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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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안 루츠빌은, 악한 인물은 결코 못 되었다. 친구이자 동료로서 오랜 시간 그를 보아 온 프리드는 이것이 감상 아닌 명제임을 알았다.

분명 알고 있는데도, 로시안의 얼굴을 보는 것이 프리드는 퍽 불쾌했다. 그야, 적군이 패배자를 면회하러 온다면 누구든 기분이 상할 것 아닌가. 심지어 프리드릭 앨런은 아직까지 제국민으로서의 자아가 강했기에 로시안의 얼굴을 보는 게 거리낌이 들었다.

“안녕, 프리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에 닿았는데, 로시안은 이제 머리를 길러 높이 묶고 있었다. 마치 어릴 때처럼.

프리드는 자신이 과거의 행복한 어느 시점을 회상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환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가장 철없고 또 가장 자유롭던 십대의 끝자락에서 누가 떠나고 싶어 할까, 프리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여긴 뭐 하러 왔어?”

잔뜩 날 선 말을 내뱉은 까닭이란 스스로 상념에서 깨우기 위함이었다.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아주 우습게도 로시안은 프리드의 가시 돋친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안함과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정을 두 눈에 넘치게 담고 있었다. 그게 꼭 눈물처럼 보인다만, 분명히 어둠이 빚은 착각이겠다.

로시안의 저 담담한 표정은 프리드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이름도 꼴같잖은 ‘알레이리아 공화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같은 기사단에서 복무할 때 지겹도록 보았다. 복잡한 표정인데, 사실은 체념과도 닮아 있었다.

“아마릴리스 선배가 다녀왔다고 들어서…….”

프리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아마릴리스를 ‘릴리스 선배’라고 지칭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그런 호칭을 썼다간 로시안은 기대해버리고 말 것이다.

로시안이 무슨 생각으로 지하감옥까지 만나러 왔는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느껴졌다. 로시안이 과거에 프리드에게 가졌던 감정은 여전하다는 것. 비록 그 위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따위가 덮였다고 해도 로시안 루츠빌은 프리드릭 앨런을 친구 내지는 곁을 주어도 되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감이 좋은 건 이럴 때마다 곤란하게 작용했다. 프리드는 로시안을 그저 친구로만 인식하기 어려웠다. 그는 명백한 조국의 배신자, 적일 뿐만 아니라 저를 손수 감옥에 처넣은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한참이나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지정된 면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무슨 말이라도 했다면 관계의 진전이든 회복이든, 그도 아니라면 파탄이 나기라도 할 텐데, 둘은 그저 머물러만 있었다. 아, 관계는 진작 깨졌다고 하는 게 옳을까.

프리드가 이 면회 시간에 차라리 명상이나 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할 즈음, 로시안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잘 지내?”

헛소리. 로시안 본인도 목구멍에서 말을 끄집어내는 동안 무수히 느꼈을 만큼 허튼 질문이었다. 잘 지내던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어 놓고 하는 말이라니,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겠다.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여기 왔어?”

그러니 프리드의 이 날카로운 말도, 감정도, 눈빛에 드러나도록 치받는 울분도 모두 당연한 것이었다.

“…… 미안.”

“뭐가 미안한데? 미안하면 여기서 꺼내주기라도 할 거야?”

언제인가, 봄의 색이라 여겼던 프리드의 눈동자에 전과 같은 생동감은 없었다. 소설에나 나오는 극독의 초록, 혹은 힘을 다하고 시든 낙엽 같은 노랑. 감옥에 갇힌 프리드릭 앨런의 안에는 생명 대신 죽음만이 가득했다. 그 들어찬 죽음이 바깥으로 뻗쳐 로시안의 가슴을 찔렀다.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 미안해.”

로시안은 이 변명이 프리드를 향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자꾸만 고개가 내려가서 턱 끝이 가슴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침묵, 침묵, 침묵.

한숨조차 나오지 않아 고요했다. 고요는 겨울밤처럼 새카맸다.

로시안은 이제야 프리드를 찾아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단 생각을 했다. 자신은 아마릴리스 선배처럼 타인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누굴 이끌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미련이 아예 없어 프리드를 조롱할 수도 없었다. 뻔뻔하게 친한 척 굴 용기도 없었다.

애초에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거지? 프리드가 반갑게 맞아주기라도 바랐던가? 아니오. 화를 내고 욕이라도 하길 바랐나? 그것도 아니오. 울며 참회하기라도 바란 건가? 그건 더더욱 아니오.

그냥, 친구라는 이름을 여전히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바랐을 뿐이었다. 이제 와 허황된 망상이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냥, 보고 싶어서 왔는데…….”

로시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프리드가 그 말을 똑똑히 들은 건 차가운 돌벽에 소리가 울려서일 것이다. 로시안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가 아니고.

프리드는 왜인지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이유는 이미 자명했다. 이래서 적이나 범죄자를 인격적으로 속속들이 알 필요 없다고 기사단 선배들이 말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야, 로시안 루츠빌의 말에는 거짓이라곤 한 치도 없는걸.

“너와 나의 인연은 이미 끝난 것 아니었어?”

“나는…….”

“보고 싶다고 해서 막 찾아올 수 있는 관계인가?”

“…….”

“우리 둘이?”

프리드와 로시안은, 그래, 원래도 아주 절친한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로시안은 오히려 한 학년 선배인 로아나 아마릴리스와 더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프리드는 모두와 원만하게 지내는 편인 데다 로시안을 놀려먹는 악취미가 있어 티격태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관계를, 함께 보낸 시간을 모조리 부정당한 것은 슬펐다. 틀어진 감정을 회복하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는데 프리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해졌나 보다. 로시안은 다만, 그 단단함을 성숙해지기 위한 연마라고 느끼지는 못했다.

“제국을 배신하고 나를 배신한 건 너잖아, 로시안.”

이 순간 프리드는 동급생이나 친구가 아닌 제국민이자 알레이리아 기사단의 기사, 사피힐레 일원인 프리드릭 앨런으로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로시안이 가장 두려워했을 배신이라는 말도 스스럼 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로시안은 입술도 달싹거리는 일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프리드의 입장에서도 옳은 말이고, 무엇보다도 친구에게 거짓을 말하고 뒤통수를 친 게 배신자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이상할 정도로 시간이 잘 흐르지 않았다. 출입문 옆의 간수는 도통 면회 시간이 다 지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프리드는 로시안의 풀죽은 얼굴이라면 이젠 질렸다. 적어도 그만 보고 싶었다.

“더 할 말 없어? 로시안 루츠빌.”

말에 실체가 있었다면 조금 전 로시안의 몸 어딘가 꿰뚫렸으리라.

프리드는 기사단원 시절 내내, 지금과 달리 곱게 정제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관할 제국민에게 깨나 환영을 받았다. 로시안은 그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막 정식 기사가 되어 잡일부터 하던 어느 여름에, 길가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노파를 돕다가 근무지에서 이탈할 뻔하고 소대장으로부터 기합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나 다정했는데!

그러나 로시안은 불만을 갖지 않았다. 그야, 자신은 제국민이 아니니까. 그가 사랑한 제국을 무너뜨렸다면 또 몰라.

“…… 친구, 였잖아, 우리.”

로시안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랬지.”

“그래서, 친구였으니까, 보고 싶어서 왔어.”

프리드는 눈을 찌푸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네 손으로 끝낸 관계에 이제 와 미련이 남아?”

고개를 끄덕이고 성대를 쥐어짜 ‘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로시안은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프리드의 눈조차 바라볼 수 없어서 수갑을 찬 손목만 보았다.

이런 때 로시안은 흔히 자기를 미워하면서 기분이 나아지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스스로 박해하는 것으로 설화에 나오는 성인이 된다고 망상하고, 상대가 저를 몰라주어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성인인 척, 가장 추한 자가 되곤 했다. 그게 편했다.

하지만 오늘은 망상에조차 빠지지 못했다.

프리드의 존재는 로시안의 생각을 방해했다. 오랜만이라 느끼는 설렘, 입장 차에서 오는 긴장, 저를 싫어할 거라는 불안, 그래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으리란 희망, 그리고 깨진 희망을 주워 담는 손을 짓밟는 미움. 모든 게 로시안 루츠빌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혹은 까맣게.

시계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벗어날 핑계가 급했다. 로시안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름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친구였다는 사실이, 그 망령에 불과한 지난 시간이 오늘의 너와 나 사이를 보장해 주지는 않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프리드도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만, 그 손에 쥔 건 미련보다는 분노 같아 보였다.

피가 맺히기 직전, 로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란스러웠다.

“다음에, 다시 올게.”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가쁜 숨이 터져 말소리가 엉망이었다.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면서도 프리드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었다.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군.”

로시안은 달아났다. 빠르게 면회실을 빠져나가 바깥의 새파란 하늘을 보았다. 버티기 힘들었다.

“…… 나도 알아.”

스스로 가시밭에 뛰어든 것쯤은, 애써 상기시키지 않아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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