 문을 밀었다. 기름칠을 아무리 해도 이 고택에서는 드르륵거리는 문소리가 났지만, 평소의 도련님이라면 잘도 쿨쿨 주무실 것이기 때문에, 시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곧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놀라고 말았다. 도련님이 기상해 계셨다.
여름철이라, 엷은 휘장을 내린 침상 안에서 아해는 묵묵히 창을 쏘아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뿌듯한가, 생각하던 시비는 고개를 갸웃하고 다가가서 협탁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먼지가 씐 자리끼를 갈아주는 새 아해가 입을 열었다. 풀 먹이지 않아 부드러운 옷깃이 스치는 스르륵 소리가 났다.
“혹시 내 방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는가?”
아직 바깥은 어둑했다. 여명이 발 딛고 있다고는 하나 이 동향의 방에도 볕이 들지 않는 먼동이었다. 아름다운 격자창에 진 그림자가 쌓인 눈처럼 소복했다. 오늘도 무더운 날일 터였다.
시비는 아직 덜 깨어 깔깔한 목으로 대꾸했다.
“나지 않았습니다, 도련님. 호위가 저리 멀쩡히 서 있는데 암습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라?”
“나쁜 꿈을 꾸었다.”
아해는 말가니 미간도 좁히지 않고 말했다. 시비가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모시를 새로 댄 침구도 정리해 주었다. 뒤늦게 물을 마시며 꼴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해가 말한 바로 나쁜 꿈이란 다음과 같다.
침상 옆에 흐늘흐늘한 그림자 같은 것이 서 있다. 대개 사람의 형태였는데, 갈수록 형체를 잃고 거무스름한 뭉태기 같은 게 되어간다. 그것이 구물거리는 사이 단검을 들고, 문을 박차고 나서면 익숙한 길, 서고까지 간신히 달려 당도해서는 케케묵은 가장 안쪽에 숨어든다. 그러면 휘영한 달빛에 문 앞을 기웃대는 그림자가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비급서를 지키는 수장의 영을 이기지 못하고 터벅터벅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문이 잠겨 있었어. 누군가 농간질을 한 게 분명하다.”
“누가요?”
“그 그림자겠지, 무얼…….”
말을 흐리는 데에서 시비는 두려움을 느꼈다. 평범한 아이와 다르게 ‘무서운 꿈’이라고 하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까워, 시비는 아해를 도로 눕히고 발을 주물러 주었다. 손안에 든 조그만 발은 어느새 조금 커져 있었고 딴딴해져가는 중이었다. 불편하다고 투덜대는 목소리에 시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가 말했다.
“내 투정이 웃긴가?”
“아니오. 귀여워서 그렇습니다.”
“가모 님께는 절대, 절대로 알리면 안 되네.”
“압니다. 물론이지요.”
“무척 걱정하실 테니까.”
하지만 실은 부끄러워서 그렇다는 걸 시비는 알고 있었다. (아니면 뭐, 어른이 어린것에게 으레 가지는 도리 없는 마음이겠지.) 가주님께 반드시 이 일화를 들려주어야지 다짐하면서 시비가 창을 활짝 열었다.
환한 동이 트고 있다.
아해는 멍하니 눈가를 좁힌 채 바깥을 보다가, 눈이 부신 지 손차양을 친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녹음이 참 청정하구나. 풍년이겠다.”
다시 짚자면, 아해가 진정한 두려움을 만난 건 강호 초출 때의 일이다. 그러니 당시의 이야기는 어르신네들이 얼콰하게 취한 연회 때에나 회자하는 주전부리 수작질에 불과하다. 그래도 소청룡은 언젠가 먼동처럼 흐릿한 미래에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보름 뒤, 단검으로 문을 내리찍으니, 안쪽에서 벌컥 열어주었지.
탈각된 용비늘마냥 희끄무레한 빛이, 나를 안아주었었지, 하고.
검이 떨어지는 뗑강 소리에 깬 이후 단 한 번도 그런 꿈은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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