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져야 하는 편지
녹티스를 기다리는 이그니스의 이야기
녹트,
이건 예전의 짧은 메모나 노트를 제외하면 정식으로 쓰는 첫 번째 편지야. 네 손에 전해질 수 없는 편지이기도 하지. 평소였다면 ‘너의 이름으로 시작했을 뿐 개인적인 일기나 다름없는 글’이라고 바로 적었겠지만 오늘은 손이 예전의 감각을 더듬어 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았거든. 요리는 이제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편지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는 탓이기도 해. 네가 그 어떤 모습보다 오래 기억에 간직해 온 나는 분명 양손에 펜과 종이를 쥐고 있을 텐데, 새삼 어색하다는 이유로 낯설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야. 미리 말해 두지만 괜찮아. 특별히 거슬린다거나 성가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어. 국제 정세 보고서를 받을 때마다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던 어떤 왕자님과는 꽤 다르지. 벌써 잔뜩 찌푸린 네 얼굴이 보여서 조금 더 유쾌한 화제를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여전히 종이를 더듬는 펜촉이 무딘 걸 보면 아무래도 노력이 부족한 모양이야.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들을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옮겨 적는 과정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나조차도 망설인 적 없는 일이었어. 이제는 조금 다른 기억을 남길 때가 온 건지도 모르지. 이렇게까지 딱딱한 이야기를 쓸 줄 알았으면 차라리 조금 전의 농담을 더 길게 이었어야 하는 건데, 미안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을 더 쏟아 보도록 할까.
테네브라에에서 맛본 뒤로 네가 호기심과 아쉬움을 담아 말해 준 과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지, 아니면 그렇게도 싫어하는 야채를 어떻게든 먹지 않겠다고 대련에서 죽을 각오로 싸웠던 날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지. 내 보잘것없는 고민을 듣고 나면 네가 어떻게 대꾸할지 생각해 내는 편이 더 쉬울 줄은 몰랐어. 종이에 잉크가 번지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써 볼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생각처럼 느긋하게 기다려 주지를 않아. 벌써 번진 건 아니냐고 핀잔을 줄 일이 걱정이라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 볼까 해. ‘필요 이상으로 새어 나온 잉크 때문에 종이가 볼품없이 구겨지는 일은 없었다’도 나쁘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드디어 이야기의 순서를 정했다’는 쪽이 서로에게 더 반갑겠지. 테네브라에 곳곳에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던 파란 꽃, 기억하고 있어? 내 대답도 비슷할 거야. 다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들판을 뒤덮은 푸른빛 물결이 아니라 네가 설명해 준 대로, 루나프레나 님에게서 받은 수첩을 펼쳐서 보여 준 대로가 전부겠지. 또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딘가 그리운 맛이 감돌던 과자를 생각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질꽃을 써 보자는 걸 왜 그렇게 느지막이 생각해 냈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그저 네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맛을 보여 주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할 뿐이야. 만드는 연습을 몇 번 반복했는지는 묻지 말아 줘.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펜을 내려놓고 있었어. 글라디오가 다녀간 참이야. 종이를 받친 손으로 펜이 멈춘 자리를 짚고 있던 걸 눈치챈 것 같아. 혼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농담 삼아 묻고 나서는 내 쪽을 유심히 살피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였을 텐데, 오늘은 금방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거든.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삼키고 참는 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는 듯해. 괜찮냐고 묻는 말,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말, 위험하다고 나무라는 말, 간혹 그런 말보다 투박하게 앞서는 행동들. 프롬프토라면 이제 웬만한 일로는 풀이 죽지도, 머뭇거리지도, 망설이지도 않아. 웃으면서 대답을 얼버무리는 대신 명확한 의사를 밝히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고. 내가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된 건 이렇다 할 자랑거리가 전혀 못 된다고 해야 할까. 그새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겠지. 이따금 생각하게 돼. 너의 빈자리를 바라보면서도 너의 부재를 되새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네가 없는 곳에서 네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려 온 우리 앞에 그 긴 밤이 돌아오는 순간, 모두를 스쳐간 시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하게 될까. 언제 채워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 자리가 그날의 너에게도 숨을 쉬듯 자연스러울까. 이곳에 차고 넘치도록 쌓인 나날이 그곳의 너에게도 과연 충분할까. 숙부님이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우리의 일은 질문이 아니라 순종이다.”
지금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이어가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어. 물론 편지를 다시 읽어 달라고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누구나 온전히 자기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과 맞닥뜨리기 마련이니까. 너에게 만들어 준 과자들이 그랬고, 이제껏 헤아려 온 날들이 그렇고, 마지막으로 남은 임무가 그렇겠지. 왜 이 편지를 전할 수 없는지 이야기할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나의 작은 위안이라면 너에게는 퍽 섭섭한 일일 테지만, 언젠가 돌아올 너는 거짓말처럼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릴 테니 미리 비긴 셈 치고 싶다는 욕심쯤이야 소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 봤어. 너도 알다시피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건 내 특기가 못 돼.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지. 미처 잇지 못한 부분이 막 떠오른 참이거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간 야채 한 접시를 걸고 너에게 대련을 신청했던 날의 일을 전부 말할 기회가 없었을 거야. 남은 건 서투른 솜씨로 돌린 말머리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너의 아량이겠지. 그날 네가 팬텀 소드를 소환하고 광요의 반지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결코 자발적으로 밝힌 게 아니었어. 먼저 상처를 발견한 쪽이 프롬프토, 추궁한 쪽이 글라디오였다고만 해 둘게. 살짝 스친 상처들뿐이기는 했어도 흔적이 평범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니까. 네가 매우 필사적이었다는 변호도 잊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빈 종이를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아. 까다로운 문제들이 따라오는 건 그다음이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받는 사람의 이름은 이미 밝혔고, 이 글이 편지라는 건 우리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데다, 새삼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들까지 쓰고 난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조금은 혼란스러울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히 적었었지. 이건 네 손에 전해질 수 없는 편지라고.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보면 네가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어. 마치 수신을 깨우고 깊이 잠든 너의 곁을 지키는 내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눈을 뜬 네가 내 이름을 부를 것 같다고 수없이 되뇌던 때 같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사람들이 알던 너는 ‘루시스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적통으로서 모든 자질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말과는 영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왕자를 모시는 일은 성가실 뿐이라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던 건 집안 대대로 내려온 의무 때문이 아니라, 너만큼은 반드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왕으로 만들어 보이겠다는 다짐 때문이었어. 모든 일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흘러서 네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이해했지. 그래서 너에게 내 전부를 쏟겠다는 결심을 다잡았을 때 알게 된 그것만큼은 차마,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지금의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턱을 괴고 먼 곳을 응시하는 너를 볼 때면 나로서는 쫓아갈 수 없는 먼 곳을 배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이따금 받았거든. 이제 그런 걱정을 덜었으니 다행 아니냐고 웃을지도 모르겠네.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지켜봐 온 넌 언제나 악의라고는 없이 해맑았으니까. 진심을 내보이는 일에 서툴렀던 나머지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을 던지거나 대답을 피할 때도 있었지만 늘 다정함을 잃지 않았어. 그런 너의 존재는 인간의 마음만으로 사랑받기에는 너무도 벅찼을 거야. 철부지 왕자로만 여겨졌던 네가 이 세계의 희망을 안고 신들과 성석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그 삶을 불태워서 어둠을 몰아낼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수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너를 기다리겠지. 끝내 전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나처럼. 녹티스 루시스 카일룸이라는 이름이 내 안에서만 소중하게 남기를 바라는 건 분에 넘치는 욕심이라는 걸 알아. 그래도 내가 섬기는 하나뿐인 군주로서 왕국에 남아 주기를 바랐다는 말 정도는 괜찮다고 해 줘. 나 혼자서는 줄 수 없었을 사랑을 온 세상이 너에게 기꺼이 주었고, 눈앞에 펼쳐진 길이 버거움뿐이라 해도 너는 결국 이 여정의 모든 굽이를 돌아 마지막 임무를 완수할 나의 왕이니까.
오늘로 너를 기다린 지 정확히 3601일째야.
머지않아 새벽이 오겠지.
곧 다시 만나자.
너의 충실한 벗,
이그니스
To Lord Protector, From His Esteemed Daughter
2014 베데스다 합작 참여글(디스아너드)/개인적인 날조 있음
홀로 남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생각하다
김신이 떠난 뒤에 왕여는 매일 그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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