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조로] 짝사랑 (지)독하게 하는 로조얘기 1

부제: 이과라서 죄송합니다

뒷편은 생각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톡 튀는 녹색 머리에 왼쪽 귀에는 세 개의 피어싱을 하고 허리에는 칼을 세 자루 씩이나 찬 검사가 한 주점에 나타나서 술을 주문한 것이다. 검사는 돈은 낼테니 저녁까지 앉아있어도 되겠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낮에는 가는 곳마다 본의아니게 소란을 일으켜서 되도록 인적이 드문 밤에만 이동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남자는 정중한 태도에 비해 그다지 예의를 차린다고는 볼 수 없는 말투였지만 사실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몇 번이고 검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스로도 긴가민가한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롤로노아 조로?"

"뭐야?"

헐. 주인은 입을 벌렸다. 남자는 호명된 이름이 자신의 것임이 당연하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그건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최근 자신이 새롭게 머리에 집어넣은 신세계의 상식에 따르면 말이다. 주인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각오를 하고 그 짧은 상식을 입 밖으로 꺼내보기로 했다.

"당신 분명히 죽었다고 들었는데?"

술을 시원하게 들이키던 검사는 별안간 한 쪽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하!"

그러더니 쾌활하게 웃으며 잔을 쾅 내려놓았다. 테이블을 부술 것처럼 커다란 소리에 주점 내의 수많은 시선들이 검사를 향한다. 불쾌함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번져가기 시작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롤로노아 조로는 불량한 자세로 다리를 꼬더니 아주 친근한 어조로 주인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빨간머리 녀석이 나를 그렇게 귀신보듯 쳐다봤던건가? 하긴 죽은 녀석이 되살아났다니 기절할 노릇이었겠어?"

그 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해적사냥꾼!"

그 순간 일대에 시한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고함과 환호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순식간에 주점 내부의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가 진짜 롤로노아 조로인지, 정교하게 변장한 가짜인지 '판별'하기 위해 문제의 해적 사냥꾼을 겹겹이 에워싼 채 끊임없이 술렁거렸다. 조로는 어수선한 주점 내의 상황이 마치 남 일이라는 듯 방관하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나 지금 어떤 해적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려줄 녀석 있나? 그렇지만 목소리는 소란에 금방 묻히고 말았다. 

'캡틴... 괜찮은거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폴라탱을 떠나오기 전 베포의 웅얼거림이 아직까지 귀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괜찮냐는 염려가 짜증스러웠다. 당분간은 폴라탱을 떠날 생각이 없었음에도 잠시동안이지만 자리를 비워두고 왔다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사실 베포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단지 그의 예민함이 두통을 호소하는 외과의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을 필요 이상 거슬려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멋대로 싸돌아다녀도 되는거냐? 30억?"

가게는 키드 해적단의 선원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발을 들이밀 때부터 알아서 그들은 입을 다문 상태였기 때문에 부엌에서 식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빼면 아무 잡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짜증스러웠다.

종종 식당을 겸하는 여관 하나를 하루 이틀 정도 멋대로 점거하고 머물다 다음 섬으로 떠난다고 들었다. 그걸 따라잡느라 폴라탱을 비우게 된 것이다. 네 목에 걸린 액수에 감흥이 없냐? 빈정거리는 말투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들어왔다. 로우는 그게 자신과 그 둘 사이의 패턴화된 화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평소처럼 발끈해줄까 하다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그냥 침묵을 고수하며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난폭한 장난에 어울려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조차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키드는 그가 자리에 앉아 입을 떼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해적 사냥꾼 때문에 왔지?"

두통이 또다시 도졌다. 의사라는 자가 고작 두통 하나 어쩌지를 못하고 끙끙대고만 있다니. 로우는 머리 안 쪽에서 슬슬 자신을 긁어대는 목소리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그 분야의 전문가는 분홍색 모자를 쓴 순록이지 내가 아냐. 나는 그런 의사가 아니라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밀짚모자 해적기에 머리가 더욱 더 지끈거려왔고, 그는 그만 제 3자가 되어 자기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한다. 로우가 내면의 자신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드는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가끔 절단난 팔뚝 밑이 빌어먹을 것처럼 아파서 잠에서 깰 때가 있는데,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내 잠을 설치게 만드는 꿈이 있어. 싸움이 다 끝난 다음에 얼굴에 하얀 천이 덮인 시체가 밀짚모자놈들 가운데서 나오는 장면을 반복해서 꾸는거야. 폭죽이 펑펑 터지고 인간들이 환호성인지 비명인지를 하나같이 꽥꽥대면서 미친놈들처럼 술을 퍼마시는데 그놈들만 시체보다 더 시체같은 얼굴을 해서는 죽은 녀석을 둘러싸고 넋 나간 듯이 서 있는거지."

별다른 묘사와 뛰어난 상상력 없이도 그는 키드가 말하는 그 장면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현실에서 벌어졌고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로우는 사실에 기반한 그의 악몽에 대해 어떤 감상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현재 자신의 기분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반면에 키드는 확실히 분통해하고 있는 것 같다. 옥상에서의 싸움이 동료애씩이나 되는 낯간지러운 감정을 일으킬 만큼 기나긴 전쟁은 아니었으나 늘상 벌어지는 그저 그런 전투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타인의 목숨을 대신 지불하고 살아남느니 거기서 죽어버리는 것을 택할만한 남자였다. 비극은 그가 그렇게 살아남아버렸다는 점이다.

"너와 전장의 추억 따위를 주고 받으러 온 건 아니다."

한결같이 싸가지 없는 새끼... 키드는 사나운 얼굴을 더욱 더 일그러뜨렸다. 그는 곧장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처럼 자잘한 금속 파편으로 이루어진 왼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철로 만들어진 팔은 그대로 테이블에 걸쳐졌을 뿐이다. 로우는 귀찮다는 듯이 턱짓했다. 키드는 가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속해서 말했다.

"뭐... 우리가 아는 그 놈이 맞기는 해. 웬 엉뚱한 놈이 사칭한 것도 아니고 파시피스타마냥 외형만 본따 만든 정부의 클론병기 따위도 아니었다."

"있을 수가 없잖아."

"하지만 현실인데? 디테일한 구석 몇 개는 좀 어긋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 녀석 기억은 우리의 것과 일치해. 아니, 심지어 당사자가 아니면 우리와 공유할 수 없을 만한 굵직한 사건들도 알고 있지. 킬러의 스마일열매 부작용이라든가."

죽은 해적 사냥꾼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두어달 전부터 신세계 전반에 퍼져있는 상태였는데, 특히나 높은 빈도로 언급되는 사건이 있었다. 소문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부터 어디선가 나타난 해적사냥꾼이 유스타스 키드와 대면했고 놀랍게도 별 충돌 없이 헤어졌다고 한다. 선장과 같은 액수를 목에 걸고 있는 다른 해적과 1대 1로 대면하고도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않은 그의 의중이 특히나 관심거리였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심리가 실망이라는 점은 제쳐두도록 하자. 로우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디테일이 어긋난다는 건 적어도 '부활'일 수는 없다는 거군..."

키드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로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 와중에도 앞 뒤 정황 따져가며 사람을 분석하고 싶냐고 묻는 대신 말했다.

"죽기 전까지 그 놈 한 쪽 눈이 없었지?"

"그래."

"그럼 네 말대로 '그' 해적사냥꾼이 되살아난 건 아냐. 내가 만난 그 녀석은 양 눈 다 있었거든."

언뜻 로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가 모자를 푹 눌러쓰며 바로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키드는 이제 볼 일은 없다는 듯 주점을 빠져나가려는 남자에게 빠르게 덧붙였다.

"사실 그 해적사냥꾼이랑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군."

"찾지마라."

로우는 키드를 돌아보았다. 사납게 치켜뜬 시뻘건 눈이 명백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그런 재미없는 농담이 어딨나. 나는 솔직히 단체로 뭔가에 홀리고 있는거 아닌가 싶다만."

"다른 세상?"

"어쨌든 찾지마라. 위험한 녀석이니까. 물론 밀짚모자가 먼저 낚아채러 가겠지만 난 그 녀석보다 네 녀석이 좀 덜 싫거든. 선심써서 충고해주는 거야."

키드는 웃음기를 싹 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찾지말라고 했다."

"그럴 일 없어."

"뭐야? 롤로노아 조로 때문에 왔다며?"

"그냥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야."

로우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저벅저벅 주점을 나오는데 뒤통수에서 키드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꾸준하게 골 때리는 자식이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우스워서 얼굴까지 활짝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두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쵸파."

"쵸파, 좀 일어나봐."

"너 불침번 아니야?"

"네가 잠들어버리면 어떡해?"

"있잖아. 여기가 대충 어디쯤이지?"

"음... 내 말은.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는 걸 물은거야."

상공 만미터 위에 떠 있는 섬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괴물 같은 해류에 목숨을 걸고 올라타 층층히 쌓여있는 바다 구름을 헤치고 올라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터무니 없는 곳이었다. 선의는 그의 인생에서 그만큼 멀리 고향을 떠나온 적이 없었다. 뼛골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냉기가 머리 속까지 좀먹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추운 섬이었다. 선의는 용기도 모험 정신도 겨울섬의 다른 사람들과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남들처럼 평범한 수준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고 낭만을 모르지는 않았다. 때로는 낭만이라는 것이 너무 반짝거려서 스스로의 겁의마저 화악 집어삼켜버릴 때가 있다. 선의는 결국 고향을 떠난다. 낭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조로는 강하구나. 신보다 위대한 것 같아.

선의는 낯선 세계에서 누구보다 단단한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자를 바라본다. 대지로부터 강제로 잡아뜯겨 절대자의 영역으로 승천한 세계였다. 신민들은 그들의 근원이 되는 대지를 동경하고 절대자는 그런 어쭙잖은 낭만에 기반한 거짓된 숭배를 처단하는 땅이다. 허락없이 신의 영역에 침입한 그들 주위로 신의 사도들이 몰려들었다. 사도들이 외친다. 천벌! 천벌! 그러자 검사는 마치 이 세상 전부를 발 아래 두고 내리깔아 보는 것처럼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나 신에게 기도해본 적 없어.

선의는 겨우 눈을 떴다. 백백해도 샨도라도 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그저 지표가 없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였다. 언제부턴가 그들의 배는 끝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써니호의 키는 분명히 다 같이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빈 자리가 생겨버렸다. 키를 잡고 있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배는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꾸자꾸 다른 쪽으로 향하다 원래 항로에서 크게 벗어나버렸는데 아무도 배를 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냥 넓은 바다 위에 배를 온전히 띄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랬다. 

그 때 다시 한 번 누군가가 선의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어깨에 손을 짚고 살며시 흔든다. 선의는 졸음에 파묻힌 얼굴로 꿈틀거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의 어둠에 가려져 얼핏 보이는 그림자가 꽤 친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선의는 그림자의 정체를 어렴풋 확인하고는 전혀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도로 꾸벅꾸벅 머리를 돛대에 처박았다.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자신을 깨웠다. 쵸파, 일어나보라니까. 그런데 우악스러운 손길이 아니라 아기 요람을 움직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흔들고 있어서 백백해의 섬구름에 발을 담갔을 때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깨우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선의는 한껏 게으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로, 갑자기 무슨 일..."

조로? 순간 선의는 눈을 번쩍 뜨며 튕기듯 일어났다. 이제 부를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이름이었는데 마치 방금 전까지도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그랬다. 아니, 놀랍게도 곁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오, 반갑군."

검사가 씩 웃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별 일 없었다는 태연한 얼굴로 가볍게 다리를 굽히고 앉아 작은 순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입던 복장, 늘 지니고 다니던 칼 세 자루, 양 쪽 눈을 빛내며 그렇게 태연하게 있었다. 선의는 입을 떡 벌린 채 검사를 쳐다보았다. 시간과 공간이 마구 혼재되고 갑작스럽게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핑핑 돌다가 완전히 사고가 정지해버린다. 머리가 꽉 막히니 귀까지 먼 것 같고 짧뚱한 손발이 경련까지 일으키는데 아무 대처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상대의 모습까지 흐리게 보일지경이다. 그러자 부옇게 번진 실루엣의 검사에게서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왜 울어?"

선의는 엉엉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배 안의 모든 사람을 다 깨우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소리내서 울었다. 검사는 그를 진정시키거나 달래지도 않고 그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으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머나."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니코 로빈은 연극배우처럼 말하고 있었다. 능청스럽게 건네오는 말투와 우아한 자세가 대단히 작위적이었다는 의미이다. 로우는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

로우는 그 순간 볼썽사납게 자빠져 흙바닥에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을 뻔했다. 홱 뒤를 돌아 밑으로 고개를 내렸을 때 발목을 잽싸게 잡아챈 손은 살랑살랑 가느다란 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잖아. 차 한 잔이라도 하고 가지 않을래?"

손의 주인을 가만히 노려보았는데 로빈은 얄밉게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로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아무도 자신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기록지침의 교차로에 있는 몇 안되는 섬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워낙 해적들이며 잡상인들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경유하는 곳이었다. 어느 날은 대로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시끌벅적한 대로 한복판에서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건 둘 뿐이었고, 스스로가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는 기분은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로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냐?"

"응?"

"미리 와 있었겠지. 우리 행로가 파악하는데 별로 어려운 편도 아니고."

"아. 빨간머리 선장님을 만났거든."

"...그럼 그 녀석은?"

로빈은 부정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빨간머리가 사황 쪽의 그일리는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특정 인물을 언급해버리고 말았다.

"응, 얼마 전에 합류했어. 지금은 프랑키와 같이 있고. 코크? 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음료를 구하러 간다고. 콜라랑 성분이 비슷한 음료수라네."

코크! 코크가 그 섬에서만 유통되고 있다고 하니까! 베포가 소리치던 목소리가 귀에 어른거렸다. 또 어디선가 새롭게 알아온 기호식품이겠거니 했는데 역시나 달달한 과당 음료 종류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보증이 안된 신제품을, 그것도 신세계에서 경각심 없이 받아들이는 안일함에 대해서는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갈 길이 바쁠텐데 한가롭게 쇼핑이나 할 정도로 여유가 있구나."

"상륙한 건 나랑 프랑키, 브룩, 그리고 조로 뿐이야."

"뭐?"

"다른 선원들은 먼저 출발시켰어. 겨우 다시 시작한 항해인데 신중해야하니까. 그 쪽은 선발대, 우리는 보급팀."

으레 하던 작업이었던 양 말하고 있었지만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밀짚모자 해적단이 포지션 씩이나 나눠가면서 섬을 탐색한 적이 있단말인가? 나눠봤자 그랜드라인의 이상현상이나 불가사의한 괴수들 따위에 미친 모험광들과 배에서 발바닥이 떨어지면 죽을병에 걸리는 겁쟁이 집단으로 이분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대개는 후자가 전자의 무식한 집념에 장렬히 패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끌려간다.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로빈을 쳐다보았는데, 어쩐지 그녀 또한 로우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로빈은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트랑이 군에게 부탁할 게 있는데."

당사자를 엉뚱한 곳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대면하게 되었다. 상점들이 모여있는 좁은 길목에서였다. 폴라탱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 멀리 벤치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는 검사를 목격했을 때 상대는 이미 자신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로우가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다가온다. 귀에서 달랑거리는 금색 피어스들이 빛을 반사하면서 쉴 새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로우는 눈을 깜빡이며 그 모양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너 혼자 다녀?"

생각 외로 친근하게 나간 목소리에 자신도 놀랐다. 조로는 로우와 딱 한 발짝 떨어진 거리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통계."

"통계?

질문과 어떤 관계도 없는 대답이었으나 맥락 따위를 유추할 계제는 아니다. 로우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우선 그는 진짜 롤로노아 조로였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짧은 찰나의 순간에 상대를 스캔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유스타스 키드의 허술한 눈썰미가 착각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으나, 열매의 능력으로도 명백하게 본인임이 증명되는 시점에서 의심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우는 얼마 전에 그를 만났을 때 멱살이라도 잡아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웬일로 자신을 덜 짜증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우는 죽은 조로와 너무나도 똑같은 얼굴의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만 인사도 없이 그를 지나쳐버렸다. 그냥 1분 1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져서 그랬다.

"어디가?"

그러자 상대가 지나치는 그의 팔을 살짝 잡아 걸음을 멈춰세웠다. 로우는 상대의 얼굴이 아닌 자신의 팔을 붙든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배로 돌아간다."

"그래? 잘 됐네. 나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넌 네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내 동료들? 아... '이 쪽'의 그 녀석들?"

조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팔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다시 말했다.

"아까부터 시선을 피하는군. 아... 좋은 예감이 들어."

"뭐?"

로우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로는 씩 웃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것 같다. 그게 너무나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조로도 이런 분위기였던가? 자신에게 이런 얼굴을 보인 적이 있었나? 로우는 무의식 중에 눈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남자와 기억 속 롤로노아 조로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상대가 죽은 조로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실망하고 있었고, 로우는 그 실망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롤로노아 조로의 가장 뚜렷한 차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왼쪽 눈. 

유스타스 키드가 알려준 건 양 눈이 다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 눈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조로는 태연하게 자신의 호박색 쪽 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왜 혼란스러워 하는 거야? 헷갈릴 것도 없잖아. '이 쪽'의 롤로노아는 죽었다면서?"

"......"

"난 그가 아냐."

그리고 이가 갈릴 정도로 예상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대답을 했다.

"이건 '저 쪽'의 네가 준거야."

***

"코끼리 섬에서 출항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래."

"아, 근데 그 때 저 뼈선생은 밀짚모자를 따라갔었는데. 그렇죠?"

"그랬지."

"코크는 저 조선공이 운반해왔다고요?"

"그래, 맞아."

폴라탱호가 외부인 넷을 태운 채로 마악 바다로 잠수한 직후였다. 사이보그가 로봇 팔 여섯개로 산처럼 쌓인 음료 박스를 진열하는 진기명기를 펼치고 있었다. 펭귄은 선장이 주워온 자들을 확인하고는 대단히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명에 대해서는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라 정신이 혼미함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는데 어느정도였냐면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그를 못 본 척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로우는 펭귄이 의도적으로 특정인물에 대한 언급과 반응을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모른척 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걸 끊임없이 드러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인다고?

물론 남의 연애사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며, 그게 쌍방이 아니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은 대부분 당사자에게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로우의 주변인들은 그를 한껏 배려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로 얼마 전에 만난 그 유스타스 키드조차 어쭙잖게 말을 얹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느꼈었는데, 오히려 로우는 그 점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스스로가 단순한 가십거리로 취급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몰려다니는 덜 배운 자들 정도는 무시해버릴 수 있었다. 로우는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자신을 섬세하고 감성 풍부하며 여리고 애처로운 도련님 쯤으로 대하고 있다는 점을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저기, 롤로노아. 그 눈은 보이는거야?"

샤치는 최근 신세계의 떠들썩한 화제의 중심에 있는 남자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물었다. 되살아난 롤로노아 조로는 자신이 '이 쪽'에 있던 조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조로이고, 당신들이 아는 조로와는 다른 자라는 말을 했지만 언론은 그를 죽었다 살아난 기적의 인물로 묘사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사람들은 원래 알고 있던 인물과 모습만 같은 다른 인물이 미지의 어느 세계에서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보다, 그 자는 죽은 줄 알았지만 사실 살아있었다거나 죽었지만 되살아났다는 스토리를 오히려 더 쉽게 받아들였다. 샤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 앞의 롤로노아 조로가 자신이 알던 해적사냥꾼과 다른 인물이라는 당사자의 설명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체형도 전부 똑같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라는 말인가? 그보다는 신세계에서 늘 벌어지는 이상현상이 이런 부조리를 발생시켰다는 설에 더 납득이 갔다. 그의 오른쪽 눈은 아마 그 부작용일 것이다.

"아니? 전혀. 이건 그냥 안면에 영향을 줄까봐 방지하기 위한 용도일 것이라더군."

"엥?"

라더군? 샤치는 고개를 갸웃하며 왜 어미가 추측으로 끝나는지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다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굳힌 채 다가오는 선장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고 샤치는 식겁하며 그대로 동료들에게로 도망쳐버렸다. 샤치가 자신을 머리 둘 달린 괴물보듯 경기를 일으켰다는 점은 대단히 유감이었으나 로우는 귀신같은 얼굴 그대로 조로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단 니코야가 부탁해서 태워주기는 했지만 언제 돌아갈 생각이냐."

"돌아가? 어디로?"

"어디든 말이야."

네가 있던 '저 쪽'이든 이 곳의 써니호든. 로우는 샤치와는 다르게 롤로노아 조로가 부활을 했든 지옥에서 돌아왔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과거의 그가 죽은 시점에서 조로와의 인연은 끊긴 것이다. 그게 섭리에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네 동료들도 데리고 사라져. 로우는 쌀쌀맞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러자 조로는 그를 관찰하듯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흠. 색깔이 다른 양쪽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번쩍거렸다. 이윽고 그가 피식 웃었다.

"다행이군. 역시 평범한 트라팔가 로우다."

"너에게 내 정상성을 평가받고 싶지 않은데."

"빡빡하게 굴긴. 그 뭐냐... 고백하자면 내가 돌아갈 곳은 없어. 딱히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해야할 일도 없거든."

로우는 저도 모르게 잠수정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심해의 어둠이 작은 창 너머에 있었는데 그 순간 그는 이성적으로 굴어야겠다는 발작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떤 태도가 가장 이성적으로 보일지를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그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앞에 나타나게 된 경위를 들어봐야겠다는 모순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 원리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것에 기인하고 있었다. 나는 연모라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옛 연정의 상대가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동요하지도 않는다. 태연하게 행동하자. 아니, 자신은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머리 속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되어서 사고가 정지한 것도 아니고 감격에 차서 이상행동을 보이지도 않는다. 사실은 그 태연함에 매몰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상대를 짝사랑하고 신체 일부까지 주어버리는 어떤 세계의 한심한 남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들어있을 수도 있다. 아니, 전부 긍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아니, 사실은...

"듣고 싶다."

"응?"

"어쩌다 네가 '이 쪽'으로 오게됐는지 말이야."

"아... 그래, 좋아."

조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압축하자면 루피가 카이도를 쓰러뜨리는 동시에 레벨리가 모종의 테러를 당하면서 해적과 마리조아와의 전쟁이 시작됐지. 신문사들은 앞다투어서 그랜드라인 역사상 가장 대규모 전쟁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팔아댔고. 여기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지만."

"미래를 단정할 순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군. 이 쪽의 레벨리가 열린 지 한 달도 안됐으니까."

"그래... 아무튼 전쟁은 꽤 장기전이 됐고, 마리조아를 붕괴시켰지만 딱히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고 봐야겠군. 그리고 넌 그 전쟁 도중에 죽었어."

로우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 선원들은 그 전쟁에서 전부 살아남았지만 다른 녀석들도 우리만큼 운이 좋은 놈들이라는 법은 없었지. 아무튼 그 전쟁에 참전한 해적들이 대부분 죽은 걸로 알고있다. 너희도 예외는 아니었고. 특히나 너는 네가 먹은 그 열매 때문에 좀 더 귀찮게 시달렸어. 아, 시체가 훼손됐다거나 한건 아니야? 어쨌든 나한테 눈을 넘겨줄 정도였으니까. 꽤 멀쩡한 모습으로 죽었는데... 그냥 해군이 네가 먹은 열매를 회수하겠다고 끈질기게 쫓아다녔다는 거지. 결국 그 녀석들도 실패했지만."

조로의 목소리는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한 부분은 그 쪽 세계의 로우가 죽었다는 지점부터였는데, 그 때 로우는 어떤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과 무관한 사건에서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까지 기묘하게 들리고 있는 것이다. 로우는 일단 계속해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그 기시감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 건지 궁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정말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뒤로는 나도 별 재미 없이 그럭저럭 살다 죽었는데 다시 눈을 뜨게 된거야. 똑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세상에서 말이야."

로우는 눈을 크게 떴다.

"죽었다고?"

막연하게 항해 도중 떨어졌다고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로빈은 이 사실을 알까? 그렇게 물어야 하는데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조로는 멀뚱히 대답했다.

"아, 나는 말년에 해군에 체포됐는데... 체포된 해적이 죽는 방법은 달리 없지."

로우는 모두의 머리 속에 도식화 된 이미지를 떠올린다. 팔다리가 묶여 광장에 높이 올라앉은 채 참수당하는 해적. 그 때 조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게 트리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나는 한 번 죽어야 해. 뭐... 꽤 여러번 죽었지."

그 해적사냥꾼과 완전히 다른 놈이다.

키드의 험악한 목소리가 겹쳤다. 바로 알 수 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부분에 한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우는 저주에 걸린 남자를 응시한다.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저주에 걸린 남자.

"그렇다면 너는 단지 죽을 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세상들을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는 소린가?"

"하하. 아니?"

순간 조로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로우는 그 때 기시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꼭 해결해야할 게 있었거든. 아, 정말 골치아픈 문제였어. 이 눈 말이야."

태연함을 가장하는 얼굴.

"이봐, 로우."

태연하게 이름을 부르고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목소리.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거든?"

상대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런데 네 녀석이 죽기 직전에 왜 나한테 이걸 선물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어."

"......조로야,"

"하지만 답을 줄 녀석은 죽었고, 나는 그냥 계속해서 네 녀석들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지. 벌써 트라팔가 로우를 수십 명은 만났을 거다. 여태껏 명확한 답을 준 트랑이는 없었지만. 답을 못 들으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 거기서도 답을 못 얻어내면 또 다음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트랑이군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우리가 잠시 동안만 폴라탱호에 타도 될까?"

알다시피 본인들 몫은 할 수 있을거야. 너희 항로에도 방해되지 않도록 할게. 로빈은 나긋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이지적인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로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왜?"

죽은 동료가 나타났는데 마치 뭐에 쫓기는 것 마냥 황급히 갈라진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빈은 어쩐지 긴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텐데 기뻐하고 있지도 않았고 설레어 하고있지도 않았다. 확실히 어떤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불안을 느끼는 요소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배를 타고 싶다는 청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로우는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이 이성적으로 사고해야한다는 압박에 얽매여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을 자신의 배에 태울 수는 있으나 그러려면 이유를 들어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녀가 그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로빈은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조로...가 두려워."

로우는 눈을 깜빡였다. 니코 로빈이 두려워하는 롤로노아 조로? 잘 상상이 안갔다. 로빈은 애써 웃었다.

"물론 '그' 조로가 위협적이고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든가 잔뜩 경계하면서 우리를 거부했다든가 한 건 아니야. 전과 다름없는 믿음직한 동료야."

"그런데?"

"우리 선장은 들떠있어. 너무 들떠있어서 한 가지에만 꽂혀있는 상태야. 이해해. 당연한 일이야. 우리 모두는 언제나 재출항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 그런데 나는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대로 출항해서 모험을 계속하다가 어느날 조로를 또다시 잃는 순간을 상상해봤어. 죽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야. 어떤 방식인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지만 아마 '조로'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벌어지게 될 것 같아."

"......"

"그 상실이 벌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조로'로부터 선장을 보호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니코야, 마치 네가 하는 말은 그 녀석이 너희 선장을 반드시 다치게 할 거라는 전제가 깔려있구나. 네가 서술하는 조로야는 오히려 너희들에게 호의적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째서?"

"단순히 호의를 보이는 것과 배에 올라탄다는 건 달라. 알잖아."

"글쎄. 단순한 호의만 가지고 왔는지 남은 생을 전부 너희에게 던질 각오로 왔는지는 알 수 없지. 어쨌든 그 녀석은 '이 쪽'의 조로야가 죽었을 때와 같은 나이 아닌가? 아직은 '이 쪽'의 너희가 낯설어서일 수도 있고."

그러자 로빈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그는 끝을 보고 왔다고 말했어. 모든 걸 이룬 생에 더 이상 미련도 없고 어떤 의무도 없다고 말했지."

"......"

"그러면 그는 왜 여기에 온거지?"

평범한 질문에서 그토록 꺼림칙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나는 그를 모르겠어서 두려운거야.

"하지만 너는 대답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니... 이제는 너 뿐일 것 같아. 어떠냐?"

로우는 그만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마 망치로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유스타스 키드가 맞았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다같이 뭔가에 홀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트라팔가 로우에게는 그걸 거부할 의지가 없었다. 로우는 어쩐지 산소가 부족한 방 안에 오래 있어 몽롱해진 것만 같은 정신으로 겨우 말을 꺼냈다.

"네가 수십번 세계를 옮겨다닌 이유가 겨우 그거냐?"

"...겨우?"

"너희 배가 아니라 내 배에 타기 위해서?"

조로는 섬뜩한 얼굴로 되물었다. 로우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너머의 공허가 너무 숨이 막혀서 그랬다. 이 자는 정말로 롤로노아 조로인가? 남자의 감정이 낯설어서 숨이 막혀오는게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로우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직시함으로써 거기에 있던 공허와 우울을 확인하고 그만 자기 자신의 숨통을 틀어막고 싶어진 것이었다. 반복해서 세계를 떠돌며 사랑을 부정당한 남자의 비극에 환호하는 비겁자가 있었다.

"너는 혹시 나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로는 로우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따뜻하고 말캉한 혀가 입술 사이로 끈적하게 밀려들어왔다. 입맞춤은 짧게 끝났다. 조로는 팔을 계속해서 붙든 채 말했다.

"맞아, 너처럼."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똑같다. 일방향적 사랑을 앓다 끝내 과녁 자체를 통째로 상실한 자. 

로우는 허리를 숙이고 입을 감쌌다. 역겨워서 토해버릴 것 같았다. 애써 꽁꽁 묻어둔 응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밖으로 튀어나와 줄줄 흐를 것 같아서 그랬다. 조로가 살아있었을 때는 분명히 원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리려고 하면 갑자기 발작처럼 고통스러워져서 마음 속으로 그 끈적거리고 잘 떼어지지 않는 것을 잘라내는 상상을 했다. 칼 자르듯 단번에 잘라낼 수는 없다는 게 미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이제는 확실해진 게 하나 있었다. 미련을 애써 덮어버리고 홀로 삭히고 있다보면 썩고 곪아서 처음에 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결코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감정에 지배된 남자가 서 있었다. 비극에 기반한 누군가의 절박함이 접착제처럼 감정과 감정을 연결해 겨우 쌍방이 되었다는 현실이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기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트라팔가 로우가 있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