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Septum (중격)

전쟁 부대 철권중의 리더 진과 어딘가 (나쁜 의미로) 나사빠진 용병단 레지스탕스의 리더 화랑. 어설픈 군대전쟁물. 2023년 7월 10일 연성.

그래서, 상황은? 폭음과 함성, 비명 소리가 섞여있는 전장을 바라보던 진의 말에 라스가 한가롭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세력도 크지 않았고 미시마에 개처럼 기면서 권력을 유지하던 쪽이었으니 군대도 오합지졸이었지. 다만 돈만큼은 세금을 횡령해서 비자금으로 축적한 만큼 귀찮게도 용병단을 고용해서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보다시피 거의 마무리 된 상태지. 알리사가 건낸 쌍안경을 받아든 진이 쌍안경으로 전장을 구석구석 살폈다. 과연 라스의 말대로 철권중은 금방이라도 도시로 들어서기 일보직전이었다.

철권중. 본래 미시마 재벌 휘하의 사설 군단으로 헤이하치가 창설한 부대로 그의 아래에 있었으나 전쟁이 가능할 정도의 무력을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며 세상의 숨은 지배자가 되고 싶었던 카즈야가 헤이하치와 골육상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시마와 척을 지고 어머니인 카자마의 성을 쓰고 있던 진이 난입하여 3명이서 싸운 결과. 결국 헤이하치는 사망, 카즈야는 진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인 준의 설득으로 그녀와 함께 세상의 뒷면으로 사라지면서 진이 철권중의 리더가 되었다. 미시마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지만 그 대가는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고 많은 일반인 피해자들도 생겨났다. 그 후 진은 자신의 뜻에 찬동해준 라스, 그의 파트너인 알리사와 함께 미시마에 빌붙어 권력에 취해 살던 자들을 대상으로 속죄이자 더 이상의 권력을 위한 전쟁을 막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계속 하고 있었다.

" 근데 라스, 상대가 용병단을 고용했다는 거 치고는 점령 속도가 너무 빠른데? "

" 고용주가 자신들을 미끼로 삼고 도망치려고 하는걸 알았는데 돈에 목숨을 던질 수 없잖아? "

" 무슨 소리야? "

" 알리사가 도청을 해서 알아냈다. 용병단을 미끼로 삼고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던 모양이야. 물론 우리도 알아낸 걸 그쪽이라고 모를리가 없겠지. 그래서 전장에 한 명도 보이지 않는거야. 아마 도시 안에서 느긋하게 철수 준비라도 하고 있겠지 "

" ...그 용병단 이름은? "

" 레지스탕스. 철권중이 지금같지 않을 때 결성되서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쟁 용병 집단이지. 리더가 꽤나 젊은 걸로 알려져 있어. 아마 진, 너랑 동갑일거다 "

" 레지스탕스... "

" 그래, 아마 알리사가 정보를 가지고 있을거야, 알리사 "

라스가 알리사를 바라보며 말하는 사이 진은 계속해서 쌍안경으로 전장을 살폈다. 그리고 쌍안경의 렌즈가 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색을 포착했다. 사람의 붉은 혈액과는 다른 붉은 빛. 마치 저녁 노을같은 그 색에 진이 쌍안경의 렌즈를 조작했다. 넓게 보던 시야에서 그 붉은 빛을 향해 시야를 좁히자 진의 눈에 자신의 시야와 마주치게 겨눈 스나이퍼 라이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 진! "

라스의 외침과 함께 자신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총탄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느껴지는 통증에 윽, 소리를 내며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까지도 용케 내리지 않은 쌍안경의 시야에 스나이퍼 라이플을 어깨어 걸치며 입에 담배를 문 붉은 머리빛의 남자가 들어왔다. 오른쪽 눈을 안대로 가린 그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진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잠시 멈칫거리더니 씨익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이고는 유유자적하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 진이 쌍안경을 내렸다.

" 아슬아슬하게 빗나가서 다행이야 "

" ...아니, 빗나간게 아니야. 빗맞춘거지 "

라스의 말에 대답하며 손으로 대충 총탄의 스친 곳을 문지른 진이 자신이 본 남자를 떠올렸다.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붉은 머리 빛의 남자. 자신과 전장의 거리는 1KM 정도. 아슬아슬하게 스나이퍼 라이플의 사정거리에 들어온다. 그렇다 치더라도 최대 사정거리에서 목표를 맞추는 저격수는 많지 않다. 특히나 곧 도시가 점령될 상황에 놓인 저격수라면.

" 빗맞췄다고? 이 거리에서? "

" 감이지만... 저격수는 안대를 한 붉은 머리빛의 남자였어 "

" 아, 그럼 빗맞춘게 맞겠군. 그리고 하나 정정하지. 저격수가 아니야. 그가 리더다 "

" 뭐? "

알리사가 내민 태블릿을 받아들자 그곳엔 방금 자신을 빗맞춘 남자의 사진과 신상 정보가 있었다. 진이 빠르게 눈으로 훑는 사이, 라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 이름은 화랑. 각종 총기를 아주 능숙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용병으로 별명은 블러드 탈론. 한국 출신으로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전 세계의 전장에서 활약하는 중이지. 그의 용병단인 레지스탕스는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 배신하지 않는 걸로도 유명해. 반대로 배신하는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복하는 걸로도 유명하지만. 아마 이번 우리들의 목표이자 그들의 고용주는 반죽음 상태로 눈에 잘띄는 곳에 버려져있을걸 "

" ...그 고용주가 날 죽여달라고 했을 가능성은? "

"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확률은 낮겠지 "

과연 그 말대로 철권중의 목표였던 남자는 흠씬 두들겨 맞은 체로 도시 한복판 광장에 묶여있다는 보고를 들은 라스가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남자는 권력을 위해 수많은 전쟁 범죄를 일으킨 죄로 국제 재판소에 서게 될거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늦었지만 그래도 상정 기간 내의 점령 완료에 진은 가만히 태블릿 속 화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이 전장에서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서도 그는 굳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나타나 자신을 빗맞추면서까지 도발 아닌 도발을 강행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진에게 각인 시키려는 듯이. 전쟁광...? 아냐... 전쟁광보다는 강한 자와 싸우기 위해 전장을 돌아다니는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느낌.

" ...라스 "

" 뭐지? 슬슬 우리도 마무리 하고 퇴각 준비를... "

" 레지스탕스를 철권중으로 끌어들었을 때 발생할 손해 같은게 있나? "

" 뭐? "

후아암. 임시 거처의 자기 방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있던 화랑이 크게 하품을 했다. 간만에 꽤나 짭짤한 보수를 받고 전장에 뛰어 들었지만 그 의뢰주의 배신으로 발만 살짝 담그고 전장에서 퇴각해야 했던 탓일까, 복귀하고 난 뒤 화랑은 평상시에도 그랬지만 더 무기력하게 지냈다. 마치 살찐 고양이 마냥 자기 방에서 안대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늘어져 있던 화랑을 보며 쯧쯧 혀를 차고 있는 건 간부인 미겔이었다. 원래라면 그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인 백두산이 몸이라도 움직이라며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 도장으로 끌고 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부재 중이었다.

" 백두산씨가 없다고 너무 늘어져 있는거 아냐? "

" 아아, 간만에 사범님 안계실 때 이런 것도 좀 누려보자고~ 가끔은 이렇게 빈둥거려도 나쁠 게 없잖아? "

" 그냥 빈둥거리는 게 아니니까 그렇겠지. 그나저나 상대가 철권중이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원수를 갚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건만 "

" 원수? 아아, 철권중의 리더 말하는거야? 그러고보니 미겔, 너는 그에게 원한이 있었지. 찬스였는데 아쉽게 됐네 "

화랑의 말에 미겔이 칫, 혀를 찼다. 그런 미겔의 반응에 작게 웃은 화랑이 눈을 깔며 그때 그 전장에서 보았던 철권중의 리더를 생각했다. 전쟁 부대 철권중의 리더라고 하길래 얼마나 험한 얼굴을 한 인간일까 싶었지만 라이플의 조준경으로 본 그는 의외로 깔끔한 얼굴이었다. 마치 땅에서 벌어지는 개미들의 싸움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마리의 고고한 독수리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나. 유명한 전쟁 부대와 싸운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지만 고용주의 배신으로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퇴각하게 된 게 억울했던 화랑은 모두가 퇴각 준비로 분주했을 때 슬그머니 라이플을 들고 전장으로 나왔었다.

처음엔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길 생각은 1도 없었다. 전쟁터까지 나왔는데 그 유명한 철권중 리더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게 너무 짜증나서 얼굴이나 확인하려는 것 뿐이었는데. 족히 1KM는 떨어진 곳에서 쌍안경으로 전장을 보던 그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화랑은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물론 그저 얼굴만 확인할 생각이었기에 조준은 애초부터 빗나가게 잡은 상태였다. 라이플에서 발사된 총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 걸 확인한 화랑이 만족하며 돌아가기 위해 라이플을 거둬 어깨에 걸친 순간 여전히 느껴지는 시선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고 그대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고는 전장을 뒤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 후 화랑이 뭘 하고 왔는지 대충 눈치 챈 백두산의 일갈이 있긴 했었지만.

자,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해볼까나. 화랑이 앉아있던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찰나,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범님인가, 싶어서 폰을 꺼낸 화랑은 이내 번호만 달랑 떠 있는 액정에 눈을 크게 떴다. 용병단을 하고 있는 모두의 폰에는 도청과 추적을 막기 위한 온갖 차단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고 화랑에게 직접적으로 연락을 할 수 있는 건 특정 몇몇 뿐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거는 사람의 이름도 없이 번호만 찍혀있다? 화랑의 머리 속에 본능적으로 철권중의 리더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뛰어난 해커라도 있나, 작게 중얼거린 화랑이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처음 진의 의견에 난색을 표하던 라스는 결국 진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일단 만나나 보라며 알리사를 통해 화랑의 개인 폰을 해킹했다. 레지스탕스의 의뢰 창구를 통해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내용이 내용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현존하는 개인 사병 군대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철권중과 최강의 용병 부대라 불리는 레지스탕스, 두 조직의 리더들의 대면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얄팍한 기계를 통해 처음 들은 레지스탕스 리더의 목소리에 해킹에 대한 불쾌함 보다는 해킹을 하면서까지 자신과 직접 연략을 취한 그 이유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아차린 라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대면을 거부할거라 예상했지만 너무나 쉽게 만날 장소를 묻는 행동에 맥이 풀린 것도 있었지만.

[ ...함정이라는 생각은 안드나? ]

[ 그건 그때고~ 여하튼 장소나 말해 ]

시원할 정도로 빠른 결정에 라스는 결국 접견 장소를 말했다. 외부에 위치가 공개되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장소. 철권중이 타 조직과 접견을 할 때 사용하는 건물의 주소를 말한 라스가 만날 날짜와 시간을 말하려는 순간, 화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3시간 후에 만나자. 그리고 뚝 끊어진 통화에 잠시 폰을 들고 있던 라스는 어이가 없어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화랑은 받지 않았다. 진짜... 제멋대로군. 그리고 3시간이라니, 철권중의 본부와 접견 장소로 정한 그곳까지의 거리는 아무리 빨라야 3시간이었다. 지금부터 준비하고 간다고 해도 4시간은 걸릴테지. 그럼... 지금 레지스탕스가 있는 곳은 접견 장소에서 3시간 이내라는 건가. 생각하던 것도 잠시 라스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멋대로인 레지스탕스의 리더가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 접견이 깨지는 건 막아야 했으니까.

" ...먼저 만나자고 초대해놓고는 몸수색에 절차가 긴 것도 모자라서 손님이 오고나서야 느릿느릿 나타나는 건 대체 어디 나라 예절일까나~? "

접견실의 재떨이가 가득찰 정도로 줄담배를 피던 화랑이 인내심의 한계가 온 듯 마지막 돗대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자리에 일어선 순간 문이 열리면서 라이플의 조준경을 통해 보았던 그 얼굴의 주인공과 처음보는 남자가 함께 들어왔다.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 끌어올리며 답지 않게 기다린 보람은 있어야 할텐데, 라고 중얼거린 화랑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내뱉은 말에 라스가 쓰게 웃었다.

" 날짜와 시간도 듣지 않고 멋대로 통화를 끊은 쪽은 누구지? 더군다나 다시 걸어도 받지도 않았지 "

" 빨리 만나면 만날수록 좋은거 아냐? 이런 건 빨리빨리 해결해야 뒤끝이 안남는거라고. 일단 초대받았으니 내가 먼저 소개하지. 레지스탕스의 리더, 화랑이다 "

" ...철권중의 리더, 카자마 진이다 "

" 철권중의 간부, 라스 알렉산데르손이다 "

" 근데... 혼자인가? "

" 무슨 문제라도 있어? "

순수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표정을 하고는 내뱉은 화랑의 말에 라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리 용병 부대라지만 자신들의 리더를 너무 제멋대로 밖으로 돌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자신들의 리더의 실력을 너무 믿고 있을지도. 그런 라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랑은 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애들 단체로 끌고와서 시끄럽게 할 이유가 없잖아? 무엇보다 애시당초 우리 의뢰 창고를 거치지 않고 내 폰을 해킹해가면서까지 연락을 취한 건 밖으로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의도도 있는거 아냐? 제멋대로 행동한 것 치고는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맞추자 라스는 제 안의 화랑의 이미지를 다시 수정했다. 그래도 리더는 리더라는 건가. 진이 자리에 앉고 라스가 그 뒤에 자리를 잡자 화랑도 자세를 다시 잡았다.

" 자, 그럼 시간 끌지 말고 빨리빨리 진행하자고. 목적이 뭐야? "

" ...레지스탕스의 영입을 원해 "

" ...잠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더 말해주겠어? "

" 철권중으로 레지스탕스가 들어왔으면 한다고 말했어 "

진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하던 화랑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화를 참는건가 싶었던 것도 잠시 화랑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함이 아닌 웃음이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배를 잡고 웃다가 손으로 제 무릎을 치는 그를 둘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을 웃던 화랑이 겨우 진정하고는 후아, 숨을 내뱉었다. 진짜 예상을 깨네, 너. 화랑이 중얼거렸다.

" 그쪽 산하에 들어가면 우리가 얻는 이득은 뭔데? "

" 풍족한 지원과 안전 "

" 그건 우리 레지스탕스를 너무 무시하는 발언 아닌가? 마치 우리가 안전하지 않고 지원도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은데 "

" 그런 의도는 아니였어. 다만 용병 부대 보다는 사병이긴 하지만 굴릴 수 있는 돈도 충분하니 지원도 안전도 용병 부대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지. 무엇보다 그 날, 비록 쌍안경의 렌즈로 마주한 거지만 너의 강함도 확인했어. 그런 네가 리더로 있는 부대라니, 당연히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건 당연한게 아닐까 "

진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화랑이 이내 눈을 감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화랑이 생각에 잠기는 걸 본 진은 차분하게 화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면서도 짧았고 지루하면서도 기대감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화랑이 눈을 떴을 때 진은 보았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한쪽 눈을 잃은 야수가 자신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을. 화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우리 레지스탕스에는 딱 하나의 규칙이 있어. 배신은 용납하지 않는다. 뭐,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그 규칙을 더 악착같이 지키는 건 별거 없어. 우리는 용병 부대다. 여기저기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서 하나의 집단이 되었지. 군대처럼 계급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계급 차이로 인한 질서도 없어. 그럼 그런 집단이 하나의 집단으로 온전히 남아 있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 필요한 건 힘도, 기술도 아냐. 바로 믿음이야.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녀석이 내 목을 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낯선 곳에서도 편하게 있을 수 있으니 질서도 자연스럽게 지켜지지. 그래서 우리는 배신을 용납하지 않아. 그리고 그 배신의 범주에는 조직 일원의 원수를 돕는 것도 포함되지 "

" ...말하고 싶은게 뭐지? "

" 우리 간부 중에 하나가 카자마 진, 너를 원수로 여기고 있거든. 니가 리더가 된 후로 철권중이 좀 변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잖아? "

" ...피해자의 가족인가 "

" 빙고. 오히려 너는 레지스탕스의 표적이야. 그리고 그 표적은 그 녀석이 너에 대한 원한을 지우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겠지 "

" ...그럼 그때 날 저격하지 않고 빗맞춘 이유는 뭐지? "

" 아, 그건 우연이야. 난 너를 몰랐고 그냥 얼굴만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널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지 뭐야. 그리고 레지스탕스가 커지기 전까지는 너희와 적으로 만나는 건 일부로 피해왔고. 이제 어느 정도 규모가 커져서 너희하고도 한판 뜰 정도로는 쉽게 안망하겠구나, 싶어서 이번 의뢰도 받은 거였는데... 재미없게 그 의뢰인이 배반을 때리는 바람에... 여하튼 너의 제안은 거절이야 "

" ...그럼 레지스탕스가 아닌 화랑, 너 한명은 어떻지? "

" 뭐? "

" 레지스탕스의 리더가 아닌 화랑, 너 자신은 어떻냐는거야 "

" ...하... 재미없는 소리. 난 비싼 몸이라고. 이번 제안도 NO다 "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단단히 무장을 한 병사 열댓명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화랑을 포위했다. 그 움직임에 놀란 건 화랑이 아닌 진이었다. 자신은 병사들에게 명령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 라스 "

" 기다려, 진. 네 취향이 아닌 건 알지만 앞에서 대놓고 네가 표적이라고 말하는 집단의 리더를 순순히 보내주는 건 말도 안되지. 미안하지만 내 신병을 구속하겠다, 레지스탕스의 리더 "

라스의 말에 잠시 무표정을 하고 있던 화랑의 표정이 순식간에 미소로 바뀐 순간 그가 움직였다. 이곳을 들어올 때 몸수색을 해 호신용으로 항상 지니고 있던 권총과 나이프는 빼앗겼지만 그건 화랑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랑은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병사들의 급소를 향해 손과 발을 뻗어 가격했다. 화려하면서도 간결한 공격의 끝은 열댓명의 병사들이 바닥에 나자빠져 신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예상했는데 너무 생각대로 되니까 재미가 없네. 시간 벌이도 되지 못했다는 듯 숨 하나 차지 않은 체 화랑이 고개를 돌렸다.

" 난 총기를 잘 다루긴 하지만... 내 취향은 접근전이야. 묻겠는데, 더 있어? 아니면... 그 쪽이 올거야? "

" ...그만, 라스 "

" ...알았다 "

" 쳇, 시시하기는. 여하튼 또 다른 전장에서 보자고 "

" 네가 강한 건 알겠어. 근데 이런 상황을 예측했으면서도 왜 혼자 온거지? "

라스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화랑이 웃으며 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여기가 이상한거지, 난 내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가면서까지 강한 자와 싸우고 싶거든. 그게... 내 삶의 이유다. 뭐, 너희가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그 이유가 나 한명으로는 어떻냐고 제안한 진, 너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야. 너랑 싸우는 건 꽤나 재미있을 것 같거든. 그 말에 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내기라도 해볼까 "

" 내기? "

" 별거 없어. 어느 전장이던 만나서 승패가 결정 나는 순간 각자 원하는걸 받아가는 건 어때? "

" 그건 꽤나 재미있는 내기가 될 것 같네. 우리가 이기면 카자마 진, 너의 목숨이 될 것 같은데... 너는 뭘 가져갈거지? "

" 그쪽이 원하는게 내 목숨이라면 이쪽은 당연히 화랑, 너다 "

" 헤에, 날 가져서 뭐하게?

" 너에게 전쟁과 전장은 어떤 느낌이지? "

" 장난감이 많은 놀이터 "

" ...그 장난감에 네 목숨을 잃어도? "

" ...그게 전쟁이잖아? 남을 죽일 자격이 있는건 살해당할 각오가 된 사람 뿐이라고 우리 사범님이 항상 말씀하셨지. 난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고 내 쾌락만 챙길 생각은 없어. 그리고 선도 넘지 않지 "

" ...그런가.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선은 이미 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

" 그건 과거 이야기야. 사범님을 만나기 전... 아, 잠깐. 내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너한테 줄줄이 하고 있는거야. 정말이지... "

" 나에게 전쟁과 전장은 아이러니하지만 속죄의 수단이다. 철권중을 얻기 위해 그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 속에서 내가 깨달은 건 전쟁과 전장에서 진심으로 웃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거였지. 단 한명만 빼고. 지금 그 사람은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거지만... 화랑, 니가 나타났지. 전쟁과 전장을 장난감이라고 말하는 넌 분명 잘못됐어. 그러니 내가 이기면 너에게서 놀이터를 빼앗겠다 "

" ...나에게서 삶의 이유를 빼앗겠다라... 아, 그거면 확실히 죽이겠다는 말보다 더 무섭긴 하네. 그럼... "

화랑이 성큼성큼 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화랑의 광기 어린 눈과 진의 이성이 서린 눈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화랑이 호승심이 서린 미소를 짓고는 휙 돌아섰다. 그럼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각 잡고 놀아야겠네. 무서운 어른이 오기 전에 말이야. 그럼 다음번 전장에서 보자고, 카자마 진. 그 말을 끝으로 화랑은 손을 흔들며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병사들을 요리조리 피해 방을 나갔다.

" 라스, 내일부터 레지스탕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줘 "

" ...그래 "


  

들어가기 전에 떠 있던 해가 달로 바뀌었다. 그 희미한 달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건물을 나오는 화랑의 발걸음이 참으로 가벼웠다. 새로운 호적수, 새로운 장난감. 신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제 바이크에 수작질을 부리는 걸 막기위해 일부로 접견 장소에서 1KM는 떨어진 곳에 세워놓고 온 화랑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놀랍게도.

" 엑... 사범님... "

" 그래, 화랑아. 산책이 너무 길구나 "

" 아... 아하하, 그, 그게... "

" 미겔이 노발대발하고 있으니까 몇대 맞을 각오는 해두거라. 그리고 돌아가면... "

" 네, 철권중의 리더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말해드릴게요 "

" ...그래 "

" 근데 사범님.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아, 또 추적 어플 까셨어요? 저번 보안 점검 때? "

"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은 안해봤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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