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비움 by 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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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소리(@loveblackbadger)님 생일 선물로 쓴 단편입니다.

* 퇴고 없음


[카이, 출근했어?]

[짐 가져다줘서 고마워.]

[화났어? 전화 좀 받아줘.]

스크롤을 계속해서 올려봐도 일방적인 대화의 흔적만 남아있는 메세지 창. 노려본다고 해서 대답없는 상대에게서 답장이 올 리 만무하건만 힐데베르트는 좀처럼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빠르게 회신을 주던 상대는 며칠째 묵묵부답이었다. 텍스트만으로도 느껴지던 다정한 온기가 그리웠다.

카이로스가 화가 났다. 조금씩 커지던 불안이 현실임을 자각했을 때, 왜 이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던지.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에도 용서를 구하면 못 이기는 척 웃어주지 않을까. 못 말리겠다는 듯이 투덜대면서도 늘 그랬듯 옆을 지켜주지 않을까. 그러나, 염치없는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의료동에 머무르는 3일 내내 카이로스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힐데베르트는 우울한 얼굴로 협탁 위에 놓인 게임기를 바라보았다. 카이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게임기도, 세면도구도, 담요도, 갈아입을 옷도.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여주고 가지. 그 날 곁을 지키던 릭이 말하길 카이로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는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다 떠났다고 했다.

서러움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감정이 울컥울컥 목구멍을 뜨겁게 데웠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표출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걱정어린 경고를 무시한 건 저였으니.

[나 오늘 퇴원해.]

기어코 한 마디를 더 덧붙이고는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한 마디 속에 담긴 미련이 못내 한심스러우면서도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문을 열면 카이로스가 와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똑똑.

구질구질하게 늘어지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설마, 진짜로? 힐데는 얼굴 가득 퍼지는 기대감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등지고 있던 몸을 번쩍 일으켰다.

“힐데!”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제 이름을 부르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미였구나. 푸쉬식, 바람이 빠지듯 쪼그라든 기대감 대신 자리잡은 실망감을 빠르게 감추고 반가운 방문객을 맞았다.

아미는 분주하게 환자를 이곳저곳 살피더니, 상태가 꽤 만족스러웠는지 한가득 사온 디저트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회용 포크를 힐데의 손에 쥐어준 그녀는 직접 한 입을 떠먹여주기도 했다.

달콤한 초콜릿 맛이 입안 가득 퍼지자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쾌활한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미와의 대화는 늘 시간이 가는 줄 모를만큼 즐거웠다. 통통 튀는 성격만큼이나 휙휙 바뀌는 대화 주제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대화에 푹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집중이 되질 않았다. 아미는 한발짝 늦게 나오는 대답과 자꾸만 휴대폰을 힐끗대는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저보다 나이는 훨씬 많지만,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후임이 답지않게 머뭇거린다.

“…오늘 잭 보셨습니까?”

“응. 방금 전까지 같이 있다 왔는데.”

묘하게 가라앉아있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진다. 그런 후임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뜬 아미의 얼굴은 어쩐지 제 오빠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싸웠네, 싸웠어.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힐데는 잭과 있을 때 가장 편안해보이고, 잭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힐데가 있는걸. 아끼는 후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꾹꾹 눌러두었던 의혹은 “둘이 사귀어?”라며 넌지시 찔러보았을 때 빙그레 미소짓던 잭을 보며 확신으로 변했다.

잭은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한 눈에 동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하는 잭의 성정답지 않게 그는 힐데와의 잔잔하고 견고한 관계에서 높은 만족감을 얻는 듯 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하며 지켜보았던 아미였지만,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견고해보일수록 작은 균열에도 쉽게 금이 갈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나오지 말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힐데베르트가 긴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카이로스는 7개월만에 깨어난 힐데베르트를 향해 의연하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를 보며 안심하던 것도 잠시, 퇴원 이후 카이는 힐데의 안위에 과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걷는 게 익숙치 않아 휘청이는 힐데를 볼 때면 대번에 표정이 굳어져 달려오는가 하면, 음료수를 마시려 할 때도 잽싸게 가져가 뚜껑을 딴 음료를 내밀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대장이었는데…. 지은 죄가 있으니 하고 싶은 말들을 꾹꾹 눌러담고 있었으나, 기어이 화장실까지 밀고 들어와 씻겨주려 하자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후로도 과잉보호는 계속 되었다. 집안일엔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카이로스 덕분에 지금도 힐데는 바삐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탁.

“자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스튜였다. 얘가 이런 것도 만들 줄 아나. 과거 천방지축 날뛰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매번 놀라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생활력이라곤 없는 녀석이었는데.

제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파편을 엿볼 때마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맛있네.”

스튜는 정말로 맛있었다. 이가 없어도 먹을 수 있을만큼 부드러운 야채와 감칠맛나는 국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하루이틀 한 솜씨가 아닌데. 아마도 저를 기다리는 동안 이 곳에서 지내며 터득한 것이리라.

모든 선택이 괴로웠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렸을 카이로스에게 또다시 기약없는 기다림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맞은 편에 앉아 힐데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카이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연인은 알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훤히 보인다는 걸. 힐데는 어느덧 숟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멈춘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을 맞추자, 상념에 잠겨있던 눈동자에 그제야 빛이 들어온다.

“무슨 생각해?”

“미안. 기껏 차려줬는데….”

쪽. 입술 위로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는다.

“그거 말고.”

“별 거 아니야. 신경쓰지 마.”

쪽. 쪽. 이마, 콧잔등, 볼, 입술. 얼굴 전체에 산발적으로 쏟아지는 버드키스에 힐데가 항복을 표하듯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얼굴을 감싸쥔 두터운 양 손을 겹쳐잡았다.

“미안해. 자꾸만 기다리게 해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올곧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늘 애정을 담아 그를 바라보던 눈에 슬픔과 죄책감이 담긴다.

“나는 자네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순간을 모면하고자 꺼낸 위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카이로스에게 두 번째 기다림은 생각보다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적어도 병상에 누워있는 힐데의 손을 잡고 쓰다듬을 수 있었으니.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기다릴 수 있었다.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눈부신 황금빛 시선이 저를 향했을 때, 두 번째 생을 얻은 것과 같은 벅찬 행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미워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게. 그거면 돼.”


그렇게 약속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병원 신세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일 년 이상의 휴직을 권했으나,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지가 멀쩡한데 환자 취급을 받는 것만큼이나 답답한 일이 어디있단 말인가. 병문안을 오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해댔더니 드디어 복귀 허락이 떨어졌다.

카이는 영 탐탁지 않아했지만 당분간 힐데에게 떨어지는 임무는 전부 소규모 지역의 순찰 임무 뿐이었기에 수월하게 설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재활운동이나 다를 바 없을만큼 설렁설렁 걷다가 퇴근하는 나날이 반복되다보니 방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힐데베르트!”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나서지 말라는 선임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급소를 노리며 쇄도하는 공격을 향해 몸을 날린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부상은 조금 긁힌 수준에 불과했으나 나약한 몸뚱아리는 기어이 3일간 입원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당장 퇴원해도 되는데. 3일 내내 새뮤얼에게 최선을 다해 건강한 몸 상태를 어필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설득에 성공해 조금 더 빨리 퇴원했다면 카이의 화도 조금 더 빨리 가라앉았을까.

꼬리를 무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털어내며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힐데는 협탁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카이로부터 답장은 결국 오지 않았다. 하루종일 무료하게 누워있는 동안, 연인의 화를 풀어줄 방법을 수십가지는 생각해보았으니 퇴원하는대로 하나씩 실천해 볼 생각이었다.

끙. 모든 짐을 챙긴 힐데가 제 몸만한 가방을 집어들고 병실을 나섰다.

“…어?”

문 앞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적발과 아름답게 빛나는 주홍빛 눈동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으나 막상 눈 앞에 닥치니 온 몸이 얼어붙었다.

카이로스는 연신 입맛 뻥긋거리는 힐데를 향해 싱긋 미소짓고는 그의 손에 들린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붙잡고 걸으라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카이를 보고 있으니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다행이다, 라는 생각. 여기까지 데리러 올 정도면 그만한 애정은 남아있는 것이리라. 깊은 안도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 진짜 얘 없이 못 사나봐.

“화난 거 아니었어?”

“그랬지.”

“그런데 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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