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 어떤 노력

사랑과 세계 중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은 너무 오래 씹어 과일맛이 다 빠진 껌처럼 재미없는 놀이다. 사랑을 구하면 세계가 망가지고 세계를 구하면 사랑을 잃는다니. 이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는 분명 무언가를 간절히 사랑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멀쩡히 잘 있는 세계를 비틀어 잘게 부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쿠죠 죠타로에게 열일곱의 겨울은 뜨겁고 끈적했다. 4명과 한 마리의 동료, 그리고 후방을 든든히 지원해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흡혈귀로부터 세계를 지켜낸 겨울이었다. 그 과정에 생겨난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사자에 대한 추모는 하되 그들의 죽음에 빠져 허우적거림으로써 그들이 일궈낸 승리를 모욕하진 말아야 했다. 무덤에 몸을 뉘인 그들은 생환자들이 그들은 잊고 스스로의 삶을 당당하게 걸어나갈 것을 바랄테니까. …정말? 정말 열일곱 밖에 안 된 카쿄인 노리아키도 자신의 죽음이 그렇게 빨리 잊히길 바랄까? 그렇게 이전에 죽은 수십, 수백, 수천억의 사람들과 같이,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히고, 소중히 여겼던 자존심이나 개성 따위도 기억되지 못하며, 그저 죽은 자 중 한 명이 되길 바랄까? 열정으로 뜨겁고 욕망으로 끈적했던 겨울을 보낸 쿠죠 죠타로는 아니라고 보았다. 처음으로 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카쿄인을 그리 쉽게 보낼 순 없었다.

우주를 이루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 중 시간은 모든 것을 좌우한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게 만들기도 하며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그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죠타로는 시간과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모아댔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다룬 책이라면 공상과학 소설이라도 상관 없었다. 애초에 스탠드나 파문도 비상식적인 현상이다. 그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줄 수만 있다면 뭐든 잡히는 대로 읽었다. 빛보다 빨리 날아 시간을 되돌린 수퍼맨, 타임머신으로 과거로 돌아간 맥플라이.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죠타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멈추는 것이지, 시간을 되돌리거나 시간을 빨리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속이 썩어 들어가던 죠타로에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더 월드로 시간을 멈춘다고 해서 자신의 시간까지 멈추는 것은 아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곧 시간이 흐른다는 것. 세상의 시간이 멈춘 동시에 자신만의 시간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 또한 멈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그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찢어 글씨 위에 스스로의 이론을 써 나갔다. 홀리가 준비해준 밥도 먹지 않고 틀어박힌 죠타로의 방에선 부욱 책을 찢는 소리와 사각사각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소리, 바스락바스락 종이 더미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만이 들렸다. 때로는 밤에 켜둔 불빛이 낮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고 때로는 낮에 꺼둔 불빛이 밤이 되어도 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론이 완성되었을 때 핏발 선 눈으로 죠타로는 귀신 들린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론만으로는 써먹을 수 없다. 증명을 해야 한다. 검은 옷을 챙겨입은 죠타로는 밤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증명하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어두운 밤에 인적이 드문 곳을 홀로 다니는, 부주의한 인간 하나를 죽인다. 직후 시간을 멈춘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자신만의 시간을 멈추고, 또 그 안에서 움직이는 자신의 시간을 멈추고, 또 반복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무한히 멈춘다. 그에 의해 무한히 쪼개진 시간이 다시 움직이면서 세상의 법칙을 구부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으며 그 영혼이 결국 산 자의 세상에 갇혀 영원히 떠돈다. 죠타로는 자신이 죽인 자의 영혼을 손에 붙잡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스스로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카쿄인이 살아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의 영혼을 이 세상에 가두면 된다. 지금부터 천천히 하면 된다. 비록 원하는 영혼을 지정해 이 세상으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카쿄인의 차례가 올 것이다. 오늘은 50일의 여행이 끝난지 3주째, 세상에는 1만 7942명의 죽은 영혼이 갇혀 있다. 영혼들이 산 자에게 해를 입히기도 하고 비상식적인 일을 일으키는 것이 매일 뉴스에 보도되었지만 죠타로는 외면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카쿄인을 딱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 그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에게 용서를 빌고, 자신의 죄를 고하고 싶었다.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한 순간이라도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웃는 얼굴이 아니어도 되니까, 한 번만 눈을 마주쳐줘…….

쿠죠 죠타로는 죽은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것을 막고, 천국에 있어야 할 영혼을 산 자의 세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지금도 그는 하루에 1만여 명의 영혼을 되돌리고 있으나 하루에 죽는 사람은 16만여 명이다. 카쿄인의 차례는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죠타로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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