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Lord Protector, From His Esteemed Daughter

2014 베데스다 합작 참여글(디스아너드)/개인적인 날조 있음

칼드윈은 코르보를 가리켜 ‘아타노 경’이라고 불렀다.

서코노스에서 그리스톨의 수도이자 항구인 던월로 거처를 옮기는 동안 이 젊은 군인이 들었던 호칭이라고는 ‘너’, ‘거기’, ‘어이’ 따위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이동하는 배 안에서였을 뿐, 던월에 발을 디디고 나서부터는 대강의 호칭으로조차 불리는 일이 없었다. 배에서 내린 즉시 여행을 마친 이들에게 쏟아진 인사는 ‘그리스톨의 군인이라면 그리스톨의 쇠붙이를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무기 회수는 지체 없이 이어졌다. 그의 손에도 이내 낯선 감촉의 검이 쥐어졌다. 선착장에 서 있던 늙은 관리가 도착한 인원의 머릿수를 세고, 군인들 한 명 한 명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대강 훑은 뒤, 함께 온 다른 일행을 향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코르보에게 이름이나 출신지에 관해 묻지 않았다. 며칠의 적응 끝에 코르보는 외지인으로서 얻게 된 암묵적인 배척이 제 그림자로 못 박혔음을 알았다.

그리스톨 사람들은 외부인을 특별히 박대하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이렇다 할 환대로 낯선 이를 맞아주지도 않았다. 특히 귀족들은 타지에서 온 이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유일한 방법이 험담뿐인 듯이 굴었다. 코르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나직한 수군거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갖 입에서 비어져 나와 멈출 줄을 몰랐다. 황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한 인질 중 하나라는 이야기는 예사로운 것이었다. 유독 말이 없는 젊은 아타노가 사실은 혀를 잘린 벙어리라는 것에서부터 창녀의 뱃속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수치를 모르는 추잡한 소문들이 지독하게 맴돌았다. 그에게만 붙는 특별한 꼬리표라고 하기에는 함께 서코노스를 떠나 온 이들 역시 두세 개씩 가진 것들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어딜 가나 똑같군, 하는 동기들의 빈정거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다.

언젠가 코르보에게 큰 관심을 보인 늙은 신사가 있었다. 잠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왔다던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보초를 서고 있던 코르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흥미로운 눈으로 한참 훑었다. 제법 점잖게 나이를 물었던 것과는 달리 열여덟 살이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노신사의 과장된 몸짓이 놀랍다는 표정과 부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 정도 나이에 던월까지 선발되어 올 정도의 실력이라면 제법 어릴 때 입대를 했겠군, 하고 잠시 수염을 쓰다듬던 그는 곧 그래, 부모가 없으면 혼자 밥을 벌어먹기에도 벅찼을 게야, 라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코르보는 여느 때와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신사가 곧 코르보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 돈 좀 벌어 보고 싶은 생각 없나? 구미가 당길 만한 일을 알고 있네.

별다른 수확 없이 돌아간 노신사가 제안한 거래는 소위 ‘높으신 분들’의 오락거리였음을, 코르보는 다른 군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실력이 괜찮아 보이는 군인 몇 명을 추려서 싸움을 붙인다고 했다. 편을 가르고 돈을 걸면서 즐겁게 구경하는 쪽은 물론 귀족들이었다. 공공연한 비밀처럼 되어버린 일이라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도 알 사람은 다 안다 했다. 한 번 귀족들의 눈에 들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은 돈을 만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승진 역시 일사천리라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을 때, 코르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누군가가 그를 보더니 너 역시 그런 제안을 받지 않았느냐며 낄낄댔다. 젊은 군인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돌렸다. 뒤통수를 찔러 오는 비웃음이 고약했으나 신분을 잊은 광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황실의 군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본래 조용했던 코르보의 성격은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더 불거졌다. 던월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서코노스 출신 군인들은 곧 제국의 심장부에서 흘러넘치는 온갖 종류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즐기는 이렇고 저런 취미들을 그들 역시 몸소 즐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음주나 도박은 이렇다 할 대수로운 것이 못 되었다. 그 이름에 충실한 곳으로 명성이 자자한 ‘쾌락의 집’은 언제나 군인들로 만원이었다. 술 한 잔 마시는 일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코르보에게 자신과 같은 제복을 입었을 뿐인 다른 이들을 이해할 만한 구석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히 동기들이 그와 어울리는 일은 뜸해졌고, 코르보 역시 무리에 섞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서코노스에서 온 젊은 군인은 언제부터인가 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스톨의 봄은 서코노스의 겨울보다 싸늘했다. 코르보가 던월에 발을 들인 지도 이미 6개월 남짓한 시간이 흘러있었다. 열흘 중 이레는 그에게 성벽 외부를 경계하는 임무가 맡겨지곤 했다. 안감을 두껍게 대었던 제복은 다시 얇아졌건만 쌀쌀한 바람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간혹 포경선이 제 몸집만한 고래를 잡아 던월 탑 근처를 지날 때면 진한 고래 기름의 냄새가 주변에 스며들고는 했다. 고향에서 맡아 온 것보다 더 낯설고 거친 향이었다. 죽은 몸을 무기력하게 누이고 있는 고래를 볼 때마다 코르보는 가죽이 벗겨지고 살이 발린 뒤 기름까지 짜일 거대한 짐승의 최후를 생각했다. 숨을 쉬고 있을 뿐, 결국 발 묶인 고래와 같은 자신의 처지 또한 생각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에 눈을 감고도 할 만큼 몸에 익은 황실 경비대의 일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으나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던 황제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게 늘어졌다. 궁을 오가는 귀족들의 시시껄렁한 농담에 기계적으로 웃는 일조차도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회의감은 매순간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밀려들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가 입대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이런 안일하기 짝이 없는 무료한 일상 따위가 아니었다. 앞뒤 살필 겨를 없이 결정했던 입대가 어린 마음의 치기였다 해도 지금의 무기력함보다는 몇 곱절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자존심을 건드렸다. 포경선이 두 번 지나쳤던 그 날도 어쩌면 별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지도 몰랐다. 여자아이 하나가 어디론가 달아나다가 코르보의 앞에서 험한 꼴로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부끄러운 듯 웃어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내 반가운 기색으로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아니, 코르보가 그 소녀에게 무심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처음으로 코르보의 이름을 물었던 여자아이는 그 뒤로 코르보가 근무를 서는 곳마다 종종 얼굴을 비추었다. 더는 넘어지는 일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근엄하기까지 한 몸짓으로 물을 말을 이리저리 생각하는 모습이 퍽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코르보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궁에 자주 모습을 나타낼 정도라면 결코 낮은 신분의 귀족은 아니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매번 여자아이 쪽이 먼저 ‘오늘도 부지런하구려’ 비슷한 이야기로 운을 떼면 코르보 쪽이 답례로 허리를 숙이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렇다 할 대화가 오가는 편은 아니었다. 인사를 나눈 뒤에는 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코르보가 바라보는 쪽을 여자아이도 함께 응시하거나, 점잖게 뒷짐을 진 여자아이의 모습을 코르보 쪽에서 슬쩍 따라 하거나, 그러면서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별말은 없었다.

가끔은 곧 자주가 되고, 자주는 금세 일상이 되었다. 매일 마주치게 된 이 어린 숙녀 덕분에 코르보는 던월에 온 뒤로 잊고 지냈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어디에 사는 아가씨일까, 궁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하는 따위의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주인공이 나타나 인사를 건네는 순간 거짓말처럼 잊어버리는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그가 소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채 짙은 쪽빛 옷을 입은, 늘 한결같은 모습이 전부였다. 앳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묻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기품이 온몸에 서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고약한 장난 따위는 엄두도 못 낼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따금 포경선이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풍겨오는 진한 기름 냄새에 간혹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코르보는 그런 소녀의 곁에서 천천히 웃음을 배웠다.

코르보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만남은 곧 다른 군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눈 밖에 난 코르보를 동기들이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리는 없었다. 그들은 이 훌륭한 트집거리를 기꺼이 물어뜯었다. 코르보의 체면은 물론 그와 어울리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신경 쓰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진짜 여자를 상대할 배짱이 없어서 선택한 것이 저런 꼬맹이라는 둥, 그렇게 좋아하던 군인의 자존심을 여자애한테서 한 수 배우는 모양이라는 둥, 악의적인 의도가 다분한 말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 따위에 오래전 귀를 닫은 코르보는 행여 상대편 쪽에서 이야기를 듣게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이었다. 말은 갈수록 흉측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던 여자아이는 곧 모습을 감추었다. 가시 돋친 말들이 수그러들자 일상은 다시 단조롭기 그지없게 흘러갔다. 매일같이 지나는 포경선, 바람, 그리고 침묵.

인사를 좋아하던 손님의 발길이 끊긴 지 어언 두 주일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포경선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코르보의 귓등에 문득 평소와 다른 기척이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짜맞춘 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발소리가 한데 섞인 채 점차 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코르보는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제 뒤를 돌아보았다. 일전의 그 꼬마 숙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는 이미 그녀와 함께 온 무리에 겹겹이 둘러싸인 다음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코르보를 보며 그의 어린 친구가 전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예의 위엄 있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나, 군도 제국의 통치자이며 그리스톨의 군주이자 티비아, 몰리, 서코노스의 합법적 보호자이신 칼드윈 황제의 정당하고 유일한 적통 재스민 칼드윈은, 내게 허락된 후계의 권한으로써 그대를 호국경으로 임명하는 바요.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드시오, 아타노 경.”

열두 살의 어린 후계자는 젊은 군인을 가리켜 ‘아타노 경’이라고 불렀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