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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한 데 모여있어야 어여쁘다.

글 - 김켄켄 / 편집 및 퇴고 - 박마뇨

cancan by 김켄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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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週日)의 말미가 되면 우리 셋은 따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퍽 당연하단 듯 내 집에 모이곤 한다. 나는 이 암묵적 만남에 앞서 짧은 모험을 마무리 짓거나, 대학으로부터 온 논문 검수를 끝내고 홀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한다.

이어 점심이 되기 전까지 서재에 올라가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서, 집필 중인 모험기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벽에 걸린 초코보 시계가 울기 시작하면 현관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굳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이 현관문을 열면, 실상이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잠깐의 외출을 마치고 온 듯이 덤덤하게 인디즈 씨가 서 있다. 이제 슬슬 따갑게 느껴질 법한 한낮의 볕을 가득히 머금은 그의 겉옷을 받아서 들어준다. 그렇게 그가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섬과 함께 초코보 시계의 울음소리가 멎는다.

엡실론 씨가 오는 것은, 해가 수평선으로 넘어가고 머지않아 찾아올 밤을 맞이하기 위한 바람이 불어올 즘이다. 노크 소리가 들려와 문을 열기도 전에 설렘이 가득 담긴 얼굴로 조잘거리면서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서늘한 저녁 내음을 잔뜩 껴안은 품 안에는 자신이 오늘 먹고 싶은 요리의 재료나, 인디즈 씨가 일찍이 부탁한 식재료가 들려 있다

“어서 와요. 엡실론 씨.”

“다녀왔어요?”

“네! 다녀왔어요. 둘 다 잘 지냈죠?”

마중 나온 바람조차 지쳐 잠잠해지고 달이 느지막이 올라오면 우리의 저녁 식사 준비도 완벽하게 마무리된다. 인디즈 씨가 준비한 요리를 각자 하나씩 테이블에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하며 비로소 셋이 함께 있는 일상을 음미한다. 분위기는 매일같이 식사를 함께 해온 사람들 같지만, 어서 자신의 선물을 전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이처럼 이 한 주 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이야기를 허겁지겁 꺼낸다.

소소한 듯, 하지만 다양한 그런 이야기들. 모험가들 사이의 소문이나 사건들, 우연히 주워 담은 누군가의 옛 모험 이야기. 그마저도 말라 없어진다면 나는 최근에 얻게 된, 새로운 연구의 결과를 얘기하고 둘은 오늘의 날씨나 오는 길에 본 광경을 얘기한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식기에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보다 이야기와 웃음이 더욱 많이 테이블 위를 채운다.

그러나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내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처럼 소소함에서 오기에 안락하고 또한 그렇 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귀한 시간은 터무니없게 빨리 끝나버린다. 단순히 아쉬운 마음에서 오는 느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체감할 수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정각을 알리는 초코보 울음 소리가 반복하여 울리면 엡실론 씨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것인지 재차 확인하듯 흘긋거린다. 뒤이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고 나갈 채비를 하며 한마디를 하는 것으로 이 일상적인 시간의 끝을 고한다.

"벌써 시간이 이만큼 되었네요,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어쩐지 서둘러 도망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나와 인디즈 씨는 서로를 볼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한마디씩 꺼내며 그를 말린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저는 서재에서 자면 되니, 엡실론 씨 편하게 자고 가세요.”

“아쉬우니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와 인디즈 씨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게 제안하고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웃는 낯으로 짐을 챙기고 꿋꿋하게 현관문으로 향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조그맣고 소중했던 저녁 식사 시간이 이젠, 흡사 폭풍이 오기 직전 서늘하게 불어닥치는 바람과 같이 느껴졌다. 너희들이 안온함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딱 여기까지가 전부라고 고하듯이. 엡실론 씨가 우리와 함께 하는 밤을 거절하는 방법이나 변명이 하도 다양한지라 이젠 아예 그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며 집을 나설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였었죠?”

“...바깥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니 여기서 자기 불편하다고 했죠.”

“...오늘은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죠?”

“제가 느끼는 선에선 그랬습니다.”

인디즈 씨는 한숨처럼 느껴지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3층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 같았다면 셋이서 서재에 있는 난로 앞에 모여 앉아 별다른 말은 없어도 서로를 느끼면서 각자의 시간을 여유롭게 가졌을 것이다. 그러다 취침 시간이 가까워지면 엡실론 씨는 이제 자러 가야겠다고 말하려는 인디즈 씨를 살짝 앞질러 아까다 못 한 모험 이야기가 있다면 더 들려달라며 보채기 시작했을 것이고, 결국 인디즈 씨는 말을 다 해보지도 못 하고 살짝 졸린 듯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운 얼굴로 엡실론 씨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추억할수록 입 안으로 쓴맛이 돌았다. 이 일상이 가장 따뜻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처음에는 엡실론 씨의 보챔에도 단호하게 자러 가자고 말을 하던 인디즈 씨가 선뜻 한 발짝 물러서기 시작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날은 어쩐 일로 그가 자신이 들고 온 낡은 가방을 집어 들어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가방 안에서 나온 물건은 오래 된 유적의 파편 같은 것이었다. 어떤 날은 감정이 필요한 유물, 어떤 날은 오래 된 고서. 이 행위가 이어지면서 그의 가방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어느샌가 엡실론 씨와 나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조금씩 반영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름 없는 유적을 가든, 손 닿을 수도 없이 먼 우주의 저편을 가든, 차원 너머 다른 세계로 가든, 동행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떼어서 가져오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멈춰버렸지.

마른침과 함께 무심코 흘러나올 뻔한 말을 목 안으로 넘겨버렸다. 이제는 창문 너머로 엡실론 씨가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인디즈 씨의 옆에 서서 그와 내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인디즈 씨의 입가에는 내 입 안만큼이나 씁쓸한 미소가 돌고 있었다.

초코보 시계는 오늘도 어김 없이 운다, 밤이 늦었다고 알리듯이. 그 소리도, 시계의 바늘도 한결같은데 세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 중 하나는 싸늘하게 비어있다.

아, 분명 사랑하는 사람 이 곁에 있는데도 가 이렇게 찰나를 머물고 간 날은 왜 유독 더 적막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좀 더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할수록 손아귀에서 새어 나가는 바람을 움키는 기분이다. 오죽하면 인디즈 씨와 둘이, 혹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비에라 종족의 특성이 아닌가 진지하게 얘기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게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홀로 생각해 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그날 저녁부터였던 것 같다. 나와 인디즈 씨가 사귀게 되었다고 고한 그 날말이다. 한 번 확신이 들기 시작하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의식되었다. 그러고 보 니 엡실론 씨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도 그때를 기점으로 서서히 줄어든 것도 같았지.

밖으로는 어둠이 이미 짙게 깔려 있었다. 엡실론 씨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인디즈 씨는 턱에 걸터앉은 채 창문을 살짝 열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에 그가 삼켜질까 순간 겁이 났다. 그대로 잡아끌어 나의 품에 기대게 하자, 서늘한 피부가 고스란히 닿았다. 이 차가운 몸이 눈처럼 녹아버리지 않을까, 이 사람마저도 그대로 녹아서 흩어지는 것은 아닐까, 나를 두고. 그런 생각이 들어 지그시 내려보다, 그마저 밤에 녹아버릴세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디즈 씨.”

“.....네?”

“저 사람이 그렇게 걱정되나요?”

인디즈 씨를 처음 만난 날이 문득 떠올랐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기울어진 고개를 통해 그의 시선이 엡실론 씨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의 대상이었던 엡실론 씨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디즈 씨 또한 어느샌가 시선을 옮겨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의 창이라 할 수 있는 두 눈이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인디즈 씨였지만. 그가 엡실론 씨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고, 그렇기에 나를 가늠하듯 보고 있다는 것을. 혹시라도 내가 영웅의 명성과 소문에 심취해 엡실론 씨에게 그를 소개해달라고 과하게 조른 것은 아닌지, 천성이 순수해서 모험가를 선하게 보는 엡실론 씨에게 내가 좋지 못 한 언행을 보이지 않을지 걱정하는 시선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엡실론 씨의 부탁으로 가면을 벗고 두 눈을 드러내 나를 바라보았을 때, 이는 더욱 확실해졌다. 어딘가 낡고 지쳐버린 모험가의 두 눈은 공허할지언정, 인간을 꿰뚫어 보는 눈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렇군, 이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자신만큼 닳아버릴까, 혹 악의에 물들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건가?

그는 비록 표면은 혼탁하지만, 그 속은 예리한 눈으로 나를 계속해서 응시하다 내 소개를 듣고서야 경계심을 접은 듯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것이 불쾌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서늘함의 뒤편에서 다정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동안 그가 엡실론 씨나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직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한 인간이 가진 상냥함과 다정함이 악의에 망가져 버리는 슬픔을 알았기에 그는 낯선 타인인 나를 그렇게 경계했던 것이었다. 아, 그런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느끼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짧지 않은 공백기 사이사이, 우리는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나는 인디즈 씨가 자신의 모험에 대해 차분히 얘기해주거나 그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들려주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는 실로 다재다능했지만, 특히 치유술에 있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런 노릇으로 그는 전시(戰時) 상황에서는 최전방을 담당하는 제1부대에서 활약하곤 했다.

그가 사람을 꿰뚫는 눈을 가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경험이 많고 노련한 치유사는 자신이 속한 파티의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짧은 사이에, 전멸이라는 끔찍한 사태를 초래하니까. 인디즈 씨는 언제나 후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움직이는지, 또 적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조언은 나뭇잎의 맥부터 거대한 숲까지 헤아리고 있었으며 그것은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나는 문득,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이 나도 모르는 새에 심장을 가득 채울 만큼 커져버리고 말았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걸 선뜻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내가, 다자연애(多者戀愛, Polyamory)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디즈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내가 속한 사회에서 그것을 용인하는 이는 거의 없었기에 애초에 그에게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

하지만 이성이 그렇다고 말한들, 감정이 그대로 억눌려 사라질 수 있을까? 그 가슴 벅찬 사랑은 시간이 지난다고 하여 퇴색되거나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선명하게 타올랐고 댐이 터져 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엡실론 씨 없이 단둘이 만나게 된 날 그만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나는 아차 싶었지만 인디즈 씨의 표정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한 것인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고, 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그 사이, 그의 얼굴이 느리게 변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당황하는 얼굴, 한 발짝 늦게 깨닫 는 순간 붉어지는 귀 끝, 어색하게 창문 밖으로 향하는 시선, 마지막으로 그의 긴 머리카락이 사르락거리며 흩날릴 때쯤 그의 목마저 평소보다 색이 진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차라리 매몰차고 잔인하게 거절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완전히 단념했을까? 어쩌면 멋쩍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당신이 상냥하기에 나도 모르게 짓궂은 장난을 쳤다고 넘겨버렸을 테지. 하지만, 아, 그 사람은 진실로 상냥한 사람이기에 나의 마음에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저와 사귄다면 당신이 제게 준 마음만큼 돌려받지 못할 겁니다.”

“괜찮아요, 제 마음을 전부 받아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차고 흘러넘쳐서 결국 저에게 닿을 테니까요.”

분명 거절의 의미인데도, 나는 어째선지 선뜻 마음을 접고 싶지 않았었다. 그는 이어서 그 자신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며 이유를 말했지만, 그 이유들은 정말 하나같이 내겐 별것도 아닌 이유였다. 여태껏 만나온 이들에게 들은 말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어서 나는 끈질기게도 괜찮다고 답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게 실례되는 행동인 것을 머리가 알고 있었지만, 그 상처투성이 영웅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는 다른 형태였지만 깊은 상처를 품고 있던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그가 가지고 있던 사랑스러움이 한 꺼풀 더 짙게 느껴졌다. 그는 말과는 다르게 포옹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수락이었다. 그 순간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충만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허전함이 나라는 사람이 참 모순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나의 심장은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다자연애자인 내가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은 바로 엡실론 씨였기 때문이었다.

바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다인(多人)을 사랑한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었고, 연인들이 서로에 대해 알고 상처받거나 질투하지 않고 사랑하길 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추잡한 변명일 뿐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니 내가 내 마음을 접어야 옳다고 생각했다. 인디즈 씨는 엡실론 씨를 몹시 아끼고, 엡실론 씨는 인디즈 씨를 믿고 따르니 오로지 나 한 명만이 감정을 억누른다면 우리 셋의 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도 연인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거듭 되새기며, 우리는 그에게 교제 사실을 얘기했다. 아마 내가 생애에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아니었다 싶다. 나의 연애는 축하받은 적이 없었기에 나는 불안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엡실론 씨는 명랑한 목소리로 우릴 축하해 주었다. 나는 뭔가 맥이 풀리면서도 한결같은 엡실론 씨를 보며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참 터무니없는 녀석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엡실론 씨에게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낯빛이 감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도. 유독 그의 그림자가 짙고 길어 보이는 걸 느꼈어야 했는데도. 나는 인디즈 씨에게 고백하기도 전부터 엡실론 씨에게는 이미 서로의 성향을 터놓고 얘기를 했었는데, 그것만으로 그가 나를 이해하고 이 관계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얄팍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이. 우리가 그를 생각하는 만큼, 그 또한 우릴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결국 오늘처럼, 먼저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를 붙잡으려는 인디즈 씨의 노력에도 이렇게 말하곤 웃어버렸다.

밤이 늦었으니까 오붓한 시간 보내야죠, 둘이서

우리는 그렇게까지 말하며 떠나는 그를 결국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인디즈 씨가 현관에 있는 창가에 기대어 말 없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다. 나는 정말 얼마나 둔했던 것인지. 그가, 언제라도 금방 돌아와 그냥 장난 좀 쳐봤다며 천연덕스럽게 웃어줄 누군가를 좇으며 기다리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저 자그마한 아쉬움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 엡실론 씨는 계속해서 우리를 떠나가고 인디즈 씨는 그 사람이 돌아오길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모습이 반복되니, 이제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제가 느끼기엔-”

당신이 엡실론 씨를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요, 제가 그렇듯이. 인디즈 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걸 긍정이라 받아들였다.

“우리 그러니, 얘기해요.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우린 그런 사이잖아요.”

부드럽게 인디즈 씨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좀 더 끌어당기니 이제는 더 자연스럽게 내게 기대왔다. 그렇지, 우리는 이런 사이다. 좀체 타인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 그가 나에게는 기대어 온다. 그러니 나는 그가 목소리를 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인디즈 씨는 호수 같은 사람이다. 거울같이 매끄러운 표면이 고요하고 잔잔해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럴듯한 변화라곤 없어 보이는 호수 말이다. 하지만 호수는 그 내면의 깊이를 함부로 헤아릴 수도 없고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으며, 그날 날씨나 바람에 따라 물결의 모양이 변한다. 인디즈 씨는 얘기를 하자는 나의 말에도 선뜻 답하지 않고 창문 너머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 짧은 정적이 영겁과 같이 느껴졌다. 그가-

“그가 우리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쓰입니다.”

계속해서 불어오던 바람에 호수의 표면이 일렁거렸다.

“그랬던 거군요.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어요.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엡실론 씨가 우릴 밀어내는 것 같았죠?”

네. 그 짧은 답변에 깊고 탁한 한숨이 묻어 있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아플 정도로 선명 히 느껴졌다. 그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기대니 딱히 미동이 없었지만, 마르고 긴 손가락은 불안함을 보여 주는 듯 간간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그의 손을 감싸 한껏 움켜쥐었다. 상처 많은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이것이 당신이 온전히 감내해야 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이 모든 걸 함께 할 사이임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는 결코 먼저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구태여 캐묻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믿고 의지하는사랑하는 사이니까.

“인디즈 씨, 저도 엡실론 씨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물론 이 마음이 당신이 품고 있는 감정과 다를지도 몰라요.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그가 내 고백에 거절하며 구구절절 대는 이유에서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나처럼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아, 그로 인해 상처 받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또 하나, 그의 성적 지향은 나와 엡실론 씨의 다자 연애와는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 인디즈 씨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나와 똑같지도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형태는 사랑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엡실론 씨를 생각하는 것과 그의 행동에 대해 느끼고 있는 것은 비슷할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믿으니까.

“그가 우리 때문에, 우리로 인해... 상처받지 않길 원합니다... 그가, 기왕이면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건전한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는 사람에게요..”

사랑스러운 사람, 상냥한 사람.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디즈 씨만이 아는, 그렇기에 더욱 염려하고 걱정하며 한때 나를 경계했던 그 감정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알아야, 엡실론 씨가 보이는 이 일련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할 길이 보일 것 같았다

“저도 그래요. 인디즈 씨, 그러니 작은 부탁을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당신과 엡실론 씨 사이에 있었던 시간에 대해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저는 엡실론 씨의 상처도, 당신의 염려도 이해하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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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작업 - 김켄켄
편집 및 퇴고 작업 - 박마뇨

일전에 앤오님이 한국에 온다 하여 몇 개월간 작업 했던 고록…?에 해당 되는 글을 올려봅니다. 퇴고와 글을 출력에 맞게 편집을 할 줄 몰라서 울면서 글러지인에게 찾아가 엎드려 절하며 퇴고 및 편집을 부탁했었내요. 글러지인은 도와주면서 말하길 “나는 너희 셋의 기깔나는 로맨스물이 보고 싶었지, 성소수자의 성장물을 편집하게 될 줄 몰랐어!!!” 하며 저에게 이야기를 하며 편집 할 때 자주 머리카락 뜯겼네요.

이후 내용은 그 둘의 과거 묘사 및 심리 묘사 그리고 두 사람의 입장에서 엡실론을 바라보았을때 어떠했는가?를 위주에 서사가 적혀 있습니다. 또한 고백하는 파트는 웨이파 오너님께서 작업하게 되었기에 중간에 끊기겠네요. 아마 이것은 1부라 칭하는 것이 맞겠죠? 2부는 올라올지 안 올라올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북북) 대충 셋이서 기깔나게 사랑했습니다.

만약에 구매하신다면(……?) 인디즈는 무성애자이지만 본인은 자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답 할 수 있습니다.

향후 언젠가 그림파트도 업로드 된다면 링크 걸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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