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생각하다
김신이 떠난 뒤에 왕여는 매일 그리했다
수없이 전장을 누비며 수천의 목숨을 거두고 번번이 살아 돌아왔던 너는 결국 피를 뒤집어쓴 야차도, 눈물을 모르는 냉혈한도 아니었다. 까마득한 언젠가처럼 힘겹게 무릎을 꿇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는 순간 나는 머지않아 벌어질 일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장렬히 죽는다, 늦은 기별을 받았으나 애통하다 기별하기에는 터져 나올 목소리가 수천 갈래로 찢길 듯이 위태로웠다. 몸을 지탱하던 검이 형체를 잃고 너는 속절없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너를 향해 발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기타 누락자의 다급한 뜀박질이 앞섰다. 눌러쓴 모자에 손을 얹고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길었던 염원을 눈앞에 둔 너에게서는 무엇도 넘치지 않아 서러웠다. 온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젖기 전에 너의 눈이 감긴 탓이었는지도 몰랐다. 떠나는 이의 낯이라 하기에는 찬란했고, 돌아보지 않을 이의 낯이라 하기에는 서글펐다. 너를 알았던 내내 한 번도 본 일 없던 표정이었다. 기타 누락자는 서럽게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날 너와 내가 마지막으로 함께 머무른 하늘 아래에는 단 한 방울의 비도 쏟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승에 속한 자가 아니었으므로 살아 있는 모든 이가 너의 존재를 잊은 뒤에도 너를 지울 수 없었다. 습관처럼 신의 뜻으로 미루고도 싶었으나, 선택을 한 쪽은 어김없이 나일 터였다. 지나온 생을 모두 잊겠다 했던 기백 년 전의 나는 너와의 백팔십 일 남짓한 시간 뒤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더는 없었다. 너의 부재는 기억 속의 시간을 한없이 집어삼키며 커져만 갔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면 나는 눈물이 고이고 맺혀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더듬어 닦아야만 너의 빈자리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기타 누락자는 밥을 뜨다가도 영문 모를 눈물을 흘리며 제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끝방 삼촌의 편에 서겠노라 호언장담했던 너의 조카는 유 회장의 부재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자꾸만 앓아누웠다. 두 사람 중 누구에게도 차마 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 꺼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자기 힘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근원에는 오로지 공백만이 존재할 터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채우는 일이란 달갑지 않다기보다 잔인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내가 지은 죄는 이미 충분히 깊었다.
언젠가 나누었던 너와의 짧은 대화가 이따금 떠올랐다. “저승.” 과장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어조로 나를 부르는 네게 왜, 하는 퉁명스러운 대꾸로 응수했던 때였다. 한 손에는 알 수 없는 약을, 다른 손에는 맥주 한 캔을 든 채 너는 나와 마주한 눈 한 번 깜빡이는 일 없이 말을 이었다.
“여기 오겠다고 탈탈 털었다던 노잣돈, 삼백 년 동안 모은 거라면서. 그럼 너는 그 삼백 년 동안 네 손으로 인도했던 망자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어?”
터무니없는 질문이었다. 너를 앞에 두었던 그 순간만큼은 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짧고 분명하게 답했다.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셀 수도 없는 걸.”
이상하게도 너의 얼굴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뒤이어 네가 뱉은 말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역시 그렇지? 불멸과 불망의 벌을 받는 건 오직 도깨비뿐인 거지? 너희 저승사자들은 망자를 인도하면서 죗값을 치르고, 이승에 꼼짝없이 매인 나는 기억으로 죗값을 치르는 거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망각이 무슨 대단한 특권인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말허리를 자른 네 말은 이러했다.
“언젠가 나를 저승으로 인도한 뒤에도 넌 그렇게 잊겠구나. 다른 망자들을 잊었듯이.”
나로서는 네가 기타 누락자에게 속삭였던 마지막 이야기들을 알 길이 없었다. 첫째로는 너의 낮은 목소리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너와 함께 흩어져 사라진 기타 누락자의 기억 때문이었다. 봄이면 때아닌 성에로 유리창이 차게 갈라지는 일이 잦았으나 겨울에 꽃이 피는 기이한 일만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비가 내리고 눈이 올 때마다 어떤 생각들에 사로잡혀 하염없이 창문을 내다보는 기타 누락자의 모습이 종종 보일 따름이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 세 해가 지난 뒤에도 기타 누락자는 계속해서 도려내진 기억 뒤에 남은 자국을 더듬기만 했다. 무엇을 더 잊거나 무엇을 더 떠올리지도 않고, 네가 끌어안고 간 너의 모든 흔적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채로, 막연한 고통만을 호소했다. 나의 일은 인간의 생 아닌 사에 매달려 있었기에 너의 어린 신부와 어린 조카가 재차 같은 일을 겪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매일같이 전달받는 명부에 네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은지,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치는 망자들 사이로 네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지, 종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난 뒤에야 누릴 수 있는 사치와도 같은 바람.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도 한 번쯤은,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를 더듬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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