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트 그랜드 오더

삼세체념열반 하리마노쿠니

2024 Fate/GO 드림 합작 이계공상영역 참가작. 아시야 도만 논커플링 드림.


“도만 법사님, 안에 계세요?”

“법사님은 옆 마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가셨어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당신은…. 못 보던 얼굴인데. 같이 다니시던 점사님도 안 보이고.”

“린 점사님이라면 쿄에 남으셨어요. 얼마 전부터 제가 대신 제자로서 일을 돕고 있답니다. 내일이면 법사님께서 돌아오실 테니 그때 다시 찾아와주세요.”

유진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대문을 닫았다. 묵직한 문이 삐걱거리며 서늘한 겨울 공기를 실어왔다. 석양과 두꺼운 구름이 걸린 하늘은 무심하게도 뿌연 빛을 뿜어냈다.

 

“누구였습니까?”

그가 종종걸음으로 목조 가옥의 거실 안으로 들어오자, 발치에서 도만의 나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야 도만은 산 송장처럼 누운 채로 제 주인을 맞이했다. 튼실한 사지는 끊임없이 파르르 떨려오고, 마른 숨을 몰아쉬어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매끄러운 낯짝엔 지극히 평온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이웃집 과부. 예전에 도움을 받아서 사례하고 싶대. 적당히 둘러대고 돌려보냈어.”

유진은 도만의 머리맡에 웅크려 앉았다. 하얀 머리카락 끝에 달린 방울을 손끝으로 두들기며, 제 종복의 말에 가만 귀 기울였다.

“으음, 그렇군요. 살짝 엿들었는데, 거짓말하는 솜씨가 느셨습니다.”

당장 죽어가는 몸뚱이치곤 대답이 술술 돌아온다.

“누구한테 잘 배웠거든. 그보다 독은 좀 들어?”

손톱이 방울을 스칠 때마다 아주 작은 금속음이 울렸다. 도만의 거친 숨소리는 그 소리를 가차 없이 삼키며, 웃음소리를 섞어냈다.

“네에,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5분 뒤에는 제 숨도 끊어지겠군요.”

“이래놓고 돌아올 거잖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여느 특이점처럼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도만은 그대로 눈을 부릅뜬 채,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서번트의 소멸이라기보다 인간의 죽음에 가까웠다. 거대한 몸뚱이는 여느 영핵이 망가진 서번트와는 달랐다. 희미한 빛을 내며 부서지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채 흙으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유진은 마력 패스가 끊기는 감각을 느끼자마자, 손을 뻗어 도만의 눈을 감겨 주었다. 조심스러웠으나 애틋함은 없는 손짓이었다. 그리고 그 손길을 거두지 않은 채, 침실과 이어진 장지문을 노려보았다.

머지않아 얇은 문 너머 부드러운 빛과 함께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력이 모여 사역마를 새로이 부를 때 나는 소리였다. 끊어졌던 것이 불결하게 연결되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돌아왔습니다.”

장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문틈으로는 짐승 같은 손이 보였다. 검게 물든 손끝, 치장 대신 저주가 덕지덕지 붙은 기다란 손톱, 요란한 옷차림. 유진의 발치에 누워 눈감은 것과 똑같은 육식수였다. 그것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방울이 흔들리며 경쾌히 울린다. 경의와 조롱을 담은 미소는 여전했다.

“봐, 이번에도 실패했어.”

“괘념치 마시지요.”

“주제넘게 위로하지마. 창고에서 자루나 챙겨서 마당으로 나와.”

“예, 맡겨만 주시길.”

유진은 양손으로 시신의 머리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 온’ 도만보다 앞서, 예장 부츠를 신고 거실을 나와 뒷마당으로 향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길어진 그림자가 이방인의 발끝에 매달렸다.

 

도만의 고향 집은 검소하되 초라하지 않았다. 그가 생전 일군 영광과 치욕에 적당히 어울리는 살림이었다. 다다미 스무 장을 깔아둔 거실이 하나. 양옆에 딸린 침실이 둘, 손님 방 하나. 유진은 이곳에 처음 온 날 하루 만에 내부 구조를 익혀 제 집안처럼 활보했다. 동쪽 침실을 향해 돌아가면 작은 정원 겸 뒷마당이 나왔다. 본디 둥근 자갈을 깔고 화초를 가꾸었을 테지만, 겨울이 다가온 지금은 묘지나 다름없이 기능하고 있었다.

그는 뒷마당 담장에 기대어 둔 삽을 잡았다. 부츠 끝으로 땅을 두들겨 보고, 아직 얼지 않은 지점을 골라 본다. 어깨와 무릎에 힘을 실어 깊게 한 삽. 다시 살짝 약하게 한 삽. 흙이 패여 나오고 먼지가 일며, 손바닥 골 사이로 끈적한 습기가 느껴졌다. 얕게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만,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고개를 돌리지 않고 넌지시 말을 걸어 본다. 도만은 큼지막한 자루를 질질 끌어왔다. 그곳에 이미 죽은 제 분신을 담아 왔으리라.

“오늘로 이레째 되셨을 겁니다.”

“그럼 내가 너를 몇 번 죽였을까?”

“으음, 지금 발밑에 제 몸뚱이 다섯이 누워 있을 테지요. 이제 여섯이 될 겁니다.”

일곱 밤낮에 여섯 목숨.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숫자. 유진은 이를 헤아리는 제 감각이 무뎌졌음에 스스로 놀랐다. 제 죽음이 끔찍이도 싫은 만큼, 그동안 어느 목숨도 가벼이 여긴 적 없었을 텐데. 그는 삽질을 계속하면서 이 비틀린 굴레의 원류를 가만 떠올려 보았다.

 

이곳은 11세기 초 12월의 특이점, 일본 하리마노쿠니. 요승 아시야 도만이 나고 잠든 고장. 기록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악령좌부(悪霊左府)와 손잡고 권세를 탐낸 그는 쿄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향했다. 그 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끝없이 음모를 꾸미다, 하리마에 찾아온 세이메이에게 처단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특이점에서 아시야 도만은 살아 있었다. 세이메이가 하리마를 떠난 뒤에도 제 고향 집을 지켰다. 성배가 만든 인리의 균열이었다. 그것이 칼데아의 서번트 아시야 도만을 불러들여, 육신을 주고 인리를 비틀어 욕망을 자극했으리라.

유진은 일주일 전 코핀 대신 제 방 침대에서 잠을 청하다 이곳에 당도했다. 잠들기 전 입은 파자마는 칼데아의 예장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칼데아와는 통신이 닿지 않았다. 시모사에서 겪은 것과 얼추 비슷한 상황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제 얄미운 서번트 하나뿐. 그는 제집에서 참선하듯 가부좌를 틀고, 온화한 미소로 주인을 맞이했다.

“마이 마스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승의 몸은 생활속명의 법과 햐쿠도쇼닌의 비술에 묶여 있어 사라질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 손으로 이 영생의 매듭이 끊어질 때까지 몸소 처단해주시죠. 아무래도 인리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지라.”

도만의 설명은 간결했다. 현재 제 몸은 생전 아시야 도만과 서번트인 자신이 융합한─지옥계만다라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것. 사람의 육(肉)으로 서번트이자 짐승인 상태. 아무리 죽여도 원한으로 뭉친 채, 몇 번이고 다시 소환되어 몸을 얻고 태어날 수 있는 것. 이 특이점을 이루는 원흉은 투항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해 왔다. 자신을 오롯이 이 특이점에서 소멸시켜 달라고.

“…일개 인간의 손으로 널 해치라는 거야? 다른 서번트를 찾아서 해결한다면 모를까. 무얼 믿고?”

“소승이 저항하지 않을 테니 마스터의 손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이 몸이라면 인간의 내구도와 다름이 없고요. 이곳에서 억지력이 부른 협력자를 찾으시기보다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질질 끌지 말고, 어서 말해.”

“으으음. 소승은 이곳을 시모사와 같은 시산혈하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곳에서 마스터를 기다렸답니다. 부끄럽게도 잠깐 성배에 이끌렸으나, 이 특이점을 지킬 생각은 추호도 없지요. 이래도 신뢰하시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이성의 신이 거느리던 사도는 한참 전에 칼데아에 패했다. 따라서 지금 유진의 앞에 있는 얼터에고는 이성의 신과 연결이 끊긴, 틀림없이 인리를 위한 도구가 분명했다. 칼데아에 속한 아시야 도만은 대체로 유진의 명령에 순응해 왔다. 때때로 음모를 꾸미거나 저주를 걸었으나, 유진의 신변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약으로 쓸 수 있는 극독이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신뢰를 보내도 상관없는 상대였다.

 

그리하여 유진은 경계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도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로 다음 날부터 무명천으로 도만을 목 졸라 죽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갖은 방법으로 죽이고 파묻길 반복했다. 낮에는 특이점을 수복하기 위한 정보를 찾고, 밤에는 살육에 골몰하는 나날의 연속. 굵은 목을 짓누르고, 영주 두 획으로 자해를 명했다. 칼데아의 현인들이 가르쳐준 방법으로 독을 먹였으며, 날붙이를 들이밀기도 했다. 이 모든 행동을 망설였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필요 없는 전율에 사로잡혀,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다만 목숨을 거두며 도만을 향해 품고 있는 악감정은 애써 외면했다. 그저 미래를 구하기 위해 해할 뿐이라고, 기회를 봐서 분풀이하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자신이 칼데아에 오면서 행한 모든 일이 불가피했으며 정당했으니, 이 또한 허물이 되지 않았다. 인리가 불러낸 영령의 손에 묻을 피가 제 손에 바로 닿을 뿐이었다. 저것은 여러 특이점과 이문대에서 악연을 쌓은 그것과 다르다. 저것은 제 명을 따라야 마땅한 종복이며, 자신이 조력자를 해하며 기뻐하는 게 아니라며 자신했다.

이 암시는 오늘 도만이 자루를 열어 시신을 구덩이에 내던지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애뢰(哀誄)와 축문(祝文)을 올릴까요?”

아시야 도만은 유진과 두 발짝 거리를 두고 섰다. 흙먼지 위에서 나뒹구는 제 분신을, 길가에 나뒹구는 조약돌처럼 바라보았다.

“짐승에게 장례가 필요할까?”

육식수의 주인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죽은 종복의 몸 위로 흙을 퍼 올리며, 내일 산 종복을 죽일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스스로 위안해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엿새간 살육으로 망가진 정신이 몸을 향해 외친다. 저 짐승의 꾀임이 나를 좀먹고 있다. 유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쓸모없는 웃음이 감도는 입가에 힐긋 눈길을 줬다. 저것이 인리에 반기를 들고자 특이점에 둥지를 튼 게 아니리라는 추측까지 생각이 미친다. 오로지 진노하고 침울한 제 낯짝만을 보기 위함이라면.

“애완하시던 짐승이라면 장례를 못 치러주실 것도 없지요.”

자신감이 넘치는, 매끄러운 음성이다. 자신이 사랑과 멸시를 한몸에 받음을 알고 있었다.

“조용히 해.”

유진은 단호한 대답과 함께 팔에 힘을 실어 박차를 가했다. 저것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삽과 발끝에 달린 그림자는 아주 많이 늘어진 채 희미해졌고, 어둠이 어깨 뒤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는 자세를 고쳐잡고 재빨리 남은 흙을 덮었다. 차디찬 땅밑에 부끄러운 야만성을, 차마 누그러뜨릴 수 없는 증오를 숨겨냈다. 그리고 채 굳지 않은 지면에 냅다 삽을 꽂았다. 그것이 곧 묘비였고, 조롱이자 추도였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응. 이만 쉴래. 내일 같이 남쪽 마을로 갈 거야. 서번트 같은 게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달이 얼굴을 드러내기 전, 두 흐릿한 그림자가 도망치듯 뒷마당을 빠져나왔다. 주인은 무기력에 찌든 마음을, 종복은 조롱에 심취해 들뜨려는 영혼을 다잡으려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유진과 도만은 며칠간 몸에 익은 대로 일과를 시작했다. 이웃 주민들은 귀향한 도만을 반기며 너도나도 시주했는데, 이 음식은 전부 유진의 입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햅쌀로 지은 떡과 말린 과일 이 영장의 졸린 뇌를 서서히 일깨운다. 소박하면서도 정성과 존중이 담긴 맛이었다.

“이거, 한 달은 먹을 수 있을 만큼 남아 있었지? 꽤 사랑받았구나.”

“예, 하리마에선 선하게 살았으니까요.”

“그런데도 인류애를 몰랐다고?”

남은 떡을 씹어 삼키며, 유진이 좌탁 맞은 편에 앉은 도만에게 물었다. 담담한 목소리에 지난 며칠 간의 악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으음. 슬슬 나가시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하니.”

일순간 요승의 낯이 일그러졌다가 도로 펴졌다. 굴종으로 힐난을 잘라낸 뒤, 도만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자락이 펄럭이며 미약한 바람을 일으켰다.

 

하리마의 하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구름을 드리웠다. 둘은 살짝 가파른 산을 가로질러 걸어 나갔다. 칼데아와의 통신은 여전히 먹통. 그 솜씨가 고스란히 녹아든 예장만이 문제없이 기능했다. 팔다리에 닿는 냉기는 전혀 괴롭지 않았기에, 유진은 폐부에 들어오는 찬 숨결만으로 겨울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다만 이 특이점에서 유진의 대외적인 신분은 어디까지나 도만의 제자였으니. 도만이 만든 부적이 다른 형상을 제 몸에 씌워, 아마 나뭇가지 사이를 뛰노는 산짐승조차 칼데아 예장 대신 허름한 코소데를 입은 소녀를 보고 있으리라. 그는 아랫것을 자처하는 게 못마땅했으나 불평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에 대처하려면 지금 신분이 참으로 적절했다.

“할머니와도 이렇게 다닌 적 있어?”

유진이 발에 걸리는 돌부리를 걷어차며 물었다. 마안─아마 칼데아와 연을 맺은 떠돌이 검객의 천안(天眼)과 비슷한 것─소유자였던 유진의 조모는 이 시대에도 몸을 의탁한 적 있었다. 이방에서 온 점쟁이로서 궁중의 광대가 되었고, 도만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던가. 스승과 갈라섰다는 소문이 있으나 도만은 이에 대해 함구했다. 비록 요절하여 손녀와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마안 대신 기이한 유산을 둘이나 남겨 주었다. 제 앞날을 찾아 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팔자. 그리고 저 요승을 불러내어 종복으로 삼을 인연을.

“아뇨. 기껏해야 성문 밖에 의뢰를 받아 움직인 게 전부였습니다. 린 점사는 대체로 쿄에 남아 있었죠. 관상은 기가 막히게 잘 보았지만, 남을 해치는 데 재주는 없었답니다. 마스터처럼요.”

“…내가 묻지 않은 것까지 알려주지 마.”

도만은 사과하지 않았다. 빙긋 웃으며 발걸음에 박차를 가할 뿐. 유진은 도만의 뒤통수를, 산바람에 살랑이는 그의 머리 방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산길 위에선 한동안 부드럽게 오가던 말소리는 사라지고, 바람과 짐승이 몸을 숨기는 소리만 맴돌았다.

 

“어라, 거기 도만 법사님이신가요?”

일순간 감돌았던 정적을 낯선 목소리가 갈라냈다. 순박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나무를 하러 왔는지,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에 땔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곧바로 슬쩍 거리를 두었다. 어제처럼 먼저 도만을 죽여놓은 게 아니라면, 현지인과의 대화는 도만에게 맡기는 게 나았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안 그래도 돌아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으음, 무슨 일이시길래?”

“얼마 전부터 십수 년 만에 괴이가 마을로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쳤지요. 마침 마을에 머물던 서역인이랑 무사님이 도술을 부려 간신히 막아내고는 계시지만, 아무래도 법사님께서 와주신다면…”

“서역인?”

도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바로 간결한 설명이 돌아왔다.

“네, 둘 다 신기한 힘을 쓰시더군요. 처음에는 두 분 다 음양사님이신줄 알았습니다. 여행하시던 중이었다는데….”

“당장 안내해주세요. 두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도만이 호응하지 않고, 유진이 말을 불쑥 잘라냈다. 어제 도만의 이웃집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가 분명했다. 수상쩍을 만큼 강한 이들이 남쪽에 찾아와 마을을 지켜준다는 소문. 영웅의 설화라기보다는 떠돌이 서번트일 수도 있는 가능성.

“아, 저 녀석은 쿄에서 데려온 제자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보시다시피 어리고 철이 없는지라. 안 그래도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두 분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도 좋겠지요.”

유진을 의식하지 않던 청년이 그제야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도만은 슬쩍 손을 들어 말을 덧붙였다. 어리고 철없는 제자. 주인에게 덧붙일 만한 말은 아니었으나, 유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좁은 산길 위, 나무꾼이 도만보다 앞장서는 행렬이 만들어졌다. 그는 구불구불한 흙길을 지나가며 도만과 유진을 안내했다.

“기대하고 계십니까? 서번트라면 바로 가계약을 맺으시지요. 오늘부턴 그들 손을 빌려 제 목을 베셔도 좋을 겁니다.”

도만은 앞서는 길잡이에게 들리지 않게, 고개를 돌려 제 뒤에서 걷던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돌아오는 것은 영원한 침묵. 그의 주인은 평소와 달리 어떤 기쁨이나 초조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괜한 오기가 그 낯짝을 꽉 붙들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 나타난 구세주가 서번트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유진은 도만과 단둘이 돌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위업을 낳은 영웅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다시 살의를 발휘하고 달빛 아래 매장해야 했다. 실망한 얼굴로 저것을 기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쪽 마을은 괴이가 습격하던 곳치고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도만이 살던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소박한 집이 늘어섰고, 겨울을 견뎌 봄 파종 시기를 기다리는 논밭이 자리 잡은 것까지 비슷했다. 이따금 장례를 치르는 무리가 여럿 보이는 점에서 비틀린 일상을 짐작할 뿐이었다.

“이쪽 집입니다. 오랫동안 빈집이었는데, 수리하여 그분들을 묵게 했지요. 지금이라면 안에 계실 겁니다.”

나무꾼 청년은 가장 빠른 길로 그들을 안내해 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허름한 집의 대문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겨울 공기 속으로 둔탁한 소리가 흩어졌고, 담장을 넘어 자그마한 앞마당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갓 자리 잡아 생겨났어야 할 생기가 없었다.

“원래 자주 집을 비우십니까?”

요승이 넌지시 물었다. 입으로 뱉은 것은 길잡이에게 향했으나, 검은 눈은 제 주인에게 내리꽂혔다. 언제라도 표정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아뇨, 괴이가 오는 게 아니면 늘 계십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실지도 모르니….”

도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진은 팔을 뻗어 대문을 밀어보았다. 실없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대문. 달음박질하여 장지문을 열어젖히는 손길. 겨울바람이 창문으로 기어들어 와 작은 집을 꿰뚫는 소리.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난장판이 된 채 비어버린 방. 무너진 바닥재와 흠집이 난 벽이 고요히 버티고 있는 곳. 간소한 세간살이만이 놓인 방에는 고약한 난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서진 나무 파편, 찢긴 침구만이 식솔처럼 떡하니 손님을 반겼다.

혈흔이나 무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삼류 마술사의 촉으로도 와닿는 감각이 있다. 지맥을 따라 솟아난 것이 마구 요동치다 소멸한 물결이 뇌리를 스친다. 그리하여 직감은 읽어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닌 것끼리 발악하다 흩어진 것이다. 인리에 부응하려던 것이 미처 호응하지 못한 흔적이다. 때맞춰 못 박듯 천장 대들보 너머로 얇은 종잇장이 날아갔다. 붉고 각지게 오려내어 눈이 달린, 익숙한 사역마 서너 개가 보란 듯이 서서히 몸을 감추어갔다. 아는 이에게만 누가 손을 써두었는지 선포하는 꼴이었다.

“이건…….”

도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난장판에 대한 순수한 탄식 같다가도, 한 사람만 읽어낼 수 있는 조소를 살짝 섞어낸 말이었다.

“법사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러나 먼저 문을 열어젖힌 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요승을 올려다보았을 뿐. 분노의 불길이 잦아들고 남은 잿더미가 두 눈에 담긴 듯했다. 스승께 한 말씀 아뢰는 제자의 탈을 쓰고, 물러나자 못 박는 명령이었다.

 

음양사와 그 제자는 왔던 산을 다시 넘어, 해가 지고 난 뒤에야 종복과 주인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도만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저 멀리 식신을 보내 소환되는 떠돌이 서번트를 없애 놓았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아주 놀랍고도 경악스럽거나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깊은 악감정과 고약한 유희를 새삼 느낄 뿐.

“생각보다 무뎌지셨더군요.”

도만은 유진이 좌탁에서 저녁 식사를 마칠 때에야 말을 걸어왔다. 남은 식량과 오래된 찻잎을 곁들인 만찬이었다.

“실망할 구석이라도 있어야지.”

묵은 차의 텁텁한 맛이 유진의 입가에 감돌았다. 저것이 오늘치 유흥에 기름을 부어볼 참인 듯했다.

“오늘도 소승을 죽이실 겁니까?”

풀빛이 감도는 입술이 비틀리며 웃음을 만들어냈다. 무력한 평정심을 거둘 시간이었다. 다른 나날과 다를 바 없이 죽여보라며 부추긴다. 사람의 마음을 잃고, 체념하여 무의미한 피를 자아내라며 꾀어낸다.

“잠깐…….”

“뜸 들이실 필요 없습니다. 매일 하시던 일이니.”

“…도만, 내가 무얼 할 수 있지?”

순식간에 말라버린 입술이 달싹였다.

“계속해서 짐승처럼 살육을 연습하시지요. 포기하지 않으시는 성정을 발휘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급소를 베거나 두들기시려면 더 요령이 필요하실 겁니다.”

유진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울적하다 못해 수업에 딴청부리는 학생 같은, 내일을 넘기기 어려운 병자의 낯이었다. 그러나 점차 찻잎 찌꺼기처럼 가라앉고 달라붙은 마음이 고요한 파동을 불렀다. 모독적인 해탈이다. 윤회를 끊으려는 열망조차 놓은 채, 두려움을 잊자 피어나는 총기가 있다.

 

“고마워, 도만. 덕분에 답이 보였어.”

한참 정적이 감돌다가 대답이 돌아온다. 바스라지듯 건조하고도 단단한 바위같은 목소리였다.

“별말씀을. 쓸만한 도구가 필요하시다면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남은 영주로 명하나니, 이 특이점에서 고통 없이 나를 소멸시켜 주었으면 해.”

“네?”

되묻는 말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은 손등 위, 단 하나 남은 붉은 낙인이 짧고 밝게 타올라 사라졌다. 유진은 밋밋해진 손을 거둔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 종복이 어느 급소든 노릴 수 있게 꼿꼿하게 서서, 밋밋한 낯짝 위 서서히 웃음을 띄웠다.

“아까 돌아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아주 마음이 꺾이면서 깨달음을 얻었거든. 의외로 널 죽이면서 기쁘지 않더라고. 짐승이 되려던 너랑 다르게 말이야. 짜릿하긴 했는데, 재미를 들이는 소질은 없는 모양이야. 인간이라면 다들 이렇겠지.”

“잠시만, 잠시만. 으으음, 왜……?”

“난 아끼는 도구는 오래 쓰고 싶거든. 사람의 마음을 잃고 싶지도 않고, 네게 어울려주지도 않을 거야. 앞으로는 똑바로 협조해 줘.”

호선이 걸린 선한 눈매가, 불온한 저주가 모인 짐승을 바라보았다. 나찰을 쫓는 인간이 아라한이길 소망하는 눈이다. 저 긴 손톱 끝에 강한 기운이 서림을 목도하고, 저것이 곧 제 몸을 찢어발기리라 기대해 본다. 저항이라도 하는지 육식수의 굵직한 팔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머잖아 영주의 힘에 거역하지 못하고, 도만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해칠 자세를 잡았다.

요승의 매끄러운 눈매는 기이한 표정을 자아냈다. 왼눈으로 괴로운 듯 인상을 쓰고, 오른눈은 예상 밖 호기심에 사로잡혀 이채를 띤다. 반으로 갈린 제 두개골의 상흔과 검고 흰 머리카락처럼. 양면적인 것이 깔끔히 갈라지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그 영혼에 참으로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칼데아에서 봐, 도만.”

“…예. 이따 뵙지요.”

큼지막한 양손이 끝내 제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어 꺾었을지, 가슴팍이나 배를 꿰뚫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속하고도 능숙한 처리였으니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다만 주인은 똑똑히 보았다.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얼빠진 저 얼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유진은 희미한 두통과 함께 칼데아 의무실에서 깨어났다. 몸에 부착된 의학과 마술의 산물, 전자음의 향연으로 보아 제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누운 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작은 탁자가 보였다. 그 위에는 작은 호출 벨과 함께 성배가 놓여 있었다.

의지 없는 성자께. 패배와 체념을 바칩니다.

원망기의 손잡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의무실 형광등 아래에서 선명하게 자태를 뽐냈다. 승자에게 바치는 공물로 손색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성배를 손에 쥐었다. 불온함이라곤 느껴지지 않았기에, 잔물결 같은 승리감에 서서히 도취하였다. 떠돌이 린 점사는 얼굴도 모르는 손녀에게 기구한 팔자만 남긴 게 아니었다. 어쩌면 재미있는 악연과 한 방 먹일 힘을 물려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칼데아의 마스터는 성배를 조명 아래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이윽고 호출 벨을 누르는 대신 원망기를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요란한 금속음이 제 고막을 흠씬 두들겼다.

“무슨 소리지?”

“선배가 깨어나기라도 한 걸까요?”

“마슈, 먼저 가 볼래? 치료용 앰풀을 좀 챙겨갈게.”

자동문 너머 복도에서도 깜짝 놀란 말소리가 여럿 들려오고, 발소리가 뒤따라왔다. 유진은 실실 웃으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칼데아 동료들이 오기 전까지 자는 척이라도 해 볼 참이었다. 어떤 얼터에고를 영기 보관실에 격리하는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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