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주단] 크리스마스에는
청려주단입니다. 크리스마스라고 이것저것 열심히 벌여놓고 있는데 문득 떠오른 소재를 후다닥 업로드하기로...
온실이 된 청려와 얌전히 키워지는 주단은 너무 보기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막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시선에게서 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정우단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꽁꽁 싸맨 차림을 했다. 누가 봐도 아이돌이 아닌 것 같은 옷차림이었다. 모자도 따로 쓴게 아니라 롱패딩의 모자를 그대로 뒤집어 쓴 모습이었으니까. 늘씬한 몸선과는 다르게 펭귄처럼 까맣고 둔둔한 패딩을 입었으니, 양팔을 아래로 쭉 내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두툼한 장갑을 낀 손에는 옅은 파스텔 톤 색이 입혀진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손잡이 부근에 붉은색과 초록색이 섞인 리본 장식이 달려 있어, 누가 봐도 크리스마스 기념 케이크였다. 마스크와 목도리로 둘러쌓인 하관 쪽에서 뿌연 입김이 샜다. 아침부터 이 추위를 뚫고 케이크를 사왔는데, 상대가 당연한 리액션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정우단의 심장이 괜히 두근거렸다. 초인종을 누르는 손은 장갑을 꼈음에도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방문자를 예상한 현관문은 금새 열렸다. 차가운 바깥 냄새를 맡은 커다란 노란색 강아지가 정우단의 패딩을 냅다 앞발로 긁으려 들었다.
"이런. 콩이, 이리와."
신재현은 여상한 목소리로 자신의 강아지를 불러세웠다. 덕분에 몸비틀기를 안하게 되어 케이크를 지켜낸 정우단은 서둘러 거실의 탁자에 케이크 상자부터 내려두고 두껍게 둘러입었던 옷을 하나하나 풀어제꼈다.
"많이 추운가보네."
근래 집 밖에 나갈 일이 없던 신재현의 말에 정우단은 시린 코 끝을 제 손으로 슬쩍 덮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기하실 생각이 있다면 잠깐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당연한 말인데 정우단이 하니까 우습게 들린 모양일까, 신재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장갑을 꼈었음에도 서늘한 손을 맞잡는 손은 제법 따뜻했다. 정우단은 또다시 두근거리는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손이 많이 차네. 고생했어. 커피 타줄까?"
"...네."
표현이 크지 않음에도 다정하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정우단은 홀린 것처럼 대답하고 소파에 앉았다. 앉는 곳에 깔려 있던 작은 전기 장판은 이미 따뜻하게 열이 오른 상태였다. 부엌의 커피 포트를 만지고 얼마간 서성이던 신재현은 이내 두 개의 머그컵을 들고왔다가 작은 접시 두 개, 포크도 두 개 챙겨와 머그컵 옆에 가지런히 놓고 정우단의 옆에 앉았다.
이렇게 있으면 새삼스럽게 둘의 사이가 연인이라고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우단은 아직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 연인으로 자리한 같은 그룹의 리더 형이 신기했다. 감정의 표현이 적고 자신이 뭘 하면 '이 녀석이 왜 이러지?' 하는 시선을 아직도 종종 받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정우단은 쓸데없는 말은 잠시 접고, 자신의 수고로움이 들어간 케이크를 상자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슈가파우더가 잔뜩 뿌려진 딸기가 케이크 맨 윗단을 빼곡히 채운 생크림 케이크였다. 딸기의 끝부분에 금가루가 포인트로 장식되어 더욱 고급스러워 보이는 생김새였다.
"재현 형, 요즘 딸기는 겨울이 제철이라고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음."
긴장했군. 신재현은 어렵지 않게 정우단의 상태를 파악했다. 같이 등봉되어 온 플라스틱 빵칼을 쥔 정우단의 손을, 달래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손등을 감싸쥐었다. 같은 방향의 손이니, 다른 손은 정우단의 허리를 감아 안게 되었다. 더욱 바짝 긴장해버린 정우단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맛있어 보이네."
그 말을 하는 신재현의 시선은 정우단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진 못했지만 볼이 따끔따끔해져서, 정우단은 대답을 않고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불안하게 바들거리는 칼끝을 신재현이 힘을 줘서 제대로 자르도록 도왔다. 딸기부터 포크로 콕 찍어먹은 신재현은 이내 케이크도 포크로 조금 잘라내 먹고선 입을 열었다.
"고생해서 사온 보람이 있네, 우단."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그제서야 정우단은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조금 뺄 수 있었다. 케이크는 달았고, 커피는 쌉싸름해 궁합이 좋았다. 몸에 남아 있던 차가운 바깥 기운은 커피 때문인지, 제 몸에 달라붙은 체온 때문인지 금새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케이크의 크기가 제법 컸던지라 다 먹지는 못하고 다시 상자에 들어갔다. 휴일이어도 먹는 양을 조절하는 형의 모습에 정우단은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더 드시지 않고요."
신재현은 콩이를 달래주려고 장난감에 조각난 간식 조각을 끼워넣다가 소리없이 웃었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좋지 않아, 우단. 내가 늘 경고했잖니."
"......"
훈련이 잘 된 커다란 강아지가 간식 장난감을 물고 다른 방으로 사라지자, 신재현과 정우단의 시선이 가깝게 마주쳤다.
"...그러면 점심은,"
"먹을 생각만 하는거니..."
"......죄송합니다."
어쩐지 금새 꼬리를 마는 모습에 신재현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잠시 망설이던 손끝이 연인의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겨 주었다.
"탓하는게 아니야. 오해하진 말고."
"그렇습니까."
"그래. 네가 먼저 제안했잖아. 휴일에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겠다고."
그랬지, 참. 정우단은 아까보다는 기가 조금 살아나서 눈을 반짝였다. 신재현은 일생에 낙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개를 키우고 나서부터 성격이 좀 달라졌나 싶긴 하지만, 휴일에 여전히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특히 연인이 같이 지내게 되는 휴일이라면...
"...음, 영화라도 같이 보죠."
"그래."
신재현은 순순히 리모콘을 정우단에게 넘겼다. 영화만 하루 종일 틀어주는 채널과 OTT 서비스 중에서 짧게 고민한 정우단은 OTT 서비스를 선택했다. 신재현은 작품을 가리지 않고 접하는 경향이 있다면 정우단은 좀 더 까다로운 필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로맨스 영화를 틀어주는 것을 보고 신재현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너도 연애를 글로 배웠겠구나."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정우단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커다란 TV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눈을 질끈 감았다가 용기를 쥐어짜내 연인의 손을 마주 잡는 것에 성공하고 나서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순히 손을 내어준 신재현은 다시 잔뜩 긴장한 듯한 정우단의 옆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TV로 시선을 돌려줬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스토리고, 동성 간의 연애 중인 처지라 그런걸까 남녀의 평탄한 연애 서사에는 크게 동하지 않았다. 신재현의 생각은 그랬다. 다만 몰입이 워낙 뛰어난 제 어린 연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나자, 자신도 모르게 소매를 길게 늘여 촉촉하게 젖은 정우단의 눈가를 콕콕 찍어 닦아주었다.
표정 변화는 하나도 없이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생소했다. 이렇게 감정적인 아이였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너무 무감각한 편인 것이 맞겠지. 신재현은 이렇게 닳아빠진 제게 조심스럽게 애정을 고백하는 바들거리는 목소리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것일까. 너는 나를 무서워하는게 아니었던가. 어떤 '미지의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매일 매일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은데......
"재현 형."
"왜 부르니, 우단."
"형......"
울먹이는 기운을 애써 가라앉힌 목소리가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제 인생에 형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비극적인 영화의 내용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신재현은 애써 눈꼬리까지 접어가며 웃어보였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나를 붙잡으려고 한 것이구나. 문득 떠오른 아주 흐릿한 기억의 편린을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너는 나를 두고 도망친 적이 있는데."
"이제 절대 안 그럴 겁니다. 그 때의 저는 너무 어렸으니까요. 지금은 다릅니다. 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요."
너는 모르는, 내게도 흐릿하게만 남은 기억인데도 왜 그렇게 단호하게 답하는지. 그리고 그 대답에 왜 위안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건지 모를 일이다.
"앞으로의 일이 중요한 거겠지."
남들은 모르는 과거의 기억이 신재현에게는 너무나도 많았다. 가끔은 그런 기억들이 그의 몸을 무겁게 잡아끌곤 했다. 웬만큼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툭툭 튀어나오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게 분명한 너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에서 비롯된 신뢰를 내게 들이밀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런 거겠지.
금새 눈물이 멎은 정우단은 정말로 기쁜 듯한 미소를 지은 신재현의 얼굴을 한참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태 붙잡고 있는 손이 따뜻했다.
언제나 먼저 용기를 내는 쪽은 정우단이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을 물끄러미 쫓던 신재현의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정신적 교감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욕망 또한 동반하는 감정이었구나, 싶은 생각에 신재현도 정우단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맞닿은 정우단의 몸이 순식간에 뻣뻣해지는게 느껴져서 머쓱하게 입술을 먼저 떼었다.
"음... 별로니?"
"아뇨, 너무... 좋아서요."
정우단은 눈을 감고 신재현의 어깨에 기댔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신재현의 옷자락을 양 손으로 쥐어잡았다. 난방이 잘 되고 있는 상태인게 분명할텐데, 울어버린 탓일까 어깻죽지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정우단의 상태를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신재현이 양 팔로 그를 힘있게 껴안아주었다.
"우단. 네 심장 소리가 너무 커."
"...그렇습니까."
"고장난 것 같아."
"......형 앞에서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하하."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맞대고 있다가... 정우단은 깜박 몰려드는 졸음기를 치우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더 남아 있었으니까. 정우단이 다음 계획을 입 밖으로 내려고 할 때,
"산책하기에는 밖이 아직 추우니까 방에 들어가 있을까? 네가 읽을만한 책이 서재에 있을텐데."
신재현의 말에 정우단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계획표에 빨간 색연필을 주욱 그었다. 새삼스럽게 이 사람은 자신을 오랜 시간 지켜봐온 사람이라는게 실감이 났다.
"네, 재현 형."
여유롭게 웃는 신재현과는 다르게 정우단은 여전히 바짝 굳은 표정이었지만 신재현은 그런 외면을 뚫고 정우단의 머릿속을 웬만큼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눈빛에 어린 기대감을 충분히 읽었으므로, 그의 손을 잡아끌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에서 각자 한 권씩 뽑아들고는 함께 앉을 수 있는 마땅한 곳이 없으므로 어쩌다보니 신재현의 침대 위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왜 거실로 다시 나가지 않은걸까, 여기보단 거실 소파가 책 보기엔 편하지 않을까, 정우단은 궁금증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제 옆에 아주 가까이 앉은 신재현을 의식하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몰입력이 뛰어난게 장점인 그였지만 오늘따라 쉽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것에 집중력을 다 쓴 탓일까. 주의산만해진 와중, 볼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신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누워있어도 되는데."
옅게 웃으며 하는 말에 정우단은 조심스럽게 몸을 뒤로 뉘여봤다. 베개가 푹신푹신하고 매트릭스도 편했다. 몸을 반바퀴 굴려 엎드려서 책을 펼치니 등 뒤에 포근하게 덮이는 담요가 느껴졌다.
"아, 이것은......"
언젠가 콩이가 두르고 있던 VTIC 콘서트 MD로 나왔던 담요였다. 노란 털이 곳곳에 박혀있는 게 보였다. 강아지 샴푸 냄새 같은 것도 은은하게 맡아졌다. 담요를 관찰하던 정우단의 귓가에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가 흘러들어갔다.
"우단."
"네."
"자고 가."
갑자기요? 정우단은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꾹꾹 눌러 삼켰다. 밤은 아직 일렀고 내일 스케줄이 없긴 하지만... 자고 가는거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하지만... 진도가 너무 빠른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네."
새빨개진 얼굴로 얌전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신재현이 소리내 웃으며 정우단의 옆에 비슷한 자세로 엎드렸다.
"같이 봐."
"넵."
팔랑,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가 느리게, 오랜 시간 동안 방을 맴돌았다. 때때로 묘하게 치솟는 긴장감에도 어느샌가 둔해질 수 있었다. 거실보다 더욱 따뜻한 공간에 엎드려 있던 탓에, 긴장이 완전히 풀린 정우단이 어느새 새근거리며 잠든 것을 보고 신재현은 그가 새벽부터 저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거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오롯하게 즐길 수 있는 휴일에 타인을 들여본 것은 기나긴 생을 통틀어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만큼 알았다 생각해도,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는 면이 있는 상대를, 신재현은 앞으로 또 오랜 기간 곁에 둬 볼 것을 결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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