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망했다면 바로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2)
히어로가 아닌 주제에 히어로인 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코마 인생에 이렇게 깊은 생각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처음이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종종 만나긴 했어도, 풀지 않으면 그만이었는데 이번 문제는 꼭 풀어야하는 문제인 게 코마의 머리를 더더욱 아프게 했다. 이래서 선생님들이 공부하라 그러셨구나.
일단 내가 능력은 사라졌어도, 히어로를 계속한다면 내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빌런들은 함부로 히어로들을 건들지는 못할 거다. 그렇다면 히어로 친구들에게는 내가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려야 할까? 뒤지게 놀리겠지. 다른 애들이 자신을 놀리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러다가 의문이 하나 생겼다.
아니, 잠깐만 근데 내가 왜 은퇴하면 위험한 거지? 내 능력은 순간이동으로 전투 능력도 아닌데, 평소에 딱히 일을 많이 하지도 않고, 빌런 잡는 데에 그닥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물론 코마는 3년이나 활동하면서 착실히 경력과 실력을 쌓아가긴 했다. 지금 들어오는 히어로들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강하긴 하지만, 코마와 비슷한 시기에 히어로가 된 애들과 비교하면 코마는 그렇게까지 강하진 않았다.
히어로가 됐을 때는 신나서 다른 애들보다 괴물도 더 많이 잡고, 활약도 많이 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점점 히어로 일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코마가 별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시민들은 모르지만, 빌런들은 안다. 그리고 빌런들이 안다는 사실을 히어로 애들도 안다. 그런데 왜 내가 주요 전력인 걸까.
우토 말로는 선하가 닥치는 대로 히어로를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지금은 나 같은 애매한 히어로들도 전력으로써 힘써야하는 상황인 건가 보다. 근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정도면 그동안 본부는 뭐 하고 있던 거야? 놀고 있는 히어로들한테 일 좀 시키지 능력 좀 강하다고 일 안 시키고, 막 대우해 줘도 되는 건가. 나 같은 모범 히어들만 죽어나가지.
하아
코마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히어로인데 능력을 못 써. 이거 완전 심장이 없는데 살아 움직이는 거잖아.
그러면 히어로는 계속하는데, 죽지 않기 위해선 싸우지 않는 편이 좋겠지. 애들이나 본부 사람들한테 말할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항상 싸우던 내가 갑자기 안 싸우면 이상해하려나? 코마는 가끔 농땡이도 피웠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다. 빌런들이 이상함을 느끼든 말든 능력이 사라지는 케이스는 코마가 최초니까, 빌런들은 코마가 능력이 사라졌다고 쉽게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상한 짓 하는 게 하루 이틀이냐? 이쯤이면 빌런들도 알아서 적응해야지.
플래그, 우토가 말했던 그 이름을 코마는 오랜만에 중얼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발음해 보는 단어인데도 딱히 어색함 하나 없이 소리가 났다.
플래그는 왜 빌런으로 넘어간 걸까? 플래그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왜 다 빌런이 된 걸까? 분명 나보다 도덕성은 떨어졌지만, 히어로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애들이었는데. 빌런으로 넘어간 애들이 계속 히어로를 했다면, 우리 조금 고생했어도 세상은 평화로웠을 텐데. 코마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갤러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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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그는 코마가 히어로가 되기 전에 먼저 히어로가 된 사람이었다.
코마는 플래그를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적당히 살가운 사람이었다고만 기억한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면, 본인을 히어로제일능력이라고 소개했다는 점이다. 히어로 본부에는 자화자찬의 귀재들이 많지만, 플래그는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빨간 눈과 흑발인 평범하게 생겼다는 것도 신기했다. 히어로 본부에 특이하게 생긴 애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더 눈에 띄었다. 아무튼 플래그는 여러모로 괜찮은 히어로였다. 히어로 일을 하고 바로 본부 복도에 늘어져 버리는 바람에 순간이동으로 지나가야 하는 귀찮은 것과 깃발의 각도가 매번 똑같다는 이상한 것 빼고는 착실히 괴물을 잡는 그럭저럭 괜찮은 히어로였다. 그리고 그때는 빌런같은 것도 없었다. 아주 사소한 테러리스트는 존재했어도.
그래, 플래그는 최초의 빌런이었다.
플래그가 어느 시점부터 이상해졌다는 건 알긴 했지만, 여기에 안 이상한 애들이 없어서 눈치를 채기 어려웠다.
분명 전력으로써 최고였던 플래그였는데 지금은 최고의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복도 지나가는 거 방해했을 때부터 빌런의 싹을 알아봤어야 했다. 이래서 히어로 하나 잘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왜, 어째서 어떤 이유로 플래그가 빌런이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코마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빌런을 하든 말든 코마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니까.
히어로로서 빌런인 플래그를 잡으려고 할 때마다 손이 멈칫하는 이유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최초의 빌런이 생기고, 세상은 난리가 났다. 그래도 선하나 파이브 그리고 여러 애들이 진행하는 개인 방송에서는 플래그의 얘기가 잘 나오지 않았다. 친구가 빌런이 되었는데 마음이 편하겠냐는 팬들의 배려였다.
히어로 주제에 개인방송은 왜 하냐고 말하던 코마였지만, 어느 순간 재미가 들려서 가끔 개인 방송을 하게 된 코마도 플래그가 빌런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을 잠깐 했다.
"아, 맞다. 플래그가 배신을 때렸긴한데.. 잡으면 되지 않을까?"
[그런 거 막 말해도 돼ㅜㅜ?]
"국가 기밀도 아니고 어때"
그 방송이 끝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거냐며 팀원들과 시민들한테 대차게 까였고 국가 기밀이라는 별명이 생겼어도, 진짜로 플래그 일은 코마에게 아무렇지 않았다. 플래그가 범죄의 길을 걷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막고 싶지만, 사실 따지면 악보다는 선에 가까운 플래그가 아무 생각과 이유 하나 없이 범죄의 길을 걸을 거라고 코마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밌어 보여서 빌런이 되었다면 유감이다. 사실 재밌어 보여서라는 이유도 일리가 있는 게 코마도 한 때 빌런의 길을 고민했었다(재밌어 보였다). 이유 같은 건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니까 넘어가자.
어찌 되었든 코마는 히어로였으므로, 코마는 최선을 다해서 플래그를 잡을 계획이다.
아직 사람 하나 죽이지 않았고, 일으킨 일 때문에 인명피해가 발생한 건은 하나도 없었으니, 플래그는 만약 잡힌다면 적당히 벌 받고 나올까? 코마는 법을 잘 모른다. 그냥 눈앞에 놓인 플래그를 잡아야 한다는 목표만 알 뿐이다. 아는 것만,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게 좋다.
발로란트를 하던 중에 행크에게 들은 인생 조언이었다.
그 일로부터 날짜가 별로 지나지 않았을 때, 코코아를 마시며 쉬고 있는 코마에게 선하가 중얼거렸다.
"범죄자를 옹호하고 싶은 건 아냐, 근데 문제는 플래그가 정말 범죄자냐이지."
"혹시 빌런 뜻을 잘 몰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내가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 빌런 뜻 정도는 안다고."
"뭐가 문젠데."
선하는 옆에 있던 물을 들이켰다. 수돗물이지만, 퍴렀드아잇씀의 수돗물은 먹어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다. 선하도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거 같다.
"너 같은 애가 빌런했으면 그냥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넘겼겠지만, 플래그? 플래그는 솔직히 빌런보다는 히어로를 더 멋있다고 생각할 거 같다고, 옷도 흰 티를 입고 다니잖아. 그리고 깃발도 빨간색이잖아. 이거 히어로의 색상인데 왜 갑자기 빌런을 했냐 이거지."
"네 헛소리를 감당 못 해서 빌런이 된 거 아닐까. 그런 이유면 나 지금 플래그가 이해되거든."
코마는 맥없이 웃었다. 선하는 코마를 따라 웃다가 시끄럽고 요란하게 울리는 폰을 보면서 일하러 가야 한다고 짜증을 냈다. 코마는 오늘 할당량을 다 채웠기에 고생해야 하는 선하를 위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선하는 놀리지 말라며 문을 열었다. 마지막 질문을 남기고 선하는 자리를 떠났다.
"플래그 잡을 거야?"
"글쎄."
잡아야 하지 않을까?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 문장이 코마의 뇌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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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하지 마라."
"다른 애들한테 말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말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말할 거 같아."
"잘 아네, 선하!"
"아!!!!!!!!!!!!!!!!!!!!!!!!!!!!!!!!!!!!!!!!!!!!!!!!!!!!!"
복도를 거닐고 있던 코마는 상상치 못한 이유로 우융에게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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