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샘플 05

NCT127 도재

신데렐라 上

18:03 [야 다 모여 쏜다]

[뭔일] 18:04

[오 뭔데 뭔데?] 18:04

18:05 [나 승진했음]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 마블링이 죽여준다는 김가네 돼지고깃집에 모여 앉았다. 도영은 집게를 들고 고기를 뒤집을 타이밍을 보고 있다, 옆구리까지 색이 올라오는 순간 바로 뒤집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기 굽는 데에 열중인 그의 손에서 유타가 집게를 앗아갔다.

"주인공은 드시기나 하시고~"

"아 뭐래. 고기 이상하게 구울까 봐 내가 굽는 거잖아."

"오빠만 믿어."

"웃기네."

유타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그저 픽 웃고 만 도영은 겨우 쌈 하나 싸 먹을 수 있었다. 서로 놀리기 바쁜 것 같아도 역시 챙겨주고 위하는 것도 서로뿐이라는 생각에 문득 마음이 뿌듯해진다.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할 때도 번갈아 제게 고기 하나라도 먹이려던 사람들이다. 자소서 한 줄 더 쓰려 머리를 쥐어짜는 제게 이미 번듯한 회사에 들어간 태일이 봐주기도 했다.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괜스레 텐션이 올라간 도영이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일 출근 어쩌려고, 하는 걱정의 소리가 나오면서도 신나게 술판이 벌어졌다. 도영은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잠시 바랐다.

 

어제 내가 미쳤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출근길에 나섰다. 대리로 승진한 지 하루 만에 지각해서 책잡히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안전하게 도착한 도영은 어제의 업무에 이어 오늘 할 일을 쭉 살펴보았다. 역시 그저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하니 할 것이 더 늘었다. 일개 사원은 몰라도 될 것을 이제 도영이 책임지고 해나갈 것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인수인계하고 다른 팀으로 간다던 박 대리를 떠올려본다. 홀가분해 보이던 표정이 생각이 났다. 우리 팀 일이 특히 많기는 하지.

"모닝커피 한 잔씩 하세요~"

얼마 전 입사한 신입이 싹싹하게도 아메리카노를 돌렸다. 다들 고맙다고 받아들었다. 도영도 웃으며 받았지만 마시지는 못하고 내려두었다. 술을 들이부은 빈속에 쓴 카페인을 넣었다간 위가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도영은 점심때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업무에 집중했다.

 

지금은 이직했지만 이전에 도영의 사수이자 대리 직급이었던 상사를 떠올려본다. 그녀는 승진에도 욕심이 있었고,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능력도 충분했다. 그렇기에 더 좋은 조건의 회사로 이직을 했겠지만. 도영은 그녀의 업무가 얼만큼인지 몰랐기에, 내심 할만한가 생각했던 때를 돌아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분이 대단했던 거구나. 후배들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지 않고 어떻게 다 처리하셨대. 하지만 도영도 그런 상사가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나 대리만이 알 업무를 적당히 설명하고 사원에게 떠넘기는 그런 한심한 직장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서른이니 승진할 때가 되어서 됐다고도 하지만 그런데도 승진의 기회는 어느 정도 능력과 자질이 있으니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냥 나이가 됐으니 얘 대리시켜줘라, 그런 회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나이가 오십이 되어도 임원직에 못 다다라 정리당하는 세상이다. 도영은 어제만 해도 식사를 하고 1층 테라스 카페에서 오손도손 커피를 나눠 마시며 점심시간을 꽉 채워 쓰던 자신을 떠올렸다. 오늘 야근을 하지 않으려면 점심시간도 쪼개어 일해야 했다. 한숨을 푹 쉬며 도영은 점심시간도 자진 반납을 했다. 이거 승진했다고 마냥 좋은 건 또 아니었네. 월급이 올라간 만큼 일도 늘어났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2주가 흘렀다. 이제는 김 대리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해졌다. 팀장님께 결제받으러 갔다가 깨지는 일도 퍽 익숙해졌다. 도영은 승진한 것이 마냥 또 즐겁지는 않음을, 본인의 야무진 부분이 참 거슬리는 성질이라는 것을 2주 상간에 깨닫게 되었다. 적당적당히 넘어갔으면 몸은 편했을 것도 있었다. 매사에 꼼꼼하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했다. 도영은 오늘만큼은 칼퇴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다.

시계는 어찌 그리 더디게 달리는지. 6시에 긴 바늘이 닿는 순간 도영은 책상 정리를 했다. 주위에선 김 대리가 웬일로 칼퇴근을 하느냐는 눈빛을 보내었다. 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퇴근해보겠습니다! 크게 외치고는 나섰다. 그래도 평소 야근까지 마다하지 않고 일해온 성실함 덕인지 팀장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도영은 일찍 퇴근한 만큼 약간의 힐링할 요소가 필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간단히 서치를 해보니 회사 인근 카페의 차 종류가 그렇게 맛있다는 글을 발견했다. 도영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는 원목으로 된 외벽에 아기자기한 화분들로 꾸며져 있었다. 돌출형 간판은 '휴'라고 적혀 있었다. 궁서체로 적힌 글씨는 하얀빛을 뿜었다. 작아 보이지만 아늑해 보이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문 위에 달린 물고기 모양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동시에 카운터 쪽에서 어서 오세요~ 부드러운 저음이 들렸다. 도영의 피로에 지친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뭐야. 저렇게 잘생긴 사장이……. 알반가? 아무튼. 예쁘게 생겼다. 흑발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이마를 덮고 있었다. 남자는 눈 밑의 애교살이 볼록해질 만큼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도영은 그 애교살을 찔러보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갈색의 에이프런을 두른 남자는 포스기 앞에서 도영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린 도영은 대충 메뉴를 훑고는 미리 봐둔 귤 차를 골랐다.

"따뜻한 거로 드릴까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어…. 따뜻한거요. 아, 먹고 갈게요."

"네엥. 쿠폰 드릴까요?"

"네네. 주세요."

"다 되면 가져다드릴게요~"

말할 때마다 약간 이응 발음으로 끝나는 것이 퍽 귀엽다. 김도영 머리에 힘줘라. 이러다 번호라도 받을 것 같은 위기를 겨우 넘기고 돌아선 도영은 손목의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얹어두었다. 뒤이어 검은 정장 재킷을 벗어 반으로 접어 의자에 걸쳐두었다. 자리에 앉아 카운터 바로 뒤에 놓인 작업대에서 움직이는 재현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뒤통수가 동그랗고 퐁실해보인다. 좀 쓰다듬고 싶게 생겼네. 도영은 퍼뜩 고개를 휘휘 젓고는 휴대폰을 들어 이것저것 들어가 본다. 실시간 검색어를 훑다, 유튜브 홈 피드를 훑다 보니 시야에 쟁반이 보여 고개를 들었다. 나무색 플라스틱 쟁반 위에 흰 머그잔에 차가 담겨 있다. 테두리에 조그마한 귤 말린 것이 꽂혀있는 게 귀여웠다.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귤 차 옆에는 주문하지 않은 쿠키가 작은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어, 이거는 주문 안 했는데요."

"서비스에요."

남자는 입을 벌리지 않은 채 씩 미소를 지었다. 양 볼에 볼우물이 깊게 팼다. 도영은 그림자가 지는 볼 언저리를 바라보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다. 약간 만화 속 남자주인공 같은 요소를 다 갖춘 듯한 사람이다. 차는 향긋하고 달콤했다. 힐링을 바라던 마음이 이루어지다 못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도영은 드물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차를 음미했다.

 

그 뒤로 도영은 퇴근길에 카페를 종종 들렀다. 그사이 많은 것을 알았다. 남자가 사장이며, 점심때나 퇴근 시간대를 제외하면 그렇게 손님이 많지 않아 주말에 일해주는 아르바이트생 한 명만을 고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름은 정재현이며, 나이는 스물아홉이라 딱 한 살 어리댔다. 도영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형이라고 불러, 얘기했다. 재현은 방긋―정말이지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릴법한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웃으며 혀엉, 불렀다. 도영은 본인이 이렇게나 얼굴에 홀리는 금사빠였는지 과거를 곱씹으며 때아닌 자기반성에 빠져들었었다.

“형은 그럼 요 앞에 저기 회사에서 일해요?”

저기, 라는 말을 하며 재현은 카페가 위치한 맞은편 건물을 가리켰다. 정답이었다. 도영은 꼭 자기 자랑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재현이 물은 김에 대답해주었다.

“어. 대리 단 지 얼마 안 됐어. 마케팅팀이라 그런지 일도 많고. 일개 사원에서 직급 달아보니 일이 어마어마하더라고.”

도영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멋쩍게 웃었다. 재현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꼭 도영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는 형, 파이팅. 말하며 양손으로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도영은 약간 순정만화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형, 나 마감하면 우리 영화 보러 가요.”

재현의 해맑은 얼굴에 대고 나 내일 출근해야 해서 심야 영화 보러 가기 몹시 힘들 것 같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목구멍 뒤로 삼켜내었다. 도영은 상영 시간표를 뒤지며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데이트를 했던 때가 언제인지 곱씹어보았다. 대학생 때의 풋풋한 만남을 뒤로하고, 입사 후에는 직장인을 상대로 만났기에 일에 치여 금세 헤어지기 일쑤였다. 상대가 도영을 기다리다 지쳐서, 혹은 도영이 기다리다 지쳐서. 도영은 재현의 마음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쯤은 예측할 수 있었다. 종종 저를 보며 보조개가 깊이 패게 웃는 재현의 모습들이나, 운전하고 있으면 느껴지는 시선들이 그러했다. 관심이 없으면 그렇게 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런 썸타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인 것이었다. 도영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일에 치여 팍팍하게 지내던 하루에 서로를 알아가고 작은 것에 설레하는 감정을 느끼니 꼭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전날 본 영화는 지루한 로맨스 코미디였다. 심야에 하는 영화라곤 흥행하는 액션 영화나 한물간 공포 영화 따위가 전부였다. 나름 썸탄다고 생각하는 상대와의 시간에 상업적인 액션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또 도영은 공포 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재현에게 연신 흠칫 놀라는 그런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어쩐지 재현이는 잘 볼 것만 같아서.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것이 로맨스 코미디였는데, 뻔하디뻔한 소재였다. 대학 때부터 만나던 연인이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며 현실에 부딪혀 위기를 겪는다. 서로 반쯤 헤어진 상황에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러고 나니 역시 서로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만나게 되며 마무리되는 그저 그런 스토리였다. 영화의 줄거리야 어쨌건 도영은 영화에 집중한 재현의 톡 튀어나온 오리 입술이라거나, 길게 뻗은 속눈썹 따위를 감상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재현이 자연스럽게 제 손을 가져가 만지작거리던 것도. 도영은 힐링을 위해 갔던 카페에서 사랑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재현과 자신의 상황도 저 유치한 영화 못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재현을 만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도영은 여덟 시쯤 일을 마무리하고 어김없이 재현이 있을 카페로 가린 걸음을 옮겼다. 재현은 카페에 늘 있기 때문에 저녁도 대충 때우기에 십상이었다. 가게에 판매하는 케이크나 쿠키를 집어 먹거나, 미리 집에서 마련해 온 도시락, 가끔은 바로 옆 편의점에서 후다닥 사 들고 온 삼각김밥 정도가 전부였다. 도영은 회사 인근에 괜찮은 샌드위치 집을 떠올렸다. 커피와 한 세트를 사들고는 카페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초록 불로 바뀌길 기다렸다.

저만치 카페 앞에 검은 아우디 한 대가 정차했다. 도영은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창가 쪽 테이블을 정리하던 재현이 후다닥 밖으로 나온다. 그때부터 도영이 집중해서 맞은편 장면을 쳐다보았다. 뭔데, 재현이가 저렇게 서둘러 나오지? 차 안에는 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현의 표정이 드물게 밝았다. 도영은 재현이가 손님을 상대할 때 웃는 얼굴과 수줍게 저를 바라보는 웃음이 조금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매사에 친절한 재현이지만 역시 자신을 볼 때는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지곤 했다. 그런데, 도영에게만 보이던 미소가 재현의 얼굴에 걸려있다. 도영은 잠시 온갖 타당한 이유를 떠올려본다. 가족인가? 형제라거나. 그런데 보통 형제한테 저렇게 안 웃어주지 않나? 대체 누구지. 마침 신호등 불빛이 바뀌자 도영이 서둘러 건넌다.

“재현아!”

“어. 형아.”

반가운 듯 부르는 목소리에 한결 안심되었다.

“이거. 너 또 저녁 대충 먹었을 거 아냐.”

“헉. 이게 뭐야아. 아, 형 정말 고마워...”

재현은 예쁘게 포장된 샌드위치 쇼핑백을 품에 안다시피 받아들고는 배시시 웃었다. 도영은 재현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아까 그. 아우디는 누구야?”

“응? 아…. 그냥. 아는 사람.”

“아는 사람? 친구야?”

“웅. 형, 이거 진짜 대박 맛있겠다. 나눠 먹자, 우리.”

재현이 포장지를 뜯으며 들떠 하는 모습에 도영은 더 묻지 못했다. 신경 쓰여. 신경은 쓰이는데 그런다고 갑작스럽게, 멋없이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영은 재현에게 물 한잔 건네주며 너 다 먹어, 말했다. 재현은 행복한 표정을 하며 진짜? 되물으며 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입 가득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양 볼 가득 음식물을 물고는 눈을 접어 웃으며 맛있어하는 모습에 도영이 다 뿌듯했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엄지로 닦아내어 주고, 그러다 눈이 마주쳐 히히 웃음을 짓고. 도영은 이러한 시간이 그래도 직장 스트레스를 견디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도영은 재현이 적당히 대답을 넘어간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심야 데이트를 어떻게 보낼지 이것저것 루트를 짜보고 있었다. 새로 개업했다던 펍에 가볼까? 그 사이 손님이 들어와 재현은 얼른 물을 마셔 음식물을 삼켜내고는 주문을 받았다. 카운터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도영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재현이 일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조금 거들어주었다. 끽해봐야 컵홀더를 미리 끼워주거나, 빨대 포장을 뜯어 꽂아주는 정도였지만, 재현은 그것도 고맙게 느꼈다.

 

재현은 생긴 것도 그렇게 보이기는 했지만 알고 보면 더욱더 로맨티스트였다. 도영이 그것을 느낀 것은 최근의 일이었는데, 항상 자신이 주문하는 음료에는 홀더에 꼬박꼬박 형 거♥라고 적어놓고는 했다. 그러고는 홀더는 버리지 말라며 애교를 부리고는 했다. 사실 도영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재현의 글씨체가 오롯이 녹아든 홀더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다. 물론 재현이 그 얘기를 듣고는 진짜 안 버렸냐며 놀렸지만. 도영은 재현의 귀 끝이 붉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도영은 재현의 은근한 애정 표현이 점점 더 귀엽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사랑이었다.

“형. 형 요즘 일은 어때?”

“뭐. 처음 했을 때보다는 일이 줄긴 했지. 팀장이 잔소리만 안 하면 더 좋겠다.”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재현에게 속을 털어놓고 나면 다음 날이 수월했다. 그날도 팀장 험담을 조금, 솔직한 심정으로는 쌍욕도 하고 싶었지만 그런 못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자제한 말을 털어내고 나니 팀장이 한풀 꺾인 채 나타났다. 보나 마나 또 차였거나, 다퉜거나. 팀장은 감정 기복이 심했는데, 연애할 때는 대놓고 티가 나서 팀원들은 다 아는 눈치였다. 저거 또 싸우고 화풀이네, 오늘은 좀 좋은 일 있나 보지, 기념일인가? 직원들이 알 정도니 말 다 했다. 여하간 도영은 재현과의 시간이 날로 즐거워졌다.

물론 종종 다툴 때도 있었다. 도영이 다른 직원과 다정하게 퇴근하며 카페 앞에서 헤어지는 모습을 본 재현이 투정을 부렸고, 도영이 애처럼 굴지 말라는 말에 기분이 상해서 도영을 내쫓았다. 도영은 마감 때까지 근처 다른 곳에서 재현을 기다리다 용서를 구했다. 아직 사귀자고도 안 한 거 같은데 어쩐지 벌써 100일은 된 커플처럼 굴었다.

한창 연애의 기분에 잠겨 있던 도영은 그 날따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어린 신입 사원이 실수하는 바람에 거래처에서 클레임이 걸려왔다. 팀장이 처리할 일인데 도영이 떠맡게 되어 진땀을 뺐다. 신입은 불안감에 발을 동동 구르며 연신 죄송해했다. 도영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는 했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도영은 얼른 일이 마치는 대로 재현을 보고, 그가 만들어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힐링을 하고 싶었다. 일 처리가 늦어져 재현의 카페가 마감하는 즈음에야 도영도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마침, 또 재현이 지난번의 그 아우디 차량의 차창에 대고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배웅하고 있었다. 눈을 휘어 웃으며. 도영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꼭 바람을 피우는 연인의 현장을 발각이라도 한 사람처럼 씩씩대며 재현에게 갔다. 재현은 저를 보고 아까 짓던 웃음만큼이나 환한 얼굴로 저를 맞이했다. 하지만 도영은 오전 내내 지쳐있던 기분을 돌이킬 기력이 없었다. 말이 모질게 뻗쳐갔다.

“저번에 그 아우디 또 있더라. 되게 친한가 봐?”

“그렇게 자주는 안 오는데. 형은 차종도 외웠어?”

어쩐지 재현의 눈빛이 ‘아니 뭐 그런 것까지 기억을 다 하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영은 괜히 오버를 했다.

“나 그런 거 기억 잘해. 아니 그렇잖아. 네가 그렇게까지 대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단 거지. 소개 좀 해줘 봐.”

“형은…. 아니 그런 게 왜 궁금한데. 그냥 아는 사람이라도.”

소개해달라는 말에 재현은 눈에 띄게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도영은 눈을 치뜨고 캐묻기 시작했다. 대체 누군데 그렇게 말을 돌려? 너 저번에도 그냥 아는 사람이라며. 솔직히 나 건너편에서 네가 하는 거 다 봤거든. 너 나한테만 그렇게 구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다 여지 흘리고 다니는 그런 애야? 마지막 말을 뱉어놓고 도영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말은 이미 쏟았고 담을 수 없었다. 재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형은 그렇게 밖에 생각을 못 해? 내가 형을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는 모르지?”

“네가 무슨 애를 쓰는데.”

물러서고 용서를 구할 타이밍임을 알면서도 도영은 괜스레 성질을 돋우는 말만 내뱉었다. 재현은 입술을 감춰 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만해. 나 집에 갈게.

엉망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도영은 후회했다. 왜 그렇게 말했지. 그 아우디에 탄 사람이 누구든 내가 뭐라고 할 군번은 아닌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재현이를 헤픈 애인 것처럼 몰아붙인 게 제일 큰 잘못이었다. 도영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심 불안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재현이와 서로 호감을 느끼고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이제껏 재현이가 보여준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그저 형이라서 좀 잘해준 정도였다면? 어쩌다 친해진 단골 형이라서 그랬다고 하면 도영은 할 말이 없었다. 도영은 카톡 창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뭐라고 사과하지. 한참을 고민하고 뒤척이다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도 못하고 핸드폰을 덮어버렸다.

 

[나는 형한테 비밀 같은 거 없고 싶어] 22:05

[근데 형이 힘들까 봐 말 못 했어] 22:06

[알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나는 형이 나랑 있으면서 힐링 됐음 좋겠다고 생각했고 형이 나랑 있는 시간이 편하길 바랐거든] 22:10

 

덮어둔 틈새로 반짝이는 화면을 보자마자 도영이 얼른 핸드폰을 열어 카톡을 확인했다. 재현의 연락이었다. 재현도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쓴 티가 나는 문장들이었다. 도영은 그다음 말을 듣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 시작도 한 적 없지만 그만 와도 된다는 얘기라도 하면? 도영은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금방 받은 재현의 목소리는 축축했다.

“울었어?”

[...아니이]

말끝이 늘어지는 것이 분명 조금쯤은 울었겠다 싶어서 한숨을 쉬었다.

[왜. 나 아직 할 말 남았어]

“형이 미안해. 말이 심했어.”

[...]

재현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귀를 울렸다. 도영은 심호흡하고는 제 진심을 꺼내 보였다.

“오늘 내 말이 심했어. 너 그런 애 아닌 거 뻔히 알면서. 두 달 가까이 만나면서 그 정도도 모를까 봐.”

재현이 모르면 등신이지 진짜, 하고는 억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영은 그 목소리가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냐?]

“질투해서 그래.”

[질투를 왜 하는데]

“알잖아.”

[말하면 오늘 일은 용서해줄게]

“내일 반지 맞추러 갈래?”

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웃음기가 녹아드는 목소리로 웅. 대답했다. 도영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도영은 스스로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재현만이 로맨티스트는 아니었다. 재현이와 어딘가 산책을 하거나, 한강에라도 가서, 손을 맞잡고 잔잔한 진심을 담은 고백을 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도영도 한 구석에는 재현과 같은 사람이었다.

“멋없어서 미안해.”

[그거 알아? 난 항상 형이 멋있어.]

솔직히 형이 시계 풀고 재킷 벗는 모습에 반했어. 어, 나는 너 웃는 거 보고. 아 뭐야아!

 

재현은 최근에 마감을 맡아줄 새 알바생을 구했다. 그리고 밤마다 도영의 손을 잡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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