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나는
글스터디 1월/주제: 잊고싶은 기억
날이 흐릿했다.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무겁고 어두운 구름이 우는듯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을 보아 오래 쏟아질 것 같았다.
부디 천둥이 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모험가는 이불을 푹 덮어썼다.
천둥은 좋아하지 않는다. 번쩍이는 빛과 폭음이 그 날의 붉음을 떠올리게 하니까.
붉은 하늘 위로 수를 놓는 빛,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하얀 숨이 금방이라도 사라질듯 옅어서, 그럼에도 강렬해서...
아, 안 좋은 생각. 그는 도리질을 치며 부드러운 천에 고개를 묻었다.
살면서 고통을 느끼는 일이 적지는 않았지 않나. 애당초 붉은 기억 자체가 처음이 아니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겪었던, 검은 용이 하늘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부수던 날.
꼭 막은 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비명소리가 선명했다.
하지만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나날도 이제 기억에서 멀어진지 오래.
모험가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법을 잘 알았다. 따스한 난로와 웃음소리가 나는 테이블, 포근한 이불과 다정하게 감싸오는 달빛 같은 것은 사치였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더더욱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차가운 시선과 웅크린 몸만이 익숙했다.
심장에 박힌 기억이 눈발 날리는 노을하늘이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당시의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었다. 원래도 그다지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때는 정말 한계에 내몰려있었으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둘씩 사라지는 동료들의 단호한 외침을 뒤로하고 하얀 입김이 새어나오는 커르다스를 밟았을 때부터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그의 눈에도 그리 보였겠지.
무엇하나 구하지 못한 채 도망쳐온 사람을, 남자는 아무 의심없이 받아주었다.
알고있어. 웃음과 다정이 익숙한 그는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제게 아무 의도없이, 너는 언제나 나의 맹우라며 다가온 온기가 너무나 따스했다.
하여 그것이 독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목마른 사람처럼 허겁지겁 받아 삼켰던 것이다.
커다랗게 세상을 찢는 소리가 들린다. 모험가는 이불을 꽉 움켜쥐고 몸을 더욱 둥글게 말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광경이 다시 떠오른다.
지우고 싶어, 없애고 싶어...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것이다. 당시에도 느꼈던 강렬한 직감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래서 결국 잊지 못한 기억이었다.
내가 사람을 구해낸 첫 기억. 모험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눈 앞의 풍경이 바뀐다.
내 앞에서 쓰러진 너, 아니, 네 앞에서 쓰러진 나. 어쩌면 둘 다 내가 보는 풍경이었을지도 몰라.
머리를 흔든다. 손으로 세게 때린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것에 휘둘리기에는 이제 너무 커버렸지.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이불 위로 올라온 손이 느껴진다.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도 함께.
"넨. 밖이 조금 시끄럽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더라."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고 머리위로 올라와 있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쥔다.
익숙하게 다정한 눈이다. 나의 푸른 태양.
"이런 날에는 너와 함께 있어야지. 안 그래?"
유쾌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이 장난스럽다. 내 마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모험가는 손을 뻗어 그를 잡아 안았다.
"응, 오르슈팡. 오늘은 나와 있어줘야해."
"걱정마, 나는 지금도 여기 있으니까."
내 손으로 구해낸 첫 사람. 트라우마에 가까운데도 결국 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
아직 나는 너를 구해낼 수 있으니까. 너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나는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결국, 귓가를 때리는 천둥에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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