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는 언제나 그 녀석이 있다 上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전교 1등 고죠 사토루 x 전교 2등 드림주

* 현대 au

* 공백 포함 1.1만자

* 타싸에 업로드했던 글

추천 BGM


학급 석차, 코스 석차, 전체 석차.

오늘따라 유달리 뾰족해 보이는 그 활자들 옆에 일정하게 새겨진 숫자.

이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해진 바로 그 숫자. 2.

이를 아득 물고 성적표를 구겨 버린다. 빳빳한 종이는 형태를 잃고 마구 우그러진다. 그래봤자 이미 새겨진 등수가 사라지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고개가 돌아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얇은 커튼은 들이친 바람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흩날린다. 서서히 내려앉는 천, 그 뒤에 드러나는 미형의 얼굴. 손바닥 위에 턱을 괸 채 이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곱게 제 푸른 눈을 휘어 보인다. 매끈한 입술이 달싹인다.

나를 제친 녀석, 언제나 내 앞에 있는 녀석. 그 녀석은 부러 입술을 크게 벌리며 소리 없는 문장을 만들어 낸다. 내가 알아듣기 쉽게, 아주 천천히.

또 내가 이겼네?

그러고는 또 천사처럼 웃었다. 남의 속을 긁는 언사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상냥한 웃음을 꾸며냈다.

내 앞에는 언제나 그 녀석이 있다

w. 하루살이

타고나길 영재는 아니었지만, 나름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인생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내 곁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무언가를 읽고 이해하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고,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문제를 풀어내면 어른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똘똘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난 언제나 첫 번째였다. 내 성적표에는 늘 쭉 뻗은 작대기만 무수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인생. 그랬기에 나는, 누군가 나를 제치고 앞설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본 적이 없었으니까. 1이 아닌 숫자는 내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는데…….

입학시험에서 차석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외동딸이 명문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에 몹시 기뻐하셨다. 다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차석? 내가? 수석이 아니라 차석이라고?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소식을 전해주던 관계자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차석. 2등. 언제나 곧았던 나의 숫자가 처음으로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나를 제친 그 녀석을 처음 마주한 건 입학식에서였다. 두 명의 신입생 대표가 단상에 올라섰다. 수석과 차석, 1등과 2등. 우리는 같은 단상에 서 있었지만, 그 등수의 간극은 명확했다. 수석은 수백 명의 신입생들을 대표하여 선서를 한다. 차석은 한 걸음 뒤에서 신입생들에게 나누어주는 입학 키트를 대표로 받는다.

두 명의 대표였지만, 목소리를 알리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을 거다. 이 입학식의 진정한 대표는 수석을 차지한 저 녀석이라는 것을.

선서문을 낭독하고 돌아오는 녀석과 시선이 얽힌다. 여름날의 하늘을 닮은 더없이 청량한 파랑. 아니, 정정한다. 그 눈동자는 휴양지의 바다를 더 닮아 있었다. 파랑이 잔잔한 수면이라면, 그 사이사이에 퍼진 희끄무레한 덩어리는 파도의 포말과도 같았으니.

실로 대단한 미남이었으나 그 얼굴에 정신이 팔리지는 않았다. 잘 다듬은 조각같이 생긴 그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순수한 감탄마저 모두 잊게했다.

이 자리가, 이 등수가 당연하다는 듯한 그 낯을 보자마자 키트를 움켜쥔 손에 제멋대로 힘이 들어간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까 저 녀석한테도 당연한 일인 거였다. 나처럼 언제나 1등을 차지했을 거고, 1등이 아닌 자신을 떠올려 본 적도 없었던 거다. 감히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고 추측해 보았지만, 그 또한 이제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저 자리를 지켜냈고, 나는 밀려났기에.

五条 悟

시선을 조금 내려 명찰을 확인하자, 단정하게 새겨진 한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죠 사토루. 입을 다물고 속으로 그 이름을 발음해 본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거리며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다. 고죠 사토루는 여전히 내 앞에 선 채였다. 우리는 두 번째로 눈이 마주쳤다. 이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던 눈에 순간 생기가 도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죠 사토루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슬쩍 웃었다. 명백한 오만에 견고했던 내 자존심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17년의 짧다면 짧은 인생, 그 인생 중 처음으로 느낀 패배감이었다.

나는 입학한 이후부터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했다. 시험이 가까워졌을 때는 툭 치면 코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했다. 새하얀 공막이 시뻘겋게 충혈될 정도로 자그마한 활자를 읽어댔다.

그렇게 첫 시험이 다가왔다. 명문 대학에 수십 명은 거뜬히 보내는 편차치가 높은 고등학교답게 시험은 몹시 어려웠다. 사실상 만점이 나올 수 없도록 교묘하게 문제를 꼰 탓에 만점을 받은 과목은 없었지만, 각 과목에서 세 개 이상 오답을 고르지는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가채점을 한 시험지를 보며 감탄하지 않는 급우는 없었다. 그건 담임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번에는 분명 내가 1등일 거다. 나의 피나는 노력, 주변의 반응.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조금 섣부른 확신을 하고 말았다.

담임 선생님은 아주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성적표를 건넸다. 저번에 놓쳤던 자리는 내가 다시 되찾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여유로운 마음으로 성적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교 석차 2, 학급 석차 1.

그리고 모든 코스의 석차 옆에 복사라도 된 것처럼 줄줄이 새겨져 있는, 2.

…말도 안 돼.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 반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침입에 당황한 그 반의 아이들이 저희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어수선함 속에서 유일하게 침묵하고 있는 건 그 녀석뿐이었다. 가장 구석에 앉아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녀석, 고죠 사토루. 그 애는 또 이전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젖힌 고개가 슬쩍 내게로 돌아선다. 푸른 시선은 형태를 잃고 구겨진 내 성적표로 와닿는다. 고죠 사토루는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냅다 달려와 제 성적표를 확인하는 내 행동에도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내 것과 똑같은 양식의 성적표. 일렬로 나열된 작대기. 전교 석차, 학급 석차, 그리고 모든 코스 석차. 네모난 칸이 지나치게 휑해 보일 정도로 일정하고, 곧은 숫자, 1.

숨 쉬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불규칙하게 호흡이 틀어진다. 녀석의 성적표를 책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린다. 고죠 사토루는 제 성적만큼이나 올곧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진 햇살에 가뜩이나 화려한 눈동자가 더 반짝였다. 그 눈동자는 도톰하게 솟아오르는 애굣살에 의해 반쯤 감추어진다.

"안녕."

이어지는 경쾌한 목소리. 내 등장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자연스레 인사를 건넨 고죠 사토루는, 나를 보며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 * * * *

공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다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성적표에는 놀라울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무수한 2, 그 사이 딱 하나의 1.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연도말고사. 1년에 네 번, 도합 여덟 번의 시험 동안 일관되었던 성적. 아홉 번째 시험에서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물론 좋은 쪽의 변화는 아니었다. 학급의 석차가 한 단계 내려간 거였으니. 유일하게 고고했던 일직선 또한 완벽하게 일그러졌다. 그 고죠 사토루가 나와 같은 반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2. 완벽한 2. 2의 향연.

고죠 사토루의 성적표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완벽한 1. 나를 한 걸음 앞선 꼭대기의 숫자. 나는 또다시 패배했다. 고작 한 걸음이었는데. 그렇게 기를 쓰고 노력해도 나는 고죠 사토루를 앞설 수 없었다. 우리의 격차는 지독할 정도로 일정했다.

처음 고죠 사토루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내심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을지도 몰랐다. 며칠 내리 전교 1등과 전교 2등을 한 반에 몰아넣은 학교의 몰상식함에 분노를 표했으니까. 물론 학교에 직접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했다. 난 그 정도의 배짱은 없었다. 다만 중학교 시절부터 쭉 절친이었던 쇼코를 만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달콤한 파르페를 먹으며 하소연하긴 했다. 쇼코는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주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왕 그렇게 된 거 곁에서 한 번 지켜보는 건 어때?'

'…뭘?'

'그 1등이라는 애. 네가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널 이기는 거면 뭔가 대단한 공부법이 있지 않겠어?'

솔직히 너 내심 궁금해했잖아. 쇼코의 입에 물려 있던 숟가락이 가볍게 들썩였다. 난 긍정도 부정도 않고 입술만 두어 번 삐죽이기만 했다. 눈치 빠른 나의 절친이 내린 판단은 자존심 속에 묻어둔 진실을 꺼내 들고 말았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2년 내도록 고죠 사토루를 궁금해했다. 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길래 저 성적을 유지하는 건지. 타고난 머리인지 그것도 아니면 피나는 노력인지, 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합친 경우인지. 학원 다니는지, 과외를 받는지, 설마 나처럼 자율 학습으로만 저 성적을 유지하는 건지. 고죠 사토루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여전히 제 성적에 관심 따위 없어 보이는 고죠 사토루에게 성큼 걸어갔다. 반 인원이 홀수였기에 한 명은 필히 혼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혼자가 된 건 고죠 사토루였다. 미리 말하는데 따돌림은 아니었다. 그냥 본인이 혼자 앉기를 원했다. 입학한 이래로 쭉 전교 1등을 유지해 온 독보적인 모범생에게-성격은 모범적이지 않았지만- 선생님들은 대체로 무른 편이었다. 크게 부당한 요구도 아니었으니 담임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텅 빈 옆자리 책상을 탁 내리치자 고죠의 시선이 내게 돌아선다. 품에 적당히 맞는 빳빳한 교복, 구김 하나 없는 셔츠, 그 안에 언뜻 보이는 흰색 반팔 티. 그 모범적인 외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량한 눈빛을 마주한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또 샐쭉 웃었다.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숨을 들이켜며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아마 빼어난 외모를 극찬하는 대화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건 비현실적인 저 녀석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나 여기 앉을게."

"그래, 마음대로."

요청도, 부탁도 아닌 통보였다. 그럼에도 고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앉고 싶다고 말한 학기 초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되는 태도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나쁠 건 없었다.

나의 성적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바랐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앞에 있는 그 녀석. 그러니까 고죠 사토루에 대한 파악은 필수적이었다. 이제 와 자존심을 세울 단계는 아니다. 어떻게 수업을 듣는지, 어떤 공부를 하는지,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 곁에서 지켜보며 그 녀석을 낱낱이 파헤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 * * * *

고죠 사토루 관찰 일지

1. 고죠 사토루는 우리 학교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고죠 사토루는 교우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가 농구를 하기도 했고, 적당히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들 줄 알았다. 저런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녔으니 이성으로부터의 인기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볼 때는 그랬다. 학기 초에는 난 가장 앞자리에 앉았고, 녀석은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았으니 자세히 살필 기회는 없었다. 기왕 옆자리를 차지한 김에 난 내 재능을 활용해 녀석을 관찰했다.

마침내 내린 결론은, 고죠 사토루는 학교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다. 친근하게 지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방과 후에 놀러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매번 거절했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에게 유달리 시달린 하루면 그 생글생글한 낯에 언뜻 피로가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다. 지나친 관심을 피곤해했으며 그에 상응하는 관심을 그들에게 되돌려주지 않았다.

굳이 우리 학교로 범위를 좁힌 이유는 저 녀석에게도 나름 절친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였다. 분명 게토 스구루라고 했지. 일전에 고죠 사토루와 같이 학교를 나올 때 정문 앞에서 고죠를 기다리고 있는 그 애를 본 적이 있었다. 앞머리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고죠 사토루와는 다른 결의 미남이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성격도 정반대였다. 나를 보자마자 꼭 전에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대하며 악수를 청했다. 먼저 살갑게 구는 친구를 내칠 이유도 없어 손을 맞잡으려 한 순간 그 사이를 고죠 사토루가 가로 막았다.

제 절친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그런 건지. 내민 손은 무안할 정도로 한참이나 허공을 배회했다. 고죠 사토루에게 질질 끌려가던 게토 스구루는 곤란한 낯으로 미안하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저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녀석과 친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몰래 물어보려고 했는데, 게토 스구루는 다시 우리 학교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2. 학원은 안 다니고 혼자 공부하는 것 같다.

우리 학교는 이번 연도부터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자습실을 따로 만들었다. 운영 시간은 보통 여덟 시 정도까지인데, 사실 자습실에 남아 있는 학생은 별로 없다. 보통은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죠 사토루는 꼭 여덟 시까지 남아 있었다. 나도 대부분 여덟 시까지 남아 자습을 하고 집에 돌아가기에 보통 저 녀석과 활동 범위가 겹치는 편이었다.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엄연히 우리는 라이벌이었으니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황상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고죠 사토루에게는 사교육의 잔재가 없었다. 나 또한 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평생 이기지 못하는 놈이 나와 같은 자기주도학습 파라니.

3. 이 자식은 천재다.

기말고사를 일주일 정도 앞둔 시기에서야 나는 비로소 인정했다. 나는 옆자리에서 녀석이 읽고 있는 책을 힐끗 바라보았다. 대학 전공 서적이었다. 그것도 원서. 상기한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더 경악스러운 사실은 저걸 동화책이라도 보듯이 심드렁하게 읽고 있다는 거다.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자란 나도 저 녀석에게 비할 바는 못 됐다. 나는 그냥 공부에 재능이 있는 수준인 범재였고 저건 천재였다. 범접할 수 없는 천재. 대체 저 허연 대가리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사고 회로가 동작하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고죠 사토루는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만 듣고 제가 원하는 대로 응용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지망 대학과 지망 학부를 적을 때, 지망 학부에 고민 없이 공학부를 적는 걸 보고 속으로 내심 인정했다. 잘 어울린다고. 물론 곧바로 내 뺨을 후려쳤다. 내 평생의 라이벌을 이렇게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괴물 같은 천재 녀석을 이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만점을 받는 거? 말이 쉽지, 사실상 우리 학교는 만점을 받지 못하도록 부러 악랄한 난이도의 문제를 몇 개 섞어두었다. 근데 고죠 사토루는 만점을 받았다. 시간 내에 한 개 정도는 풀 수 있지만 모든 문제를 정확하게 푸는 건 힘들었다. 그러면 다른 방안을 생각해야 하는데…….

적갈색의 책상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어지던 사고가 뚝 끊겼다. 코언저리가 지나치게 뜨끈했다. 최근 무리를 한 탓인지 정직한 신체는 곧바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더 몸을 혹사하지 말아 달라는 그런 애달픈 요구를 말이다. 코피를 흘리는 건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대강 옷소매로 틀어막으려던 참이었다.

1. 고죠 사토루는 우리 학교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나를 제외한 학교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시야에 불쑥 커다란 손이 들어온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코를 틀어막은 녀석은 제 새하얀 셔츠가 피로 젖어가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다른 손이 머리를 꾹 누르고 있었기에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책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본 거지. 수그린 고개 위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쏟아진다.

"이번엔 드디어 나 이기는 거야? 이렇게 코피 흘릴 정도로 열심이니까 한 과목쯤은 이기겠지."

고죠는 키득거리며 내 코를 틀어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 벌어진 입술이 다시금 일자로 꾹 다물린다. 저 자식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교의 다른 녀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다른 애들에게는 웬만하면 유들유들하게 굴면서 매번 나한테만 이랬다. 나한테만.

그래도 나한테만 저 이상한 성격을 내비친다는 건 곧 내가 저 녀석의 관심 범위 안에 들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름의 라이벌로 여기는 건지, 아니면 한 번도 이기지 못하면서 아득바득 덤비는 꼴이 우스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고죠 사토루는 언제나 날 보면서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조금 전에 한 말부터 봐라. 지금까지 저를 이기지 못한 나를 비꼬는 기색이 역력하지 않았는가.

재수 없는 자식.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새겨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고죠 사토루를 이기는 방법, 언제나 나를 앞서는 녀석을 따라잡는 방법.

나는 기말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밤새도록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최근 평균 수면 시간은 네 시간에 수렴했다. 수면 부족이 야기하는 문제점은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건 집중력 저하와 과민 반응이 있겠다. 평소였다면 그냥 짜증만 내고 넘어갈 일에도 과도한 반응을 내비치게 됐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고가 흘러가고, 두어 번 생각하고 내뱉었을 말을 필터링 없이 뱉어버리고 만다.

왜 하필 그 순간에 그걸 떠올려 버려서. 고백 공격으로 상대의 멘탈을 박살 낸다는, 그런 만화에서나 언급되는 우스갯소리를 떠올려서. 여태 내 코를 붙잡고 있는 고죠 사토루의 멱살을 냅다 붙잡았다.

"너, 나랑 사귀자."

통제를 잃은 입술이 제멋대로 벌어진다. 결국 폭탄을 던져 버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아주 당당했다. 그 고죠 사토루가 당연히 나의 고백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 오만하고 잘난 낯에 당황이 어리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멘탈까지 흔들려 시험을 망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비겁하다는 걸 안다. 이렇게 비겁한 방식은 나와 어울리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하는 것도 필히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향일 거다.

"그러지 뭐."

그리고 이 부작용은 고죠 사토루의 깔끔한 대답으로 해결되었다. 남다르게 튀어 나가던 생각도 저 한마디에 곧바로 제 자리로 돌아왔다. 머리에 피가 몰렸다. 가까스로 멎었던 코피가 다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고죠 사토루는 아이코, 같은 성의 없는 감탄사를 뱉으며 다시 내 코를 세게 붙잡았다.

얼굴이 희게 질리는 것이 느껴졌다. 쏟아낸 코피 때문이 아니었다. 난 녀석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 고개를 조금 쳐들자,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정수리를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러면서 제 몸을 숙여 눈을 맞추는 아주 기이한 행동까지 했다.

"…잠깐만. 왜 승낙해?!"

"그야 내 맘이지."

"잠깐, 잠깐! 취소해. 취소할게!"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꽥 질렀다. 고개까지 세차게 가로젓고 싶었지만 날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 때문에 시도조차 불발되었다. 고죠는 나와 눈을 맞춘 채 싱그러이 웃었다. 그 상냥한 미소와는 다르게 잇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음? 누구 맘대로."

"내가 고백했으니까 취소도 내 마음이지!"

"아니지. 네가 고백했고 내가 받아들였잖아. 취소는 내가 대답하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거고."

"아니, 난 네가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차이는 취미라도 있어? 내 여자친구 취향이 이렇게 음습하다니."

저 미친 주둥아리에서 기어이 여자친구라는 언급이 나오자마자 난 그대로 혀를 깨물고 기절하고 싶어졌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물론 책임을 져야겠지만, 이런 결말을 바란 건 아니었다. 사귄다는 건 서로에 대한 사랑, 애정. 뭐 이런 감정을 기반으로 만드는 관계가 아닌가. 사랑은커녕 마주치면 물어뜯기 바빴는데-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그러긴 했지만- 여기서 저 고백을 받아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비겁한 수를 쓰려고 했던 나를 꾸중하려는 듯 그 여파는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고백해서 멘탈 터뜨리기는 무슨. 고백을 받아서 되레 내 멘탈이 터졌다. 이럴 시간에 그냥 평소처럼 공부나 더 열심히 할 걸.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지만, 상대는 고죠 사토루였다. 언제나 나를 앞서는 그 고죠 사토루. 내가 지금껏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녀석을 일상생활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미안, 말이 헛나온 거야. 취소가 아니면…, 그렇지. 헤어져. 어, 그래. 헤어지자!"

"싫은데?"

"고죠!"

"상호 합의 하에 사귀게 된 거니까, 헤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야? 난 싫어. 그럼 합의 결렬이네. 끝!"

"너 나 좋아해? 아니잖아!"

"글쎄~"

고죠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꼬리를 지나치게 늘렸다. 저렇게 대답을 오묘하게 피해 봤자 녀석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애초에 날 좋아할 이유도 없고, 당장 녀석의 눈에 애정 비슷한 것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따금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긴 했지만, 그건 그냥 호기심에 불과할 거다.

내가 내 무덤을 판 거구나…….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내 표정을 바라보던 고죠 사토루가 짤막하게 입 속으로 소리를 냈다. 이어 다물린 입술이 벌어진다.

"아니면 이렇게 할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에 찬란한 빛이 스민다. 그 애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웃었다. 아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지만 나는 되레 불안해졌다. 저런 낯선 표정을 짓는 고죠 사토루가 정상적인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네가 날 한 과목이라도 이기면 깔끔하게 헤어져 줄게."

"…야, 너 그게 뭔."

"왜. 자신 없어?"

입꼬리가 그려내는 호선은 지나치게 오만했다. 나는 저 미소가 익숙하다. 우리의 첫 만남에서 녀석이 그려낸 미소와 아주 똑같았으니까. 또다시 무너져 내린 나의 자존심. 그 불쾌한 기분에 결국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기고 말았다.

난 눈을 부릅뜨고 이 미친 내기의 제안자를 노려보았다.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듯 뱉어낸다.

"고죠. 너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고죠 사토루는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뻔뻔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보란 듯 손깍지까지 끼고 내 눈 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모습에는 여유만이 가득했다.


고죠 사토루 관찰 일지

1. 고죠 사토루는 우리 학교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나를 제외한 학교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2. 학원은 안 다니고 혼자 공부하는 것 같다.

3. 이 자식은 천재다.

4. 성격이 이상하다. 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이 새끼 반드시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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